1,085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894 추천 수 0 2023.08.20 22:31:28
설교보기 : https://youtu.be/JLOEaNj1n9c 
성경본문 :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15:21-28, 성령강림 후 12, 2023820

 

 

가나안 여자

오늘 설교 본문은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호수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두로와 시돈 지역에 갔을 때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린 가나안 혈통의 한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이야기입니다. 15:22절은 처음 장면에 관한 묘사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이 여자의 딸은 요즘 흔하다고 하는 조현병에 걸린 걸까요? 간질이나 열병에 걸려서 헛소리하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사람들은 고치기 어려운 병을 귀신 작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학이 놀랍도록 발전한 오늘날에도 모든 병이 치료되는 건 아닙니다. 코로나 판데믹이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유행할 조짐이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독감 바이러스 하나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한다는 게 이상할지 모르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우리 몸 안의 암도 그렇습니다. 암이 우리 몸 안에서 독립적으로 생존의 길을 찾고 있기에 완전한 퇴치가 어려운 겁니다. 더 근원적으로는 유전자 세포들이 인간 의학 기술에 맞서 각자 살길을 찾는지도 모릅니다.

가나안 여자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예수께 오기 전에 딸의 병을 고치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녔을 겁니다. 딸의 병만 고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겠지요.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급기야 그녀는 이방인과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 유대인인 예수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얼마 전 목숨을 버린 초등학교 교사의 부모가 겪었을 심정이었을지, 작년 이태원 참사에서 세상을 뜬 젊은이들의 부모나, ‘묻지 마범죄에 희생당한 젊은 여성들의 어머니 마음이었을지요.

예수께서는 평소 예수답지 않게 세 번이나 이 여자의 호소를 무시 또는 거절했습니다. 1) 예수께서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 들려서 고생합니다.’라는 이 여자의 외침을 듣고도 못 들은 척하셨다고 합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내가 이방인이라고 차별하나, 하고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원망했을지 모릅니다. 2) 제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라도 해결하시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집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 중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게 바로 자기의 주된 소명이니까 이방 여자의 요구에 일일이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머지않았기에 이방인을 돌볼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혹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는 중일 수도 있긴 합니다만,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뒤따라오던 이 여자는 예수의 이 말씀을 들었는지, 예수 앞에 바짝 다가와 절하면서 다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적극적으로 매달렸습니다. 22절에서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고, 여기 25절에서는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인은 자기 잘난 맛에 살기에, 때로는 허세를 부리면서 다른 이들이 자기 밑에 들어와서 굴복하기를 바라기에 불쌍히 여겨달라거나 도와달라고 읍소하는 이 여자의 비굴한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 이 여자는 정신적으로 어딘가 크게 문제가 있을까요? 부끄러움을 모를 정도로 수준이 낮은 인간인가요?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거나 도와줄 수 있는 대상을 찾은 사람은 오히려 행복합니다. 그제야 구원의 빛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3) 주변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반복해서 도움을 청했다면 당연히 귀를 기울일 줄 알았는데, 예수께서는 26절에서 더 야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무 민망해서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이렇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방인인 이 가나안 여자를 개 취급하는 발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일종의 격언을 인용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을 강하게 비판할 때도 기껏해야 위선자들이라거나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고, 자기를 죽이려던 헤롯 왕에 대해서 기껏해야 여우라고(13:32)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누가 들어도 모욕적으로 들릴만한 이 발언은 평소 예수님의 생각과 인격에서 너무 거리가 멉니다.

어쨌든지 상황이 이런 정도 되면 미련을 끊고 발길을 돌리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보다 한 수 위의 발언을 합니다. 이런 경우가 예수의 공생애 중에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이 발언을 듣고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동양식 표현으로 돈오 경험입니다. 27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가나안 여자의 이 말을 듣고 예수께서는 속으로 내가 한 방 제대로 먹었구나.’ 하지 않으셨을지요. 예수의 발언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나 이 여자의 발언은 그 구별을 극복하니까요. 이 가나안 여자는 사람의 혈통을 뛰어넘어서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으니까요. 개들로 취급당하는 이방인도 최소한 부스러기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이 가나안 여자의 발언은 우리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통쾌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여자의 발언은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 부스러기 영성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부스러기 영성

현대인은 자기나 자녀들이 부스러기만 먹을까 해서 조바심을 느끼면서 삽니다. 서로 제 몫을 차지하려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그런 이치를 거스르기도 힘듭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여러분이 부스러기 신세로 사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줄 모르면 우리는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기에 이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좋은 음식, 더 자극적인 먹을거리에만, 그리고 유튜브 먹방프로그램처럼 더 많이 더 맛있게 먹는 데만 마음을 팔게 되니까 먹는 행위 자체를 즐기지 못합니다. 존재의 기쁨(joy of being)이 없는 겁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중에 먹었던 허접한 먹을거리인 만나만으로 생명 충만감을 경험할 수 있는 데 반해서, 로마 귀족들의 만찬에서 행해졌듯이 먹토’(먹고 토함)로도 삶을 빈약하거나 소란스럽게 경험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서 부스러기로 살아가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칫 패배감에 떨어지거나 불평불만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데 자기만 가난하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런 심리가 사회적으로 진행되면 요즘 우리 사회에서 보듯이 반사회적인 돌출 사태가 벌어집니다. 2천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젊은이들에게 이런 생각이 강합니다. 그건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학부모들이 교사들에게 온갖 호소와 압박을 가하는 일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자기 자식을 모두 공주와 왕자로 키우려는 마음이 그렇게 나타나겠지요.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어떤지 제가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우리나라처럼 아파트와 주식이 매일 뉴스로 나오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지 궁금합니다. 성공신화 이야기를 현실화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가나안 여자의 발언을 듣고 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굳이 주인처럼 멋진 식탁에 초대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그냥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더 분명해졌으니까요. 부스러기는 주변에 널려 있으니까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래서 예수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제가 벌써 일흔 살이 되었으니까 죽을 때까지 남은 시간은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부스러기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돈도 부스러기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비현실적인 생각인가요? 모두가 충분한 자기 몫을 달라고 하고, 더 부자가 되고 더 오래 살고 더 건강해져야 한다고 몸부림치고, 그게 채워지지 않으면 밥상을 뒤엎겠다는 기세라면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무너지고 말겠지요.

우리가 수도사도 아닌데 어떻게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수 있냐, 하고 질문하는 분들에게 오늘 저는 직접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대신 가나안 여자에게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충분한 대답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28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큰 믿음

바로 직전까지 매몰차게 응대하시던 예수께서 완전히 다른 말씀을 이 여자에게 하셨습니다. ‘당신 믿음이 큽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인 마 15:1~20절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율법 규례를 근거로 예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려서 그들을 위선자라고 일갈하셨습니다.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15:13)라고 하셨습니다. 종교 엘리트로 자타 인정받던 이들을 영적인 시각장애인이라고 비판하신 겁니다. 이걸 전제하고 28절을 읽으면 이 가나안 여자를 향한 예수의 칭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믿음보다 더 큽니다.’ 이 여자는 예수께 인정받았습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선입견이 사라진 셈입니다. 아무도 이 여자를 귀찮은 존재라거나 무시해도 좋을 존재로 여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살이에서 이보다 더 소중한 순간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딸이 귀신 들려 애타하던 이 쳐자가 오히려 부럽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크고 참된 이유는 예수를 향한 영혼의 간절함에 있습니다. 그 간절함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외침과 자기를 도와달라는 호소, 그리고 부스러기로도 만족하겠다는 고백에 표현되었습니다. 모든 게 풍요로운 사람들에게는 이런 간절함이 없습니다. 건강하고, 사회 지위도 높고, 자녀들도 잘되고, 남에게 부러움을 살만한 조건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간절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영혼의 간절함이 없는 삶을 행복하다고 여기겠으나 오히려 불행할지 모릅니다. 제가 어릴 때 끼니때마다 깡통을 들고 남의 집 문 앞에 와서 밥 좀 줘요. !’ 하고 구걸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개천 굴다리 밑에서 삽니다. 하루살이가 벅찰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인생입니다. 매일 호텔 뷔페에서 비싼 밥을 먹는 사람은 그들이 굴다리 아래 옹기종기 모여서 한 끼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모를 겁니다.

우리가 가나안 여자처럼 영혼의 간절함을 경험하기 위해서 실제로 노숙자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런 시절은 다행스럽게 우리에게서 지났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빼고, 우리는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한 시대를 삽니다. 영혼이 간절함을 경험하기가 어려운 시절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저는 궁핍한 시대나 풍요로운 시대나 가릴 것 없이 하나님 경험이야말로 궁극적인 의미에서 영혼의 간절함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진짜 보석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의 가짜 보석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예수 앞에 엎드린 이 가나안 여자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큰 믿음의 사람입니다. 더는 불쌍하거나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의 치유

소원이 이뤄졌다는 말은 곧 귀신 들린 딸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구나, 그러니까 큰 믿음만 있으면 모든 고난이 즉시 해결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분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적시합니다.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복음서에는 예수의 축귀 능력, 치유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대목인 마 15:29~31절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 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카리스마가 있는 다른 이들에게서도 일어났습니다. 현대로 들어와서 이런 일은 의사들의 업무가 되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려는 핵심은 축귀와 치유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를 통해서 삶의 신비와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보면 귀신 들린 딸이 아니라 예수께 왔던 이 가나안 여자의 영혼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시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엄마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딸이 귀신 들렸다는 손가락질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왔듯이 예수 제자들에게는 민폐를 끼치는 귀찮은 여자로 취급당했습니다. 딸의 병을 낫게 하려고 돈을 많이 써서 가난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럴 바에야 딸과 함께 죽어버리는 게 낫지, 하는 끔찍한 생각도 했을 겁니다. 이제 그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엘리트들도 얻지 못했던 큰 믿음을 예수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실제로 귀신 들렸는지, 열병 걸렸는지, 불면증에 걸렸는지 모를 딸과 함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딸의 병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을 수도 있고, 또는 언젠가 훗날 실제로 치료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출발은 엄마의 큰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는 예수와의 만남을 가리키는 그 때로부터그의 딸이 나았다고 표현한 게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의 인생살이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이루고 싶으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에게 큰 믿음이고 참된 믿음인가요? 저에게 물으신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명의 가나안 여자처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심정으로 사는 사람, 그리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멘.


profile

[레벨:18]부스러기은혜

August 22, 2023
*.101.193.117

거룩한 포즈를 가끔 취하고는 사나
내면은 여전히 갖은 욕망이 꽈리를 틀고 있고
내일에 대한 염려와 시기, 불안, 허무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다 귀신들려 사는 처지겠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정작 제가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가나안 여인의 절규가 바로 우리의 절규가 될수밖에요

잠시잠깐이라도 넋놓고 있으면 영락없이
시대정신에 속절없이 떨어질수 밖에 없는
무력하고 비참한 존재이기에
매일 거기로부터의 구원을 탄원하며
"다윗의 자손 예수시여!"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가나안 여인의 심정으로
그분을 찾을수 밖에요

귀신이 정말 떨어져 나가는지
가시적인 응답여부와 상관없이
그 부르짖는 자세의 견지가
부스러기 구원을 쌓아가게 해줌으로써
구원의 퇴비가 되어주는거겠죠?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22, 2023
*.182.156.94

앗, 부스러기은혜 님이 오늘 설교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부스러기만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 내공이 

우리에게 갖춰졌느냐가 관건이겠지요.

이게 말장난이 아니라 reality로 경험되어야 하는데,

쉽지 않지요? 

그러니 다행입니다. 

그 세계가 극장 입장권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우리의 인생에서 도전해볼만한 거지요.

늘 깨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profile

[레벨:41]새하늘

August 23, 2023
*.126.124.2

오늘 아침일찍 주일 설교 영상을 들으면서 울컥 했네요.
사회 비주류인 가나안 여인의 부스러기 영성이 계속해서 가슴에 울립니다.

이 설교로 일주일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겠네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23, 2023
*.182.156.94

새하늘님의 울컥했다는 그 멘트로 인해서 

부스러기만으로 저의 영혼이 생명 충만해질 수 있는 깊이 안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짐하게 되는군요.

소박한 성찬대 위의 소박한 먹을거리인 빵 한조각과 포도주 한 모금으로

우리가 영육간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그 사실도 다시 기억하고요.

그분에게 모든 걸 맡기고 '나'를 내려놓아야겠지요.

그나저나 오늘이 처서인데도 습하고 덥군요.

내일부터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를 태평양으로 방류한다고 하고,

우리 정부는 거기에 맞장구를 치고 있으니...

더 습다고 더 덥네요.

profile

[레벨:10]소유와존재

August 26, 2023
*.254.11.100

당신의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믿음보다 더 큽니다.’ 여자는 예수께 인정받았습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선입견이 사라진 셈입니다. 아무도 이 여자를 귀찮은 존재라거나 무시해도 좋을 존재로 여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이 여자를 귀찮은 존재라거나 무시해도 좋을 존재로 여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이말에 실제 삶에서는 쉽사리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께 인정받는 차원에서는 동의가 됩니다. 사람들은 나를 귀찮은 존재, 무시해도 좋을 존재로 취급합니다. 거기서 흔들립니다. 신앙이 구원이 역설적이라는 말이 때로는 마음 깊이 울림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왜 꼭 그런 식어야만 하나? 하는 푸념을 늘어놓게 만들기도 합니다. 언젠가 목사님께서 설교하셨던 문구가 생각납니다. "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찮은 음식과 하찮은 삶의 조건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있음의 기쁨과 환희’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26, 2023
*.182.156.94

이 세상으로부터의 평가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건 분명합니다. 

가난한 사람, 장애인, 소수자 등은 무시당하고 심지어 혐오의 대상도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람들에게 조롱받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될까요? 아닐까요?

업적이 아니라 순전히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어떤 사람에게 위로가 될까요?

성경의 세계 안으로 조금씩이라도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평판에 완전히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꾸준히 수행하듯이 들어가야겠지요.

밤바람이 시원해졌네요.

복된 주일을 맞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155678
1085 대림절 충만한 '의로움의 열매' (빌 1:3-11) new 2024-12-08  
1084 대림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 25:1-10) [2] 2024-12-03 402
1083 창조절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8:33-38) 2024-11-24 1031
1082 창조절 성소에 들어갈 담력 (히 10:11-14, 19-25) [3] 2024-11-17 1824
1081 창조절 영혼이 갈급한 사람 (막 12:38-44) [2] 2024-11-10 2659
1080 창조절 전심전력 귀 기울임 (신 6:1-9) [2] 2024-11-04 3609
1079 창조절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 이야기 (막 10:46-52) 2024-10-27 5169
1078 창조절 세계의 비밀이신 하나님 (욥 38:1-7) 2024-10-20 7188
1077 창조절 십계명 '너머' (막 10:17-22) [4] 2024-10-13 7723
1076 창조절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히 1:1-4, 2:5-10) [4] 2024-10-07 7718
1075 창조절 지옥 이야기 (막 9:38-48) [2] 2024-09-29 7882
1074 창조절 하늘의 지혜 (약 3:13-18) [2] 2024-09-23 8149
1073 창조절 의로움의 원천 (사 50:4-9a) [5] 2024-09-15 8033
1072 창조절 무엇이 '놀라운 일'인가? (막 7:31-37) [2] 2024-09-08 8158
1071 창조절 생명의 길 (신 4:1-2, 6-9) 2024-09-02 8206
1070 성령강림절 영원한 생명의 말씀 (요 6:60-69) 2024-08-25 8038
1069 성령강림절 성령 충만의 길 (엡 5:15-20) [4] 2024-08-18 8159
1068 성령강림절 영혼의 깊이 (시 130:1-8) [2] 2024-08-11 8295
1067 성령강림절 생명의 양식 (요 6:24-35) 2024-08-05 8377
106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하심 (엡 3:14-21) 2024-07-28 8119
1065 성령강림절 메시아 대망 (렘 23:1-6) 2024-07-21 8528
1064 성령강림절 선지자 '너머' (막 6:14-29) [2] 2024-07-14 8544
1063 성령강림절 제자들의 축귀 능력 (막 6:1-13) [2] 2024-07-08 8514
1062 성령강림절 공평한 세상을 향하여! (고후 8:7-15) 2024-06-30 8516
1061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막 4:35-41) [2] 2024-06-23 8754
1060 성령강림절 사람의 외모와 중심 (삼상 16:1-13) 2024-06-16 8622
1059 성령강림절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 4:13-5:1) [4] 2024-06-09 8988
1058 성령강림절 안식일 문제 (막 2:23-3:6) [2] 2024-06-03 10129
1057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충만' 경험 (사 6:1-8) [2] 2024-05-26 10943
1056 성령강림절 파라클레토스 (요 16:4-15) [2] 2024-05-19 11389
1055 부활절 믿음과 영생 (요 3:1-15) 2024-05-13 10965
1054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5:1-6) 2024-05-05 10888
1053 부활절 상호내주의 신비 (요 15:1-8) [4] 2024-04-28 13224
1052 부활절 부족함 없는 삶, 가능한가? (시 23:1-6) 2024-04-21 14186
1051 부활절 죽은 자 가운데서 (눅 24:36b-48) [2] 2024-04-14 13855
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5] 2024-04-08 14426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2024-03-31 13895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2024-03-24 14512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2024-03-17 14216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2024-03-10 14278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2024-03-04 14390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14611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14425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14596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14677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14486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14689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14658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15378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17279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17887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18086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18328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4551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4] 2023-11-19 14951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5443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 2023-11-07 14981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4876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5054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4984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4638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4826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4926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4975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4685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5116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4645
»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4894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5457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5139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5434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4973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4959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4588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14882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4747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4904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4861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4966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5205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5010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5082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4671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5055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15142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15504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5073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5111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5195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16338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15462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15015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15602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15534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15624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16856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16344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15737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15808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17045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