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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59FvVC_ou7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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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가복음 10:46-52 |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 이야기
막 10:46-52, 창조절 9주(종교개혁 507주년), 2024년 10월 27일
여리고 성문 앞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예수께서는 생애 마지막 해에 성지 순례차 예루살렘에 왔다가 체포당하고 심문과 재판을 받은 후 결국에는 신성모독과 사회 소요죄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의 운명을 가르는 기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짐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느꼈을 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갔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바로 직전에 벌어진 어떤 특별한 한 사건을 보도합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설교의 본문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요단강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왔다면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 여리고를 거쳐야 합니다. 대구에서 서울에 가려면 경기도 광주나 수원을 거쳐야 하듯이 말입니다. 여리고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과 광야 40년 생활을 거친 후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요단강을 건넌 후 처음 만난 성읍이었습니다. 당시 전투가 격렬했습니다. 그곳에서 거둔 승리가 가나안 정착에 토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예수 일행은 그런 고대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을까요?
예수 일행이 여리고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가려고 여리고 성을 나왔습니다. 성문 앞길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습니다. 그곳에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동냥을 얻으려 했나 봅니다. 그 장면이 삽화처럼 그려집니다. 그는 당시 가장 불행한 운명에 떨어진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애인인 데다가 동냥을 얻어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요즘 서울역 앞 광장이나 지하도에서 낮술을 하거나 잠에 떨어지거나 끼니를 해결해줄 봉사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노숙자 신세보다 더 못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운명에 떨어진 이들은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에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미국에도 있고, 독일에도 있고, 노르웨이에도 있습니다. 자기 잘못으로 그렇기도 하고, 사회 구조적인 이유로 그렇기도 합니다.
시각 장애인 이야기가 요 9장에도 나옵니다. 바디매오 이야기의 요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일행이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의 죄로 맹인이 되었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이런 운명을 인간의 죄와 연결해서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대답하시고, 그의 눈을 고치십니다. 공교롭게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긴 대화 끝에 바리새인이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다그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많은 걸 보고 읽고 좋은 가문에 태어나서 당시 사회 지도급 인사가 된 바리새인들이 장애인보다 삶에 대한 이해가 오히려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삶의 참된 실체를 보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 업적이나 사회적 업적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 이야기로 돌아옵시다. 그는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시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의 외침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민폐 끼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바디매오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바디매오를 불러오라 말씀하셨고,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왔습니다. 예수께서 ‘나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오?’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 사람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 그 말이 끝나자 바디매오는 시력을 찾았고, 즉시 예수를 뒤따랐다고 합니다.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예수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함께 들어갔겠지요.
영혼의 울림
이 이야기의 어떤 대목에서 여러분의 영혼에 울림이 있었나요? 예수께는 장애인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은혜를 받으셨나요? 그런 일들은 부차적입니다. 그런 치유 능력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당시 다른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영혼(통전적) 구원이지 육체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그런 일은 의사의 업무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바디매오 이야기에서 정말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저의 영혼에 울림이 되는 지점을 몇 가지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비슷한지 아닌지를 비교해보면서 저의 설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는 어떤 특별한 일이 우연한 방식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디매오는 오늘도 루틴으로 여리고 성문 밖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가에 앉아서 동냥을 얻고 있었습니다. 날이 맑았는지 흐렸는지는, 기온이 따뜻했는지 싸늘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똑같은 날의 반복이었습니다. 그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예수 일행이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은 우연이 중첩되어야만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여리고가 아니라 반대편인 엠마오를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여리고 쪽으로 왔다고 하더라도 여리고에 들리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었고, 바디매오의 외침을 못 들은 척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장애인과 환자를 고친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요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소설가의 상상력이 우리에게 삶과 역사의 실체를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습니다. 소설가의 상상력을 빌려서 당시 바디매오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유추해보려고 합니다. 그는 누군가로부터 예수에 관한 소문을 진작 들었을 겁니다. 예수라는 나사렛 사람이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소문을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복이 있는 사람이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위선자라고 비판한 분이십니다.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시고,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남자만 계산해서 오천 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기도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그런 분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을 한 번쯤은 먹었을 겁니다. 그러나 만나 뵐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는 어디서나 있는 둥 없는 둥, 주목을 받을만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요. 눈이 안 보이니 예수를 찾아갈 수도 없고,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찾아간다고 해서 예수께서 자신을 만나준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길가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걸 느꼈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하룻밤 묶고 지금 길을 떠나시는군.’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를 한번 만나봐야지.’ 그리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어떤 결정적인 사건은 우리에게 느닷없이 닥치기에 시인들은 ‘시가 내게 왔다.’(오인태)라고 말합니다. 음악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들의 영감도 갑자기 옵니다. ‘유레카!’라는 말처럼 물리학의 깨우침도 갑자기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교 식으로 말해서 성령도 우연히, 갑자기, 예상외의 순간에 옵니다. 궁극적으로 죽음도 사실은 갑자기 옵니다. 자기의 죽음을 천천히 느끼는 사람이 있으나 실제로 죽는 순간은 모든 이에게 갑작스러운 사건입니다. 사고나 자연재해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이제 죽을 나이가 되었다고 느끼더라도 막상 그 죽는 순간은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겁니다. 자기의 인생 전체가 끝나는 순간이니, 일상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니, 그리고 인생이 너무 짧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이니 갑작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기 출생도 비슷한 사건입니다.
모든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이 갑작스럽고 우연하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일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보기를 원한다.’라고 대답했다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시각 장애인이니까 당연히 보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여기면 곤란합니다. 대개는 자기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일상에 길드는 겁니다. 그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조금이라도 잘살아보려고 노력하지 않느냐, 힘들지만 돈벌이에 매달리지 않느냐, 결혼하고 자식 키우는 일에도 온 정성을 들이지 않느냐, 일상에 많은 일이 발생하지 않느냐, 취미생활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 일상은 사실 똑같은 일의 반복입니다. 겉으로는 달라 보이나 실제로는 똑같습니다. 조금 더 넓은 방에서 지내든지 좁은 방에서 지내든지 교도소 생활은 근본에서 똑같듯이 말입니다. 그런 일상에만 심취하고 몰두하는 사람은 생명의 근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더욱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에 연예 오락 프로그램이 지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연예 프로그램이 일상의 매너리즘을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실제로는 탈출구가 아니라 우리 영혼을 서서히 마비시키는 마약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신앙생활이 종교적 여흥이나 종교적 업적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목사의 경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지, 성장 프로그램을 어떻게 세우고 실천할 것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칠 것인지에 몰두합니다. 평생 성경을 읽고 전도하고 교회당을 건축하고, 국내외 선교 사업을 역동적으로 펼치고 교회를 키우면서 나름대로 목회에 성공을 거둘 수는 있으나 하나님 경험에는 전혀 진도가 나지 않습니다. 입에서는 종교 언어가 매끄럽게 튀어나올 수 있으나 그럴수록 그의 영혼이 더욱더 매달라 갑니다.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도 비슷합니다. 평생 시간과 돈과 몸을 바쳐서 교회 생활에 매달렸으나 하나님에 관해서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기껏해야 하나님의 은혜로 자식이 잘되었다거나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간증 수준에 머뭅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에게는 ‘보기를 원한다.’라는 바디매오의 거룩한 열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믿음과 구원
바디매오는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인정한 그의 믿음을 ‘믿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다.’라는 구호나 ‘믿으면 만사형통이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믿음 만능주의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과 거리가 멉니다.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할 수 없다.’가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믿음을 가장 정확하게 신학적으로 설명한 대표적인 인물은 마틴 루터입니다. 루터는 지금부터 507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신학논제 95개조를 비텐베르크 교회당 정문에 게재했다고 합니다. 95개 신학 논제의 핵심은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이런 비판은 그의 세 가지 신학 명제로부터 출발했습니다.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을 하나를 꼽으라면 솔라 피데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오직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에서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도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도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행위가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문제는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행위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성지 순례나 마리아 기도나 헌금이나 자선 행위에 경쟁하듯이 매달렸습니다. 모든 것을 실천해보았던 루터는 그런 방식으로는 그리스도인이 전혀 영혼의 평화와 만족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실을 루터 이전에 바울이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사람은 율법으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말입니다.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발언도 있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롬 4:15) 거칠게 말하면 모범생처럼 사는 것만으로는 삶이 충만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더 일상적인 말로, 럭셔리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행복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의 후예인 오늘의 대한민국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가르침을 얼마나 진지하면서도 실제의 차원에서 경험하고 있을지요.
바디매오는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 게 전혀 없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의지할만한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nothing! 오직 현재의 운명을 벗어나서 ‘보는 삶’을 향한 열망만 있었습니다. sola fide! 한강은 이런 열망을『채식주의자』에서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고 싶어 한 여자로 형상화했습니다. 여기 파도에 휩쓸려 죽음 직전에 놓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갑자기 구명줄이 손에 잡혔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구명줄에 모든 힘을 쏟습니다. 친구들과 해외여행 나갈 꿈도 꾸지 않고, 넓은 아파트로 이사할 계획도 잊었고, 냉장고 안에 쟁여놓은 다이어트 식품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믿음은 이와 비슷한 영적 사건입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삶의 희망을 얻는다는 사실 하나에 집중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역설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신경 쓸 데가 많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비현실이고 관념적이라고 깎아내릴 분은 안 계시겠지요.
바디매오 이야기에는 한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련의 단계가 있습니다. 성문 밖 길가에서 동냥에만 몰두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사실은 동냥입니다. 슈퍼리치들도 자기 혼자의 힘으로 배추 한 포기 만들지 못합니다.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가 번뜩 귀에 들리는 단계에 있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단계에 들어간 사람도 있습니다. 내 운명에 참견하지 마시라, 나 혼자 ‘무소의 뿔처럼’ 멋지게 잘 산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아무도 큰소리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예수의 말을 듣는 단계도 있고,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단계도 있고,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라는 말을 듣는 단계도 있습니다. 단계마다 영적인 깨달음의 비약이 일어나면서 우리의 삶이 더 풍성해집니다. 저는 여러분이 언젠가는 바디매오처럼 ‘임마누엘’이신 그분의 제자가 되는 단계로 들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