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assic Style
- Zine Style
- Gallery Style
- Studio Style
- Blog Style
설교보기 : | https://youtu.be/R_d4tYls2yY |
---|---|
성경본문 : | 히브리서 10:11-14, 19-25 |
성소에 들어갈 담력
히 10:11-14, 19-25, 창조절 12주(추수감사절), 2024년 11월 17일
성소
히 10:19절에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이 나옵니다. 들어보십시오. 본문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ἁγίων)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소는 거룩한 곳(holy place)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핫 플레이스(hot place)’라는 말이 쓰이는 것처럼 성소는 종교적인 핫 플레이스인 셈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지성소는 NIV 영어 성경이 영역한 Most Holy Place를 가리킵니다. 성소는, 또는 지성소는 어디를 가리킬까요?
고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에는 지성소가 따로 구분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휘장으로 막아놓았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만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지성소에는 모세의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성전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지금 히브리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그 지성소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성전에서 행하는 제사 행위는 더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히 10:11절이 짚었습니다. 1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과 이를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은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근거로 본다면 성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구원 사건, 또는 구원의 세계입니다. 12절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표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앉아계신 하나님의 우편이야말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성소인 셈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원한 생명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우편,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이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소, 또는 지성소로 번역된 헬라어 ‘하기오스’를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하기오스’은 본래 세상에서 구분되었다, 또는 성별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장소나 사건이나 일들이 바로 하기오스(holy)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이사야는 성전에서 스랍 천사들의 다음과 같은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실증적 인과율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하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도 없고, 당연히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자본 논리에만 찌든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복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깁니다. 조폭처럼 힘을 통한 지배에 길든 사람은 이타적인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짓말로 동네 사람을 속이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소년은 정직한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소가 무슨 뜻인지를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태양에 속해 있고 태양은 은하계에 속해 있습니다. 은하계에는 태양 같은 별들이 최소 1천억 개가 있으며 이런 은하계가 우주에는 또 1천억 개 이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주에는 1천억 곱하기 1천억 개의 태양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최소한의 숫자입니다. 그 안에 있는 지구라는 행성은 바닷가 모래사장의 모래 한 알보다 작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와 그 일부인 지구, 그리고 지구 안에서 사는 우리 개인을 실제로 느낀다면 그 차이와 거리가 너무 아득해서 비현실적으로 보일 겁니다. 우주의 차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으로 경험하는 작은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씨앗이 3kg 배추로 자란다는 사실도 사실은 비현실적입니다. 세상의 과학적 설명으로도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완전한 해명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절대적인 장소를 가리켜서 holy place, 또는 더 강조해서 most holy place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더 친숙한 개념으로 바꾸면 부활의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하는 그 하늘나라입니다.
담력
19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하늘나라가 입장권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담력 운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담력으로 번역된 헬라어 παρρησία는 확신(confidence), 솔직함(opennes), 배짱(boldness) 등등, 여러 뜻이 있습니다. 담력이 있어야 할 이유는 성소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세상의 질서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칼 바르트 용어로 성소는 절대타자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먹을 것도 많고 놀 거리도 많고 좋은 사람도 많으며, 개중에는 황금 면류관을 받을 거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생각에만 묶이면 하늘나라에 가서 오히려 크게 실망할 겁니다. 잘 먹고 잘사는 듯한 표현이 성경에 나오나 그것은 사실적인 게 아니라 메타포입니다.
성소를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라고 생각해보십시오. 10년 후의 미래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미래 말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모두 지구의 원소로 해체될 것입니다. 여기서 법관으로 살았든지 휴지 줍는 사람으로 살았든지 이런 궁극적인 미래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개인의 죽음이라는 실존적인 미래만이 아니라 더 먼 우주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5천 년이 흐를 것이며, 1만 년이 흐를 것이며, 1백만 년이 쏜살같이 흐를 겁니다. 이런 긴 시간 앞에서 우리의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 누구도 그 미래와 운명을 정확하게 계산해낼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전혀 예상할 수 없어서 불안합니다. 영천 원당에서 평생 살았던 노인이 혼자서 아프리카 오지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겪는 불안보다 수천 배 강한 불안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담력이 필요하다고 말한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이라는 성경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겁니다. 아무리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그런 궁극적인 미래는 지금 우리의 삶과 직접 상관이 없으니까 그냥 현재 여기서 재미있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으면 그만이라고 말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학자, 예술가, 애국자, 정치가가 되어서 이름을 남기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공적인 삶의 성취를 우리의 인생 목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의미 있게 사는 일도 중요하나, 아니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라도 궁극적인 미래를 향한 영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경과 2천 년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궁극적인 미래인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는 사실을 붙들고 삽니다.
예수의 피
19절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력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피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교 당국자들에 의해서 신성모독자로 몰렸고, 로마를 대표하는 빌라도 법정에서는 사회 소요죄로 기소당하여 결국에는 십자가 처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신성을 모독하신 일이 없습니다. 유대교의 오류를 바로잡아서 오히려 신성을 드러내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에도 병자와 장애인을 치료하셨고, 성전에서 상거래 하는 사람들을 몰아내셨습니다. 이게 유대교 고위 당직자들에게 불손한 행위로 비쳐서 마녀사냥 하듯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라고 몰았습니다. 그들이 종교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로마 체제가 흔들리는 상황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집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나사렛 예수의 메시지로 인해서 로마 체제(status quo)가 흔들릴지 모른다고 판단했습니다. 유대교 교권과 로마 제국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예수는 무기력하게 죽었습니다. 그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성소에 들어갈 담력의 근거라니, 이게 말이 되나요?
우리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인생을 삽니다. 온갖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도 있고, 편안하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불안하게 하는 일도 있고, 안심시키는 일도 있습니다. 평생 육체노동자로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고, 쾌적인 사무실에서 아랫사람을 많이 둔 CEO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부자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죽는 사람도 있고, 천수를 다 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유복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살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과정으로 살았든지 우리의 인생은 죽음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처럼 사치스러운 인생을 살았어도, 실제로 그렇게 살기도 힘들거니와 ‘모든 게 헛되도다.’라는 생각으로 죽는 사람이 많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는 생각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그게 곧 하늘나라에 간다는 뜻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문장으로 말하면 ‘성소에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너무 먼 이야기일까요?
본문은 20절 이하에서 이를 풀어서 설명합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성소를 막아놓은 휘장이 걷혀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났습니다. 22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예수의 피로 죄책감에서 벗어났다.’라고 말합니다.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다.’라는 말은 세례를 가리키겠지요. 죄책감을 <개역개정> 성경은 ‘악한 양심’으로 번역했습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을 따라가지 못하면 삶이 무너지는 거 아닌가, 율법적으로 완벽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바로 죄책감이고 악한 양심(evil conscience)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힘입니다. 지난 목요일인 11월14일에 있었던 수능시험에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올인’합니다. 여행도 다니고 연극과 음악회도 관람하고 미술관도 찾아야 할 나이에 감옥생활을 하듯이 점수에 매달립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낙오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이 바로 죄책감이며, 악한 양심입니다. 즉 예수의 피로 죄책감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세상의 방식으로 인정받아야만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이 현실을 몰라서 철없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공부를 잘해야만 연봉이 높은 직장에 들어가고, 높은 연봉을 받아야만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가난한 삶이 얼마나 처량한지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문재 시인의 <혼자의 넓이>에 나오는 ‘유모차’라는 시가 있습니다.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모차에/ 유모가 없다/ 아기도 없다// 기역 자로 굽은/ 할머니가 밀고 가는/ 낡은 유모차/ 겨우 굴러가는 유모차// 옹알옹알 아기 대신/ 젖 잘 나오는 유모 대신/ 할머니가 온종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건/ 종이박스 폐휴지 소주병 맥주병/ 박카스병 활명수병 생수병// 반지하 독거노인에겐/ 유모차가 전재산/ 손자 손녀 없는 유모차가/ 곁에 남은 유일한 피붙이// 유모차/ 손 놓으면/ 거기가” 최하층의 인생으로 전락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현대인은 모두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셈입니다. 개인의 차이가 있으나 전반적으로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 인생의 종착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기에 대한 염려에 매달려서 사니까요.
함께하심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생명을 영혼의 깊이에서 살아내셨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셨던 예수께서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에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은 시작합니다. 불행한 운명은 착하고 정의롭고 지혜로운 사람에게서도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몸이 약하게 태어날 수 있고, 가정 형편이 나쁠 수 있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속임도 당하고, 고독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마저 그런 운명을 피하지 못했으니 누군들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다음입니다. 우리의 운명이 아무리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 사실은 곧 창조주이시며 완성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죽음과 같은 그 어떤 불행한 운명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험이 분명했기에 제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2천 년 전에 살았으나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고, 마지막 때 다시 오신다는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인가, 전도하는 것인가,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인가, 서로 사랑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가능합니다. 부분적으로 맞는 생각입니다만 그렇게 살아도 예수님을 생생하게 느끼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저도 딱 부러진 대답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각자의 신앙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생생한 경험이 늘 분명한 건 아니었습니다. 교회 모임에 참여할 동력이 점점 떨어졌습니다. 히브리서를 집필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이들을 격려하는 말씀이 22-25절에 나옵니다. 신앙의 무기력증을 벗어나라고 말입니다. 25절만 읽어보겠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여기서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이라는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 날은 ‘성소에 들어갈 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날에 관한 생각이 절실하지 않으면 신앙의 무기력증에서 벌어날 수가 없습니다. 큰 수술을 앞둔 사람만이 다른 일을 다 제쳐놓고 수술 준비에 몰두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앞에서 성소, 또는 지성소는 이 세상의 질서와 구별되는 거룩한 곳(하기오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이기도 하고, 영원한 생명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으로 성소는 불확실성이 가득한 곳이며, 비밀 충만한 세계이자 은폐된 사건이며, 완전히 종말론적으로 열린 미래이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 성소는 죽음 이후만이 아니라 이미 여기 역사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에서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리키는 그 아득한 구원의 깊이를 어렴풋이라도 느낀다면 이 세상의 폭력적인 논리에서 점점 더 자유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담력’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이 자유야말로 추수감사절의 핵심 가치가 아닐까요?
유모차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