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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eRvTyaAB_ZE 
성경본문 : 시편 25:1-10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25:1-10, 대림절 1, 2024121

 

 

25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새번역> 성경은 주님,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직역하면 여호와 당신께 내 영혼을 들어 올리나이다.’입니다. 이 문장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영혼입니다. 이 문장만이 아니라 성경 곳곳에는 영혼이라는 단어가 흔하게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마 10: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몸은 손에 잡히나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이나 마음 정도로 볼 수 있기는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을 따르면 하나님과의 가장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인간의 구성 요소가 바로 영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지요. 어떤 사람은 남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좌우되기에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자기를 과시하거나 남의 시선이 두려워서 자기를 숨깁니다. 이와 달리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가난한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주변에 친구들이 없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예민한 사람과 비교해볼 때 이 사람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삽니다. 물론 이 사람도 몸으로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배고프면 힘들고 병들면 고통스럽습니다. 자식이 어려움을 겪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조건에 절대적으로 지배받지는 않습니다. 이런 삶이 주어지는 이유는 그에게 일상 너머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가리켜서 영혼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영혼이 풍요로운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지기에 시 25편을 기록한 사람은 자기 영혼을 주 여호와께 높이 들어 올린다고 노래했습니다. 이 시인의 찬양은 진정성이 있을까요? 자기 합리화나 정신승리에 불과할까요?

 

기다림

저는 이 사람의 고백이자 찬양이 단순히 종교적 독백이 아니라 구체적이면서 궁극적인 실존에서 터져 나오는 호소이고, 절규이며, 선포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인의 진심을 알 수 있는 내용이 5절에 나옵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그는 5절에서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를 이끌어달라는 간청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을 기다리겠다는 고백이자 결단입니다.

1) 먼저 이 사람은 왜 자기를 지도하고 교훈해달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 사람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서 세상살이의 이치를 알고 싶다는 건 아닙니다. 돈 버는 방법을 알고 싶은 게 아닙니다. 착한 사람이 되는 비결을 배우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런 건 세상 스승을 찾아가면 됩니다. 그는 삶의 궁극적인 깊이를 알고 싶은 겁니다. 삶의 궁극적인 깊이가 곧 영혼의 깊이입니다. 그런 영혼의 궁극적인 깊이를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전혀 관심 없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관심 없이 사는 게 속은 편할 겁니다. 그냥 세상의 원리대로만 열심히 살면 충분하니까요.

삶의 궁극적인 깊이나 근원이라고 해서 사실은 엄청난 게 아닙니다. 철학이나 물리학을 전문적으로 알거나 신학 전문가가 되어야만 그런 세계를 경험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일상을 찬찬히 들여다볼 줄 알면 누구에게나 그 세계가 눈에 들어옵니다. 제가 사는 원당에 지난 화요일(1126) 새벽부터 오전까지 비가 내렸습니다. 저는 집 마당 뒤꼍에서 두 장면을 사진에 담아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 원당일기메뉴에 올렸습니다. 한 장면은 처마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물줄기입니다. 지름이 1될까 말까 한 가는 물줄기가 2이상 끊어지지 않고 흘러내렸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 분자가 부드러운 끈 형태를 띠고 낙하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려니 이보다 더 황홀한 장면이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한 장면은 가운데가 오목한 잎새 위에 강력한 표면 장력을 일으키면서 앉아있는 크고 작은 물방울들입니다. 옆에 가로막는 게 없으면 확 퍼지고 말아야 할 물방울이 무슨 주술에 걸린 듯이, 마치 무중력 상태에 있듯이, 또는 최정상 서커스 대원이 공중 부양을 하듯이 타원 형태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두 장면을 보면서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물리 현상의 오묘함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왜 지구에만 물이 있는지, 우리 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저 물은 알프스 빙하가 녹은 물은 아닌지, 표면 장력을 유지하는 저 물방울의 힘이 지구를 떠받치는 건 아닌지, 등등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이 모든 질문에 결정이고 완전한 대답을 다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시편 기자는 도대체 무엇이 알고 싶은 걸까요? 5절만이 아니라 이미 4절에서도 주의 도를 보여주시고 주의 길을 가르쳐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의 갈망이 느껴집니다. 그가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 갈망은 앞에서 예로 든 자연현상의 깊이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에 무한한 심연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는 게 최선의 삶인지 실제로 아십니까? 저도 모르고 그 어떤 위대한 스승들도 완전히는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직업으로 사는 게 최선인지를 모릅니다. 화가가 되기도 하고, 소설가나 교사가 되고, 일반 노동자도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직업이 자기에게 최선인지를 우리는 모릅니다. 직업만이 아니라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누구를 친구로 삼아야 하는지, 어떤 교회에 나가야 하는지도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닙니다. 좀 더 사회과학적인 문제로는 우리나라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는 게 최선인지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미국 국민이 다음 대통령으로 선택한 트럼프가 실제로 미국과 전 세계에 최선의 사람일까요? 재앙의 결과가 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정확하게 아는 게 거의 없는데도 아는 척하고, 모르는 그 사태를 답답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 도를 닦는 사람들은 평생 화두를 붙들었습니다. ‘이게 뭐꼬?’라는 질문 말입니다. 화두를 잡는다는 말은 설사가 난 사람이 화장실을 찾을 때의 다급함을 유지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2) 시편 기자는 그런 마음을 담아서 내가 주를 종일 기다리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출가 수도승이 아니라 세속 사회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종일주를 기다리면서 살기가 어렵습니다. 불가능할 겁니다. (생명, 사랑, 자비, 긍휼)를 생각하기보다는 엉뚱한 생각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종일 거짓말과 변명만 생각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당한 대로 갚아줄 방법만 생각합니다. 주식에 투자한 사람은 매일 주식값을 살필 겁니다. 시인들은 종일 시를 생각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나 깨나 연인을 생각하겠지요. 특히 자본주의가 종교처럼 작동하는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돈에 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할 겁니다. 요즘 인터넷 시대에 사는 우리는 정보의 홍수로 인해서 삶의 중심을 잡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뉴스는 아무개 배우나 가수가 몇 년 전에 산 빌딩 가격이 서너 배 올랐다는 것들입니다. 건물주가 된 그 사람을 본받으라는 건지, 이런 식으로 불로소득을 올리면 안 된다고 경종을 울리는 건지, 조회 수를 늘리려고 무조건 내지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일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요?

오늘 본문의 시인은 마치 만삭된 여인이 출산 순간만을 기다리듯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시편에는 이런 표현이 수없이 나옵니다. 42:1-2절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한 마리를 양을 찾아 나선 목자 이야기, 잃은 드라크마 동전을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찾은 여자 이야기, 유산을 당겨 받아 멀리 떠났다가 탕진한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목자와 여자와 아버지는 잃었던 대상에 몰두했습니다. 다시 찾을 때까지 찾고 기다렸습니다. 찾았을 때 기쁨이 충만해서 친구와 이웃과 가족을 불러서 축제를 열었습니다. 하늘나라가 이와 같은 경험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하나님

이 시인이 종일주를 기다리는 이유는 주님께서 구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관계되는 단어가 6절 이하에서 반복됩니다. 주의 긍휼하심, 인자하심, 주의 선하심, 정직, ‘인자와 진리’(10) 등등입니다. 이런 표현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의 인생살이가 무조건 잘 풀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인생살이도 얼마든지 잘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인생살이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자랑하라고 두십시오. 그런 자랑거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이 궁핍해질 겁니다. 그 어떤 인생살이도 그것 자체로는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인생살이가 어떻게 전개되든지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참된 위로자이시고 긍휼하신 분이시고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교를 할 때마다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인생의 절망적인 나락으로 떨어진 경험이 없어서 어떤 이들에게는 태평스럽게 들리는 말을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제가 어떻게 모든 인생을 다 경험했겠습니까? 지금 설교를 듣는 분들의 모든 인생 경험을 제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제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어도, 사실은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는데, 성경과 그리스도교 신학과 인문학 공부와 그동안 겪었던 짧은 인생 경험에 근거해서 하나님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목사로서 청중에게 설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락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제 인생의 미래를 준비하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내다보지 않으면서, 희망하지 못하면서, 기다리지 않으면서는 아무도 궁극적인 나락이라 할 죽음을 제대로 대면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인생살이가 복잡하니까 그런 문제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죽을 때 되면 하게 죽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사는 일도 그냥 대충 하게 살면 됩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삶이 즐거워 봐야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으로 저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는 깨닫게 되었고, 그런 깨달음을 통해서 제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저 자신보다 저를 더 깊이 아시는 성령께서 판단하시겠지만요.

 

하나님 경험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여기 두 사람의 취업 준비생이 있다고 합시다. 한 청년은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업했습니다. 모두가 축하합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 청년은 대기업이 요구하는 모든 조직 메커니즘에 충실했습니다. 상당한 위치까지 올라갔다가 은퇴했습니다. 당연히 재산도 모았고, 자식들 키우기에도 나름 성공했습니다. 다른 한 청년은 지방에 있는 중소기업체에서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았습니다. 살림살이는 쪼들렸습니다. 그렇게 은퇴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본다면 전자에 속한 사람의 인생이 성공적이었으나 영혼의 차원에서 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낮은 계층에 속한 인생살이였다고 하더라도 매 순간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놀라워하고,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물리 현상을 낯설어하며, 주변 사람들을 사랑스럽게, 또는 귀엽게 볼 줄 안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이니까요.

이런 삶의 절정이 곧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세상이 제시하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허풍을 떨거나 주눅 들지 않습니다. 물론 종종 인생살이에서 실망하기도 하고 지루해하기도 하며 약간 우쭐하기도 하겠으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자기 삶에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시는지를 전심전력으로 종일살피고 기다립니다. 겨울비 같은 위로가 언제 찾아오는지, 예기치 못한 기쁨이 언제 스며드는지,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깨달음의 순간이 언제인지를 예민하게 살피면서 삽니다. 그런 준비가 된 사람은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났듯이 인생살이 과정 곳곳에서 천사를 만나지 않을까요? 그 천사가 바로 하나님의 위로이며 긍휼함이 아닐까요?

지금 설교를 듣는 여러분도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라고 고백한 이 시편 기자처럼 살고 싶겠지만, 그렇게 살기가 어려울 겁니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던 에덴동산을 떠난 이후 인간은 모든 근심과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3:17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이런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기에다가 무한경쟁으로 인한 갈등과 탐욕과 허무와 자기 연민이 우리의 인생 전체를 지배합니다. 여기서 단숨에 벗어날 뾰족한 방법은 없습니다. 설령 인생이 잘 풀려서 공주와 왕자처럼 살더라도 또 다른 문제로 인해서 평생 수고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내 구원의 하나님을 종일 기다리면서 자비와 사랑과 위로와 긍휼함을 삶의 내용으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설교를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요 3:17절 말씀을 전해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종교 창시자가 아니고 도덕 선생도 아니며 심리 치료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하나님의 사랑만을,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8:1)라는 바울의 고백에 이른다면 십자가 죽음 같은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도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를 경험하실 겁니다. 우리 인생살이에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큰 설렘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함께 2024년 대림절에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 안으로 한걸음이라도 깊이 들어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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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소유와존재

December 04, 2024
*.126.156.157

"그는 종교 창시자가 아니고 도덕 선생도 아니며 심리 치료사도 아니었습니다그는 하나님만을하나님의 사랑만을하나님의 통치와 구원만을 전했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표현이 하나님나라와 그의 통치가 구원과 종교, 도덕, 심리치료와 대척점에 있는 듯한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그게 아니란걸 알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기존에 가져왔던 생각들이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해서일까요? 아니면 뭔가 확실한 어떤 가르침에 내 의식을 고정시켜 안정감을 누리고 싶어서일까요? 

수없이 깨닫고 가르침을 받고 하는 과정들을 통해서 많은 글귀들을 써내려 가다가도 결국엔 다 지워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 남는 저의 메모장을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놓고도 실제로는 세상지혜와 깨달음을 써내려간 탓일까요? 

두서없이 글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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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4, 2024
*.137.91.200

예, 소유존재 님의 진정성이 전달됩니다. 

수행의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 신앙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대신 우리의 종교적 열망만 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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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21511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21599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1955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17270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4] 2023-11-19 17841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18411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 2023-11-07 17788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17735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17807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17826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17377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17554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17712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17837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17325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17732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17306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17690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18490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18060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18312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17674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17631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17145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6] 2023-06-25 17579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17281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17508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17539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17698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18118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17785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17937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17406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17798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17814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18467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7889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7911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975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19390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18448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17783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18416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18373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18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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