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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골로새서 3:12-17 |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
골 3:12-17, 성탄 후 1주, 2024년 12월 29일
옷과 몸의 관계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라는 말이 은혜롭게 들리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걸 경험하고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 채, 그리고 생각해보지 않았으면서도 입버릇처럼 내뱉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말이 실제로 무슨 뜻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시나요?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있나요? 먼저 골 3:12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
본문은 선택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성품 다섯 개를 나열했습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 그것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를 이해하기 좋게 동정심, 친절함, 겸손함, 온유함, 오래 참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갈 5:22-23절에서 성령의 열매를 아홉 가지나 열거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랜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서로 중복되기도 합니다. 당시 로마 스승들도 이런 삶의 가치 높은 태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요즘도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선택받았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까요?
골로새서는 이런 다섯 가지 성품, 또는 삶의 태도를 ‘옷 입어라.’라고 표현했습니다. 동정심부터 시작해서 오래 참는 것까지 다섯 항목은 우리가 일상에서 걸쳐야 할 옷이라는 겁니다. 그런 옷을 입으면 그 옷에 걸맞게 살고 싶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잠옷 바람으로 길거리에 나오거나 디너쇼에나 어울릴만한 화려한 옷을 입고 장례식에 왔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가능한 한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옷을 걸치면 좋고, 가능한 한 품위가 넘치는 옷을 입으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옷은 옷일 뿐이지 몸 자체는 아닙니다. 옷을 아무리 세련되게 입는다고 해도 그 사람의 인격 자체가 새로워지는 건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옷에 신경을 너무 많이 쓰면 삶의 중심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몸이지 옷이 아닙니다.
본문이 나열한 다섯 가지 특성 중에서 겸손을 조금 더 살펴봅시다. 요즘처럼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세상에서는 겸손은 인정받기 힘듭니다. 뉴스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치계에서도 겸손은 미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신적으로 높은 단계에 올라간 스승들은 모두 겸손했습니다. 제자들에게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겸손한 사람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겸손한 시늉을 해도 겸손하지 못하다는 사실 역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궁극적으로 겸손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최선은 겸손한 척하는 위선일지 모릅니다. 그게 교만보다는 나아 보이니까요. 특히 이런 삶의 태도에 관한 말씀을 늘 듣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위선에 떨어지기가 쉽습니다. 겸손하지 못한데도 일단은 겸손한 듯이 살아야 하고, 동정심이 없는데도 동정심이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하니까요.
골로새서가 열거한 다섯 가지 교양과 품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중요하지 않다면 골로새서가 그걸 언급하지 않았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어울려서 함께 살아야 할 이웃과의 관계가 이런 교양과 품성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13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사람이 세상살이하면서 불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물론이고, 가족 사이에서도 그렇고, 교우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불만을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불만을 속으로 삭이다가는 속병이 생길지 모릅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불만을 드러내라고 가르칩니다.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토해야만 병이 생기지 않기도 하고 서로의 관계도 좋아진다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래야만 할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그게 해결 방법은 아닙니다. 사람의 특성과 세계관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남편은 지구의 기후 변화 문제를 생각해서 겨울철에 난방을 최소한으로 하는데 아내는 아무 생각 없이 방 안 온도를 올립니다. 서로 불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다퉈야 할까요? 정치 사회적인 차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보수적일 수 있고 진보적일 수도 있습니다. 남북문제에 대해서 보수적으로 현실 유지에 중점을 둘 수 있고, 진보적으로 미래 지향적인 변혁에 중점을 둘 수 있습니다. 저는 신앙의 본질에 관해서는 보수주의이자 정통주의자이나 교회 형태에 관해서는 진보주의자이자 개혁주의자입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상대를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기가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앞에서 다섯까지 교양과 품성을 열거했겠지요.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품성이 밑받침되어야만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불만스러운 대상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으니까요.
용서의 가능성
다시 묻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고상한 품성이 갖춰지면 생각이 다른 상대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까지 갈 필요 없이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용납하고 용서합니까? 못합니다.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말로는 만족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를 닦달하기에 바쁩니다. 더 노력해서 더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그칩니다. 우리나라 젊은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 크다고 합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이의 한계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야 합니다. 그런 현상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풍요롭게 사는 현대인들은 옛날의 왕보다 더 많은 걸 누리면서도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기에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현대 사회를 ‘피로 사회’라고 진단했습니다. 행복을 좇아 동분서주 열심히 사는데, 현대인의 영혼이 ‘번아웃’되는 중이라고 말입니다. 번아웃 증후군을 직면하지 못하기도 하고 그런 사태 자체를 외면하려고 마약 중독자처럼 자극적인 것에 더 매달립니다.
아무리 학력이 높아지고 교양을 쌓고 품성을 갈고 닦아도, 그리고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돈과 명예를 얻어도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할 줄 아는 능력이 없는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대인은 왜 이렇게 자기의 삶에 만족할 줄 모르고, 화가 난 상태로 살아갈까요? 불만이 왜 그렇게 많을까요?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듯이’ 비상계엄을 내질러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일까요?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이런 문제를 저는 사회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겠습니다. 심리학으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경배와 찬양’ 방식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가볍게 위로해주는 방식을 따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과 신학이 무엇을 말하는지가 저에게는 중요합니다. 거기서 인간의 근본적인 치료가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라고 짚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우리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을 알고 경험하는 게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입니다. 거기서만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 남편, 사장, 국회의원, 교사, 노벨문학상 수상자, 연봉 1억 원, 한강 ‘뷰’가 있는 고급 아파트가 우리의 실체는 아닙니다. 그것은 연극 무대에서의 역할과 같습니다. 그 연극배우는 무대에서 맡은 역할만이 아니라 밥도 해 먹고 슈퍼마켓에도 가고 운동하는 실제의 삶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실제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그 관계를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한 가지나 몇 가지 방법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능력과 비슷해서 그 능력 안에 들어가야만 인식되기에 그분의 선택도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져야만 알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수영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우선 사람이 물에 뜬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에 들어가면 누구나 가라앉는다는 게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몸에 힘을 빼고 물에 엎드리거나 누우면 저절로 몸이 뜹니다. 그런 경험이 완전히 자기 몸에 체화되면 그때부터 수영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물에 가라앉을 때 물에 빠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힘을 빼고 물에 자기 몸을 맡기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몸이 물에 뜬다는 사실은 말이나 글로 경험할 수 없고 실제로 물에 들어가서 그런 순간을 느껴야만 경험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선택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느껴야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람도 느껴야만 경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이 왜 없는 게 아니라 있는지를, 더욱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있는지를 느껴야만 세상을 경험하는 게 아닙니까. 세상의 이치도 이럴진대 하나님 경험은 오죽 신비롭고 특별하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오해하거나 착각하며 겉돕니다. 간혹 자기가 만든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기도 합니다.
거룩함과 사랑받음
오늘 본문은 ‘선택받은 사람’을 ‘거룩하고 사랑받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거룩하다는 그리스어 ‘하기오스’는 구별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로서 이방인과 구별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먹을거리도 구별해서 먹고, 결혼 대상자도 구별해서 찾고, 안식일에는 노동하지 않았습니다. 구별되었다는 말이 단지 겉으로 나타나는 형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근본에서는 세상의 논리를 따라가지 않아도 생명 충만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뜻입니다. 이런 능력이야말로 참된 삶의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화려한 걸 누려야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그걸 전혀 누리지 못해도 얼마든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는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힘으로 뭔가를 성취하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보다 더 잘나고 싶어 합니다. 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는 세상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높은 자리에 남보다 먼저 올라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세속적인 조건을 손에 넣으려고 합니다. 그런 기도를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결혼 상대의 구체적인 조건을 놓고 기도하라거나 원하는 집의 구체적인 조건을 놓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그건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라 자본주의 물신숭배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의 작동방식에서 구별되어 그들의 방식으로 경쟁하지 않으면서 삶을 충만하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비유적으로 여기 동네 아이들이 놀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놀이에서 이기는 데에만 마음을 씁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이기려고 합니다. 다른 친구들을 곤경에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어떤 아이는 함께하는 놀이 자체에 마음을 둡니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거나 덜 중요합니다. 함께 놀이에 심취하는 거 자체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운명과 약속을 믿는다면 후자 어린이처럼 세상을 살아갈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살이에서 무엇이 가장 실제로 중요한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말을 너무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라고, 지금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 쫓기고 힘들다고, 그런 마당에 어떻게 세상의 논리와 완전히 다른 거룩한 차원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지병을 안고 사는 사람, 자식들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 친구에게 배신당한 사람, 어렵게 시작한 카페에 손님이 없어서 문 닫아야 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 어려움을 간단하게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각자가 감당하고 풀어가야 합니다. 사회적인 안전망을 만들어가도록 정치인들과 국민이 서로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 이전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사실을 붙들고 있기에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좌초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노골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이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걱정할까요?
그래서 골로새서는 선택과 거룩함만이 아니라 사랑을 말했나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받은 자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14절에서는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셨나요? 사랑받은 자보다 더 큰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골로새서가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사람들의 얄팍하고 들쑥날쑥한 애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입니다. 고전 13:3절은 사랑이 없으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더라도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위해주는 듯한 흉내를 내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아침저녁으로 아내와 남편과 자식과 부모에게 노래하고 ‘허그’한다고 해서 그걸 아가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이 곧 아가페입니다. 그 아가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역사와 일상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고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받은 자는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거룩하며 사랑받은 사람으로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일상에서 옷처럼 차려입고 불만이 있어도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늘 깨어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17절이 반복해서 ‘감사하는 자가 되라.’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은 곧 예배를 가리킵니다. 16절 일부만 읽어보겠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
만약 여러분이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일에 진정성을 보인다면, 더 나아가서 ‘일상의 예배’에 구도 정진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영혼의 중심에서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2025년에도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택받다 = 거룩하게 구별되다 = 사랑받다"
거룩하다고 하면, 구별되었다고 하면 보통 도덕적으로 세상과 다르고 구별된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이처럼 사는 거라는 사실을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네요.
삶 자체를, 생명 자체를 순간순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고, 승패를 위해서만 이기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율법적인 세상에서, 그 프레임에서 아예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 다시 태어난 자로 사는 게 구별된 거룩이군요.
임마누엘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 존재론적으로 휩싸일 수만 있다면 가능해 보입니다.
설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