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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현재, 11월27일

기타 조회 수 9739 추천 수 69 2005.11.27 23:17:46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9 

http://wms.kehc.org/d/dabia/11월27일.MP32005. 11.27.      
고전 1:1-9
종말의 현재

대림절에 대해
교회에는 사회에서 사용하는 태양력과는 좀 다른 ‘교회력’(church calendar)이 있습니다. 성탄절이나 부활절도 교회력에 포함됩니다. 로마 가톨릭은 우리보다 훨씬 다양한 교회력을 지킵니다.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 승천일도 있고, 여러 성인 축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도 앞으로 이런 쪽으로 준비가 되면 세계 교회와 구별되는 우리만의 절기를 지키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지 세계 교회가 지키는 교회력의 첫 절기는 대림절입니다. 이 대림절은 성탄절 4주 전부터 계산해서 4주간을 지키는 절기인데, 올해는 오늘 11월27일이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그의 임재와 그의 재림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특히 그의 재림의 중요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신앙은 초기 기독교부터 아주 분명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신앙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독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걸 그대로 믿는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개중에는 실제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또는 이런 재림 신앙을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이외에 대다수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 대림절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근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 세계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위선적이거나 무책임해서라기보다는 기독교 신앙 자체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만으로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컨대 꼴찌가 첫째가 되며,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경쟁원리가 철저하게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심층으로 들어가야만 첫째와 꼴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마저 경쟁과 자기만족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변죽만 울리거나, 아니면 그것 자체를 아예 부정하게 됩니다.
‘대림절’ 신앙도 역시 그렇습니다. 신앙이 좋다고 자부하는 기독교인들도 이 가르침을 매우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지금은 어디에 계신 건가요? 사도신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는데, 그 곳이 어딘가요? 신약성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생각하던 하늘을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계몽주의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 중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은 뭔가 잘못된 것일까요? 이런 것에 대해서 성서가 자세하게 설명해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성서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곧 성서 기자들이 정직하다는 근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건을 마술처럼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합리적으로 꾸며서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사건을 경험한 그들은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그것을 단순하게 묘사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계관과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그들의 진술은 분명히 영적인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영적인 현실이 무엇인지 살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바울은 고린토 교회에 보내는 장문의 편지 글머리에서 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선교여행에서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고린토는 그 당시에 매우 잘나가는 도시였습니다. 모든 게 풍요로운 도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 공동체 교우들의 삶도 꽤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5절).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었다는 바울의 이 진술은 기본적으로는 신앙적인 것을 말하겠지만 그 이외에도 삶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마 여기에는 재정적인 문제도 포함되지 않았을까요? 특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언변과 지식에서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요즘 말로 바꾼다면 고린토 교우들은 교양인, 지식인, 중산층이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바울은 문화적인 점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을 절대화하지 않지만 또한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금욕주의자도 아니고 쾌락주의자도 아니었으며, 탈속주의자도 아니고 세속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토 교우들의 넉넉한 삶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고린토 후서 9장에서 바울이 고린토 교우들에게 구제금을 요청하고 있다는 걸 보면 바울이 재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서 살든지 하나님의 뜻에, 즉 영적인 시각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시각이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십시오. 7절 말씀입니다.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전혀 부족할 게 없는 현재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나타나심은 대립적인 사태입니다. 예수의 재림은 이 세상에서 쌓아놓은 인간들의 모든 업적이 근본적으로 해체되는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취해보려는 모든 좋은 삶의 조건들이 말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의 재림은 이런 방식과 전혀 다른, 그것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발생하는 생명 사건이기 때문에 이 두 사건 사이에는 긴장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구슬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슬을 딴 아이들도 있고, 잃은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 순간에 그들의 전체 삶은 오직 구슬에 달려 있습니다. 저녁시간이 되자 어머니께서 그만 놀고 들어오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던 구슬놀이를 접어야만 합니다. 집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구슬놀이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집은 놀이터와 전혀 다른 삶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는 고린토 교우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무런 부족한 게 없이 잘 살고 있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하는 게 곧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여기까지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의 재림이라는 게 막연하게 생각되기는 하지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개인의 죽음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접어야 할 때가 온다는 말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재림, 그가 다시 나타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확신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확신이 없다는 건 그렇게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확신은 대개 현재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거나 과거에 실증적으로 발생했던 사건들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예수의 재림은 순전히 미래의 사건입니다.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사건, 그리고 과거에서 한 번도 똑같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깊은 딜레마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성적인 사람으로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무조건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으로서 그것을 믿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을 이런 딜레마에서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다만 성서와 신학이 제시하고 있는 길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길을 제시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분명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동성애자들에게도 그렇지 않은 우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마음이 닫히면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친교
앞에서 구슬치기 하는 아이들을 예로 들었는데, 그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만약 그 놀이터에 생각이 좀 깊은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아이는 그렇게 놀면서도 그 놀이가 모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예측할 것입니다. 물론 그 아이는 그런 놀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어제도, 그제도 반복해서 경험했으니까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아무리 그런 일들이 과거에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예수의 재림으로 일어나게 될 그 세계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삶을 직관함으로써 어느 정도 내다볼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삶은 무상합니다. 그 어느 것도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런 무상한 방식이 아니라 영원한 방식의 삶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약간 다른 각도로 본다면, 그냥 현재에 그대로 고정되어 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를 포한한 이 세상은 어디를 향해서 지금 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요? 만약 하나님이 창조자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완성되는 그 시간을 마련해두지 않았을까요?
이런 내 말은 별로 결정적인 설득력이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논리는 같은 정도의 반론을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가 재림할 때에 대해서, 그리고 심판의 날에 대해서 언급한 후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여기서 재림과 심판은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그 사건은 곧 무상한 이 세상의 생명이 참된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생명의 완성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일치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결정적으로 미래의 사건인 종말, 재림, 심판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종말의 현재’라고 이름 붙이겠습니다. 생명의 완성인 종말은 단지 우리에게 멀리 떨어진 미래의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 현재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참된 생명과 하나가 되었다면 우리는 결국 최후에 완성될 생명의 세계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이게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나요?
사람들은 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대기적으로만 구분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나와 너, 그리고 사물을 명백하게 구분하기만 합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순전히 자기 기준에 따라서 이 세상을 구분하며 살아가는데 익숙합니다. 이런 방식에 묶여 있는 한 우리는 종말이 이미 현재에 침입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희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연대기적 시간을 극복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 이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창조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말에 완성될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 창조의 힘은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태초와 종말이 모두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현재 안에는 이미 종말이 들어와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방식으로 종말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이런 창조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행위라고 믿습니다.
이 창조와 종말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 중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와 의 일치가 곧 우리가 종말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 단계에서는 증명이 아니라 신뢰가 필요합니다. 예수의 가르침, 그의 행위,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근거로 그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그에게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종말을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종말의 현재가 대림절 첫 주간을 맞는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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