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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3V_3ECw6Dt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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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예레미야 31:31-34 |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사순절 5주, 2024년 3월 17일
저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읽을 때마다 영적 깊이에서 큰 위로를 받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짠한 심정이 됩니다. 그가 겪었던 실존적인 고뇌가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격동기였습니다. 유대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지기 얼마 전 유대를 개혁해보려 했던 요시야 왕은 전쟁에 나갔다가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전사합니다. 그 뒤로 유대는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요시야가 그렇게 졸지에 죽지만 않았다면 예레미야와 더불어서 유대를 새로운 나라로 만들어냈을지도 모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당시 다른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왕궁 귀족들에게 위험인물로 낙인찍혔습니다. 인민재판을 받아서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렘 26장에 나옵니다. 당시 지도급 인사들이 예레미야를 마치 마녀처럼 적대시한 이유는 예레미야의 설교에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무너지고 많은 유대인이 포로 신세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레미야는 패배주의자이고 바벨론 제국을 이롭게 하는 간첩과 같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패배주의가 아니고, 친바벨론 인사도 아닙니다. 예레미야만큼 애국적인 선지자도 드뭅니다.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대를 도와주셔서 무조건 잘 될 것이라고 여기는 값싼 낙관주의를 경계한 것입니다. 당시 역사를 정확하게 뚫어본 현실주의자였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민중들은 예레미야를 반대하는 거짓 평화 선지자들의 설교에 솔깃해했습니다. 지금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기복주의가 한국교회에 만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근거가 있든 없는 상관없이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잘될 것이라는 말만 일방적으로 듣고 싶어 합니다. 삶이 불안하면 그런 경향이 더 강해집니다. 이런 막연한 낙관론에 기울어졌던 유대의 마지막 시기에 예레미야는 고군분투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유대 역사는 예레미야의 설교대로 흘러갔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무너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역사에서 사라진 지 130여 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은 불타고 고급 집기는 전리품으로 빼앗기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장애인이 되었으며 노예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유대라는 나라 자체가 없어진 겁니다.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한 예레미야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옛 언약
오늘 설교 본문인 렘 31:31-34절은 이런 격동기에 예레미야가 선포한 메시지의 한 대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역사 경험에 따라서 생각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새로운 생각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도 하는 것처럼 가장 참혹한 역사 현장을 경험한 예레미야는 새로운 영적 비전을 찾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대 백성과 ‘새 언약’을 맺는다고 말입니다. 새 언약을 맺으려면 옛 언약은 폐기되어야겠지요. 그 상황을 렘 31:32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옛 언약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을 떠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광야에서 본격 유목민 생활을 시작할 때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것입니다. 출 19:5-6절을 들어보십시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옛 계명의 압축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다룬 대목인 출 20:6절은 이렇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거꾸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으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신 28:16)입니다. 예레미야 역시 유대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망했다는 것은 곧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과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라고 확실하게 짚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옛 언약의 효력이 끝났다고 본 것입니다. 마치 부부가 부부로서의 언약을 깨고 이혼한 것처럼, 또는 국가 사이에 맺은 외교 조약을 위반함으로써 양국의 우호 관계가 깨진 것처럼 말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옛 언약에 포함된 율법과 규례를 소홀하게 여겨서 우상숭배와 죄로 기울어졌다면 따끔하게 경고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이끌면 될 텐데, 굳이 새 언약 운운한 건 무슨 까닭일까요. 시내산 십계명과 여러 계명 및 법도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길을 잘못 들어설 때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호소했습니다. 죄를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예레미야도 이런 선지자 전통에서 활동한 사람이라서 보통 때 같았으면 그렇게 설교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가 완전히 ‘폭망’한 비상시국입니다. 뭔가를 고쳐서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상기시켜서 정신 차리게 해봐야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일처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옛 언약이 무효가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모두 포기하고 각자 자기 나름으로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그 순간에 예레미야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새 언약을 맺으신다고 외친 것입니다.
새 언약
새 언약의 내용이 33절 이하에 나옵니다. 우선 새 언약은 십계명처럼 돌판에 새기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기록된다고 합니다. 옛 언약인 율법은 십계명만이 아니라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구구절절 많은 내용을 포함합니다. 그게 다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과 비슷하고, 지금 우리의 실정법과 비슷합니다. 문명국가는 법치를 근간으로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총선을 이십여 일 앞두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의 주 업무는 입법입니다. 인간 삶과 법의 관계는 정말 이상합니다. 법이 없으면 범법도 없습니다. 법이 있다고 해도 그 나라가 법대로 굴러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그랬습니다. 율법을 놓고 서로 시시비비를 따졌습니다. 율법 전문가들은 율법을 통해서 명예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법 이전에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이 왜곡되면 법은 이용당할 뿐입니다. 그걸 예레미야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었던 바울 역시 율법 신앙에 관해서 문제의식이 강했습니다. 그는 롬 2:28-29절에서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예레미야는 새 언약에 관해서 34절에서 아주 파격적인 말을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새 언약이 맺어지면 모든 사람이 여호와를 알기 때문에 더는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무도 직접 알지 못합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깊이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일시적으로 나타난 생명 현상뿐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누구이고, 공부를 어떻게 했고, 재산이 얼마인지를 압니다. 주민등록증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신분증입니다. 그런 형식들이 우리 자신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삽니다. 세월이 휙 흘러서 31세기가 되면 우리를 기억할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애써서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들도 다 사라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누군지 아십니까? 예레미야는 새 언약이 맺어지면 생명의 근거가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각자의 정체성도 그제야 드러납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아직은 모릅니다. 새 언약이 맺어져야만 그게 가능하다고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새 언약이 돌판이나 양피지나 파피루스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34절에 나오는 파격적인 말씀의 다른 하나는 정말 놀랍습니다. 예레미야가 완전히 새로운 영성의 깊이로 들어갔다는 것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메시지입니다. 율법 너머 복음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 그의 말씀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해당하는 문장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의 이 설교는 율법 도식(패러다임)을 초월합니다. 신명기 역사관을 뛰어넘습니다. 우리가 원래 알고 있기로는 악을 행한 사람은 일단 벌을 받은 다음에 용서받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께 제사를 바쳐야만 죄가 씻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런 조건 없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그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달라진 건가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요? 똑같은 잣대로 잘한 놈 상 주고, 못한 놈 벌을 주는 게 ‘공정’ 아닌가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일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저는 사람이 실제로 공정하게 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정의와 공의를 앞세우지만, 마음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예를 들겠습니다. 운전 중에 다툼과 갈등이 종종 일어납니다. 차선을 바꿀 때 옆 차가 조금 속도를 늦춰주면 되는데 안 늦춰준다고 불평하고, 끼어들기를 당하는 사람은 저 사람이 끼어들기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끼어든다고 불평합니다. 속으로 욕을 하고, 경적을 울리기도 하고, 아주 험할 때는 보복 운전까지 합니다. 인간의 행동에는 늘 주관이 작용하기에 공정은 관념이지 실체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내로남불’이라는 저잣거리 표현에서 보듯이 이런 현상은 인간 삶 전반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최선으로 정의와 공의를 세워나가야 하지만 그것으로 인간 문제가 근본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유대의 멸망과 거기에 이는 전반적인 상황을 통해서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유대 백성의 잘못을 아무리 지적해도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화되지 않을 겁니다. 바벨론 제국 앞에서 그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아무리 경고해도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비현실적인 평화를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만 들으려고 했습니다. 옛 언약인 율법으로는, 그것이 나쁜 게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필요한 제도이기는 하나,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들의 악행을 용서하시고 당신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사실을 근거로 바벨론 유수 50-70년을 버텨내라고 말입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심판과 징벌을 통해서 사람을 변화될까요? 두려움은 우리의 행위를 어느 정도 제어하지만, 속마음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법이 있고 법 전문가들이 있고 재판이 벌어지고 감옥이 있는데도 범죄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사실만이 우리의 중심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생각이 너무 ‘나이브’할까요? 비현실적일까요? 물론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사랑받았다고 해서 실제로 당장 사람이 변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걸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에서만 우리의 존재가 변화될 수 있고, 거기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죽음에서 자기 사랑, 자기 열망이라는 죄가 용서받듯이 말입니다.
그 ‘날’이 오면 …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은 실제로 실행되었을까요? 그 새 언약대로 세상이 달라졌을까요? 예레미야는 지금 당장 새 언약이 실현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31절 첫 문장은 “힌네, 야밈 바임”입니다. ‘보십시오. 그 날들이 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날들’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오면 새 언약이 성취될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이 문장은 “돌아서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라는 예수님의 첫 메시지를 연상시킵니다. 하늘나라가 오는 때는 구원의 순간입니다. 생명 완성의 시간입니다. 하늘나라 안에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엉망입니다. 신분의 차이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죄 용서가 아니라 없는 죄도 만들어서 사람을 조롱합니다. 새 언약의 날들이 오고 있다니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니요, 이게 말이 되나요? 예레미야는 유대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파멸되는 걸 보고 정신이 좀 이상하게 된 건 아닌가요?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너무 강하게 영향을 받아서 하늘나라가 왔다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자기도 잘 모르고 그대로 따라서 선포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건 아닐까요? 왜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의 날과 예수께서 선포한 하늘나라를 우리는 이 세상살이에서 절감할 수 없을까요?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합니다. 1) 예레미야의 이 메시지는 새 언약이 지금 당장 실현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세계를 향해서 치열하게 살아가라는 요청입니다. 2) 그렇게 살아가려면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저 메시지의 세계를 실제 삶에서 경험해야겠지요. 죄를 용서받았다는 경험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가난하거나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도 삶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크게 깨달은 것으로 말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한 하늘나라를 이렇게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죽는 순간이나 그와 비슷한 실존에 떨어지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고 말입니다. 가난과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부러워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요 1:14절이 증언하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세상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언약의 날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이미 결론이 난 싸움입니다.
패잔병을 상대하는데 난 왜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다가오셔서 일까요?
예레미야의 심정을 이해하고 싶지만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부인할 수 없네요
결국 새언약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