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4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 4:13-5:1)

성령강림절 조회 수 864 추천 수 0 2024.06.09 18:11:10
설교보기 : https://youtu.be/FV2RJ63QEjg 
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4:13-5:1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 4:13-5:1, 성령강림 후 3, 202469

 

 

세계 삼대 운하 중의 하나가 코린토스 운하입니다. 그리스 코린토스 지협을 관통하는 운하입니다. 코린토스가 우리말 성경에는 고린도로 표기되었습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반도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지협에 자리한 도시로 고대부터 아테네(아덴)와 더불어 번창했습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인 기원후 50년경 아덴을 떠나 왼편 90정도 떨어진 고린도에 와서 1년 반 정도 머물면서 교회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행 18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바울은 훗날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게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입니다. 거기서 벌어진 가장 껄끄러운 소식은 고린도 신자들이 바울을 배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신학을 문제 삼은 겁니다. 바울을 배척하는 이유 중에서 인간적인 것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가 없다거나 외모가 형편없다거나 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입니다. 고후 10:10절에서 바울은 그 문제를 이렇게 짚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고후 11:5-6절에서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이런 말을 하는 바울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는 예수께서 생존해 계실 때 직접 제자로 임명받지 못했기에, 즉 예수를 친견하지 못했기에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예수님과 3년 공생애를 함께한 제자들보다 외적인 권위가 떨어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명실상부 지도자로 활동하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권위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교회가 볼 때 바울은 속칭 듣보잡입니다. 그가 틔르키예 지역에서 더는 선교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그리스 쪽으로 옮긴 이유도 이런 알력이 작용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환상으로 경험했기에 스스로 사도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열두 사도들보다도 예수님의 복음을 더 깊고 더 풍부하게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만큼 치열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제자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의 글이 신약성경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받아들여졌다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다시 한번 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내용이 주로 고후 2:14절부터 7:4절까지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설교 본문은 그것의 일부분입니다.

 

겉사람과 속사람

바울은 복음 사역자로서 활동하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엄청나게 겪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고후 4:8절과 9절에 따르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으며 박해를 받았고 거꾸러뜨림을 당했습니다. 좀더 구체적인 어려움은 고후 11:24 이하에 나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을 맞았으며,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당하고, 잠도 못 자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가 선교 사역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신앙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을 바울은 오늘 본문 16절부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먼저 16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바울은 여기서 겉사람과 속사람을 대비합니다. 겉사람은 바울을 비판하고 무시하던 사람들이 강조하던 것들입니다. 외모, 사도직, 연설 능력 등등입니다. 우리도 보통 이런 것들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는 일종의 외모 지상주의가 아주 강합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던 일본 사람의 글에서 한국 대학생들이 화장을 진하게 하는 걸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만 그렇게 화장을 한다는군요. 세계에서 성형수술이 가장 크게 발전한 나라도 대한민국입니다. 학력주의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나 빈부격차가 있기 마련이나 우리나라는 도가 지나칩니다. 바울이 겉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것들은 일시적이면서 빨리 시듭니다. 우리에게 영속적인 즐거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에 지배당하는 이유는 바울이 속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은 내면을 가리킵니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평화와 기쁨과 사랑 같은 것들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평화 지향적이고 더 기쁨 충만하고 더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는 사람이 있고, 오히려 반대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고후 4:17절에서 다시 두 가지 것들을 대비합니다. 하나는 환난이고, 다른 하나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는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았고, 로마 사람들에게서도 무시당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상당한 곤란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바울이 그리스도교의 초석을 놓은 사도로 인정받으나 그가 살아있을 때는 전혀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죽는 순간까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선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삶의 내공이 깊었기에 그게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위 17절에서 자기가 받은 환난이 일시적이면서 가벼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들어도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벌어지는 다툼으로도 크게 힘들어합니다. 바울은 삶의 방향과 깊이가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달랐기에 환난이 오히려 자기를 영광스럽게 한다고, 즉 행복하게 한다고 말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폐 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자녀를 돌보는 일만 생각하면 불평 불판이 쏟아질 겁니다. 아이를 돌보느라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편히 쉬지도 못하니까 짜증이 날 겁니다. 어떤 때는 함께 죽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 겁니다. 그러나 그 장애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영혼에 충만하면 오히려 그 아이와의 관계에서 놀라운 기쁨을 경험할 겁니다. 바울은 선교 활동에서 겪는 환난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했기에 환난이 일시적이면서 가볍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말을 들으면 오늘 우리는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인생을 사는 거 아닌가, 하고 부끄러워집니다.

환난은 손에 확실하게 잡히는데 영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광이 뭔가요? 바울은 이 문제를 이어지는 18절에서 풀어서 설명합니다. 이 구절에서도 두 가지 개념이 대비됩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사람들은 보통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삽니다. 그게 겉사람입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환난으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환난으로 오히려 영광에 이른 겁니다. 비유적으로,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어린 시절을 온통 피아노 연습에 쏟아부음으로써 피아니스트 대가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말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런 혹독한 연습 과정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그를 그렇게 끌어가는 어떤 힘이 있기에 그게 가능했습니다. 그걸 18절에 나온 단어로 설명하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영어로 invisible reality에 해당합니다. 궁극적인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원자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씨앗 속에 꽃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20년 후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사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보이는 것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절망하겠지요.

 

하늘의 영원한 집

우리는 지금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는 상황가운데서 바울이 무슨 근거로 복음 전도자로서의 길을 용감하게 갈 수 있었는지에 관한 설명을 따라가는 중입니다. 바로 위에서 세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바울은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을, 환난이 아니라 영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삶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이어지는 고후 5:1절에서 고대인들이 실감 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그림 같은 문장으로 설명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앞에서 짚은 속사람, 영원한 영광, 보이지 않는 것이 모두 이 구절에 나오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연결됩니다.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져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영원한 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도 우리 손에 쉽게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점수로 말하면 30점 정도입니다.

하늘은 우주의 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이 어딘가를 알고 싶으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하늘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창조의 능력을 경험하는 곳이 하늘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일부 공간이 아니라 모든 곳에, 만유 가운데 존재하시기에 만유가 바로 하늘입니다. 에베소서 45-6절은 이렇습니다.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 하나님은 이미 너희 안에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너희 안이 곧 하늘입니다.

이런 설명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신데 어떻게 만유와 우리 안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과 똑같지 않습니다. 초월적이시고 전능하십니다. 우리가 죽었다가 깨도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앞을 보면서 동시에 뒤를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은 손오공처럼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범주에 갇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감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즉 은폐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내재하신다고 말입니다. 즉 생명이 은폐된 곳이 바로 하늘입니다.

그 하늘에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합니다. 영원은 끝이 없이 무한 반복하는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의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알파이며 오메가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시간이 하나를 이룹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어머니 뱃속과 무덤의 순간이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파편으로 나뉘어 있으나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됩니다. 그 하나 되는 시간을 가리켜서 영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성하시는 종말이 오면 그런 영원한 시간을 우리가 직접 생생하게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이 오기 전,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영원한 시간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간접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가장 지루했던 순간을 기억해보십시오. 무시당하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같은 자리에서 시간을 보낼 때일 겁니다. 가장 충만했던 순간을 기억해보십시오. 사랑하고 사랑받는 순간이겠지요. 현대인들은 많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살아도 실제로는 아주 지루하게 삽니다. 한순간이라도 뭔가로 자극을 받아야만 그 지루한 순간을 겨우 견뎌냅니다. 바울은 영원한 시간을 희망하고 살았기에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못생겼다거나 어눌한 사람이라고 무시당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종류의 집을 대비했습니다. 하나는 장막집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집입니다. 장막집은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텐트를 가리킵니다. 바울의 직업이 원래 짐승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복음 사역자로 활동하면서도 그는 그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자비량 선교사라고 부릅니다. 그가 만든 천막은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집입니다. 아무리 좋은 천막집이라도 언젠가는 낡습니다. 우리 몸도 사실은 잠시 머무는 집에 해당합니다. 곧 무너집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궁극적으로는 장막집입니다. 우리가 잠시 손님처럼 지낼 뿐이지 그 누구도 여기서 영원히 살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병들고 늙고 죽어서 썩으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육체는 지구에 원소로 해체될 것이고, 우리의 직업과 돈과 외모도 모두 낡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고유한 유기체로서 삶을 영위했던 우리는 모두 새로운 생명체로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씨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꽃이 피어나듯이 말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바울은 영원한 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겉사람에 매달리지 않고 오늘의 일상을 생명 충만하게 살아내겠지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내겠지요. 이런 새로운 삶의 차원을 가리켜서 그리스도교는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고후 4:14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다시 산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삶은 이미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서 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이라는 궁극적인 미래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폐의 방식으로 오늘 우리에게 참된 현실(reality)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profile

[레벨:7]좋은나무

June 10, 2024
*.46.132.63

지난주에 몰트만 교수님 소천 소식을 듣고 주 내내 마음이 텅 빈 느낌이었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목사님의 몰트만 강독을 함께 하면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나 봅니다. '나는 영생을 믿는다', '절망의 끝에 숨어있는 새로운 시작' 참 좋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설교가 위로와 소망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10, 2024
*.181.143.52

저도 몰트만 박사 서거 소식을 듣고 안타까움이 컸습니다. 

98세이셨지요? 천수를 다 하셨네요.

제가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세 신학자 중의 한 분입니다.

판넨베르크, 칼 바르트, 몰트만!


profile

[레벨:9]소유와존재

June 11, 2024
*.254.11.100

이번 설교는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네요...

구절 구절, 내용 내용이 연결 연결 되면서 집중 또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몰입하는 기쁨이

계속 이어져가길 소망해봅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11, 2024
*.181.143.52

ㅎㅎ 성경 텍스트의 세계에 몰입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속도가 느릴지 몰라도 그런 경험이 축적되면 언젠가 때가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훨씬 깊은 세계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겠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107768
1064 성령강림절 선지자 '너머' (막 6:14-29) [2] 2024-07-14 448
1063 성령강림절 제자들의 축귀 능력 (막 6:1-13) [2] 2024-07-08 498
1062 성령강림절 공평한 세상을 향하여! (고후 8:7-15) 2024-06-30 560
1061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막 4:35-41) [2] 2024-06-23 698
1060 성령강림절 사람의 외모와 중심 (삼상 16:1-13) 2024-06-16 671
» 성령강림절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 4:13-5:1) [4] 2024-06-09 864
1058 성령강림절 안식일 문제 (막 2:23-3:6) [2] 2024-06-03 1947
1057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충만' 경험 (사 6:1-8) [2] 2024-05-26 2807
1056 성령강림절 파라클레토스 (요 16:4-15) 2024-05-19 2968
1055 부활절 믿음과 영생 (요 3:1-15) 2024-05-13 2968
1054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5:1-6) 2024-05-05 3034
1053 부활절 상호내주의 신비 (요 15:1-8) [4] 2024-04-28 5274
1052 부활절 부족함 없는 삶, 가능한가? (시 23:1-6) 2024-04-21 6205
1051 부활절 죽은 자 가운데서 (눅 24:36b-48) [2] 2024-04-14 6084
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2] 2024-04-08 6346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2024-03-31 6162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2024-03-24 6574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2024-03-17 6397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2024-03-10 6546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2024-03-04 6589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6934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6672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6818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6930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6713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6818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6841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7121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8081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8612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8580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8630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6886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6844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7313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 2023-11-07 7129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7177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7299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6899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6875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6871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7094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7088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6961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7437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6822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7277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7394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7391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7401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7311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7458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7001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7383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7378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7415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7391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7380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7398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7397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7401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7112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7431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7742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7899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7430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7560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7412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8533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7840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7645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8051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8019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7915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8971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8325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8073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7945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9040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9235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9345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11082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10605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11038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849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8188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8123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8996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8089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9599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9018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8134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9034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8819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9053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8647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9350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9158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7871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9057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