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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부활절 조회 수 8568 추천 수 70 2007.04.22 19:10:24
성경본문 : 요한복음 21:1-14 
2007.04.22. 요 21:1-14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느냐, 혹은 아느냐 하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말이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보도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부활 현상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입니다. 부활 사건 직후에는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요 20:9절에 따르면 베드로와 요한은 빈무덤을 보았지만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요 24-29절에는 토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제자들이 어떤 집에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신 적이 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예수님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던 토마도 말만 듣고는 믿지 못한다고 했는데, 현대인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만약 어떤 종교 전략가가 기독교를 창설했다면 부활 이야기는 제쳐놓았을 겁니다. 부활 없이도 예수님에게는 우리가 배우고 따를만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귀한 가르침들은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키고 삭개오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런 것만 해도 공자나 석가 못지않은 존경을 받을 만합니다.
부활은 오히려 현대 지성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 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 사건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병이 낫는다거나 도덕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모든 기독교적인 삶은 무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배수진과 같습니다.

티베리야 호숫가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부활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설명할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이에 관한 복음서의 설명도 별로 논리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과 분명히 죽어서 무덤에 묻히셨던 분이 제자에게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만이 단편적으로 보도됩니다. 이런 증거만 놓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요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찜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20장으로 이미 일단락된 복음서에 21장을 보충합니다.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 기술된 20:30,31을 읽어보면 요한복음이 원래 20장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순전히 예수님의 부활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21장을 보충한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21장의 저자를 다른 사람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두 장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다루고 있는 20장과 21장 사이에는 시공간적으로 차이가 큽니다. 약간 어색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20장에는 세 번의 부활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난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물론 그곳은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 근처의 아리마태아 요셉의 가족 묘지입니다. 2) 그날 저녁에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3) 여드레 후에 앞서 언급한대로 주님은 토마가 포함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이곳도 예루살렘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 21:1-14절의 배경은 20장과 전혀 다릅니다. 이곳은 가나안의 남쪽 지역인 유대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북쪽 지역인 갈릴리의 티베리아 호숫가입니다. 일곱 명의 제자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10절에 따르면 부활의 주님이 갈릴리로 간다는 말씀이 있지만 그것이 곧 일곱 명의 제자들이 티베리아 호숫가로 몰려온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일상생활로 돌아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동료들에게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그들이 모두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그들이 확실하게 믿었다면 지금 한가하게 고기를 잡으러 다닐 때가 아닙니다. 또한 그건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걸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여전히 그들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누가 보아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일어난 사건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베드로의 제안에 따라서 고기를 잡으러 나선 이들은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녘에 부활의 주님은 호숫가에 서 계셨지만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무엇을 좀 잡았나 하고 물었고, 제자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일상적인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일렀습니다. 그 말을 따르자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장면에 대한 보도인 누가복음 5장(1-11절)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직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기 이전인 시몬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날 밤에도 시몬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그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고, 그물이 찢어질 지경으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두 이야기가 비슷한 이유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든지 아니면 각각의 서로 다른 전승이 우연하게 맞아떨어졌다는 데에 있겠지요. 오늘 우리가 그 모든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경험은 제자가 된다는 것과 긴밀히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잘 돌보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만 나타난 현상이라는 사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제 본문이 새롭게 발전됩니다. 예수님에게 사랑을 받던 제자인 요한이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물에 많은 고기가 잡힌 걸 보고 처음 베드로가 제자로 부름 받던 그 순간을 기억한 것인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그 특유의 성격으로 몸에 겉옷을 두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제자들은 그물을 챙긴 후 배를 끌고 뭍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육지에 숯불, 생선, 빵이 놓인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물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게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뭍으로 끌어올려 고기를 헤아리자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숫자가 베드로에 의해서 전도된 사람들의 숫자라고 말하기도합니다. 12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일상적인 말씀만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티베리아 호숫가의 사건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라고 각주(脚註)를 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처음 나타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가 아니어서 숫자에서 제외된 것 같습니다.

묻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그 흐름이 별로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거리가 백 미터쯤 떨어진 탓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자들이 허겁지겁 육지로 가서 예수님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성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분명히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가 매장까지 당하신 선생님이 다시 자기들 앞에 나타나셨다면 무언가 질문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들은 아무 말도 없습니다.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무덤에 있었던 삼일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인지, 정말 부활하신 건지, 당신이 바로 그 예수님이신지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기자는 그 이유를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해명합니다.(12절)
여러분, 지금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원초적 자리로 들어온 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두 가지 분명한 사실에 근거합니다. 첫째,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진술에 논리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사건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예수님의 부활은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근거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뉴턴의 기계적 역학은 그 이전의 이론에 의해서 이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이론인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연과학이 별로 신빙성이 없다는 게 아니라 부분적인 진리인식이라는 뜻입니다. 자연과학을 말이 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말이 안 되는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현현은 제자들에게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제자 자신들도 부활을 믿을 수 없었지만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이 자신들 앞에 나타난 것만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그럴듯한 말로 꾸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뒤가 딱 떨어지는, 알리바이가 되는 이야기로 각색하지 않고, 거칠지만 자신들의 경험을 그대로 전하기만 했습니다. 자신들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꼼꼼하게 설명할 자신은 없었지만, 죽었던 예수님이 자신들 앞에 나타난 것만은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훗날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를 비롯한 여러 편지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사실을 그대로 믿습니까? 믿을 수 있나요? 믿기 전에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는 그렇게 믿기 쉽지 않습니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면 믿는 시늉을 하겠지만 정말 그런가 하고 따지고 들면 믿지 못할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말이 안 되는 것을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고 단지 제자들의 경험만 있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만 아니라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이기도 합니다. 말이 안 되는 사건이 어떻게 제자들에게 분명한 경험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말이 안 되는 걸 믿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역설적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말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사실을 훨씬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말에 가서 모든 창조의 비밀이 드러나게 될 그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요령껏 설명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이 완성된 종말로부터 거꾸로 돌입한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 그 종말에 이르지 못한 제자들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어떤 사건을 경험한 것뿐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을 아주 평범한 제자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떤 소년이 혼자서 UFO를 만난 것과 비슷한지 모르겠군요.
여러분은 성서에 근거한 저의 이런 설명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즉 종말의 생명이 어떻게 현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좋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영인 성령에게 자기의 삶을 의존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부활생명을 환하게 경험할 것입니다. 그 생명의 놀라움 앞에서 기쁜 노래를 부를 날일 올 것입니다. 본문 7절에 요한의 외마디가 여러분의 입에서 터져 나올 것입니다. “저분은 주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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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April 22, 2007
*.150.14.63

오늘 설교는 <설교듣기>가 없습니다.
저희가 오늘 작은교회로 야외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깜빡하고 엠피쓰리를 빠뜨리렸습니다.
교회에 돌아와서 설교듣기를 원하는 분들을 위해서
혼자 녹음을 했는데,
23분쯤 되는 부분에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헛수고가 되고 말았군요.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하고 포기했습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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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가을소풍

April 25, 2007
*.79.237.76

요한복음을 읽으며 20장과 21장 사이에 흐름상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분명히 받았었는데
오늘 말씀을 읽으며 답을 얻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본격적 신학공부를 한 적 없는 저같은 초짜에겐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항상 목사님은 작은 답을 얻게 하시는 반면, 크고 무거운 물음을 짊어지게 하시는군요....
특히 오늘의 말씀에 담긴 무게는 평생을 두고 감당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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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무공해님

April 25, 2007
*.181.161.183

아... 그러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왜 설교듣기가 없을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설교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혼자서 녹음을 하셨다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녹음 도중에 전화가 왔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속상하셨겠어요...
앞으로도 좋은 말씀 부탁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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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流水不爭先

April 25, 2007
*.173.40.129

목사님
일단 설교는 잘 들었습니다.(읽고도 들었다 함은 저의 주관적 표현 ?)
말씀 말미에 성령님께 자기의 삶을 의존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경험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문제는 성령님의 존재가 인식되어야만 의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못한 자신의 현실에 조급증만 일어나고
일고 또 읽어도 이론적으로 목사님 말씀이 옳은데 손에 잡히지를 않고
목사님의 조직신학 강의내용중(신학마당에 실려있는 것)에서와 같이 어두움이 밀려와
마음이 답답합니다.
저의 조급증이라 생각되어서 기다리는 마음으로 목사님의 말씀 듣고 또 듣겠습니다.
지면을 통한 목사님과의 만남이 진정 기쁘고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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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April 25, 2007
*.150.14.46

씽크바이블 님,
솔직하고 필요한 질문이군요.
어두움이 밀려온다는 건 좋은 징조입니다.
그런 걸 경험하는 사람만이 빛을 찾기 마련입니다.
빛을 발견하는 것도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빛은 동시에 어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며 어둠입니다.
성령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하는 궁금증이 있지요?
그것은 곧 성령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는 어떤 존재일까요?
존재인가요, 운동인가요?
이런 질문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는 그것 하나도 독립된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령 경험은 어떤 사실적인 언어로 기술되는 게 아니라
느낌으로 다가올 겁니다.
그 느낌은 막연한 게 아니라 인식론적인 거라고 보아야지요.
본인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해명할 수 있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그의 삶에서 생명의 영이 경험되는 겁니다.
문제는 그런 느낌이 과연 기독교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겠지요.
이를 위해서 우리는 성서를 바르게 공부하고
더 나아가서 신학을 공부하는 게 좋겠지요.

아무래도 비유적으로 설명해야겠군요.
진정한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이 자신들을 끌어가는 경험을 한답니다.
소리의 존재론적 힘이 그를 사로잡는 거지요.
시인들도 자기들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언어가 자신에게 오는 경험을 한답니다.
그런 경험은 누가 가르쳐 줄 수 없어요.
성령 경험도 그렇습니다.
예술가들이 영감을 받듯이
기독교인들도 성령의 힘에 사로잡힙니다.

편안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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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流水不爭先

April 26, 2007
*.173.40.129

목사님

대구와 서울이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집니다
목사님의 사랑넘친 답변 감사드립니다.
성도의 교제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지금처럼 온라인으로서의 만남이
얼굴을 마주대하는 만남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하며.

주님의 보살핌이 목사님과 함께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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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야생초편지

April 27, 2007
*.148.120.50

목사님.이렇게 글로 인사를 먼저 드립니다.
한달전에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바로 미국에 계시는 저의 아버지를 뵈러 갔다가
한달간 머무르며 목사님의 설교비평책과 인터넷의 글들을 계속 읽으며 지내다 그저께 돌아 왔지요.
저는 목사님과 비슷한 연령의 중년의 삶을 보내고 있고,오래 직장생활 하다가 이제는 이곳 강화에
조그만 집을 지어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20년간 맥주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술을 무척 탐하게 되었고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에 살다보니 더욱 많은 술을 먹다가 심한 중독자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2년전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서 술을 끊고 이제는 정말 하나님때문에 하루하루 기쁘게 살고 있지요.
2년전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갈급함으로 성경을 보고 많은 신앙의 책들을 보며 살았지만
늘 채워지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지내던중,
목사님을 알게 되고 그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말씀들이 저에게 새롭게 다가와
요즘은 목사님 글을 만나는 기쁨으로 지내고 있지요.
어제 서울 모임에 참석하려 했지만 전날 너무 늦게 서울에 도착하여 피곤하여 가지 못했습니다.
다음달에는 꼭 참석하여 목사님과 다비안 가족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제가 술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신분도 하나님이시고
또 목사님을 만나도록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감사 드리고
그리고 목사님께도 감사합니다.
언젠가 이곳 강화에 목사님을 모실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목사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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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April 28, 2007
*.150.14.161

야생초편지 님,
반갑습니다.
강화에서 사시는군요.
건강하시를 바라고,
다음 달 서울 오프모임에서 만나뵙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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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기타 하늘생명의 밥 [1] 2006-08-20 15066
178 기타 예언의 성취 2006-08-13 12362
177 기타 다윗왕조의 존재근거 [1] 2006-08-06 15371
176 기타 현재의 고난, 7월30일 2006-07-30 14196
175 기타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2006-07-16 14273
174 기타 거룩한 두려움, 7월9일 2006-07-09 11286
173 기타 생명이 죽음을 삼키다, 7월2일 2006-07-02 14821
172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8021
171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9828
170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9851
169 기타 마른 뼈와 야훼의 영 [1] 2006-06-04 10139
168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9918
167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8271
166 기타 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5월7일 [2] 2006-05-07 9093
165 기타 하나님의 자녀, 4월30일 [1] 2006-04-30 9924
1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7546
163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8562
16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8151
161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9431
160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9174
159 기타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4] 2006-03-19 11733
158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9806
157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0824
156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8363
155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9621
154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0368
153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0401
15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8915
151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1362
150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8543
149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9184
148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9823
147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9056
146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8489
145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7162
144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8269
143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7298
142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9670
141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8548
140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8615
139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8973
138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9115
137 기타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1] 2005-10-16 12826
136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8862
135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9003
134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8760
133 기타 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6] 2005-09-18 10545
132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7836
131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8172
130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8545
129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8058
128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8140
12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8079
126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6703
125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9170
124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7997
123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7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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