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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CS2I1wOxGw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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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가복음 12:38-44 |
영혼이 갈급한 사람
막 12:38-44, 창조절 11주, 2024년 11월 10일
서기관들의 위선
세계 성서일과(lectionary)에 따라서 주어진 오늘의 ‘셋째 말씀’인 막 12:38-44절에는 두 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 이야기인 38-40절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상류 계급이라 할 서기관(율법 학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부러움을 샀습니다. 실제로 성실하고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판사나 대학교수, 또는 대형교회 목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당시의 일반적인 여론과는 다르게 판단하셨습니다. 본문 38-40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을 ‘본받으시오.’라고 말씀하지 않고 ‘조심하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그들은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이나 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둘째, 그들은 자신들의 전문 지식을 이용해서 의지할 데 없는 과부들에게 물질적으로 과중한 짐을 지웠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난한 과부가 소송 문제로 그들을 찾아왔을 때 제대로 대변해주지 않고 변호사비만 높이 올려서 받는 일입니다. 셋째, 챙길 건 다 챙기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이나 시장이나 성전 마당 등에서 두 손을 높이 든 채 경건한 포즈를 취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비판을 서기관들이 직접 들었다면 펄쩍 뛸 겁니다. 첫째, 자신들은 원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이 와서 인사하고, 자신들을 상석에 앉게 한다고 말입니다. 둘째, 과부들의 재산을 불법으로 빼앗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강변할 겁니다. 나름 합법 아닌 일은 세상에 별로 없습니다. 조선을 강제합병한 일본도 자신들의 행위가 합법이었다고 하며, 히틀러도 자신의 행위를 합법이라고 하고, 우리의 지난 군사독재 시절의 지도자들도 모두 합법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불법인 줄 알면서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좀도둑에 불과합니다. 큰 도둑은 대개 합법을 가장합니다. 셋째, 기도 문제도 그렇습니다. 서기관들은 남에게 보이려는 목적이 아니라 영혼의 깊이에서 우러나와 기도한다고, 자신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는다고 자신들을 합리화할 겁니다. 말은 그렇게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위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더 엄한 심판’입니다.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죽은 다음 최후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진다는 뜻일까요? 죽음 이후의 운명에 관해서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위선적이고 잘난 척하고, 합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적당하게 불이익을 취한 사람들이 모두 지옥에 간다면 우리도 모두 지옥에 갈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 자신이 위선적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면서 살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더 엄한 심판’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죽음 이후가 아니라 위선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이 지금 여기서 얼마나 곤궁하고 찌들었는지를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삶이 얼마나 피곤하며, 거기서 얼마나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지를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저는 ‘더 엄한 심판’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서기관 같은 지도자 계층에 속한 사람은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 엄하게’ 성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잠도 덜 자고, 다른 사람보다 더 솔직해야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자신을 낮춰야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출가 수도자들처럼 구도 정진하듯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서 선생님, 교수님, 박사님, 목사님, 판사님, 사장님, 대통령님 등등, 하고 높여주니까 자칫 자신이 실제로 높은 사람인 줄 착각하게 되는 겁니다. 착각이라고 하더라도 서기관처럼 높임을 받으면서 사는 게 더 멋진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비유적으로 여기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논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동네 우두머리가 되려는 아이가 있습니다. 자기 말 한마디에 아이들이 모두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그걸로 우쭐하면서 허세를 부립니다. 어른들이 볼 때 그 아이는 우스꽝스럽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삶으로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골목대장처럼 잠시는 기분이 좋을지 모르나 영혼의 만족에는 이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착각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그는 다른 일반적인 사람보다 더 엄격하게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더 긴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서기관 같은 사람을 ‘조심하라.’라고, 더 정확하게는 ‘더 엄하게’ 자신을 다스릴 각오가 없으면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혹시 본문이 말하는 서기관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아닐까요?
과부의 헌금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인 41-44절에는 과부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서기관과 대비됩니다. 당시 사회에서 과부는 하층민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침 성전의 헌금 궤 옆을 지나다가 이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나 봅니다. 부자들은 자기 체면과 권위에 맞는 액수의 헌금을 드렸지만, 이 과부는 푼돈을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성전에서 재정을 보는 사람은 부자들의 헌금에 주목했겠지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3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저는 이 이야기가 단순히 헌금을 정성껏 드려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즉 삶의 깊이에 관한 문제이고, 영혼의 문제이며, 신앙의 본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서기관은 영혼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과부하에 걸려서 피폐해진 사람이라면 과부는 영혼이 간절하고 갈급하고 투명한 사람입니다. 서기관의 인생은 주변 사람의 평가와 달리 초라했으며, 과부의 인생은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달리 놀라울 정도로 풍성했습니다. 영혼이 갈급할 때만 삶이 풍성해진다는 사실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갈급해야만 말씀이 풍성하게 경험되고, 음악에 갈급한 사람에게만 음악이 풍성하게 경험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속으로 ‘당신이 과부를 너무 치켜세우는 것 같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는 삶에 지쳐 있는 과부를 정신적으로 아주 높고 고상한 사람처럼 미화한다고 말입니다. 물론 과부의 인생살이는 피곤할 겁니다.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우느라고 하루하루가 생고생일지 모릅니다. 남편 없는 여자라고 주변에서 무시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고달픈 인생의 표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무조건 불행한 여자라고 단정하면 곤란합니다. ‘과부와 재판장 비유’(눅 18:1-8)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에게 와서 조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부는 원한이 맺힌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교만한 재판장도 과부의 원한을 무시하지 못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원한을, 즉 영혼의 갈급함을 풀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풀어주시는 인생보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사는 인생보다 더 풍성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강의 「소년이 온다」 1장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호의 실제 인물은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문재학입니다. 재학이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던 전남도청에서 어른들을 돕다가 1980년 5월27일 새벽에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습니다. 최근에 재학이의 어머니를 만난 한겨레21 기자의 보도가 10월28일자 <한겨레21>에 실렸습니다. 기자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재학아, 이제 하늘에서 편히 있거라. 친구들도 만나고 아버지도 만나고 재미있게 지내거라. 이제는 세상 사람들도 다 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과부의 헌금이 특별한 이유는 풍족한 중에서 넣은 부자들과 달리 가난한 중에서 모든 소유, 생활비 전부를 바쳤다는 데에 있습니다. 풍족과 가난이 대비됩니다. 부자는 돈은 풍족한데 영혼이 가난한 사람이고, 가난한 과부는 돈은 가난한데 영혼이 풍족한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풍족한 이들은 삶의 일부로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나 가난한 이 여자는 자기 삶 전체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때문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과부는 부자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절실하고 간절하고 갈급합니다.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물 한 동이를 얻으려고 하루에게 몇 킬로미터를 걷습니다. 우리는 수도꼭지만 틀면 값싸게 물을 얻습니다. 누가 물에 대해서 간절한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우리의 시야를 넓혀 보십시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주에서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은 지구 외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구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지구의 생태계를 보전하려고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재산이 많을수록 삶의 간절함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데도 현대인은 부자가 되려는 욕망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여론조사 예측과 달리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한 건의 유죄 평결을 포함해 네 건의 형사 재판이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도 그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는 못할 겁니다. 미국 대통령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을 겁니다. 다만 미국 우선주의라는 구호(America First, America Only)에 매혹되어서 미국이 더 부자 나라가 된다면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세계 정의와 평화, 민주화와 소수인종과 성 소수자와 난민에 대한 배려는 부차적입니다. 이번 미국 대선 이후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는 더욱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흘러가겠지요.
존재 전체를 넣은 과부
가난뱅이 과부가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는 행위는 다른 한편으로 무책임해 보이긴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더라도 일단 일용할 양식에 필요한 생활비는 남겨둬야 하니까요.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관점은 이 여자가 자기의 미래를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보통 사람에게는 불안한 일입니다. 상식에 따르면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더라도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일단 확보되어야 하니까요. 그런데요. 따지고 보면 평생 편안하게 먹고살 재물이 있는 사람들도 삶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불안을 극복하려고 돈에 더 의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더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그래봤자 우리의 심연에 놓인 현재와 미래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과부는 가난하기에 다른 사람이 의지하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 등을 의지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복입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만 희망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만 영혼의 풍요로움을 선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실제로 동의가 됩니까?
이런 설명이 실제 삶과는 거리가 있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당장 재산을 모두 헌금으로 드리든지,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기부하고 가난한 과부처럼 살아야만 영혼이 풍요로울 수 있다는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또는 이 가난한 과부의 영혼이 갈급함을 통해서 풍요로워졌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에 제가 일일이 대답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이 여러분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규정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는 여기서 가난한 과부의 영혼이 어떻게 풍요로울 수 있는지를 ‘솔로몬의 영광보다 야생화의 영광이 크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설명하겠습니다. 저의 다른 설교에서도 비슷한 설명을 들으셨을 겁니다.
일단 가난하지만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이 언제인지를 찾아보십시오. 숨쉬기, 보기, 듣기, 먹기, 책 읽기, 귀 기울이기, 사랑하기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바지 주머니 터진 부분을 바느질로 꿰맸습니다. 아침마다 은행알 서른 개를 열 개씩 각각 2백cc 우유 종이팩에 넣고 전자레인지에 각각 40초간 돌린 다음 껍질을 까서 접시에 담습니다. 함께 사는 가족 세 명이 열 개씩 먹습니다. 이런 작업에는 돈이 많이 들지 않습니다. 이런 소소한 일을 통해서 주어지는 충만한 기쁨은 대통령이 되거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될 때의 기쁨보다 더하면 더했지 전혀 못 하지 않습니다. 목사들은 섬기는 교회가 작아도 설교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값없이 선물로 받는 기쁨입니다. 늙으면 삶이 무료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다면 안심하십시오. 재미있게 살려고 분주한 젊은이들이 오히려 무료하게 삽니다.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들은 가난해도, 늙어도, 몸이 불편해도 얼마든지 풍요롭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문제는 우리에게 영혼의 간절함과 갈급함이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이거나,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의 운명을 끔찍하게 두려워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을 조심하라고, 그러니까 멀리하라고 말씀하셨고, 과부를 모든 사람보다 많이 헌금한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가까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은 다른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체면 구기지 않을 정도로 헌금하는 교양 수준에서 살아가기에 간절함이 없었고, 과부는 누추하게 살았으나 자신의 생활비, 즉 자기의 미래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서기관은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였으나 실제로는 외로운 사람이었고, 과부는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지는 않았으나 실제로는 지금 예수께 인정받았듯이 외롭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으신가요? 이런 게 너무 상투적인 질문인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실존에 대한 갈급함의 궁극적인 깊이로 들어가는 게 바로 하나님 경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두십시오. 끊임없이 재판장을 찾아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하던 과부,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과부처럼 말입니다. 언젠가 완전한 무소유 상태로 떨어지는 죽음의 순간이 벼락처럼 닥치면 누구나 모두가 어쩔 수 없이 간절하고 갈급한 사람이 되고 말겠지만, 그 이전 지금 여기서(now and here) 여러분 모두 두려워하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갈급한 영혼’으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갈급한 영혼 안에서 우러나올만한 '기도문' 말씀하시나요?
어거스틴의 기도문,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기도문,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기도문,
외르크 칭크의 기도문, 정용섭의 '매일 기도하라' 등등은 모두 갈급한 영혼으로 쓴 거랍니다.
사실은 설교 자체가 기도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갈급한 영혼을 경험한다면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할지 느낄 거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느낄뿐만 아니라 실천합니다.
그게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나타나지는 않고, 또 완전하지도 않아요.
늘 '우리를 불쌍해 여겨주시라.'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매순간을, 만물을, 모든 사람을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여길 수 있으면 좋겠지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니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도달하지 못한 경지이기도 하지만,
성악 교수에게 학생들이 레슨을 받으면서 음악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듯이
우리도 신앙 선배들의 글을 배우면 조금씩이라도 신앙의 진보가 일어날 겁니다.
너무 거리가 멀게 느껴서 포기하면 제자리 걸음만 하겠지요.
부스러기 님도 다비아 사이트를 꾸준히 방문하신 분이니까
처음에 비해서 지금 영적 내공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걸 느끼시겠지요.
세상을 뒤덥고 있는 자본주의에 뼛속까지 세뇌되어 사는 우리일진데, 모두가 끔찍히 두려워하는 백척간두에 떨어져야만 갈급한 영혼이 가능하다는 성경의 주장은 그저 넘사벽의 건조한 성경교리로만 다가올수 밖에는 없는걸까요?
우리가 가진 신앙을 동원해서라도 그런 자리에 떨어지지 않기를 소원함이 늘 기도제목의 1순위이고,
신앙의 경계선에서 들락날락하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처세술에 숙달되어 가는 우리에게, 성경의 엄숙한 요구와 우리의 절대 무능 사이의 메워질수 없는 간극앞에서 우리의 탄식과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맞아! 그렇게 살진 못하더라도 방향성만은 놓치지 말고 살아가야지"
그저 자기 합리화의 넋두리밖에는 토해낼게 없는걸까요?
'갈급한 영혼이 되기를 소원합니다..'의 고백은
곧 '백척간두의 운명에 떨어져도 좋슿니다...'
의 소원과 다름없을테니
이 주제의 설교 앞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것인가...
선뜻 기도문이 안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