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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hM_lyv4kk4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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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베드로전서 3:18-22 |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사순절 1주, 2024년 2월 18일
베드로전서는 1:1절에서 수신인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거론된 지명은 모두 지금의 튀르키예에 해당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시기는 네로가 그리스도인을 유별하게 박해하던 60년대이거나 도미티안 황제가 박해하던 90년대라고 합니다. 집필 연대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박해받던 시기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는 특히 ‘고난’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2:19절에서는 부당한 고난을 겪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라고 했고, 4:13절에서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까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4:16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문제로 인해서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습니다. 고난을 즐거워하라는 말도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로마 제국 시대나 오늘 우리 시대나 다를 게 없습니다. 이 시대도 로마 제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더 나아가서 혐오합니다.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주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아니 너처럼 괜찮은 친구가 아직도 교회에 나간다는 말이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어딘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웬만하면 교회 다니는 티를 내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이 시대정신 자체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시대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달리 돈을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자아를 숭배하도록 유혹합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다 보니 교회 생활에 충실하게 살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성의 혼란까지 겪습니다. 세상에서의 정체성과 교회 안에의 정체성이 분열되는 겁니다. 일종의 인격 분열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을 피하려다 보니 결국에는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를 포기하거나 신앙생활을 은퇴 시기로 유보합니다. 그렇게 세상에 적응해서 사는 게 편하고 행복하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라고 해도 그렇게 살지 못할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라는 게 뭐지, 그게 뭐기에 이 현실과 마찰을 빚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 신앙의 깊이가 밥 먹여주나,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지만 별로 확실한 인생을 보장해주지 않는 거 같은데,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그 신앙의 깊이를 날것 그대로 선포했습니다. 그 내용은 너무 낯설어서 우리의 영혼이 서늘해질 정도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한 구절만 일단 읽겠습니다. 마지막 절인 벧전 3:22절입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이 문장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렸습니까? 우리나라 말이기는 하나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처럼 들렸을 겁니다. 오늘 제가 이 문장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도 있도록 해석해드리기만 하면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다 감당한 것이겠지요.
그는 하늘에 오르사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을 실제로 우주 공간인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에는 예수님이 계실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낮에 보는 하늘은 밝고 아름답지만, 밤에 보는 하늘은 몽환적으로 보이는 별이 있기는 하나 어둡고 두렵습니다. 우주에는 흑암 에너지와 흑암 물질로 가득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비밀입니다. 그 하늘은 우리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천국 표상과는 다릅니다. 신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하늘을 생명의 원천으로 여겼기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주기도>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말은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이 문장에 나오는 하늘은 그리스어 οὐρανός(우라노스)의 번역입니다. ‘회개하라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이 가까이 왔다.’(마 4:17)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나오는 그 단어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천국이, 즉 하늘나라가 ‘하나님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로 나옵니다. 똑같은 뜻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도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지에 가득하다.’라는 표현이나,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며, 지금도 존재하고 과거에서 존재했고, 앞으로 오실 분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본래 우주 전체에 충만하신 분이시니까 하늘나라는 어느 시점에 왔다기보다는 이미 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인식하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걸 진작에 인식하셨기에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즉 ‘하나님의 현실성이 지금 여기에 드러났다.’라고 선포하신 겁니다.
하늘나라라는 그리스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하늘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하나님의 통치는 창조 행위입니다. 창조 행위가 곧 하늘의 통치, 곧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지금도 보존하시며 장차 완성하실 겁니다. 그 선하신 창조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존재이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능력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서 사람이 두 발로 걷는다는 게 얼마나 선한 능력인지 무슨 긴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두 손으로 물건을 잡는다는 것도 선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두 손과 발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인 시간과 공간을 경험합니다.
집안에서 진공청소기를 돌리는 일은 저에게 맡겨진 임무입니다. 청소기로 집 안 구석구석 먼지를 끌어들이는 작업은 황홀할 정도로 멋진 일입니다. 일반 동물들은 아무리 가르쳐줘도 그걸 못 합니다. 로봇청소기를 사용하라고 추천받은 일이 있는데, 제가 더 늙어서 손과 발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로봇청소기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로봇청소기가 저보다 더 부지런하게 청소할지 모르지만, 청소를 인간처럼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도 마찬가지고요. 제 설명이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생명 세계의 깊이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입니다. 그 무궁무진한 깊이를 경험하는 것이 곧 창조의 선하신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것이 곧 구원 경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청소와 설거지를 너무 낭만적으로 설명하는 거 아니냐, 식당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하고 저에게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1988년도에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은 평생 함석으로 물받이를 만들어서 시공해주는 육체노동자로 살았습니다. 멋있게 부르면 함석세공업자였고, 낮춰서 부르면 땜장이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분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집수리에 관계된 일은 비교적 잘하는 편입니다. 제 아버님의 인생에서 보듯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는 저도 잘 압니다. 하루 노동을 끝내고 마시는 막걸리 한잔이 그에게 위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난한 삶에도 여전히 창조의 선하신 능력이 은폐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본회퍼는 사형당하기 몇 달 전에 감옥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이라는 기도문을 썼다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 2월13일 밤 8시 저는 ‘신학공부’ 6강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서’를 생방송으로 강독했습니다. 강독 중간에 위르겐 몰트만의 책 『예수 그리스도의 길』(부제: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론)을 소개했습니다. 그 책 4장 제목은 ‘그리스도의 묵시사상적 고난’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고난의 ‘끝판왕’입니다. 그걸 묵시적 고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그 고난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철저한 실패였으나 하나님 역사에서는 승리였습니다. 4장 마지막 단락인 ‘깊은 곳에서의 부르짖음’에서 몰트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고문당하고 절망하는 그리스도의 부르짖음은 …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부활의 서막이다.’ 그래서 예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외쳤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로마 제국의 질서로만 세상과 삶을 판단하는 겁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권력을 손에 넣은 자가 승리자라는 패러다임으로만 세상을 봅니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그런 로마 제국의 권력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믿었습니다. 누가 옳은가요? 로마 황제와 제국의 권세와 이데올로기인가요,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인가요! 대답하기 곤란할 겁니다.
오늘 본문 19절은 예수 구원의 능력이 얼마나 심층적인지를 아주 특이한 진술을 통해서 묘사했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옥’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영어와 독일어 사도신경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구절이 들어있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신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겁니다. 이 대목이 들어간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이 아주 심층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구원 능력이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셨다고 말하는 본문이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좀더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예수의 승천은 우주 공간으로 공중 부양하신 게 아니라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화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변화를 가리켜서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과 승천은 똑같은 뜻입니다. 그런데도 서로 다른 단어를 쓰는 이유는 종말론적 생명으로의 변화가 예수의 제자들에게만 일시적으로 경험되었고 오늘 우리에게는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증조할머니나 할아버지에 대한 아버지의 경험을 여러분이 똑같이 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예수 승천이 가리키는 것은 종말론적 생명이라 할 예수 부활이 우리의 일상에 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늘을 보고 싶으면 우주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상의 깊이로 들어가야 합니다. 깊이라는 말이 어색하면 신비라고 해도 됩니다. 그것도 멀게 느껴지면 사랑이라고 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로부터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영혼으로 받아들인다면 고난도 고난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일상의 깊이에서는 인생살이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 힘을 잃습니다. 지옥 같은 곳도 그 하나님의 생명을 만날 기회는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 인생은 종 쳤어.’라는 말을 들을만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그 선하심은 남아있습니다. 사형수들에게도, 콜걸들에게도,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사람들에게도, 예수 당시의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에게도, 자살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도, 사기꾼과 노름꾼들에게도, 꼴찌들에게도, 전쟁터에 버려진 이들에게도, 큰 수술을 앞둔 사람에게도 다 열려 있습니다. 지옥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그런 이들에게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그 창조의 선한 능력을 받아들이는지 아닌지는 본인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방안에 들어앉아서는 햇빛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니
본문은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우편이 있고 좌편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하나님의 우편은 하나님과 똑같은 권위가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하나님께만 해당하는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라고 말한 겁니다. 이런 표현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지 어떻게 예수에게 복종하느냐고, 그런 표현은 순전히 종교적인 차원에 속할 뿐이지 현실에서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제력과 정치 권력과 대중적 인기에 매달립니다. 보통 매달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거기에 완전히 소진합니다. 거기에 복종하는 겁니다. 그런 삶의 목표를 성취한다고 해서 행복하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무작정 휩쓸려서 달려갈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우습게 여기거나 멀게 느낍니다. 이런 시대 정신 가운데 두 발을 딛고 사는 여러분은 만물이 예수께 복종한다는 성경의 증언을 이해할 수 있고, 그렇다고 실제로 믿으시나요?
판넨베르크는 졸역 『사도신경해설』158쪽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가 재림할 때 계시될 그것이 비밀스럽게 오늘의 현실성이 되는 것이야말로 부활한 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진술의 핵심적 의미이다.” 재림하실 예수는 심판자입니다. 추수 때에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넣어두고 가라지는 모아서 불에 태웁니다.(마 13:30)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합니다. 하나는 그 종말 때까지는 세상 권력이 기세를 올린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말 심판이 오늘 여기 우리의 일상에서 비밀스럽게 현실성(reality)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로마 제국의 폭력성 앞에서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누군가요? 매일 1억 원씩 써도 평생 다 쓰지 못할 겁니다. 그는 돈에 파묻혀서 살다가 곧 늙어 죽습니다. 가장 큰 부자였다는 사실만 역사책에 기록되겠지요. 그는 죽을 때 그 많은 돈으로 행복했다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돈은 우리의 영혼을 절대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듯이 말입니다. 여기 가난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의 일상에 이미 종말에 완성될 생명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땅에 묻힌 보물을 찾는 사람의 심정으로, 그리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등잔을 손에 든 여자처럼 일상을 깨어 있는 영성으로 삽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종말론적 생명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삶보다 더 참되고 더 의미 있는 삶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께서는 승천하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신앙고백을 담담하면서도 당당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아멘.
'전장의 참호속에서도
구름 사이 햇살과 민들레꽂을 볼수 있다....'
한용운의 "알수 없어요"'라는 싯구를 떠올리게 해주시는군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낙엽,하늘,향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절대자의 현현을
꿰뚫어보는 시인의 남다른 감수성의 배태는
그가 이제껏 무엇을 염원하며 살아왔는가에 기인하겠죠?
막장 드라마를 즐겨보는 이가 영적 감수성이 예민할수
없다는 목사님 표현대로
오늘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사유하고, 무엇을 갈급해하며 사는가... 여하에 따라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리 쌓여가는것이겠죠?
결국 그런것 같습니다
5년후, 10년후 내 영적인 감수성이 얼마나 예민해져 있을지 궁금하다면
그래서 시인처럼
지극히 작고,평범하고, 당연한 피조물 속에 깃든
그 분의 창조의 능력, 창조의 선하신 손길을 얼마나 낯설게
경험할수 있는지를 미리 알아볼수 있는 길은
오늘 내가 무엇을 먹고,무엇을 사유하며, 무엇에 갈급해하며 살아가는지로
판단할수 있다는....
지난주 설교 "예수의 변모" 결구에
'부활 생명의 신비와 능력은 간질을 앓는 산 아래의 현실 안에 은폐되어 있다....'라고 하셨지요
오늘 설교와 맥락을 같이 하는것 같습니다.
새로운 생명세계에의 영적인 개안을 경험하게 되면
보냄을 받는 자리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반대되는 실존이라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길이 없는
허무와 죽음의 세력만이 가득해보이는 곳에서도 그 분의 선하신 손길 경험이 가능한 것일까?
본회퍼 정도의 통찰에 이르기가 언감생심인 우리에겐
평생을 절규와 탄원속에서만 살다 간 시편기자들이
오히려 득도의 경지에 올라보이는듯한 본회퍼보다는 위로가 되어주는것 같군요.
하나님이 어디에도 없어보이는 자리에서 신앙이 우리의 실존을 지탱해줄수 있을까요?
하나님 부재의 자리가 곧 하나님 임재의 자리라는 역설을 우리는 관념으로만 붙들고 있을뿐
혹여 하나님 부재의 자리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 하면서 생래적인 두려움을 안고 살고 있겠죠.
목사님이 즐겨 표현하는 "백척간두"의 자리가 구원의 손길, 그 분의 창조의 선하신 손길을 발견할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임을 서당개 3년쯤 되니까 시인할 정도는 돤 것 같은데
여전히 머리와 발이 따로 놀면서 백척간두에서 진일보를 계속 주저하고 있으니
시방세계 진입은 평생 그림의 떡이기만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경천동지할만한 그 분의 선하신 손길 경험의 희망이 있기나 한 걸까요?
귀한 말씀 늘상 감사드립니다
이 시대도 로마 제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더 나아가서 혐오합니다.(본문 말씀중)
이 책임이 전적으로 이 시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현실에서 발생하는 이 문제에 대하여서 먹고사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현실과 타협하기도 싫고
삽십여년을 직장생활을 하면서 때론 하나님께 의지도하고 때론 오기로 버티기도 하며 지냈지만
인생 칠십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만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감사한 것은 다비아를 통하여 힘을 얻어서 그 시간을 견뎠다는 것이고
더욱 감사한 것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사람들과 다르게 시간이 흐를수록 삶의 폭이 넓어진다는 점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분의 견인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선한 빛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우리를 비추고 있다.
선하다는 말이 어울리지도 않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말이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안 선한데 선하다 말해야 하는 이 상황이 나로서는 당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받아들여진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나의 지금의 신앙의 모습을 인정하련다.
인정했더니 손이 보인다. 잡았다. 아니 잡혔다.
나를 끌고 간다. 나는 끌려간다.
그러면서 나는 내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