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기타 조회 수 9946 추천 수 32 2005.04.18 09:50:05
성경본문 : 사도행전 2:42-47 
2005.4.17.          
행 2:42-47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공동체적 삶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을 요약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본문(행 2:42-47)은 약간 뒤에 나오는 행 4:32-37과 병행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자가 ‘공동체 생활’과 비슷한 내용을 연이어서 진술하는 이유는 어떤 특별한 문학적 방식이라기보다는 그 내용을 강조하려 데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이 기원 80-85년 사이에 집필된 게 옳다면 누가는 지금 50년 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 교회 안에 정착된 전승도 있었을 것이며, 누가가 개인적으로 들었던 전승도 있었을 것입니다. 비교적 긴 세월의 두께 안에 갇혀 있는 전승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새롭게 정리하면서, 특별히 초기 공동체의 특징을 두 군데로 나누어 배열시킨 것은 그것이 저자에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사도행전이 보도하고 있는 여러 극적인 사건들보다 이렇게 개괄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내용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클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보도는 기독교의 한 부분에 치우치지 않고 전체적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묘사된 초기 공동체의 모습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들이 사유재산을 포기했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44,45절).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요즘의 그 어떤 공동체보다 훨씬 원칙에 가까운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건 놀랍습니다. 이런 표현만으로 본다면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것만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기독교의 정신이 완전히 일치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런 모습이 언제까지 유지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누가가 이런 사실을 두 번에 걸쳐 강조했다는 건 그만큼 중요했다는 의미이겠지요. 두 번째 설명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행 4:34,35절).
역사의 혁명을 부르짖던 모든 사람들은 오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완전한 공산주의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는,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공동체는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희망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이런 공평한 통치라 할 수 있습니다. 간혹 천국에도 상급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야무진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천국에 가서도 다른 사람보다 나은 대접을 받으려는 것은, 또한 자신의 행위에 상당한 보답을 받으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라기보다는 정치인들의 논공행상이며,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밥상공동체’와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해보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걸 오늘 본문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원시 공산주의는 기독교에서도 완전하게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삶이 왜 불가능한지는 그렇게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에덴동산 이후의 현실적인 삶에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전력투구하는 본성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생존하려면 선의이건 악의이건 늘 경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완전히 공평한 삶은 단지 이상으로만 가능할 뿐이지, 또는 몇몇 위대한 혁명가들에게만 가능하지 본성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이런 완전한 공동체 생활이 계속 유지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도 있긴 합니다.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었다는 게 바로 그 이유입니다. 예수의 재림이 현안이었을 때는 실제로 재산을 소유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연되면서 소유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적 이유였든지, 신학적인 이유였든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들이 일시적이지만 완전한 평등을 실현해보려고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건을 역사적으로 회상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들이 이런 평등의 실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서의 가장 이상적인 삶을 추구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 모습은 재산을 팔아서 함께 나누어 사용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46절) 공동체를 꾸려갔다는 사실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초기 공동체는 예배 차원에서 나누는 성만찬의 빵 이외에 모든 지체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의 식사를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습니다. 이 땅에서 함께 먹고, 함께 웃고 우는, 함께 춤추고, 같이 축제를 여는 그런 구체적인 삶을 신앙의 이름으로 끌어갔습니다.
물질적인 평등과 구체적인 삶의 친교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하는 요소였다는 사실은 그런 전통을 오늘의 삶에서 새롭게 회복해야 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아기 낳고 살아가는 이런 삶의 현실이 망각된다면 그가 아무리 고차원의 영적인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과는 상관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종교적 삶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 근거는 그런 삶의 현실에만 놓인 게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현실인 신앙에 놓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들었으며(42절), 성전에 모였고 빵을 나누었으며(46절),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47절). 이들의 이런 행동은 지금 우리가 예배당에 모여서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며, 성만찬에 참여하고 찬송을 부르는 예배와 거의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런 전통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이미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입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습관적으로 참여한 유대교의 모든 종교적인 형식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성만찬을 유대교의 유월절 행사로 하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예배 모임의 순서로 삼았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점에서 기독교 역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런 종교적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기독교인들이 단지 역사를 변혁하려는 운동가들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신앙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하나님과의 일치를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형상화하는 예배는 빼놓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신앙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을까요? 예배를 드리면서 거룩한 존재를 경험하고 있을까요?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경험이 있나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영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을까요?
어떤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예배의 위기가 임박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현실인 영적인 경험이 한편으로는 일방적으로 무시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왜곡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기독교인이었지만 이제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지성인들이 제법 많습니다. 푸닥거리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반역사적인 모습을 보이는 기독교와 그 예배에 참여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행위는 그것을 주관하는 사람들의 도덕성이나 역사의식과 상관없이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예배를 멀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제가 더 이상할 말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선택이 교회를 갱신하는 데 더 실질적인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보다는 일종의 신앙 편이주의에 빠져서 예배를 비롯한 신앙행위를 접는 사람들이 훨씬 심각합니다.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린다거나, 교회에 나가지 않고 각종 성서연구 모임으로 만족하는 태도는 자신을 향한 성령의 접근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한국교회와 예배의 위기입니다.
또 하나의 위기인 예배의 왜곡은 무엇일까요?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예배의 열정만 본다면 위기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이들은 온갖 현대 기기를 통해서 예배 참석자들에게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합니다. 소위 ‘열린예배’로 지칭되는 이런 예배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콘서트처럼 한 순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복음찬송가, 세계선교를 위한 세리머니, 대형화면을 가득 채우는 화려한 장면들, 우리를 감동시킬만한 예화 중심의 설교가 예배를 구성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예배에 참석하면 무언가 가슴을 울리는 경험이 있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이벤트 중심의 예배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의 현실을 착각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예배가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것보다는 기본적으로는 예배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두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예배에서 은혜를 많이 받는데 무슨 말이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은혜는 모든 사이비 이단의 모임에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받는 은혜보다는 그 은혜의 원천인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열광적인 심리상태와 참된 은혜를 혼동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예배의 중심은 사람들의 종교적 호기심에 놓인 적이 없습니다. 흡사 진정한 연주자는 바하의 음악을 자기 취향에 맞도록, 또는 청중의 감수성에 맞도록 마음대로 조작하는 게 아니라 그 바하의 음악 세계로 들어가는 데 진력하는 것처럼 기독교 역시 그런 방식으로 신앙의 현실을 경험했습니다. 비록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이러한 신앙의 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삶의 상호성
저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삶의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요소는 각각의 독특한 세계를 담고 있지만 상호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신앙의 현실과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삶의 현실은 매우 긴밀한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구체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 의미를 확보할 수 있으며, 거꾸로 신앙의 현실은 이 세상에서의 현실적 삶을 통해서 실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의 삶에 영적인 차원이 상실하게 되면 인간은 단지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다는, 즉 심층적 의미를 상실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우리의 신앙이 삶의 차원과 소통하지 못하면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설명한대로 신앙과 삶이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을 원래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도 열심히 드려야 하고, 이 세상에서도 모범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바로 이런 균형감각에 있습니다. 이런 말이 매우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해명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칫 또 하나의 왜곡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또한 그건 무슨 의미일까요?
삶의 현실과 신앙의 현실이 소통한다는 말은 각각의 삶을 잘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두 현실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현실에 속한 예배와 삶의 현실인 이 세상살이가 단지 인식론적으로 구별될 뿐이지 결코 다른 두 현실이 아닙니다. 좀 줄여서 말한다면 삶이 예배이고, 예배가 곧 삶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다.”(46절)는 말은 실제로 자주 모였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예배와 삶이 하나였다는 의미입니다. ‘신생불이’(信生不二)라고 불러도 될 겁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의 삶이 예배라는 건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에 궁극적인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도록 일구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삶이라는 건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종교적인 자기만족에 머물지 말고 생명의 역동성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profile

profile

[레벨:0]조기성

April 18, 2005
*.224.165.53

어느때인가 부터
'균형'이라는 말을 조금은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자칫 균형이라는 게
양비론에 가깝게
위기를 탈출하는 소극적이고도
자기보호적인 방식으로 자주 쓰여지는 걸 보게 되니까요.
그래서 균형보다는
제목에 사용하신 상호성, 통전성, 조화
또는 긴장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 늘 아쉬움이 남는 건 왜일까요?

선택의 긴 스펙트럼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한 지점에
스탠드를 정해야 하는 순간이 늘 야속합니다.

그리곤 그 선택이 신앙의 현실이
삶의 현실로 반영된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늘 당황스럽습니다.

소견에 옳은대로 선택한 건 아닌지......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19, 2005
*.249.178.13

그렇지요.
결국은 선택해야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유보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종의 '카이로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기다림'의 영성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기다림은 무조건 시간을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향한 패토스입니다.
기독교인에게 그것은 궁극적으로 파루시아, 예수의 재림이겠지요.
그 파루시아가 인간의 열광주의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역사진보주의를 뛰어넘는 사건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다림과 선택의 긴장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긴장이 바로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그런 긴장의 심화가 곧 영의 심층적 활동입니다.
"확인할 길이 없어 ...."라고 하셨죠?
정직한 사람의 자기 인식이며, 세계이해입니다.
바둑의 정수를 찾기가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잖아요?
바두의 수를 읽을 능력만큼만 보인다는 건 당연하잖아요?
'당황'의 경험마저 없는 게 오히려 문제일 겁니다.
바르트도 '복음주의 신학입문'에서
신학자의 실존이 '당혹'이라고 말하지요?
보는 게 없는 사람은 놀랄 것도, 당황할 것도 없어요.
욥의 당황은 그만큼 생명의 신비, 그 심층을 들여다보았다는 의미이겠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563
151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4883
150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71
149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572
148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2818
147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11399
146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11417
145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402
144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530
143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746
142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543
141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618
140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14106
139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648
138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11848
137 기타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1] 2005-10-16 16988
136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11525
135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11312
134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652
133 기타 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6] 2005-09-18 14880
132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9852
131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309
130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11013
129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220
128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486
12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490
126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9054
125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11505
124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432
123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358
122 기타 삶과 행위, 7월3일 2005-07-04 10703
121 기타 평화의 은총, 6월26일 [1] 2005-06-26 11110
120 기타 죄로부터의 해방, 6월19일 [2] 2005-06-20 11237
119 기타 일꾼을 위한 기도, 6월12일 [3] [2] 2005-06-13 11976
118 기타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6월5일 [1] [2] 2005-06-05 10743
117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680
116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155
115 기타 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3] 2005-05-17 10703
114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219
113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367
112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501
»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946
110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672
109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10009
108 기타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 [1] 2005-03-27 8896
107 기타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1] 2005-03-20 8932
106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123
105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308
104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9026
103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9041
102 기타 자유의 길, 분열의 길, 2월13일 2005-02-13 8511
101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140
100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40
99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584
98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002
97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442
96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625
95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604
94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80
93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8907
92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01
91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398
90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027
89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339
88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239
87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311
86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644
85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45
84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255
83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303
82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246
81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95
80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115
79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402
78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437
77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367
76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703
75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823
74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554
73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290
72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635
71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568
70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282
69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417
68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364
67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640
66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556
65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728
64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8955
63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343
62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982
61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486
6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023
59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047
58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467
5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04
56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362
55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120
54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739
53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258
52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94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