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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JLOEaNj1n9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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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태복음 15:21-28 |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성령강림 후 12주, 2023년 8월 20일
가나안 여자
오늘 설교 본문은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호수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두로와 시돈 지역에 갔을 때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린 가나안 혈통의 한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이야기입니다. 마 15:22절은 처음 장면에 관한 묘사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이 여자의 딸은 요즘 흔하다고 하는 조현병에 걸린 걸까요? 간질이나 열병에 걸려서 헛소리하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사람들은 고치기 어려운 병을 귀신 작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학이 놀랍도록 발전한 오늘날에도 모든 병이 치료되는 건 아닙니다. 코로나 판데믹이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유행할 조짐이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독감 바이러스 하나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한다는 게 이상할지 모르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우리 몸 안의 암도 그렇습니다. 암이 우리 몸 안에서 독립적으로 생존의 길을 찾고 있기에 완전한 퇴치가 어려운 겁니다. 더 근원적으로는 유전자 세포들이 인간 의학 기술에 맞서 각자 살길을 찾는지도 모릅니다.
가나안 여자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예수께 오기 전에 딸의 병을 고치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녔을 겁니다. 딸의 병만 고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겠지요.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급기야 그녀는 이방인과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 유대인인 예수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얼마 전 목숨을 버린 초등학교 교사의 부모가 겪었을 심정이었을지, 작년 이태원 참사에서 세상을 뜬 젊은이들의 부모나, ‘묻지 마’ 범죄에 희생당한 젊은 여성들의 어머니 마음이었을지요.
예수께서는 평소 예수답지 않게 세 번이나 이 여자의 호소를 무시 또는 거절했습니다. 1) 예수께서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 들려서 고생합니다.’라는 이 여자의 외침을 듣고도 못 들은 척하셨다고 합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내가 이방인이라고 차별하나, 하고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원망했을지 모릅니다. 2) 제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라도 해결하시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집’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 중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게 바로 자기의 주된 소명이니까 이방 여자의 요구에 일일이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머지않았기에 이방인을 돌볼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혹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는 중일 수도 있긴 합니다만,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뒤따라오던 이 여자는 예수의 이 말씀을 들었는지, 예수 앞에 바짝 다가와 절하면서 다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적극적으로 매달렸습니다. 22절에서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고, 여기 25절에서는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인은 자기 잘난 맛에 살기에, 때로는 허세를 부리면서 다른 이들이 자기 밑에 들어와서 굴복하기를 바라기에 불쌍히 여겨달라거나 도와달라고 읍소하는 이 여자의 비굴한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 이 여자는 정신적으로 어딘가 크게 문제가 있을까요? 부끄러움을 모를 정도로 수준이 낮은 인간인가요?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거나 도와줄 수 있는 대상을 찾은 사람은 오히려 행복합니다. 그제야 구원의 빛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3) 주변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반복해서 도움을 청했다면 당연히 귀를 기울일 줄 알았는데, 예수께서는 26절에서 더 야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무 민망해서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이렇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방인인 이 가나안 여자를 개 취급하는 발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일종의 격언을 인용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을 강하게 비판할 때도 기껏해야 위선자들이라거나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고, 자기를 죽이려던 헤롯 왕에 대해서 기껏해야 여우라고(눅 13:32)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누가 들어도 모욕적으로 들릴만한 이 발언은 평소 예수님의 생각과 인격에서 너무 거리가 멉니다.
어쨌든지 상황이 이런 정도 되면 미련을 끊고 발길을 돌리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보다 한 수 위의 발언을 합니다. 이런 경우가 예수의 공생애 중에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이 발언을 듣고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동양식 표현으로 돈오 경험입니다. 27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가나안 여자의 이 말을 듣고 예수께서는 속으로 ‘내가 한 방 제대로 먹었구나.’ 하지 않으셨을지요. 예수의 발언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나 이 여자의 발언은 그 구별을 극복하니까요. 이 가나안 여자는 사람의 혈통을 뛰어넘어서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으니까요. 개들로 취급당하는 이방인도 최소한 부스러기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이 가나안 여자의 발언은 우리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통쾌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여자의 발언은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 부스러기 영성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부스러기 영성
현대인은 자기나 자녀들이 부스러기만 먹을까 해서 조바심을 느끼면서 삽니다. 서로 제 몫을 차지하려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그런 이치를 거스르기도 힘듭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여러분이 부스러기 신세로 사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줄 모르면 우리는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기에 이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좋은 음식, 더 자극적인 먹을거리에만, 그리고 유튜브 ‘먹방’ 프로그램처럼 더 많이 더 맛있게 먹는 데만 마음을 팔게 되니까 ‘먹는 행위 자체’를 즐기지 못합니다. 존재의 기쁨(joy of being)이 없는 겁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중에 먹었던 ‘허접한 먹을거리’인 만나만으로 생명 충만감을 경험할 수 있는 데 반해서, 로마 귀족들의 만찬에서 행해졌듯이 ‘먹토’(먹고 토함)로도 삶을 빈약하거나 소란스럽게 경험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서 부스러기로 살아가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칫 패배감에 떨어지거나 불평불만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데 자기만 가난하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런 심리가 사회적으로 진행되면 요즘 우리 사회에서 보듯이 반사회적인 돌출 사태가 벌어집니다. 2천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젊은이들에게 이런 생각이 강합니다. 그건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학부모들이 교사들에게 온갖 호소와 압박을 가하는 일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자기 자식을 모두 공주와 왕자로 키우려는 마음이 그렇게 나타나겠지요.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어떤지 제가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우리나라처럼 아파트와 주식이 매일 뉴스로 나오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지 궁금합니다. 성공신화 이야기를 현실화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가나안 여자의 발언을 듣고 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굳이 주인처럼 멋진 식탁에 초대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그냥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더 분명해졌으니까요. 부스러기는 주변에 널려 있으니까 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래서 예수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제가 벌써 일흔 살이 되었으니까 죽을 때까지 남은 시간은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부스러기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돈도 부스러기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비현실적인 생각인가요? 모두가 충분한 자기 몫을 달라고 하고, 더 부자가 되고 더 오래 살고 더 건강해져야 한다고 몸부림치고, 그게 채워지지 않으면 밥상을 뒤엎겠다는 기세라면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무너지고 말겠지요.
우리가 수도사도 아닌데 어떻게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수 있냐, 하고 질문하는 분들에게 오늘 저는 직접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대신 가나안 여자에게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충분한 대답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28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큰 믿음
바로 직전까지 매몰차게 응대하시던 예수께서 완전히 다른 말씀을 이 여자에게 하셨습니다. ‘당신 믿음이 큽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인 마 15:1~20절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율법 규례를 근거로 예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려서 그들을 위선자라고 일갈하셨습니다.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마 15:13)라고 하셨습니다. 종교 엘리트로 자타 인정받던 이들을 영적인 시각장애인이라고 비판하신 겁니다. 이걸 전제하고 28절을 읽으면 이 가나안 여자를 향한 예수의 칭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믿음보다 더 큽니다.’ 이 여자는 예수께 인정받았습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선입견이 사라진 셈입니다. 아무도 이 여자를 귀찮은 존재라거나 무시해도 좋을 존재로 여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살이에서 이보다 더 소중한 순간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딸이 귀신 들려 애타하던 이 쳐자가 오히려 부럽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크고 참된 이유는 예수를 향한 영혼의 간절함에 있습니다. 그 간절함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외침과 자기를 도와달라는 호소, 그리고 부스러기로도 만족하겠다는 고백에 표현되었습니다. 모든 게 풍요로운 사람들에게는 이런 간절함이 없습니다. 건강하고, 사회 지위도 높고, 자녀들도 잘되고, 남에게 부러움을 살만한 조건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간절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영혼의 간절함이 없는 삶을 행복하다고 여기겠으나 오히려 불행할지 모릅니다. 제가 어릴 때 끼니때마다 깡통을 들고 남의 집 문 앞에 와서 ‘밥 좀 줘요. 네!’ 하고 구걸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개천 굴다리 밑에서 삽니다. 하루살이가 벅찰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인생입니다. 매일 호텔 뷔페에서 비싼 밥을 먹는 사람은 그들이 굴다리 아래 옹기종기 모여서 한 끼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모를 겁니다.
우리가 가나안 여자처럼 영혼의 간절함을 경험하기 위해서 실제로 노숙자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런 시절은 다행스럽게 우리에게서 지났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빼고, 우리는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한 시대를 삽니다. 영혼이 간절함을 경험하기가 어려운 시절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저는 궁핍한 시대나 풍요로운 시대나 가릴 것 없이 ‘하나님 경험’이야말로 궁극적인 의미에서 영혼의 간절함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진짜 보석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의 가짜 보석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예수 앞에 엎드린 이 가나안 여자야말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큰 믿음의 사람입니다. 더는 불쌍하거나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의 치유
소원이 이뤄졌다는 말은 곧 귀신 들린 딸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구나, 그러니까 큰 믿음만 있으면 모든 고난이 즉시 해결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분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적시합니다.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복음서에는 예수의 축귀 능력, 치유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대목인 마 15:29~31절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 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카리스마가 있는 다른 이들에게서도 일어났습니다. 현대로 들어와서 이런 일은 의사들의 업무가 되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려는 핵심은 축귀와 치유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를 통해서 삶의 신비와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보면 귀신 들린 딸이 아니라 예수께 왔던 이 가나안 여자의 영혼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시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엄마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딸이 귀신 들렸다는 손가락질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왔듯이 예수 제자들에게는 민폐를 끼치는 귀찮은 여자로 취급당했습니다. 딸의 병을 낫게 하려고 돈을 많이 써서 가난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럴 바에야 딸과 함께 죽어버리는 게 낫지, 하는 끔찍한 생각도 했을 겁니다. 이제 그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엘리트들도 얻지 못했던 ‘큰 믿음’을 예수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실제로 귀신 들렸는지, 열병 걸렸는지, 불면증에 걸렸는지 모를 딸과 함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딸의 병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을 수도 있고, 또는 언젠가 훗날 실제로 치료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출발은 엄마의 큰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는 예수와의 만남을 가리키는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고 표현한 게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의 인생살이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이루고 싶으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에게 ‘큰 믿음’이고 참된 믿음인가요? 저에게 물으신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명의 가나안 여자처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심정으로 사는 사람, 그리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멘.
‘당신의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믿음보다 더 큽니다.’ 이 여자는 예수께 인정받았습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선입견이 사라진 셈입니다. 아무도 이 여자를 귀찮은 존재라거나 무시해도 좋을 존재로 여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이 여자를 귀찮은 존재라거나 무시해도 좋을 존재로 여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이말에 실제 삶에서는 쉽사리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께 인정받는 차원에서는 동의가 됩니다. 사람들은 나를 귀찮은 존재, 무시해도 좋을 존재로 취급합니다. 거기서 흔들립니다. 신앙이 구원이 역설적이라는 말이 때로는 마음 깊이 울림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왜 꼭 그런 식어야만 하나? 하는 푸념을 늘어놓게 만들기도 합니다. 언젠가 목사님께서 설교하셨던 문구가 생각납니다. "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찮은 음식과 하찮은 삶의 조건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있음의 기쁨과 환희’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면은 여전히 갖은 욕망이 꽈리를 틀고 있고
내일에 대한 염려와 시기, 불안, 허무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다 귀신들려 사는 처지겠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정작 제가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가나안 여인의 절규가 바로 우리의 절규가 될수밖에요
잠시잠깐이라도 넋놓고 있으면 영락없이
시대정신에 속절없이 떨어질수 밖에 없는
무력하고 비참한 존재이기에
매일 거기로부터의 구원을 탄원하며
"다윗의 자손 예수시여!"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가나안 여인의 심정으로
그분을 찾을수 밖에요
귀신이 정말 떨어져 나가는지
가시적인 응답여부와 상관없이
그 부르짖는 자세의 견지가
부스러기 구원을 쌓아가게 해줌으로써
구원의 퇴비가 되어주는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