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

하나님은 심판하시나? (눅 13:1-9)

사순절 조회 수 5650 추천 수 0 2025.03.23 20:37:13
설교보기 : https://youtu.be/bMhyWaAReH4 
성경본문 : 누가복음 13:1-9 

하나님은 심판하시나?

13:1-9, 사순절 3, 2025323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3:1절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로마 제국의 지방 장관 격인 총독 빌라도의 악행을 거론했습니다. 빌라도가 몇몇 갈릴리 사람들을 끔찍스럽게 죽이고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성전의 제물에 뿌린 사건입니다. 이런 사건은 주로 유월절 절기에 일어났습니다. 유월절에는 많은 순례자가 예루살렘에 집결합니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라서 유대인의 민족 감정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감정이 종종 사회 폭동으로 비화하곤 했습니다. 로마 총독은 평소 머물던 가이사랴에서 유월절 절기에는 치안 유지 차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본래 반골 기질이 강했습니다. 로마 군사들과 시비가 붙을 때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그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던 거 같습니다. 성경 외의 문헌에도 이런 참사가 나옵니다. 어떤 때는 수천 명이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도 예수께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왔을 때 발생했습니다.

 

불행과 죄의 관계

2절에서 예수께서는 갈릴리 사람들이 이렇게 참변을 당한 게 당신들보다 죄가 더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자기를 찾아온 이들의 주장을 배척했습니다. 죄가 많아서 이런 참변을 당했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다 죄의 결과라고 말입니다. 선천성 시각 장애인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께 누구의 죄로 저 사람이 저런 운명에 떨어졌냐고 질문한 데서(9)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현대인의 논리로 바꾸면 가난은 게으른 탓이라거나, 스펙이 떨어지면 당연히 연봉도 적게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3절에서 그들에게 노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제를 거론한 사람들이 듣기에 민망할 정도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어서 4-5절에는 또 하나의 참사가 거론됩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사건입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동남부에 있는 식수용 저수지입니다. 저수지를 지키려고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나 봅니다. 이런 일은 요즘도 흔하게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죄와 연결해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죄를 심판하신 거라고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죄는 양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50까지는 용서되고 그 이상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세 번까지는 용서받고 그 이상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의 불행 앞에서 자기가 조금 더 행복하다고 합리화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끊어서 말씀하신 겁니다. 3절의 문장과 똑같은 문장이 5절에도 나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라는 단어만 놓고 본다면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충고와 비슷합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 불린 사람이나 졸지에 재산과 자식과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는 잿더미에 뒹굴면서 악성 피부병으로 곪아가는 자기 몸을 질그릇 조각으로 긁었습니다. 어머니 자궁에서 죽어서 태어나지 못한 운명을 부러워했습니다. 친구들이 그에게 와서 위로하고 권면하고 충고합니다.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결하고 확실한 믿음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시험이니까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들의 권면이나 충고와 전혀 다릅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회개는 행위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것이라면, 예수께서 말하는 회개는 삶의 방향을 생명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전자가 행위의 변화라면 후자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존재가 변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도덕적이거나 덜 부도덕하다고 해서 망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존재의 변화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직접 설명하기보다는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말씀이 회개하면 망하지 않는다는 뜻인지를 확인하는 게 더 좋겠습니다. 회개하면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느냐는 뜻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면 불행한 운명이 회개와 상관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행과 악행과 부조리의 이유를 충분하게 알지 못합니다. 파렴치하고 이기적이면서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서 인생을 끝낼 수도 있고, 정말 괜찮은 사람인데도 불행하게 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휴전 협정을 파기하면서까지 지난 318일 다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었습니다. 2백 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 어린아이들의 운명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건 모른 채로 남겨둬야 합니다. 그걸 죄와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하는 건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근본에서 부정하는 것입니다. 욥도 자기의 불행에 대한 원인을 모른다고 끝까지 버티면서 회개하라는 친구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욥기 결론에 해당하는 대목에서 그는 하나님을 지금까지는 귀로만 듣다가 이제는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나 여전히 비열하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면서 독선적인 21세기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종말론적 심판

이 대답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망한다.’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출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 선포한 메시지인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에 나옵니다.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그 하나님의 통치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나라, 그분의 통치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죄가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킬 정도로 폭력적이고 악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배신당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무기력해 보이지만, 종말에서는 하나님만이 승리자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종말론적 승리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종말론적 승리가 담보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종말론적 승리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 즉 메타노이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시간적인 의미에서 먼 미래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 종말은 이미 지금 여기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우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불행한 운명이 닥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동의하시나요? 문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하게 하는 방식으로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권선징악의 옥황상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십니다. 벧전 3:19절과 4:6절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음부에 내려갔다고 합니다. 스스로 지옥까지 내려가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심판은 하나님의 창조 영성과도 대치됩니다. 창조 이야기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다.’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보기에 좋았던 세상을 하나님이 스스로 파괴하신다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놀랍기에 그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 바로 심판이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그의 사랑을 얼마나 느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을 절감한다면 그는 이미 여기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승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절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입니다. 죄는 자기 중심성, 즉 교만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게 무슨 사태인지를 잘 모릅니다. 힘든 가운데서도 교회 생활을 잘하는 것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목사처럼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교만해질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일갈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덕스럽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중심에 놓고 있으니, 즉 자기 염려에 꽁꽁 묶여 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죽을 때까지 이런 데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런 점에서 죽어야만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는 말이 단순한 덕담이 아닙니다. C.S. 루이스가 죽기 전에 죽으라. 죽고 나면 기회가 없다.”(<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22)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주목받아야 행복감을 느끼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모든 조건이 갖춰져도 영혼의 만족은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 대통령이 되었다면 부끄럽고 고마운 마음과 순전히 섬기는 자세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어떤 대통령은 자기 생각대로 정국이 돌아가지 않으면 대화를 통해서 해결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다가 비상계엄까지 선포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는 방식으로 살면 어떤 조건에서도 불만스럽고 짜증스럽습니다. 온갖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삽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불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불행한 일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

조금 거칠게 말해서 우리가 없어도 세상이 돌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더 근본에서 사람이 없어도 지구가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소중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사랑 안에서만 제대로 빛을 내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삶의 중심으로 삼을 때만 우리는 충만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우리 삶의 조건이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있는 돈도 제 것은 아닙니다. 저의 건강도 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늘 공짜로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하늘과 별과 달을 봅니다. 공짜로 나무를 만질 수 있고, 흙의 친구가 됩니다. 저는 평생 설교문을 작성했습니다.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올려놓은 설교문이 1100편입니다. 그 메뉴 공지에 내 설교문이 필요한 분은 얼마든지 가져가서 사용하시라고 썼습니다. 제 책의 내용도 나에게 허락받지 말고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지식재산권을 행사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본래 저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제 생명도 제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뚫어본다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신비롭고 거룩하며 경이롭게 보일 겁니다. 시인들이 세상을 그렇게 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들장미 덤불은 이렇습니다.

 

비 내리는 저녁, 날은 어둑어둑해도

그대는 싱싱하고 순수합니다.

제 덩굴에서 선물하듯 손을 내 뻗지만

장미라는 자기 존재에 푹 빠져있지요.

 

바라지도 가꾸지도 않았건만

납작한 꽃잎은 벌써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그렇게 끝없이 자신을 뛰어넘고

형언할 수 없이 제 흥에 겨워


저녁의 상념에 잠겨 길가는 나그네를

장미는 외쳐 부릅니다.

, 걸음을 멈추고 제 모습 보세요, 보라고요.

보살펴주지 않아도 나는 걱정 없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겁니다. 사람만이 사람을 심판합니다. 사람만이 사람을 두렵게 합니다. 재물을 섬기라고 강요합니다. 다른 이들보다 더 부자로 살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위협합니다. 누가 더 죄가 많은지, 누가 심판을 크게 받는지, 누가 더 불행한지를 한순간도 잊으면 안 된다고 다그칩니다. 그게 바로 망하는 길입니다. 그게 바로 심판이라면 심판입니다. 저는 구더기가 끓고 유황불이 꺼지지 않는 지옥이 바로 지금 여기서 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만들지 않습니다. 만들었다고 해도 비워두십니다. 사람만이 지옥을 만듭니다. 위에서 인용한 릴케의 시에 나오는 들장미는 자신이 왜 왕궁의 정원에 피지 않았는지 한탄하지 않습니다. 왕궁에 있든지 들판에 있든지, 왕과 귀족이 보아주든지 아니면 새들이 보아주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햇살을 받으며,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비를 선물로 받을 수 있으니까요.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오늘 설교 본문 후반부 눅 13:6-9절에서 이 주제와 연관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삼 년을 기다렸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찍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포도원 일꾼이 주인을 말립니다. 자신이 한해만 더 관리해 볼 테니까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 작파합시다. 우리의 삶에는 종말이 이미 임박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충만한 순간이 이미 우리 눈앞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온갖 걱정거리와 자기 연민에 떨어져서 그걸 놓치고 삽니다. 지금 당장 망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1년이라는 집행유예가 주어졌습니다.

사랑하든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심판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온전하고 충만하게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을 지경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의 일상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밭에 묻힌 보물을 찾듯이 찾아보십시오. 그걸 찾게 되면 유레카!’를 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1입니다.


profile

[레벨:11]소유와존재

March 24, 2025
*.171.22.114

목사님의 설교로 나눔을 하던중 누군가가 이런말을 했습니다. 좀 구체적이 해결책을 주면 안되겠냐구요... 나눔을 하는 또 다른 어떤사람은(참고로 3팀이 있어요) '와 이렇게 분명한 가르침은 처음 봤다..." 같은 글 다른 반응 참 재미납니다^^ 우리가 무엇에 길들여져 있는지 무엇에 익숙해져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년 밖에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모두가 역전타를 날려 보길 소망해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25, 2025
*.45.99.73

제 설교문을 신앙 공부 모임의 텍스트로 삼으시다니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간접적으로 저에게 주신 그 피드백을 통해서 

저도 늘 배웁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115 성령강림절 임박한 하나님 나라 (눅 10:1-11) 2025-07-06 395
1114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 (눅 9:51-62) [1] 2025-06-29 929
1113 성령강림절 "내가 벌하리라!" (사 65:1-9) [2] 2025-06-22 1186
1112 성령강림절 구원의 능력인 하나님의 사랑 (롬 5:1-5) 2025-06-15 1361
1111 성령강림절 종의 영 vs 자녀의 영 (롬 8:14-17) [5] 2025-06-08 2047
1110 부활절 예수께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요 17:20-26) 2025-06-02 1389
1109 부활절 바울의 거룩한 비전 (행 16:9-15) 2025-05-25 1529
1108 부활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할렐루야'! (시 148:1-14) 2025-05-18 1813
1107 부활절 예수의 아버지 (요 10:22-30) 2025-05-11 1554
1106 부활절 예수 '따름'이 답이다! (요 21:15-19) 2025-05-05 2286
1105 부활절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에 관해서 (요 20:19-31) [2] 2025-04-27 2659
1104 부활절 부활은 죽음의 죽음이다! (고전 15:19-26) [2] 2025-04-20 2454
1103 사순절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처형 (눅 23:1-49) [2] 2025-04-13 2669
1102 사순절 택함 받은 증거 (사 43:16-21) 2025-04-07 2705
1101 사순절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고후 5:16-21) 2025-03-30 3037
» 사순절 하나님은 심판하시나? (눅 13:1-9) [2] 2025-03-23 5650
1099 사순절 큰 흑암과 두려움에서 (창 15:1-12, 17-18) [8] 2025-03-16 7067
1098 사순절 믿음이 구원이다! (롬 10:8b-13) 2025-03-10 5760
1097 주현절 오직 예수! (눅 9:28-36) [1] 2025-03-02 7042
1096 주현절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 (고전 15:35-38, 42-50) 2025-02-23 7190
1095 주현절 복과 화의 역설 (눅 6:17-26) [2] 2025-02-16 6860
1094 주현절 생명의 그루터기 (사 6:9-13) 2025-02-09 6859
1093 주현절 나사렛 사람들 (눅 4:21-30) [2] 2025-02-03 7414
1092 주현절 기쁨의 근원 (느 8:1-3, 5-6, 8-10) [2] 2025-01-26 7992
1091 주현절 혼례와 포도주 이야기 (요 2:1-11) [2] 2025-01-19 7264
1090 주현절 세례와 성령 (행 8:14-17) [2] 2025-01-12 7407
1089 성탄절 성육신의 신비 (요 1:10-18) 2025-01-06 8646
1088 성탄절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 (골 3:12-17) [2] 2024-12-29 9284
1087 대림절 미래의 통치자 (미 5:2-5a) [2] 2024-12-22 11137
1086 대림절 성령과 불 세례 (눅 3:7-18) [5] 2024-12-15 11378
1085 대림절 충만한 '의로움의 열매' (빌 1:3-11) 2024-12-08 11576
1084 대림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 25:1-10) [2] 2024-12-03 12634
1083 창조절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8:33-38) 2024-11-24 12376
1082 창조절 성소에 들어갈 담력 (히 10:11-14, 19-25) [3] 2024-11-17 11803
1081 창조절 영혼이 갈급한 사람 (막 12:38-44) [2] 2024-11-10 12513
1080 창조절 전심전력 귀 기울임 (신 6:1-9) [4] 2024-11-04 13521
1079 창조절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 이야기 (막 10:46-52) 2024-10-27 14219
1078 창조절 세계의 비밀이신 하나님 (욥 38:1-7) 2024-10-20 16853
1077 창조절 십계명 '너머' (막 10:17-22) [4] 2024-10-13 16582
1076 창조절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히 1:1-4, 2:5-10) [4] 2024-10-07 17031
1075 창조절 지옥 이야기 (막 9:38-48) [2] 2024-09-29 16843
1074 창조절 하늘의 지혜 (약 3:13-18) [2] 2024-09-23 16614
1073 창조절 의로움의 원천 (사 50:4-9a) [5] 2024-09-15 17290
1072 창조절 무엇이 '놀라운 일'인가? (막 7:31-37) [2] 2024-09-08 17583
1071 창조절 생명의 길 (신 4:1-2, 6-9) 2024-09-02 17568
1070 성령강림절 영원한 생명의 말씀 (요 6:60-69) 2024-08-25 17885
1069 성령강림절 성령 충만의 길 (엡 5:15-20) [4] 2024-08-18 17032
1068 성령강림절 영혼의 깊이 (시 130:1-8) [2] 2024-08-11 17732
1067 성령강림절 생명의 양식 (요 6:24-35) 2024-08-05 17065
106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하심 (엡 3:14-21) 2024-07-28 16831
1065 성령강림절 메시아 대망 (렘 23:1-6) 2024-07-21 17885
1064 성령강림절 선지자 '너머' (막 6:14-29) [2] 2024-07-14 17519
1063 성령강림절 제자들의 축귀 능력 (막 6:1-13) [2] 2024-07-08 17786
1062 성령강림절 공평한 세상을 향하여! (고후 8:7-15) 2024-06-30 18139
1061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막 4:35-41) [2] 2024-06-23 17947
1060 성령강림절 사람의 외모와 중심 (삼상 16:1-13) 2024-06-16 17660
1059 성령강림절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 4:13-5:1) [4] 2024-06-09 18284
1058 성령강림절 안식일 문제 (막 2:23-3:6) [2] 2024-06-03 22049
1057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충만' 경험 (사 6:1-8) [2] 2024-05-26 23571
1056 성령강림절 파라클레토스 (요 16:4-15) [2] 2024-05-19 23597
1055 부활절 믿음과 영생 (요 3:1-15) 2024-05-13 22415
1054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5:1-6) 2024-05-05 22459
1053 부활절 상호내주의 신비 (요 15:1-8) [4] 2024-04-28 25373
1052 부활절 부족함 없는 삶, 가능한가? (시 23:1-6) 2024-04-21 28350
1051 부활절 죽은 자 가운데서 (눅 24:36b-48) [2] 2024-04-14 27518
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5] 2024-04-08 29490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2024-03-31 25288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2024-03-24 25541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2024-03-17 24816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2024-03-10 25340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2024-03-04 24735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26592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25175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24666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26309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26147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26209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25972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28026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33068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32094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31862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31914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25957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4] 2023-11-19 25839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26679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 2023-11-07 26282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25666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25844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25812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27279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28896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26594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25959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27036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26158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27949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27055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26876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28789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