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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UaE9sEvIM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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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도행전 8:14-17 |
세례와 성령
행 8:14-17, 주현절 후 1주, 2025년 1월 12일
세례 문제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이방인 지역인 소아시아와 그리스 등을 거쳐서 로마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사도들이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의 특징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이야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울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제자들의 활동도, 예를 들어서 베드로와 요한 같은 이들의 활동도 나오지만, 대부분은 바울의 활동입니다. 바울의 본격적인 활동은 13장부터 시작해서 이후 28장까지 거침이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을 성령이 이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이렇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어서 행 2장은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 요한의 집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 여러 무리에게 내린 성령 현상을 보도합니다. 바울의 활동도 온전히 성령의 이끄심이었다는 사실이 사도행전 곳곳에 강조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성령에 관한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투 데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순전한 유대인도 아니고 완전한 이방인도 아닙니다. 그 중간쯤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이방인 선교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대표자로 파송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갈 1:19, 2:9)였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주장하듯이 베드로가 대표자였다면 다른 사람을 보냈겠지요. 사마리아만이 아니라 훗날 베드로는 순회 전도자로 안디옥에도 파송됩니다. 안디옥에서 이방인과의 식사 문제로 떳떳하지 못했던 베드로를 바울이 책망한 일(갈 2:11 이하)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믿는 사람이 성령 받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성령은 받지 못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말만 듣고는 그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게 실제로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세례라는 종교의식은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나 본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세례를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중에서 몇 사람이 훗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들은 물론 세례를 받았겠지요. 사도행전에 따르면 세례 요한의 세례와 성령 세례가 구분됩니다. 행 1:5절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앞에서 짚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구절에도 세례에 관한 언급은 없으나 성령은 나옵니다. 행 18:24절 이하에는 에베소에서 행한 아볼로의 활동이 나옵니다. 아볼로는 예수에 관한 것을 깊이 있게 가르치기는 하나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그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전통이라 할 세례의식이 그리스도교 교회의 종교의식으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혼란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문제로 더 큰 분란은 일어나지 않고, 말하자면 세례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교단 분열처럼 갈라서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고 정리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흔적을 우리는 오늘 성서일과(lectionary)에 따라서 주어진 복음서 말씀인 눅 3:16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라는 소문이 돌자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기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뒷날 자기보다 능력이 압도적으로 크신 예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대답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관점이 투영된 것입니다. 세례라는 종교의식은 성령이라는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는 실제로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더 줄여서, 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에는 무슨 차이가 있나요?
물세례
세례의식은 그리스도교인으로 살겠다고 결단한 사람이 교우들 앞에서 공적으로 자기 결단을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일정한 기간 예배에 참석하고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세례 교육은 개신교회보다 훨씬 더 철저합니다.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는 이런 준비 없이 세례를 베풀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평생 교회에 나오지 않던 사람이 위중한 병에 걸려서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고 싶다고 요청하면 일정한 신앙고백을 거친 다음에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다.
세례만으로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비유적으로 산티아고 순례를 관장하는 기관에 가서 출발하는 도장을 받거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서 출발선에서 출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가 실제로 목적지까지 도착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친구 따라서 도전했다가 힘이 드니까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고 교회 구성원이 되지만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마친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중간 탈락자가 됩니다. 또는 그저 구경꾼으로 머물기도 합니다. 마라톤 대회에 공식적으로 참가했으나 중간에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거나 진행자 눈을 피해서 자전거를 타듯이 말입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에 나오고 어느 정도 그리스도인 흉내를 내기는 하나 실제로 세례받은 사람으로서의 영성을 유지하면서 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태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인생을 영적 순례로 알아 기쁨 충만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지, 아니면 겉도는지를 말입니다.
세례와 관련해서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는 단순히 교회에서 행해지는 종교의식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세례는 세속적인 방식으로 베풀어집니다. 가정 교육과 공교육도 일종의 세례입니다. 교육받은 대로 사람은 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때 반공주의 교육이 아주 철저했습니다. 교회도 반공주의를 신앙의 한 부분으로 가르쳤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인간 이하의 빨갱이로 불렸습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간첩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교육에 세뇌당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반국가 세력과 종북 세력을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2024년 12월 3일 밤) 선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주장이 일부 사람들과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도 먹힙니다. 그들이 반공주의라는 세례를 받음으로 인해서 세계와 삶을 보는 눈이 왜곡된 게 아니겠습니까.
21세기의 가장 강력한 세례는 자본주의에 의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없는 성장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돈벌이에 매달립니다. 땅을 생각해보십시오. 땅은 자동차나 컴퓨터처럼 사람이 생산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닙니다. 그 땅은 한두 사람이 독점할 수 없는 모두의 공유 재산입니다. 한반도 땅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땅도 사적인 돈벌이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현상이 유독 더 심합니다. 정치인과 지역 토건세력과 법조인이 결탁해서 벌이는 토지 개발 문제는 심각합니다. 토지 개발 허가권 등의 방식을 통해서 천문학적 돈벌이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이와 관련해서 ‘50억 클럽’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공동 소유일 뿐만 아니라 동식물의 소유이기도 한 땅을 사적 이익의 도구로 여긴다는 말은 철저하게 자본주의라는 물질숭배 사상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움직이는 겁니다. 이런 시대정신 앞에서 그리스도교인도 꼼짝하지 못합니다. 어처구니없게도 교회가 재개발 지역에서 일종의 ‘알박기’ 방식으로 재산을 불리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무리 그럴듯한 휴머니즘을 앞세운다고 해도 공산주의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영적으로는 공산주의자로 살고 싶습니다. 언젠가 저의 마지막 꿈은 수도원 원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은 가장 원형적인 공산주의 체제입니다. 사유재산이 없으니까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사적 재산이 없는 공산주의가 수도원으로는 가능해도 세속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그쪽으로 조금씩이나마 가까이 갈 필요와 당위는 분명합니다. 세속사회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점점 더 사적 재산에 집착하게 만드니까요. 점점 더 자본에 대한 욕망 실현을 행복의 기준으로 제시하니까요. 미국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이를 가리킵니다. 이 세계는 앞으로 더 노골적으로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할 거 같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구체적인 방법을 저는 모릅니다. 다만 방향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의식으로서의 세례에 머물지 말고 성령, 즉 거룩한 영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령의 본래 의미라 할 생명의 영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
앞에서 짚었듯이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절인 17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Πνεῦμα Ἅγιον)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행 2:4절에 따르면 방언이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이고, 행 19:6에 따르면 방언과 예언이 그 증거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갈 5:22, 23) 말하기도 합니다. 세례는 무엇인지 분명하나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모호해 보이고, 그래서 오해도 일어납니다. 옛날에는 교인들이 성령을 받으려고 여러 가지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심지어 방언을 가르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현상은 뭔가 특별하게 보여서 호기심을 끌 만했습니다. 이런 은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못 됩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생명의 영이고 진리의 영이며 창조의 영이고 종말의 영입니다. 여기서 먼저 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프뉴마는 바람과 비슷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우리 집 둘레에는 대나무가 많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조용한 날인데도 대나무숲 한쪽 구석에서 대나무 잎이 살짝 흔들리는 모습이 가끔 눈에 들어옵니다. 그걸 보고 그 구석에 바람이 분다는 걸 느낍니다. 더 핵심적인 것은 바람을 우리가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바람을 창고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문을 닫으면 바람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영도 이와 같습니다. 영을 우리가 느낄 수도 있으나 그걸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령과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성경과 신학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수준에서 성령을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수준에서 성령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바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처럼 성령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공기가 움직이면 바람이 나타나듯이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면 성령을 받는 겁니다. 밤새도록 목이 쉬도록 고함을 치면서 기도할 때 경험되는 어떤 감정적인 고양 상태가 아닙니다. 타악기와 전자 악기, 그리고 춤추는 이들의 격렬한 율동, 찬양 사역자들의 멋진 구호 등등이 동원되는 찬양과 경배 유의 집회에 참석했을 때 느끼는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엑스터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일반 쇼 프로그램에서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게 사십시오. 그러나 그런 경험은 아무리 강렬해도 우리의 삶 자체를 바꾸지 못합니다. 여전히 난민을 거부하고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며,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참조) 자본 논리에 종속됩니다. 겉으로 강력해 보여도 성령의 활동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런 점에서 위험합니다. 악한 영도 버젓이 활동하니까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삶이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삶의 형질 자체가 달라진 겁니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에서 실질적인 그리스도인이 된 겁니다. 이런 변화를 가리켜서 복음서는 회심(메타노이아)이라고 말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예수의 선포가 이를 가리킵니다. 이런 변화를 실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실제 삶에서 일반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허한 것으로 여깁니다. 성령 경험을 통한 삶의 변화도 시험 점수를 매기듯이 수치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수치로 매길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고, 성령 충만 하라고 한 겁니다. 바람처럼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한 성령을 통해서만 삶의 차원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새로워진 삶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분은 마태복음 마지막 문장을 읽어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b) 여기서 세상 끝날은 지구와 우주가 끝나는 종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죽음이기도 하고, 죽음과 같은 절망스러운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에 여러분 곁에 임마누엘의 예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마음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사실의 실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성령을 통한 참된 변화입니다. 우리에게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포즈를 취하나 실제로는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 않는 건 아닐까요?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이 부부로 평생을 살다가 황혼 이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을 떠나기도 하고 그냥 밋밋하게 교회 나가는 흉내만 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뾰족한 방법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세례라는 형식에만 머물지 말고 세례의 내용인 '성령을 받으시라'는 말씀 외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런 가르침들이 관념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르침들로 충만하여져서 시대정신에 매력을 덜 느끼고 싶습니다.(아예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건 불가능하니깐요. 적어도 나자신을 솔직하게 보면...)
무엇이 허상인지 무엇이 실체인지에 대해 삶의 방향전환을 하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실체에 직면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해방임을 실질적으로 맛보며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