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숨어있는 평화의 왕

기타 조회 수 10441 추천 수 127 2006.04.09 20:00:27
성경본문 : 마가복음 11:1-11 
http://wms.kehc.org/d/dabia/06.04.09.MP32006. 4.9.        
숨어 있는 평화의 왕 (막 11:1-11)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오늘 본문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락은(1-7)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 입성용 나귀를 끌고 온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두 명의 제자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맞은 편 마을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어있으니까 그걸 풀어서 끌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주인이 나타나면 “주님이 쓰신다.” 하고 “곧 돌려보내실 것이오.” 하고 말하면 된다고 일렀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잠시 사용하겠다는 허락을 나귀 주인에게 이미 받아놓은 상태였을 겁니다. 이 주인이 친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또 다른 제자일 수도 있겠지요. 성서에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일에 도움을 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을에 들어가 보니 어린 나귀가 매어 있었고, 주인과의 문제도 그대로 해결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새끼 나귀 등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놓았고,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셨습니다.
둘째 단락은(8-1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 관한 묘사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에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 깔아놓고, 환성을 질렀습니다. 마가는 그 환호성을 시편 118:25,26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흡사 과열된 대통령 선거 유세와 같은 장면입니다.
셋째 단락은(11) 예루살렘에 들어간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구경하러 오신 게 아닙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성전을 둘러보시는 중에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아마 시간이 넉넉했다면 성전 정화를 그날 하셨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숙소가 베다니에 있었겠지요.
우리가 위에서 살려본 세 장면은 여러 가지 색조가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첫 단락은 나귀를 구하는 장면이 조금 신비적으로 그려집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느낌을 줍니다. 둘째 단락은 매우 열광적인 느낌을 줍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셋째 단락에서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갑자기 일상적인 것으로 바뀝니다. 앞 단락만 본다면 이제 예루살렘에서 무언가 화끈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이런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도 단순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셨고, 둘러보셨고, 날이 저물었고, 베다니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런 묘사로만 본다면 그 날은 평범한 어떤 사람의 평범한 하루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신비와 열정과 일상의 색깔로 채색된 한편의 삽화 같은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는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마가의 마음은 무엇에 사로잡혀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마음에 새기면서, 이제 종려주일을 맞은 우리는 본문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수님과 새끼 나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를 탔다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가 똑같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보기에 따라서 이런 장면은 그렇게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나귀는 보통 짐을 나르지, 사람을 태우는 동물이 아닙니다. 특히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탔다고 합니다. 아이도 아니고 서른 살 난 남자가 어린 나귀를 타고 길을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나귀 이야기는 철저하게 구약성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스가랴 9:9절과 연결됩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여기서 임금은 곧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마가복음은 이 스가랴의 예언을 간접적으로 인용한 반면에 마태복음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용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또 하나의 다른 구약성서는 창세기입니다. 이집트에 정착하게 된 야곱이 죽을 때 열 두 아들에게 유언했습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게 준 축복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유다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나오리라고 축복합니다. 이 통치자도 역시 메시아에 가리키는데, 그 축복의 내용 중에서 예수님의 나귀 사건과 연결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포도나무에 나귀를 예사로 매어놓고 고급 포도나무에 새끼 나귀를 예사로 매어 두리라.”(창 49:11).
오늘 사건과 연결된 두 군데의 구약성서를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메시아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온다는 스가랴의 예언이며, 다른 하나는 유다지파 중에서 왕의 홀을 쥔 통치자가 나올 때 포도나무에 나귀를 매어 놓는다는 창세기 말씀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이 사건에서 구약성서를 인용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구약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즉흥적으로 나귀를 탄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의 예언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습니다.  

왕으로서의 예수
스가랴와 창세기가 예언하고 있는 것, 즉 복음서 기자들이 주시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구약성서가 예언하고 있는 참된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도 역시 유대지파를 통해서 오게 될 왕을 말하고, 스가랴도 역시 나귀를 탄 왕을 말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에게 예수야말로 온 세상을 다스릴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흡사 왕을 맞이하는 듯한 환호를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 놓았고, 나뭇가지도 역시 길에 깔았습니다. 겉옷을 길에 펴 놓는 행위는 제왕의식에 속하고, 종려 나뭇가지를 흔드는 행위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종교절기인 초막절에 취하는 종교의식입니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의 앞뒤에서 환성을 올리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구하소서’라는 뜻인데, 원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외침이지만 경우에 따라서 왕에게 자비를 구하는 외침으로도 등장합니다.(삼하 14:4, 왕하 6:26). 마가는 지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이야말로 ‘호산나’라는 외침을 받으실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곧 왕이라고 말입니다.
고대사회는 철저하게 왕정 체제로 움직였습니다. 왕은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소유한 인물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런 왕권이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신앙도 그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완전히 지배당해야 왕, 메시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왕
그런데 예수님의 왕권은 정치적인 게 아닙니다. 그는 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그 당시의 황제처럼 자신의 왕권을 행사하는 분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런 황제들에게서 그 어떤 가능성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과 예수님을 일치시킬 수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었다고 한다면, 혹은 그런 걸 시도했다면 그는 나귀가 아니라 말을 타고 당당하게 입성했겠지요.
복음서 기자들이 인용한 스가랴 9:9b과 뒤이은 10절 말씀을 봅시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마가복음 기자는 바로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합니다. 즉 예수님은 전쟁의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이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은 수많은 왕들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언급하기도 싫은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전쟁 이야기니까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미국은 3년 전에 이라크와 전쟁을 벌여서, 4개월 만에 승리를 노래했습니다. 9.11 테러를 일으킨 집단을 지원하고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있다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이런 이유에 근거가 없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 전쟁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까요? 이 세상의 왕들은 전쟁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이유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태는 비단 정치세계만이 아니라 인간문명이 발달한 곳은 어디나 비슷합니다. 기업가들도 경제적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대학들도 역시 그렇고, 병원도 역시 그렇습니다. 매스컴은 없는 이야기도 선정적으로 부풀려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려고 합니다.
크고 작은 전쟁의 왕들이 통치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평화의 왕인 예수님을 믿고 그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은총으로 주실 수 있으며, 또한 그를 믿는 우리는 그 평화의 은총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오늘의 교회가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경험하고 있을까요? 교회가 힘의 논리로 강압적인 평화를 조장하는 세력과 투쟁할 자세를 갖고 있을까요? 아니 우리 자신은 지금 평화의 영에 사로잡혀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평화의 왕으로 경험되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간혹 마음이 평화로울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에 그런 게 다 허물어지는 때도 많습니다. 또한 평화의 왕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그 평화의 질서가 별로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왜 우리 개인과 이 세상에 평화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을까요? 예수가 주는 평화는 왜 구체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은폐된 왕권
오늘 본문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알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과 일부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인식한 사람들은 일부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에게 보인 환호성은 예루살렘 전체 주민들에게 별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예수가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장군처럼 개선행진을 벌였다면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알아보았겠지만, 나귀를 탔기 때문에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이게 곧 예수의 평화와 세상의 관계입니다. 생명이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예수의 재림까지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진리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본문 11절이 조금 더 리얼하게 알려줍니다. 앞에서 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벌어진 일이 앞의 분위기와 너무 차이가 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평화의 왕이 이제는 그냥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타고 들어온 나귀에 대해서 마가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가한 듯이 성전을 둘러보셨고, 그 사이에 날이 어두워졌으며,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추적한다면, 그는 베다니에서 제자들과 함께 손발을 씻고 밥을 먹었겠지요. 그들은 그날 하루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서로 대화하고 차를 마시거나 포도주를 마시면서, 피곤한 사람들부터 잠에 떨어졌겠지요. 이런 모습에서 예수가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누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제자들과 함께 유랑하는 아주 평범한 스승쯤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이렇게 은폐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나귀를 탄 평화의 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는 마가복음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평화를 현실적으로 실감하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초라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귀를 탄 평화의 왕인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평화는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평화가 그를 통해서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나귀를 탄 예수님에게서 그 사실을 눈여겨 볼 줄 알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profile

[레벨:6]유희탁

April 10, 2006
*.85.191.34

목사님의 설교 속에서 제가 설교한 부분들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참고가 되었고. 많은 은혜가 됩니다. 성서를 조금더 깊이 들여다 보고 그 상황들에 대해서도 더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순절에도 주님의 큰 은총이 함께 하시길..
profile

[레벨:1]똑소리

April 11, 2006
*.204.68.109

사랑채에 글을 올리다가 잘 안돼서 이곳에서 질문합니다.
부활주일을 기다리면서 예수님의 부활, 승천, 재림에 관한 목사님의 글을 검색하여 읽어 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의 성서해석 현실이 거의 축자영감설 쪽으로 경도되어 있다는 부분을 지적하시면서 신화적인 성서읽기와 신학적 성서읽기의 차이점을 잘 짚어주셨더군요.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관련된 목사님의 전반적인 내용에 공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가 구름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간 이른바 '승천표상'이 당시 고대인들의 우주관 및 세계관이 반영된 글이기에, 오늘의 독자들은 그들이 말하려고 한 영적 교훈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예수가 역사적으로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인간으로서 죽음을 다시 맞이했을터인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이런 생각이 신성모독적 망발인지요? 성서에 묘사된 예수님의 부활, 승천 표상을 역사적 사실로 해석하지 않고 영적 리얼리티를 찾는데 초점을 맞춘다하더라도 예수님은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맞이했을거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을 떨쳐 버릴수 없군요. 이 부분에 대해서 목사님의 생각은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11, 2006
*.249.178.8

똑소리 님,
질문이 좋군요.
그런 궁금증이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실체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 중차대한 것이라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네요.
그래도 최대한 정확하고, 요약적으로 설명해봐야지요.
우선 승천과 부활을 똑같은 사건이에요.
부활한 후에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승천한 걸로
사도행전이 보도하지만 그건 별로 확실한 근거가 없기도 하고,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부활도 생명 사건이고, 승천도 생명사건이에요.
똑같은 사건을 두 가지 모습으로 설명한 것뿐이에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표현도 마찬가지구요.
똑소리 님의 질문 요지는 예수가 승천한 게 아니라면,
그 승천포상은 신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가 지상에서 또 다시 죽음을 맞이 있을 거라는?
또 다시 죽음을 맞았다면 아예 부활하신 게 아니지요.
부활은 현재의 생명형식과 전혀 다른 생명형식으로
"변화"한 사건입니다.
그 변화한 생명은 우리에게 전혀 낯선 어떤 것입니다.
외계인을 상상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생명 사건이
무덤에 묻혔던 예수에게서 발생했다는 게 곧 부활신앙입니다.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냐, 하고 묻지는 마세요.
그건 또 다른 관점으로 설명해야하니까 접어두지요.
지금 나는 부활 자체를 설명하는 거에요.
사실 설명은 불가능하지요.
예컨대 아프리카 사람이 눈을 설명할 수 있나요?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눈을 처음 보았다고 해보세요.
아주 낯선 것을 보았다구 말이에요.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낯선 분이에요.
그 어떤 것으로도 유비할 수 없는 낯선 분이에요.
예수에게 일어난 부활은 우주론적 역사에서 오직 그에게만 일어난
어떤 궁극적인 생명현상이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어요.
그것은 종말에 드러나게 됩니다.
혹시 이런 설명이 신학적인 말장난처럼 들리나요?
아니면 조금씩 따라서 들어올 수 있나요.
종말에 드러나는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을 은폐된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궁극적인 생명은 은폐되어있는데,
역사적 예수에게서 선취되었다고 말이에요.
도대체 종말에 가서야 드러날 거라면 무의미하다,
확실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각 자체의 한계를 전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세계가 그렇게 확실하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저는 지금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금 우리의 삶이 꿈일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것이 깨는 때를 우리는 종말이라고 합니다.
그때 생명의 리얼리티가 나타나는 거죠.
아직 까지 생명의 리얼리티는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생명인지 아직 우리가 모른다는 거에요.
배아, 줄기, 유전자 등등,
생물학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명의 리얼리티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말이 길어졌네요.
우리가 예수에게 발생한 부활을 이해하려면,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이 역사를 이해하려면
어떤 고정관념, 혹은 지금의 시간과 공간 개념을 절대화하지 말아야합니다.
역사가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현재의 결과가 된다고 말하는
그런 생각을 접어야 해요.
그리스도교는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그 미래는 종말이에요.
종말을 말한다는 건 단지 묵시사상적인 게 아니라
이 역사를 전체로 보려는 시각이에요.
하나님은 전체 역사로서 자기를 계시하신다고 말이에요.
정리해야겠군요.
예수가 승천했다는 건 부활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부활은 곧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그런 생명의 세계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세계는 종말론적으로 우리에게 열리게 될 그런 세계에요.
그런 역사관, 세계관, 생명관은 아무래도 현실적이지 않다고 본다면
조금 더 천천히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질문을 했는데, 충분한 답변이 됐는지...
혹시 미진하면 다시 구체적으로 질문해도 좋아요.
나도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닙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그림을 머리에 그리고 있을 뿐이죠.
부활생명이 ....
profile

[레벨:1]똑소리

April 12, 2006
*.204.68.109

목사님!
신학적이고 아카데믹한 질문은 그치고
단도직입적이고도 형이하학적인 질문을 해 보죠.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데
부활하고 난 다음에 역사적 예수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는 점입니다.
변화된 영광스런 몸을 가지고 어디로 갔을까요?
뿅 하고 사라졌나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제자들과 이별했을까 하는가 하는 점이 궁금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13, 2006
*.249.178.21

똑소리 님,
아마 나에게서 아무런 확실한 대답을 얻지 못하리는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겠지요?
변화된 몸으로 어디 갔는가, 하는 질문은 모순이에요.
변화된 몸은 '어디로?'라는 공간적인 질문을 넘어서는 사건이에요.
현재의 시간과 공간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변화된 분을
다시 이런 시공의 개념으로 묻는 건 무의미하지요.
그래도 지금의 시공간이 가장 확실한 거니까 이런 식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겠군요.
그게 좀 어렵습니다.
만약 그런 식이라고 한다면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도라는 것도 무의미한 개념이에요.
또는 하이덱거의 '존재'도 웃기는 이야기죠.
화이트헤드의 '과정'도 헛소리에 가깝지요.
부활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내가 은폐된 생명의 세계라고 말한 것 같은데,
그런 신학적 개념을 접어두고 실제적인 언어로 설명하라는 거네요.
여기 씨앗이 하나 있습니다.
그걸 분석해보세요.
몇 가지 원소가 나올 겁니다.
그러나 그게 땅에 심겨지고 시간이 지나면
꽃이 되고, 열매를 맺어요.
해바라기도 되고, 코스모스도 됩니다.
현재는 몇 가지 원소지만
미래에는 화려한 꽃이 되는 게 씨앗이에요.
그 씨앗에는 이 꽃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 묻혀서 썩는 순간에는 우리가 떨어지는 거죠.
그러나 거기서 다시 생명이 시작하네요.
이게 부활과 딱 떨어지는 비유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현재 우리의 삶은 씨앗처럼 몇 가지 원소만 있어요.
그러나 미래에는 그것이 꽃처럼 화려한 생명으로 변화하지요.
그게 예수에게서 선취적으로 발생했다고 믿는 게 곧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그걸 믿지 못하겠다면
그때는 그리스도교를 포기해야지요.
그래도 믿을만한 근거가 있어야 믿을 게 아닌가,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확실하다고 생각하나요?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
또는 확실한 것이 있으면 한번 말씀해보세요.
이 세상에 무엇이 그렇게 확실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을 잠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예수의 부활에 우리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걸 최선으로 설명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실증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딱 부러지게 질문했으니까
마지막으로 그렇게 대답해야겠군요.
부활한 예수가 어디로 갔을까?
그는 미래의 생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제자들과 헤어졌을까?
헤어지고 말고가 아니라
완전히 낯선 생명으로 경험되었을 뿐입니다.
부활의 은총이....
profile

[레벨:1]똑소리

April 13, 2006
*.204.68.109

부활,
생각하기에 따라 참 간편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군요.
완전히 낯선 생명의 경험이라는 말이 제게는 참 모호하게 들립니다.
이것이 더 이상 설명해 줄 수 없는 목사님의 한계이기도 하면서
저의 인식의 한계라는 점을 인정해야겠군요

베다니에서 한 여인이 삼백데나리온의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가난한 자에게 주면 더 좋았을 거라며 여인을 질책했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이 아무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수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제자들과의 이별을 뜻하신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부활 한 후 다른 생명으로 변화한 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제자들의 눈 앞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현실세계에서 이별경험이 아닌가 다시 묻고 싶습니다. 물론 신앙(심령,의식)세계에서조차 예수가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14, 2006
*.249.178.9

베다니에서의 사건은 부활 이전의 이야기에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여러 이야기가 뒤섞여서 전승된 것이기 때문에,
더 근본적으로는 부활 경험 이후와 이전의 이야기가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지요.
어쨌든지 똑소리 님이 가장 남득하기 힘든 문제는
역사적 예수와 부활한 예수 사이의 간격에 대한 것 같군요.
역사적 예수와의 이별은 십자가와 모덤 장사로 끝난 것입니다.
그 사건으로 더 이상 예수와의 재회는 없습니다.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재회다, 이별이다 하는 말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좀 어려운 곳으로 우리가 들어갔군요.
변죽을 울리지 않고 정곡을 치고 들어가는 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합니다.
잘 했습니다.
찜찜한 부분은 좀 남겨 두지요. 뭐.
부활의 생명을 향해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53
248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4197
247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8] 2007-12-09 13719
246 대림절 영적 각성 [19] 2007-12-02 14077
245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583
244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평화까지 [14] 2007-11-18 11131
243 성령강림절 거짓 예배, 참된 예배 [7] 2007-11-11 15564
242 성령강림절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13] 2007-11-04 14304
241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563
240 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12] 2007-10-21 12179
239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645
238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582
237 성령강림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9] [1] 2007-09-30 17219
236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477
235 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9] 2007-09-16 11381
234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592
233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10976
232 성령강림절 믿음의 완성 [26] 2007-08-26 15133
231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11851
230 성령강림절 우리는 하나다! [9] 2007-08-12 10799
229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644
228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658
22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10983
226 성령강림절 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13] 2007-07-15 13325
225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9] 2007-07-08 11781
224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12762
223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11661
222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6] 2007-06-17 12678
221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37
220 성령강림절 무슨 희망인가? [11] 2007-06-03 12187
219 성령강림절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8] 2007-05-27 14105
218 부활절 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8] 2007-05-20 11754
217 부활절 누가 내 어머니인가? [16] 2007-05-13 15414
216 부활절 믿음은 가능한가? [30] 2007-05-06 13792
215 부활절 다비타 쿰! [11] 2007-04-29 12183
214 부활절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8] 2007-04-22 10746
213 부활절 구름 타고 오십니다! [10] 2007-04-15 11563
212 부활절 평화의 복음, 부활의 능력 [4] 2007-04-08 12884
211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1862
210 사순절 마리아의 나드 향유 [11] 2007-03-25 17598
209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460
208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321
207 사순절 실패의 길을 가자! [9] 2007-03-04 13485
206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528
205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435
204 주현절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고전 15:12-19) [37] 2007-02-11 15967
203 주현절 시몬의 하나님 경험 [21] 2007-02-04 12969
202 주현절 예레미야의 소명 [11] 2007-01-28 15771
201 주현절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5] 2007-01-21 16365
200 주현절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20] 2007-01-14 19245
199 주현절 그리스도의 비밀, 교회의 비밀 [5] 2007-01-07 15720
198 성탄절 솔깃한 말, 터무니없는 말 [7] 2006-12-31 12943
197 대림절 두 여자의 만남 [1] 2006-12-24 14404
196 대림절 그 날이 오면... [4] 2006-12-17 13943
195 대림절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3] 2006-12-10 14271
194 대림절 “사람의 아들”이 온다. [2] 2006-12-03 14643
193 대림절 새로운 세상이 온다! [2] 2006-11-26 15013
192 기타 야훼 찬양! (욜 2:21-27) [3] 2006-11-19 13313
191 기타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희망 [2] 2006-11-12 15693
190 기타 욥의 하나님 경험 [6] [1] 2006-11-05 14684
189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3721
188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525
187 기타 신앙적 일상과 재림신앙 [2] 2006-10-15 17509
186 기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2] [2] 2006-10-08 19603
185 기타 고난 받는 그리스도 [2] [2] 2006-10-01 15181
184 기타 사람 차별 마시오! [1] [2] 2006-09-24 19911
183 기타 창조 영성 [4] [2] 2006-09-17 15101
182 기타 성만찬 공동체 [2] [1] 2006-09-10 22989
181 기타 예배로서의 삶 [5] [1] 2006-09-03 19336
180 기타 다윗의 통곡 [1] 2006-08-27 21773
179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7899
178 기타 예언의 성취 2006-08-13 16122
177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9240
176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6440
175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6886
174 기타 거룩한 두려움, 7월9일 2006-07-09 13530
173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8872
172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624
171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14527
170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3777
169 기타 마른 뼈와 야훼의 영 [1] 2006-06-04 15209
168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13680
167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679
166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12100
165 기타 하나님의 자녀, 4월30일 [1] 2006-04-30 13230
1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18
163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13060
»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441
161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12747
160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646
159 기타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4] 2006-03-19 15695
158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13203
157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3292
156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185
155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266
154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061
153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626
15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039
151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4798
150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06
149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509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