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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v6Kx3MgycV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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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한복음 15:1-8 |
상호내주의 신비
요 15:1-8, 부활절 5주, 2024년 4월 28일
우리 가족이 시골로 거처를 옮기고 텃밭을 돌보면서 살기 시작한 게 올해로 12년째입니다. 지난 4월23일(화)에 봄 작물 모종을 텃밭에 심었습니다. 가시오이 외 11종의 채소와 방풍나물 외 5종의 나물입니다. 이미 두 주일 전에 두 종류의 호박은 씨를 뿌려서 싹이 나오기 시작했고, 감자도 집에서 먹던 감자에 싹을 틔워서 열 조각을 심었더니 여섯 조각에서 잎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애플 수박과 참외 모종을 심을 예정입니다. 나무 종류는 사과나무만 한 그루 남기고 나머지는 작년 겨울에 베어버렸습니다. 농약으로 방제하지 않으니까 온갖 병충해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0평 정도 되는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도 열매를 맺는 일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또한 얼마나 신기한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작업은 나무의 경우에 가지치기이고, 토마토나 오이 등의 경우에는 새순 잘라주기입니다. 그 작업을 하지 않으면 열매가 시원치 않습니다.
가지치기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5:1-8절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예수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아버지 하나님은 농부이며, 제자들은 열매가 달리는 가지입니다. 실제 포도나무에도 물론 가지치기가 많이 필요합니다. 2절은 이렇습니다.
무릇 내게 붙어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제거해 버린다는 말씀이 매정하게 들립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일수록 더 보살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던가요? 다른 포도원 주인 비유에 따르면(마 20:1-16) 포도원에서 종일 일한 사람이나 뒤늦게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이 똑같이 일당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비유에서 노동자들은 일하기 싫어서 일을 적게 한 게 아니라 품꾼으로 써주지 않아서 일을 적게 한 것뿐입니다. 여기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서 제거된 가지들은 열매를 맺지 못할 조건에 놓였던 게 아닌데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막 4:25절은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사랑이 풍성한 사람은 더 풍성하게 사랑하게 되고, 인색한 사람은 점점 더 인색하게 살기 마련입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한다.’라는 말씀이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반찬 만들기입니다. 밥 짓기라고 해도 됩니다. 정말 마음을 두고 반찬을 만드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그 반찬 만들기의 오묘한 깊이로 들어갑니다. 옛날 어머님들은 나물 반찬을 만들면서 계량컵이나 계량 저울이 아니라 손의 촉감으로 간을 맞췄다고 합니다. 콩나물무침을 만들 때 어느 정도나 삶아야 하는지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콩나물과 어울리는 양념도 그 깊이에 따라서 얼마든지 새롭게 개발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커리어우먼’으로 사는 걸 멋진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업주부를 낮춰볼지 모르겠으나, 근본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전업주부의 일을 살림이라고 합니다. 살림은 가정을 살리는 것이고 세상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밥 짓기와 반찬 만들기와 설거지의 깊이로 점점 더 들어가는 사람은 겉멋만 들어간 국회의원이나 장관보다 삶의 열매를 더 많이 맺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전도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일까요? 교회 봉사라는 열매일까요? 어려운 이들을 돕는 열매일까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정치 참여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기에 그들과 비슷한 삶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살기에 그리스인의 고유한 열매가 있습니다. 그 열매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기 전에 열매를 맺기 위한 전제 조건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 전제 조건을 알면 제자로서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에서(마 7:15 이하)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좋은 나무가 되어야만, 즉 존재 자체가 새로워야만 거기에 부합하는 열매를 맺는 게 아니겠습니까. 4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본문은 사람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매우 과감하면서도 독단적인 느낌이 드는 주장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할 겁니다. 그들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확신하고 삽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올라간 사람들은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이 강합니다. 그게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견디지 못합니다. 저는 그게 가장 큰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10분만 숨을 쉬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한 시간 후에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존재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주장하는 건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겁니다.
20세기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혁명은 1917년 2월과 11월에 걸쳐서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입니다. 이 혁명은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쓴 책 <공산당 선언>(1848년)을 현실 정치 역사에 실현한 것입니다. 이 혁명을 이끈 이들은 빈부격차를 심화하는 자본주의가 인간 세상을 파멸시킨다고 보고 무산자계급이 통치하는 세상을 만들려는 꿈을 꾸었습니다. 멋진 꿈입니다. 그들의 꿈은 능력만큼 노동하고 필요한 만큼 소유하는 세상이니까요. 대학교 청소부들과 총장 사이에 연봉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세상, 대학병원에서 교수 의사와 간호사 사이에 연봉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보십시오. 볼셰비키 당원들은 모두가 공평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전력투구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그 열정이 너무 강렬하고 거칠어서 종종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처단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국가가 러시아를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를 받아들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1990년을 기점으로 동구권의 공산주의 체제는 대부분 무너졌습니다. 지금 온전하게 공산주의 이념을 실천하는 국가는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살자는 공산주의 혁명은 왜 실패했을까요? 그 이데올로기가 잘못된 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기에게 직접 이익이 오지 않으면 열심히 노동하지 않습니다. 그게 인간 현실입니다. 협동농장 운영이 쉽지 않다는 걸 역사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낭만주의라 할 공산주의 체제는 어쩔 수 없이 생산력이 떨어져서 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인간의 행태를 그리스도교는 죄라고 말합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고상한 이념으로도 이상적인 나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향을 가리켜서 ‘유토피아’라고, 즉 이 세상에는 ‘없는 곳’이라고 부릅니다.
21세기에는 정치 혁명이 아니라 기술 혁명이 인류를 지배합니다. 인간 기술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한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면 자율주행 차입니다. 운전자가 운전대에서 완전히 손을 놓을 수 있는 단계가 머지않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저는 그게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는 잘 모릅니다. 전문가들도 서로 의견이 다릅니다. 인간 기술로는 넘을 수 없는 임계점이 분명히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게 결국에는 극복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동차 운전은 밥을 먹거나 라이브 콘서트에 가는 거와 달리 인간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라서 100%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일상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법적인 문제가 더 어렵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완전 자율주행 차가 교통사고를 일으켰을 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논란이 해결되기 어렵다는 겁니다. 기술 왕국을 꿈꾸는 이들은 인간이 결국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운전대가 없는 차를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이 한 가지 놓치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이 놓쳤던 인간의 ‘죄’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깊이 알지도 못하는 세계 혁명 문제와 자율 주행 기술에 관해서 말씀드린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본문 말씀이 단순히 종교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전체와 직결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상호내주
본문은 4절과 5절에 반복해서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한다.’라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인 예수 안에 거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할 때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이런 관계를 가리켜서 상호내주(相互內住, περιχορησις)라고 합니다. ‘페리코레시스’라는 그리스어의 번역인 상호내주는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나온 개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아들과 영이, 그리고 영과 아버지가 서로 독립적이면서 서로에게 침투하여 신성을 드러낸다고 말입니다. 이 개념이 오늘 본문에도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제자들이 들어가서 머물고, 제자들 안에 예수께서 들어와 머문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이 관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7절 말씀이 이 상호내주의 관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개역개정>의 ‘거한다.’라는 표현보다는 ‘머문다.’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7절에 따르면 ‘내 말’(ῥήματά μου)이 제자들 안에 머무는 것이 곧 제자들이 예수 말씀 안에, 즉 예수 안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상호내주에 이르는 겁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을 겁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기는 로마 제국이 한창 기세를 올릴 때입니다. 뭔가 가치 있는 일들은 모두 로마 제국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지중해를 둘러싼 모든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당시의 건축과 의학과 예술과 철학과 법은 지금까지도 세계에 영향을 끼칩니다. 로마 제국의 법이, 즉 ‘말’이 열매를 맺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의 ‘말’이야말로 모든 것의 기준이라고 믿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양인들은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종교적으로 너무 치우쳐 있다거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조롱했을지 모릅니다. 로마 제국에 현인들이 많았듯이 지금도 새겨들을만한 말을 하는 현인들은 많습니다. 타 종교에서 좋은 말들은 많습니다. 로마 시대나 지금이나 예수 말씀만이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말을 그냥 종교적으로 위로가 되는 가르침 정도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다음의 사실을 여러분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궁극적인 차원에서 오직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양다리 걸치기’로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간혹 모든 종교는 본질에서 같기에 자기는 불교도이기도 하고 기독교도이기도 하고, 천도교도이기도 하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근본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종교는 자기를 전적으로 내맡길 때만 성립합니다. 물론 선승 불교에서는 구도의 길을 가다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가르침도 있으니까 교양으로서의 종교가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역사적 실존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생살이에서 잎만 무성하여 그럴듯하게 보일 뿐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로 만족한다면 교양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제자가 될 사람은 자신의 모든 교양과 상식을 내려놓고 구체적으로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말씀의 능력을 실제 삶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바로 그럴 때만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별하고, 당연히 제대로 된 열매를 맺습니다.
저는 앞에서 제자들이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을 뒤로 미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8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생명을 풍요롭게 누리는 일이기에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생명의 깊이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가로막는 세력이 죄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세끼 밥 잘 먹고 재미있게 살고 있으니까 인생살이에서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정도로 만족하겠다면 예수의 제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그리고 지난 2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았던 사람들이 세끼 밥을 충분하게 먹지 못하거나 인생살이의 재밋거리가 없었던 게 아닙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100년 전보다 열 배는 더 잘살게 된 현대인들의 삶에 조금도 불만이 없어야겠지요. 반대입니다. 자기들 마음껏 사는데도 여전히 불만투성이 아닙니까. 기회만 있으면 그 불만을 쏟아내려고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 혁명과 기술 혁명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남을 괴롭히고 조롱하고 잘난 척하고 교만하게 살 겁니다. 생명 완성과는 거리가 먼 현상입니다.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제자들이 맺어야 할 열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에 필수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상호내주입니다. 말이 상호내주이지 실제로 그걸 경험하고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계산기를 두드려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저명인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게 보장되지도 않고,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런 신앙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를 찾아왔던 부자는 실망해서 돌아갔고, 평범한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상호내주는 구원의 신비이고 은총의 신비입니다. 그런 순간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매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성경공부를 하고 신학 공부도 합니다. 세상살이로 바쁘기에 충분한 정도로 시간 내기가 힘들기는 합니다. 콩나물 물주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이 다 빠져나가는 듯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서 콩나물은 자랍니다. 일상을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아내면서 동시에 진정성 있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된다면 여러분의 영혼 안에 씨앗으로 떨어진 ‘예수의 말’이 어느 순간에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아멘!
김사관님이 저의 설교에 관심을 기울여주신 걸 기쁘게 생각합니다.
설교 앞 대목에서 텃밭 이야기를 했는데요,
오늘 감자 순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예쁩니다.
감자 조각 10개를 심었는데, 7개에서 순이 자랐어요.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겠네요. 사진 보세요. 키가 5-6센티밖에 되지 않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쑥쑥자라서 감자를 맺겠지요.
우디 님의 생각과 질문은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듭니다.
역사적 예수를 몰랐던 구약의 선지자의 신앙과
오늘 예수를 알고 믿는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은지가 핵심이겠지요.
더 줄이면 '예수' 없이도 구원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고요.
'삼위일체' 개념안에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예수를 몰랐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결속된 사람들이나
성령 하나님께 결속된 사람들은 아들로서의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이사야 등등, 아버지 하나님과 결속된 사람들은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와 더불어서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니까 은총을 받은 거고 열매를 맺는 거지요.
도대체 삼위일체의 신비가 뭐냐, 하는 건 또 다른 질문입니다.
비유적으로, 기계적 역학의 세계를 드러낸 뉴턴이
양자 역학의 세계를 드러낸 하이젠베르크와 거대한 물리 현실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이요.
예수는 아마도 어렸을 때 다윗의 시편을 많이 읽고 외웠겠지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상호내주(相互內住)는 자기절대화를 뛰어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흔한설교'는 교회절대화를 강요하지만, '진짜설교'는 진정한 열매가 무엇인지를 잘 알려줍니다. 꽃이 열매가 되듯이 죽음을 이기는 부활생명이 가장 큰 열매라는 것을...이름 모를 꽃처럼 잠깐 피었다 사라져도, 보는 이들에게 미소를 열매로 남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