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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주현절 조회 수 16395 추천 수 45 2007.01.21 15:27:38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2:12-31 
http://wms.kehc.org/d/dabia/07.01.21.MP32007.01.21. 고전 12:12-31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고린도교회
그리스는 우리나라나 이탈리아처럼 반도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지형이 개미의 몸처럼 가운데가 잘록합니다. 북쪽 본토와 남쪽 펠레폰네소스를 연결하는 지협의 서남단에 고린토라는 도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건축양식 중의 하나인 ‘코린티안’이 이 도시의 이름을 딴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고린도를 거쳐야 하며, 동쪽 바다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려고 해도 역시 고린도를 거쳐야 합니다. 네로가 이 지협을 뚫는 운하건설을 추진하다가 포기하고, 근대로 넘어와 1893년에야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교통의 요지였던 고린도는 고대시대에 이미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따르면 바울은 2차 선교여행 후반부에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로 왔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들 부부는 로마에서 비교적 크게 사업을 하다가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에 따라서 로마를 쫓겨나 이곳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직업이 바울과 똑같은 가죽가공업이었던 때문이지 바울은 이들과 쉽게 친해졌습니다. 바울은 이들 부부를 포함해서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의 전도 효과는 상반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심하게 반대했지만 이방인, 즉 고린도 사람들은 비교적 우호적이었습니다. 다행히 회당장인 그리스보와 여러 고린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바울은 3,4년이 지난 후에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식을 에베소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 소식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는 클로에 집안사람들에게서 들은 소식입니다.(고전 1:11) 둘째는 스테파나와 포르두나도와 아카이고에게서 들은 소식입니다.(고전 16:17) 셋째는 고린도 교회가 직접 바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한 소식입니다.(고전 7:1)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우리가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고린도서를 통해서 그 교회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크게 보아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린도시민들에게서 영향 받은 부도덕성입니다. 5-8장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문란한 성윤리, 교우 사이의 재판, 결혼, 자유인과 노예의 문제, 우상 앞에 놓인 음식에 대한 문제 등등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당파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지적했습니다. 1장12절 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당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만 일어난 게 아니라 교회의 직분과 봉사활동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사도, 예언자, 교사, 기적행위자, 신유능력자, 행정가, 방언자 등등이 서로 자기들의 일을 앞세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이들의 활동을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끝없는 분열과 시기와 반목이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명제는 이런 점에서 무조건 옳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쨌든지 바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린도 교회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고, 여러 편의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후서 이외에 다른 편지도 있는데, 그것은 분실되어서 신약성서 안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카리스마의 원천
바울이 이 분열을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신학적인 것입니다. 핵심적으로는 교회론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하고 본질적인 신학적 진술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지금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의 몸은 우리와 똑같은 단백질로 이루어진 이런 몸을 가리키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이후에 현실성이 된 영적인 몸을 가리킵니다. 이걸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 구성원들은 모두 지체라는 뜻입니다. 이건 눈에 보이는 설명이 아니라 신학적인 진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우리의 머리는 아니지요. 우리가 서로 연결된 지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경험되지도 않습니다. 대개의 신앙생활은 자기의 종교적 욕구에 묶여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수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지는 몰라도 수평적으로 신자들 사이의 관계는 무의미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열정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이지만 교회의 일치라는 점에서는 낙제점수를 면키 어렵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즉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영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배워야합니다.  
고전 12:1-11절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은총의 선물”과 “성령”입니다. 은총의 선물은 곧 카리스마를 뜻합니다. 제가 언젠가 이 카리스마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은사’, 즉 은혜로운 선물을 가리킵니다. 은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고린도전서 전체가 자주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8,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28절에 의하면 이 은사에는 사도, 예언자, 교사 등이 포함됩니다. 말하자면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거리와 직무들이 카리스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초능력적인 힘을 가진 사람에게 이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쓰지만, 성서 헬라어 개념으로 본다면 아주 평범한 일과 평범한 직책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모든 카리스마의 원천은 성령입니다. 카리스마는 성령이 주신다는 말씀이 12:1-11절에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바로 위에서 짚은 대로 병을 고치는 능력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이고, 말씀을 전하는 것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입니다. 바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성가대의 활동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은사, 즉 카리스마이고, 교회청소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입니다. 카리스마의 원천은 곧 성령입니다.
이런 말은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여러분이 알고 있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매우 포괄적이기도 하고, 제가 다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어느 정도로 말씀드려야 할지 조금 망설여집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시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대답하기가 망설여지지요? 도대체 성령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것 받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하는 생각이 많을 겁니다. 어떤 용감한 사람은 무조건 “아멘” 하고 대답하겠지요.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관심이 없는 사람은 솔직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힘이며, 생명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지금 목숨이 붙어 있다는 건 곧 어떤 방식으로든지 성령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그걸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성령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다만 오늘 설교의 주제와 연결해서 다시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받고 있는가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겠지요. 그것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다면 이미 그 은사의 범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겠군요. 여러분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회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했다면, 참여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카리스마를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지금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성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즘 집사람이 주일에 함께 나눌 먹을거리를 준비하는데, 그것도 역시 성령의 선물인 은사입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작은 공동체래서 여러 활동들이 없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일들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만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성령과 연결됩니다. 아주 사소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과 연결되는 매우 귀중한 기회입니다.

유기적 공동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실제 몸을 비유로 들면서 카리스마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은사의 원천은 바로 성령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은사는 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은사가 한 성령에서 온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은사는 똑같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학적 착상이며,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목사나 사찰이나 다른 게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장로나 주일학교 선생이나 똑같다는 말입니다. 물론 행위 자체가 똑같다는 건 아닙니다. 15절부터 바울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듯이 눈의 역할과 귀의 역할은 다릅니다. 위의 역할과 손의 역할도 다릅니다. 목사의 역할과 성가대의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역할은 동일하게 카리스마일 뿐입니다. 성령에게서 온 카리스마는 비록 기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엘리제를 위하여”나 교향곡 9번 “합창교향곡”이나 모두 베토벤이 작곡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엘리제를 위하여”는 소품이니까 수준이 낮고 합창 교향곡은 수준이 높다고 말한다면, 또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사람에 비해서 합창교향곡을 지휘하는 사람이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면 그는 음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의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단지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카리스마가 동일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교회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누가 교회에서 화장실 청소나 하면서 자신도 목사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카리스마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게 참으로 현실교회가 일으켜 세워야 하고, 극복해야 할 카리스마의 영성입니다. 만약 우리의 능력과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역할의 높고 낮음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인은 이런 점에서 매우 약하기 때문에 카리스마의 영성은 개인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공동체 전체가 꾸준하게 확보해 나가야 합니다. 그 방향은 아주 분명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어떤 직책이든지 개인을 높이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공동체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니까요. 어떻게 교회공동체가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영인 성령이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그 구체적인 문제는 각각의 교회가 처한 형편에서 깊이 성찰해서 결정해야 하겠지만, 오늘 바울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더 요긴하게 생각해야 하며,(22절)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24절)
이런 카리스마의 영적인 원리는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전체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가 오히려 소중하게 인정받는 세상이 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세상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런 일들은 누구에게 강요받는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카리스마의 원천인 성령 안에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하고 신뢰할 때만 조금씩 그 가능성이 열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이런 일을 위한 징표(symbol)로 자리매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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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명경지수

January 23, 2007
*.241.161.130

오늘날 한국교회의 자화상과 흡사한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이 혁명적인 신학적 발상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지 상상이 되네요.

한 톨의 씨앗에서 지구의 무게를,
45억년 그 세월의 무게를 느끼신다는 목사님의 영성을 여기서도 느끼게 되는군요.
한 마디로 "아멘!"입니다.
목사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샘터교회>라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통해,
그리고 다비아라는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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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4, 2007
*.150.14.33

45억년의 영성이라,
그냥 눈으로 보고, 말만 그렇게 한 것 뿐이지,
나는 그런 거 따라가기 힘듭니다.
그래도 흉내내다보면
조금씩이나마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희망합니다.
그건 그렇고,
바울이 말한 카리스마와 성령에 대한 이해는
오늘 우리가 좀더 진지하게 성찰해서 배워야 할 대목입니다.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대개 이런 대목의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령론은 훨씬 중요합니다.
성령충만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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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야긴보아스

February 03, 2007
*.50.136.25

본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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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2, 2007
*.236.169.24

권위를 버린 카리스마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은 사회 시스템 안에서 권위가 붕괴되고, 기존 가치관이나 이념에서 탈피하거나 해체되는 현상이다. 현대인들은 이제 다정한 친구 같은 리더십, 억압적 권위가 아닌 온화한 영향력을 원한다. 어떤 의미에서 나보다 더 똑똑하게 보이는 완벽한 사람보다는 어딘가 빈 틈이 있어 보이는 리더를 선호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강력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를 원한다. 하지만 온화함과 강렬함, 이 두 가지를 다 갖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에서 이런 카리스마적 영향력을 찾을 수 있을까?

카리스마(charisma)는 원래 헬라어로 카리스(charis), 즉 은혜라는 말에서 나왔다. 카리스마는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헬라어로 카리스마(charisma)는 은사이고 카리스(charis)는 은혜이다. 그런데 M 베버가 은사인 카리스마의 원뜻을 초자연적, 초인간적 재능과 지배의 힘을 일컫는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확대 정립하여 오늘날 흔히 카리스마라고 하면 군림하는 권위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카리스마는 은혜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러면 은사(gift: charisma)와 은혜(grace: charis)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charisma”는 “a gift of grace”, “a gift involving grace”이다. 즉 은사란 은혜의 은사, 은혜를 포함한 은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은사는 외적인 능력을 은혜는 내적인 누림을 의미하는데, 그 외적인 능력인 은사는 반드시 내적인 은혜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에 바탕을 둔 외적인 능력만이 참 은사, 즉 카리스마란 뜻이다.

성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데 그는 엄청난 능력, 즉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하고 우상으로 말을 하게도 하는 큰 이적을 행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은 전혀 없고 위엄과 권위와 능력만이 있다.

‘역사의 종말’ 을 기술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종말의 역사에서는 섬김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섬김이 영향력을 발휘한 예는 인류의 역사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비일비재하다. 권위를 버린 섬김과 사랑은 강력한 영향력을 소유한다.

한 개인의 섬김과 사랑이 역사와 사회를 변화시킨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권위를 버린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을 갖출 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사랑과 섬김의 은혜를 갖추자. 은혜, 즉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 위에 은사인 능력의 카리스마를 갖자.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에 바탕을 둔 능력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폭발적인 힘이 있다.

당신은 어떤 재능(talant)을 하늘로부터 선물로 받았는가. 은혜는 없고 능력만이 있나? 아니면 은혜에 바탕을 둔 능력이 있나? 다른 말로 하면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은 전혀 없고 능력만이 있나? 아니면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에 바탕을 둔 능력이 있나?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에 바탕을 둔 능력이 아니면 그 어떤 능력도 갖기를 우리는 원치 않아야 한다.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에 바탕을 둔 능력(카리스마)을 가지지 않은 자가 많이 나올 때 사회나 국가는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늘로부터 어떤 재능(talant)을 선물로 받았다면 우리는 힘써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을 갖출 때 까지 그 재능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잠룡물용(潛龍勿用)의 참된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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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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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karisma)


카리스마라는 것이 무엇인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적·영(靈)의 식별·예언 등의 능력이나 지배자의 초자연적·초인간적·비일상적인 힘을 말한다. 원래 그리스도교 용어로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카리스마(charisma)나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charis)에서 유래하였다.

‘charisma’는 신이 내리신 것’이라는 뜻으로 주술, 예언 따위의 능력 또는 절대적인 권위, 절대적인 권위적 지배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후에는 예언이나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초능력이나 많은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이나 자질을 뜻하게 되었다. 추종자들이 지도자가 갖추고 있다고 믿는 경외로운 속성이나 마력적인 힘, 또는 사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인격적인 특성을 뜻하는 말로 발전하게 되었다.

종교지도자만이 아니라 세속적·정치적 지도자들에게서도 카리스마를 찾아볼 수 있다. 현대에는 특별한 능력이나 자질을 지닌 사람이 자신을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내세워 권능을 신에게 받은 것처럼 행사하였는데, 나폴레옹․히틀러․스탈린․마오쩌둥(모택동) 등이 이런 지도자였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에 의해 학술적인 용어로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베버는 1920년의 저서 ‘경제와 사회’에서 카리스마적 권위를 전통적·법률적 권위와 구별되는 형태의 권위로서 정식화했으며, 이런 권위가 변형되는 과정을 ‘카리스마의 일상화’(routinization of charisma)라고 표현했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대중적이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사람들을 카리스마적이라고 하지만, 원래의 뜻에 의하면 예수나 나폴레옹처럼 비범한 인물들만을 카리스마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막스 베버는 지배의 정당성 유형화에 이 개념을 사용하여 사회과학 학술용어로서 널리 일반에게도 쓰이게 되었다. 베버는 지배를 합리적 지배, 전통적 지배, 카리스마적 지배의 3유형으로 정식화하였다. 카리스마적 지배란 카리스마적 자질을 지닌 지도자에 대한 개인적 귀의(歸依)와 승인(承認)에 바탕을 두는 지배이다. 참된 카리스마는 권위의 원천이 되며 사람들에 대해서 승인과 복종을 의무로 요구한다. 이 복종과 승인은 지도자가 행하는 기적에 의하여 강화된다. 이리하여 복종자는 지도자와 전인격적으로 맺어지고 신뢰와 헌신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 지배관계는 관료적 절차나 전통적 관습 또는 재정적 뒷받침에 의거하지 않고 지도자 고유의 카리스마에 대한 내면적인 확신에만 근거하고 있어 구조적·재정적으로도 불안정한 관계이다. 또한 복종자의 귀의의 원천인 카리스마의 증명이 얼마동안 나타나지 않을 경우 카리스마적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지도자는 비참한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카리스마가 유효하게 작용하는 한 우회적 절차를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위기적 상황이나 혁명적 상황에 걸맞는 지배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카리스마가 혈통이나 지위 속에 일상화되어 지위 그 자체에 카리스마가 발생하는 관직카리스마나 카리스마가 대대로 이어져가는 세습카리스마도 있으며, 카리스마가 조직이나 제도에 정착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정치사회에서는 매스미디어를 통한 정보조작에 의하여 의사(擬似)카리스마를 만들고 지배의 정당화를 꾀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카리스마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정의하기 어렵지만 존재하고 있는 매력을 우리는 카리스마라고 통칭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가나 학자, 배우들이나 스포츠맨들에게서 카리스마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가령 강한 눈빛을 뿜는 김용옥 교수의 강의나 조용기 목사의 설교, 이명박 시장의 행정을 카리스마의 전형으로 꼽는 사람들이 있고, 최민수나 강수연의 연기를 두고 그들에게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는 이도 있다. 또한 개성 강한 김선아와 쿨한 연기를 하는 배종옥을 두고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들은 오세훈 서울시장 한나라당 후보를 부드러운 카리스마라 하기도 하고 강금실 서울시장 열린우리당 후보를 금실 카리스마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영웅적 리더십뿐만 아니라 강력한 이끌림 현상을 두고 카리스마라 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카리스마란 리더의 자극에 대해 자부심과 신뢰감을 얻고 주어진 의무 이상으로 일을 수행하려는 동기 부여 정도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렇게 카리스마란 말의 뜻이 일정하지 않고 또 세대에 따라 변질되어 가는 것은 원래 카리스마의 어원이 그랬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약성서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는 카리스마란 말은 원래 당시 그리스에서 ‘거저 베푸는 호의’,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말을 바울이 성령의 은사, 즉 ‘하나님의 선물’을 뜻하는 말로 사용했다. 바울의 생각, 즉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성령은 같으나 그것을 받아 하는 역할은 다르다는 뜻이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인 은사, 어떤 사람에게는 강연을 잘 하는 능력인 은사를 , 어떤 사람에게는 배우로서의 능력인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공부 잘하는 능력인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운동을 잘하는 능력인 은사를 하나님이 그 사람의 자질로 준다는 뜻이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있는, 초기 기독교에서 소명(召命), 즉 은사란 의미의 카리스마를 막스 베버는 확대 해석하여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확립시켰다. 베버는 인간의 지배형태를 셋으로 분류하였는데 그것은 법률에 따른 지배(합법적 지배), 관습에 따른 지배(전통적 지배)와 카리스마적 지배였다. 베버는 보통과는 다른 초자연적, 초인간적 능력을 통해 맺어지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카리스마적 지배라고 이름하여 지배형태의 하나로 만들었는데 어쩌면 후기 역사에서 전설처럼 열리게 될 과일, 카리스마를 지적했는지도 모른다.

후일 유치원(Kindergarten)을 처음으로 실시한 프뢰벨의 은물(恩物: 자신이 창안한 놀이감)도 카리스마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어린 아이에게 놀이도구야말로 한없는 카리스마일 것이다. 자발적인 분위기는 학생들이 원하는 교사의 카리스마일 것이고, 지식에 굶주린 사람에게 김용옥은 신앙일 테고, 도시의 공해로 찌든 서울 사람들에게 청계천은 카리스마일 것이며, 남자에게 굴종을 강요당한 이 땅의 여성들에게 배종옥은 카타르시스의 카리스마일 것이다.

배용준 같은 배우들이 특히 일본인 여성들에게 가진 매력, 여성 정치인들에 대한 부드러운 리더십의 기대, 이 모두 카리스마의 다른 형태일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베버의 근대로, 근대에서 후기 산업사회로 세월이 변하면서 카리스마의 형태는 수없이 사라졌지만 카리스마의 전형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스어인 카리스(charis)는 성서에서 그 번역을 대개 은혜(grace)로 하고 있다. 이 은혜란 단어는 구약성서는 없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 단어를 처음 쓰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때 이 단어 “은혜”의 뜻은 ‘누림이 되신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설교가 끝난 후에 기독교인들이 “은혜 받았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누림이 되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면 은사(gift: charisma)와 은혜(grace: charis)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charisma”는 “a gift of grace”, “a gift involving grace”이다. 즉 은사란 은혜의 은사, 은혜를 포함한 은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은사는 외적인 능력을 은혜는 내적인 누림을 의미하는데, 그 외적인 은력인 은사는 반드시 내적인 은혜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에 바탕을 둔 외적인 은력만이 참 은사, 즉 카리스마란 뜻이다.

성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데 그는 엄청난 능력, 즉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하고 우상으로 말을 하게도 하는 큰 이적을 행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은 전혀 없고 위엄과 권위와 능력만이 있었다.

당신은 그 어떤 카리스마를 하늘로부터 선물로 받았는가. 은혜는 없고 능력만이 있나? 아니면 은혜에 바탕을 둔 능력이 있나? 아니면 은혜만이 있나? 다른 말로 하면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은 전혀 없고 카리스마만이 있나? 아니면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을 갖춘 카리스마가 있나? 아니면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만 있나? 나는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인격의 감화력인 은혜가 없는 그 어떤 능력(카리스마)도 갖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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