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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기타 조회 수 10549 추천 수 39 2005.09.18 13:56:54
성경본문 : 출애굽기 16:1-8 
http://wms.kehc.org/d/dabia/9월18일.MP3http://wms.kehc.org/d/dabia/9월18일.MP32005. 9.18.        
출 16:1-8
만나의 영적 의미

이스라엘의 불평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많은 사건들을 경험했습니다. 민족 전체의 생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시절이었으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사소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매우 심각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십계명과 율법, 불기둥과 구름기둥, 금송아지, 놋뱀, 식수,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아론과 미리암, 성막, 크고 작은 전쟁 등등. 그중의 하나가 바로 ‘만나’ 사건입니다. 민수기 11장4절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보도되어 있습니다. 간혹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이라고도 하긴 하지만 핵심은 역시 만나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던 시기에 왜 이런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을까요?
민수기도 그렇지만 여기 출애굽기에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거리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게 이 설화의 단초입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 이후 한 달 반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당시에 비축했던 먹거리들이 이제 바닥 날 때쯤 된 게 아닐까요? 그들은 아마 광야에서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약간의 들짐승을 잡는다거나, 또는 광야에서 거주하는 유목민들에게서 조금씩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지 모르죠. 그러나 그런 정도로 수십만 명의 먹는 문제를 계속해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먹을 것에 대한 준비도 없이 광야로 나왔을까요? 그들이 그렇게 대책 없이 무조건 나온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이 미디안 광야를 통과하는 데는 장정 걸음으로 보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부녀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웬만하면 한 달 정도면 그들이 목적지로 삼은 가나안 언저리까지는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이 빗나간 겁니다. 한 달 반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진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앞으로도 40년을 이 광야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모세를 따라서 출애굽에 나설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요? 모세까지 포함해서 그들은 그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 것도 모르고 이렇게 엑서더스의 대장정에 나섰다가 그 초장부터 큰 시련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게 바로 우리 인생길이 아닐까요?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달만 고생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40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드림’을 안고 시작했지만 매우 혹독한 현실을 만난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현실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아무도 야무진 꿈만 먹고 살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3절). 민수기 11장 4절에서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고 허구한 날 만나만 먹고는 살지 못살겠다고 불평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을 근거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는 문제로 인해서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그들의 이런 불평은 그 문제가 해결된 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면 좀 곤란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투덜거리고 불평을 쏟아냈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그게 잘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은 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도 늘 그런 불평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한국의 경제수준이 전세계 150 개 이상의 나라 중에서 상위에 속합니다. 지금 경제가 좋지 않다고 불평들이 많긴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광야에서 실제로 생존의 위기를 절감하고 투덜거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반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린 아들 딸들이 굶고 있다면 누구인들 불평하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만나의 실체
백성들의 불평을 들은 모세와 아론은 아마 마음이 상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 약속에 의지해서 함께 광야로 나온 마당에 어려움이 생겼다고 해서 툭하면 자신들을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마음이 갈 리가 없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을 겁니다.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르죠. 아니면 다른 종족과 전쟁을 벌여서라도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었을까요? 아마 그들 중에서 실제로 이집트로 돌아간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성서는 물론 이런 것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전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전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현실로 닥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매우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모세에게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만한 무슨 뾰족한 방도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럴 때 하나님을 향해서 도움을 구합니다. 이런 모세의 간구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응답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않은지 시험해 보리라.”(4절). 이 말씀은 곧 만나를 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그 광야에 매일 아침마다 만나가 깔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자기 식구가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여야 했습니다. 욕심을 내서 더 많이 거두어들이면 그것은 곧 상했습니다. 여섯째 날에 두 배를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는 건 일주일에 하루씩 모든 노동을 멈추어야 한다는 안식일 규정과 연관됩니다.
도대체 이 만나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만나는 그렇게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시나이 반도 내륙 지방에서 흔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연지벌레에게서 나오는 분비물이 나뭇잎에 맺혔다가 땅에 떨어진 다음에 기온이 내려가는 밤중에 단단하게 굳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그걸 모아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알맹이들은 낮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해가 뜨면 얼마 있지 않아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만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해서 특별하게 일으키신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만나 사건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서는 왜 이런 사건을 하나님이 일으키신 특별한 은총인 것처럼 보도하고 있을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아주 일반적인 현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통로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자기를 알리십니다. 흡사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볕과 비를 받을 수 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알리십니다. 만약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자기를 알리신다면 그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만 특별대우 받는 걸 좋아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시나이 반도 내륙에 살던 모든 사람이 아침마다 먹을 수 있는 자연 현상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십니다.
그런데 왜 똑같은 만나를 먹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인식했고, 다른 민족들을 그렇게 인식하지 못했을까요? 여기에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과 그 역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해석하고 인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놓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도와준 사건으로 인식했습니다. 화산 폭발을 보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하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생각했습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들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만나 사건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출애굽 이후 한 달 반이 흘렀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출애굽 당시에 비축했던 먹을거리가 거의 바닥이 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초조했을는지는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까딱하다가는 광야에서 완전히 민족 전체가 몰살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졌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런 방식으로 몰살당한 민족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비등한 여론 앞에서 모세와 아론은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출애굽을 주도한 모세로서는 진퇴양난에 빠진 셈입니다. 이집트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양식은 바닥났습니다. 그는 생존의 절대 위기를 직감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서 만나가 생각났습니다. 성서가 보도하고 있진 않지만 모세가 광야에서 목동으로 지내던 40년 동안 이 만나를 맛본 경험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 이거라도 먹고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이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먹거리다. 대략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모세는 만나를 준비하신 분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렸습니다.
일상의 영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혹은 역사적 역성이라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이 구체적인 역사에 개입하고 있는 하나님의 힘을, 그 은총을 여실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성서 기자들이며, 예언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나를 먹고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들 중에서도 이미 만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존을 지키신다는 그 은총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모세는 그걸 인식했습니다.

야훼 하나님 인식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핵심은 결국 만나가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만나를 통해서 인식하게 된 하나님이 그 핵심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녁에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분이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아침이 되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6,7절). 12절에서는 이와 비슷한 내용이 야훼의 입을 통해서 모세에게 전달됩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고 일러주어라.” 6절의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와 12절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는 똑같은 내용입니다. 이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분이 야훼이시며, 그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만나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돈독해지고, 그들의 하나님 인식이 심화했을까요? 여기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뒤로도 그들은 어려움을 만나기만 하면 늘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를 원망했다는 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들을 특별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여전히 신앙적 심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곧 이 만나 사건이 그들에게 그렇게 확실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약간의 위로를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몇 가지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는 것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말하지만 그런 증거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 이 세상 모든 게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아주 놀라운 일을 보고도 거기서 아무런 생명의 깊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일상적인 일을 보면서도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만나는 필요 없습니다. 아니 우리의 주변은 늘 만나로 가득합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영적인 감수성이 열려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변의 모든 것이 영적인 만나가 되어 야훼가 곧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profile

[레벨:0]하성욱

September 18, 2005
*.154.96.173

진실된 말씀 감사 합니다. 저도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엇던 문제가 왜? 영화 비평, 문학비평, 음악비평 미술비평 은 잇는데 설교비평은 없는가? 그러타면 교회가 언로가 막힌것이 아닌가? 막히면 썩는데, 이놈의 교회를 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고로운지고.
profile

[레벨:95]정용섭

September 19, 2005
*.249.178.7

피아골단풍 씨,
안녕하세요.
이 설교를 좋게 봐주니 고맙습니다.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0]우상식

September 20, 2005
*.147.2.57

목사님 ! 설교말씀 잘 읽었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신 기적의 떡으로 믿지 않고
시나이 내륙지방에서 나타나는 자연현상으로 보시는 지요 ?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자연현상을 하나님이 주신 은총으로 인식한것에 중요성을
두고 계시군요.
profile

[레벨:95]정용섭

September 21, 2005
*.250.41.111

우상식 목사님,
이 설교의 핵심은 만나가 기적이다, 혹은 아니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 이렇게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요?
아니 온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요?
그런데 기독교 신자들은 그 엄청난 사건 자체를 눈여겨보지 못하고
작은 현상에 매달리고 있는 건 좀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 초자연적 현상들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흔하게 일어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언자들의 영적 통찰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들의 생존을 어떻게 지켜주시는지 인식하게 된 민족입니다.
그런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우리도 역시
우리의 일상에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배워야하지 않을까요?
그런 영성을 갖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기적으로 보일 것이며,
거기서 놀라운 생명의 신비와 환희를 경험하고,
그 생명이 완성되는 예수의 재림을 고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설교의 핵심은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의 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만나를 초자연적 기적으로 믿는가,
아니면 자연적 현상으로 믿는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당신은 그걸 믿는지 아닌지 대답하라고 말씀하신다면,
자연현상이 곧 기적이라는 뜻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제 대답이 좀 시원치 않죠?
profile

[레벨:0]함종연

September 23, 2005
*.75.24.222

목사님이 무엇을 말씀 하시려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몇몇 내용에 좀 이의를 달고 싶군요.

60만 장정(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하면 더 많겠죠?)이 매일 먹은 그 많은 양의 만나를
단지 벌레똥의 자연 현상으로 이해 한거라든가(벌레똥이 많으면 얼마나 많겠습니까),
만나를 모세의 절박한 기도 가운데서 얻은 지혜로 생각 했다라든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화산 폭발로 말씀 하시는거 등...
너무 합리적인 해석이 아닐까요?
과학적인 근거를 무시한체 합리적인 해석에만 치우치다보면 오히려 비합리적인 것으로
빠지기 십상인데 이 만나 해석이 꼭 그런것 같군요.
일반 성도들이 이글을 읽고는 믿음에 회의를 가져올것 같은데요.

단순.무식(?)이 믿음생활에는 참으로 좋다는것을 또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풀어 보려고 한다고 다 이해가 되고 풀어 질까요?

profile

[레벨:95]정용섭

September 23, 2005
*.249.178.14

함종연 씨,
이 사이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군요.
그리고 이렇게 다른 생각까지 말씀하게 되었네요.
좋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교환되어야 창조적인 무엇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위에서 질문한 내용들을 근원적으로 해명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이 무엇인지 설명해야하니까요.
사로 다른 패러다임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화를 사실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신화를 역사 해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 차이를 전제하고,
(이 말이 곧 내가 신학적으로 대단히 뛰어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마디만 설명하지요.
일단, 만나가 자연현상이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웬만큼 신학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는 누구에게 있는 생각입니다.
이건 생각만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지금도 그쪽 지역에 가면 만나를 먹을 수 있습니다.
60만명이 어떻게 먹을 수 있느나구요?
그들이 일년 열두달, 365일 만나만 먹고 산 것은 아닙니다.
혹은 메추라기만 먹고 산 것도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40년을 살 수 있나요?
그렇다면 성서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냐구요?
거짓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가 있다고 합시다.
그들의 연애편지에 "나는 매일 당신만 생각하면 삽니다."는 내용이 있겠지요.
이 편지는 제 삼자가 읽는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 남녀는 뉴스도 보고, 공부도 하고, 다른 생각도 하지만
그 중심에는 상대방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당신만'이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이게 거짓말인가요, 아닌가요?
연애편지와 성서는 다르지 않느냐, 하고 말하겠지요.
사실은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연애편지가 곧 구약성서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제3자가 보기에 좀 해괴한 내용들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어린아이까지 죽이라는 내용도 있고,
만나 이야기도 있고, 등등....
우리가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성서는 역사를 담고 있지만 사실 역사가 아니가 해석된 역사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영웅과 민중의 서사와 삶이 녹아있지만
결국은 그들을 관통하는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만 읽으려고 하기 때문에 큰 혼란에 빠집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다릅니다.
아니, 다르기보다는 사실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해석이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해석이죠.
흔하게 얻을 수 있는 만나에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인식하고
그런 분에게 철저하게 의존하며 살아간다는 것보다 더 위대한 믿음이 어디 있나요?
이렇게 설명해도, 아마 좀 답답한 구석이 있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성서의 초자연적인 사건을 그렇게 자연적인 사건으로 끌어내린다는 사실이
게운치 않게 들리겠지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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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5372
176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4196
175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4274
174 기타 거룩한 두려움, 7월9일 2006-07-09 11286
173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4823
172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8023
171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9828
170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9852
169 기타 마른 뼈와 야훼의 영 [1] 2006-06-04 10141
168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9918
167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8271
166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9093
165 기타 하나님의 자녀, 4월30일 [1] 2006-04-30 9926
1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7546
163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8562
16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8151
161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9431
160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9175
159 기타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4] 2006-03-19 11735
158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9806
157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0824
156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8363
155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9621
154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0368
153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0405
15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8915
151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1368
150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8544
149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9184
148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9823
147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9057
146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8489
145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7163
144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8269
143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7299
142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9670
141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8548
140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8616
139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8974
138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9115
137 기타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1] 2005-10-16 12826
136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8862
135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9003
134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8760
» 기타 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6] 2005-09-18 10549
132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7836
131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8173
130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8546
129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8059
128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8141
12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8079
126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6704
125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9170
124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8000
123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7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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