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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의 원천 (사 50:4-9a)

창조절 Views 11419 Votes 0 2024.09.15 17:23:39
설교보기 : https://youtu.be/aPJDAIa_AOw 
성경본문 : 이사야 50:4-9a 

의로움의 원천

50:4-9a, 창조절 3, 2024915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기를 원하나 모두가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노력과 운이 닿아서 자기가 원하는 행복과 재미를 찾은 사람도 있고,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고 재미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그걸 손에 넣는 일에만 몰두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충은 압니다. 미국에 사는 사람과 방글라데시에 사는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행복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류층 이상에 속한 사람들이 빈민층에 속한 사람들보다는 더 행복하고 재미있게 삽니다. 이를 조금 더 단순하게 설명하면 경제와 건강에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게 행복한 삶의 모범 답안입니다. 이게 근사한 답은 되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남부러울 거 없는 삶에는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견디기 힘든 권태가 개입할 여지도 큽니다. 권태가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해도 나름 화려한 인생이 순식간에 끝나버린다는 사실에 앞에서 절망합니다. 지금 당장은 다른 일에 쫓겨서 권태와 절망을 실감하지 못할 수 있으나 곧 그런 사태 안으로 휩쓸리게 될 겁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우리 인생살이에서 행복과 재미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에는 행복과 재미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얼까요? 삶의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과 재미와는 반대되는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도 주어집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난과 슬픔과 외로움을 직면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삶의 궁극적인 의미 안으로 들어갈 기회가 주어집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싯다르타가 왜 왕자의 신분을 포기했는지를, 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아버지의 큰 유산을 포기하고 탁발수도회를 시작했는지를, 왜 수많은 출가 수도자들이 일반적인 행복한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모두 예수나 싯다르타나 출가 수도자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구차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는 일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 일상에서 행복과 재미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최선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스스로 고난의 삶을 살아내면서 그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놓인 삶의 허상을 조금씩 벗겨내고 그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꾸준하게 그런 길을 수행하듯이 살면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사람들이 천금처럼 여기는 시간을 내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읽고, 성경과 그리스도교 2천 년 전통이 말하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마르바 던이 예배를 가리켜서 거룩한 시간 낭비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벨론 유수

오늘 설교 본문은 BC 6세기 유대의 바벨론 유수 상황을 역사적 배경으로 합니다. 선민으로 자처하던 유대 백성들이 지리멸렬 쫄딱 망한 사건입니다. 비슷한 일을 AD 70년에 다시 겪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독일 나치에 의해 유대인 6백만 명이 죽는 홀로코스트가 벌어졌습니다. 전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고난을 받은 민족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첫 재앙인 바벨론 유수 사건으로 인해서 유대인의 하나님 신앙이 한 단계 깊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십시오. 고난이 그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성찰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들은 두 가지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맞나,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할 능력이 있나,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신이 어디 있으며, 바벨론 제국의 폭력을 막아내지 못하는 신이 어떻게 전능하단 말이냐, 하는 문제 제기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익명의 선지자(편의상 이사야로 부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린 게 아니라 유대 백성이 죄악을 행했기에 이런 절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1) 둘째, 하나님의 능력은 변함없이 절대적이다.(2-3) 이런 말로 바벨론에 강제로 끌려온 유대 백성들의 불만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일본 강점기에 자의나 타의로 일본에 건너간 교포들이 모욕과 조롱과 누명을 썼듯이, 바벨론에 억지로 잡혀 와서 소수 민족 디아스포라로 살던 그들은 지쳐갔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위로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사 50:4-5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학자(제자)의 귀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신학 공부가 깊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는 우선 6절에서 자기가 처한 실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제국을 비판하다가 체포된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 당국에 의해서 심문받고 고문당하는 장면입니다. 그가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된 데에는 동족 유대인의 고발도 한몫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던 이들을 일본 사법 당국에 밀고한 조선 사람이 있었듯이 말입니다. 이사야는 결박당한 채 등에 몽둥이찜질을 당했고, 수염이 뽑혔으며, 심한 모욕적 언사를 들었었고, 곁에 선 사람들의 침 세례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사야를 동정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잘못했으니까 벌을 받는 게 마땅하지, 했을 겁니다. 선지자는 무자비한 고문을 일절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몸을 그대로 맡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불의한 권력 앞에서는 뭔가 저항하는 게 마땅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정권을 타도하려는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에 쓴 편지가 나중에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제목이 저항과 복종입니다. 본회퍼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몇 달 전에 교도소에서 사형당했기에 그의 동료 신학자인 베트게가 책을 편집했습니다. 그 제목에 본회퍼의 신학 사상이 잘 녹아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는 저항하고,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저항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무저항으로 버텨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건 어렵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조건 저항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바울 같은 이는 로마의 지방 정권에 복종하라고(13:1 이하) 충고했습니다. 무질서보다는 악한 질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낫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모욕당하면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았던 이사야도 같은 생각이었을까요?

이사야의 깊은 생각을 제가 다 알지 못합니다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의 발언에 따르면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 떨어지더라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고문 자체는 두려운 일이지만 그것으로 자기의 영혼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은 흉내 내기 힘듭니다. 우리는 고문당하고 모욕당하는 게 아니라 약간만 기분 나쁜 일을 당해도 참지 못합니다. 약간의 손해도 분해합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를 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자기를 단단하게 무장시킨 채 살아갑니다. 이사야가 억울하다고, 자기를 더는 괴롭히지 말라고, 인격적으로 대해달라고, 하나님이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고함치지 않은 이유를 8, 9a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당시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었으면 이사야가 고문에 시달려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한여름 에어컨과 선풍기도 없이 부채 하나만 들고 쪽방에서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지내는 독거노인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셔서 부러울 게 하나도 없다고,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외치는 형국이니까요.

저는 본문이 이사야 개인의 운명만이 아니라 당시 유대 민족의 운명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잃고 가나안에서 멀고 먼 바벨론까지 강제로 끌려왔습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상당히 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서 이동하는 그 장면이 그려지실 겁니다.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유대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부분 끌고 온 겁니다. 유대인들을 바벨론에서 온갖 수모를 당했습니다. 어떤 유대인과 바벨론 사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면 유대인이 거의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빨리 포기하고 바벨론 사회에 적응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니면 현실을 완전히 비관한 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포기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의롭다는 사실을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장하셨다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시니까 아무도 우리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요즘 말로 정신 승리에 불과한가요?

 

의로움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유대인들은 모두에게 모욕당하고 무시당하는 신세입니다. 요즘 말로 루저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옳다고 인정하신다니, 말이 되나요? 하나님이 무슨 기준으로 그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건가요? 뭔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게 그들에게 있어야 하겠지요.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도덕적으로 더 뛰어나거나 머리가 더 좋다거나 행실이 더 바른 건 없습니다. 그들의 특별한 점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인정하심으로 인해서 이사야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을 논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서라.’라고 담대하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집중해서 산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의 삶에는 그 선하심과 사랑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바벨론에 끌려와서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유대민족들에게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고문당하는 이사야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 넘치는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게 실제로 말이 되나요?

어떤 왕국에서 왕자의 아내를 공개 모집하였습니다. 일주일 동안 콘테스트가 벌어집니다. 전국에서 많은 처녀가 왕궁에 모였습니다. 가문이 좋은 집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미모도 뛰어났고, 학벌도 최상입니다. 그들은 서로 자기가 어떤 집안 출신이며 교양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그중에 가장 수준이 처지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평민 출신이고 학벌도 높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미모도 그렇게 빛나지는 못했습니다. 거기 모인 여성들은 모두 이 여성을 오지 못할 곳에 온 것처럼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은 이미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특별한 인연으로 왕자와 미래를 약속했기에 무시당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왕자와 미래를 비밀스럽게 약속한 것처럼 바벨론 유수 시대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실제로 느낄 줄 아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걸 느끼는 게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자신들이 처한 처량한 신세만 보고 삽니다. 그래서 설교 앞부분에서 말씀드렸듯이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거나 하나님은 바벨론 제국을 제압할 능력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역사 과정에서 반복해서 하나님 신앙을 포기하고 가나안 지역의 농경신 바알에게 기울어졌습니다. 그게 이해가 갑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치우쳐서 사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당장 배부르고, 재미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가난하고 외로운 삶을 당당히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생명이 있고, 의로움이 있고, 안식이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유대 민족은 잠깐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가 다시 다른 데로 마음을 돌렸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바벨론에 끌려온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고 말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의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산헤드린 공회 재판정에서 당한 모욕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밷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26:67) 예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벌어진 장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27:30) 예수께서는 종교 법정과 정치 법정에서 똑같이 모욕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저주스러운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이보다 더 어렵지는 않겠지요.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벌어질 수도 있는 저주스러운 운명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장 저주스러운 운명은 죄와 죽음입니다. 그들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완전한 평화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본 바울은 롬 8:31-3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발췌해서 읽을 테니까 귀담아들어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이런 말씀이 너무 종교적인 표현이라서 멀리 느껴지는 분들이 계신가요? 이 말씀은 아주 실질적인 겁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생명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겁니다. 슬퍼하는 유가족도 죽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 그 순간을 돌파해야 합니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 전에도 우리는 아무리 돈이 많고 건강해도 유형무형으로 삶의 위기를 겪습니다. 그 순간에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있는 자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의로움의 원천은, 즉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운명으로 증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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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존재

September 15, 2024
*.126.156.157

"우리 인생살이에서 행복과 재미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삶에는 행복과 재미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표현중에 이런 표현들이 제법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름 의미와 가치는 있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이런 표현을 설명할 때 받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지금 행복과 재미가 필요없다는 말이지 않나. 차라리 그렇게 말하시오." 

이런 표현들이 그 사람들에게 말장난 하는 것 같이 들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냥 시원하게 행복과 재미에 가치와 의미를 두지 마시오! 참된 길은 예수 그리스도요. 라고 

말을 해버린다면 독단적인 걸까요? 인간의 실존을 너무 도외시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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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September 16, 2024
*.137.91.200

행복과 재미를 도덕적인 삶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도 필요하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율법을 폐기하기 않으나 복음 안에서의 율법을 말한답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은 내일 오전 설교 복기를 참조하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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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은혜

September 16, 2024
*.234.134.106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 떨어져도 수치를 당치않는다고 말했다'
수염을 뽑히고 뺨을 맞기고 침 뱉음을 당하는....
그보다 더한 수치가 없었음에도 수치를 당치않는다고 한다면 여기서의 수치는 영적인 수치인가요?
하루 하루 생존이 절박한 바벨론 포로생활속에서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자 누구나?'
이사야를 통해 메세지를 주셨음에도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없어보였으니
영적인 도움, 영적인 정죄에 국한되는 선언일까요?
절망, 두려움, 자포자기속에서 생존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죽지못해 살았을 그들의 실존속에서
의롭다는 선언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선언이
사방에서 그들의 목줄을 죄고 있는 온갖 context속에서
이를 당차게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어줄수 있었을까요?

시편에도 유사한 구절이 나오죠?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않게 하소서'
그 시인도 낭떨어지에 몰려 수치를 당하는 가운데
수치를 당치않게 해달라는 고백을 드렸음직 해보이는군요

수치스런 현실과 

수치를 당치 않게 해주겠다...는 손에 안잡히는 이 메세지의 간극을
좁혀가는게 구도요, 수행이요, 우리의 신앙여정인가요?

이 문제만 해결되면..
이 기도만 응답받으면..  탄원해보지만

서쪽하늘에 비 구름조각조차 보이지 않는
그래서 때론 내일 아침 눈뜨고 싶지않은 우리의 실존은

외연만 다를뿐 바벨론 포로기와 방불하겠죠?

도망가고 싶고, 다 체념해버리고 싶은 이 context속에서
'내게 나아오라 너를 도와주고 정죄하지 않겠다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격화소양(隔靴搔癢) 같아보이는 text와의
도무지 좁혀질수 없어보이는 괴리, 모순, 역설을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는
이 text에 도전받을 각자의 몫인가요?

profile

정용섭

September 16, 2024
*.137.91.200

바벨론 유수기에도 삶의 소소한 행복과 재미가 그들에게 있었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분명하다면, 허물어졌던 관계가 회복된다면 

모순덩어리같은 이 현실에서도 분명히 빛을 볼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구체적인 삶의 방법론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삶의 분명한 방향성, 바울 버전으로 '잡힌바 된 푯대'를 말합니다.

설교 복기를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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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은혜

September 17, 2024
*.234.134.106

처세술의 팁을 설파해주겠다는 친절한 목사들부터
교회생활, 신앙생활의 정답을 본인이 알고 있는양
확신에 찬 어조로, 업로드시키는 동영상마다
조회수 수십만을 보여주는 유튜버 목사들까지...
그들 덕분에 방향성을 오도받는 순진한 크리스천들이
이 땅에 난무하는 작금의 신앙 풍토속에서
무엇믈 믿을것인가?
어떻게 믿을것인가?
목사님 단골 멘트인 '시원적인' 질문을 계속 품고 있지않으면

자칫 소경에게 이끌림 받는 소경신세를 면치 못하는 웃픈 코미디만 연출하다 하직하겠구나... 싶습니다

설교복기를 통해서
핵심을 놓치고 있는게 있었구나.. 싶었지요
'내게 오면 수치를 당치않게 해주겠다...'
역설하신 그 분이 오히려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고 버림을 받은, 

또 그런 분을 구원자로 믿어야 한다는

이 모순과 역설이
기독교의 신비요 능력이요
바로 그때문에 운명을 걸고 도전해봐야겠다..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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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 성령강림절 사람의 외모와 중심 (삼상 16:1-13) Jun 16, 2024 11951
1059 성령강림절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 4:13-5:1) [4] Jun 09, 2024 12350
1058 성령강림절 안식일 문제 (막 2:23-3:6) [2] Jun 03, 2024 13518
1057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충만' 경험 (사 6:1-8) [2] May 26, 2024 14723
1056 성령강림절 파라클레토스 (요 16:4-15) [2] May 19, 2024 15095
1055 부활절 믿음과 영생 (요 3:1-15) May 13, 2024 14639
1054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5:1-6) May 05, 2024 14502
1053 부활절 상호내주의 신비 (요 15:1-8) [4] Apr 28, 2024 16599
1052 부활절 부족함 없는 삶, 가능한가? (시 23:1-6) Apr 21, 2024 17579
1051 부활절 죽은 자 가운데서 (눅 24:36b-48) [2] Apr 14, 2024 17120
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5] Apr 08, 2024 17811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Mar 31, 2024 17094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Mar 24, 2024 17565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Mar 17, 2024 17348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Mar 10, 2024 17468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Mar 04, 2024 17522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Feb 18, 2024 17864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Feb 11, 2024 17708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Feb 05, 2024 17771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Jan 28, 2024 18046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Jan 21, 2024 17727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Jan 14, 2024 18086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Jan 07, 2024 18139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Dec 31, 2023 19246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Dec 24, 2023 21722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Dec 17, 2023 22312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Dec 10, 2023 22336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Dec 04, 2023 22669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Nov 26, 2023 17882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4] Nov 19, 2023 18497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Nov 12, 2023 19049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 Nov 07, 2023 18373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Oct 29, 2023 18371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Oct 22, 2023 18389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Oct 15, 2023 18456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Oct 09, 2023 17967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Oct 01, 2023 18125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Sep 24, 2023 18280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Sep 17, 2023 18462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Sep 10, 2023 17861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Sep 04, 2023 18314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Aug 27, 2023 17882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Aug 20, 2023 18246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Aug 08, 2023 19095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Jul 30, 2023 18644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Jul 23, 2023 18936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Jul 16, 2023 18225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Jul 09, 2023 18144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Jul 03, 2023 17727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6] Jun 25, 2023 18129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Jun 18, 2023 17796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Jun 11, 2023 18057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Jun 05, 2023 18092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4] May 28, 2023 18287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May 21, 2023 18774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May 14, 2023 18340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May 08, 2023 18584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Apr 30, 2023 17971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Apr 23, 2023 18407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Apr 16, 2023 18424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Apr 09, 2023 19072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Apr 02, 2023 18571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Mar 26, 2023 18531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Mar 19, 2023 18600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Mar 12, 2023 20049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Mar 05, 2023 19074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Feb 26, 2023 18328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Feb 19, 2023 19077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Feb 12, 2023 18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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