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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시작되었다.

성령강림절 조회 수 11851 추천 수 99 2007.08.19 14:24:37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0819.mp3 
성경본문 : 누가복음 12:35-48 
mms://wm-001.cafe24.com/dbia/070819.mp3혁명은 시작되었다.
2007.08.19. 눅 12:35-48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락은 예수님의 비유(35-40)이고, 다른 단락은 그 비유에 대한 부연설명(41-48)입니다. 첫 단락의 비유는 아주 간단해서 누가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3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마치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한 밤중에 혼인 잔치를 열었다고 합니다. 신랑 아버지는 신랑을 데리고 한 밤중에 신부 집에 갔다가 신부를 데리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가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집을 지키는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도 한눈팔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신부를 데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맞아주지도 않는다면 주인은 기분이 몹시 상할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일이 간혹 일어났겠지요. 신부 집에 갔다가 일이 늦어져서 며칠을 더 묶을 수도 있겠고, 돌아오다가 어려운 일이 생겨서 시간이 지체될 수도 있으니, 기다리다가 실수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행복한 종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조금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지키고 있다가 문을 열어주는 건 종들에게서 당연한 일인데, 무슨 일인지 이 이야기는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고(37a) 합니다. 행복은 주인의 몫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불시에 돌아와도 종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런데 본문은 잠도 자지 않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기다리던 종들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b)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요? 허리에 띠를 띠어야 할 사람들, 시중을 들어줄 사람은 종입니다. 주인은 늘 시중을 받아야만 합니다.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이 있듯이 종은 늘 종으로 살아야 하고 주인은 늘 주인으로 대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세상의 당연한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에서는 이런 세상의 질서가 전복됩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이 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이 됩니다. 주인이 종을 시중듭니다. 이건 분명히 혁명입니다. 고착된 세상 질서가 뒤집어지는 혁명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이 세상에서 실제로 가능할까요? 비슷한 일들은 간혹 일어나기는 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로마가톨릭의 교황은 가난한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이벤트를 벌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긴 그 일을 따라하는 겁니다. 개신교회에서도 그런 행사를 하는 교회가 제법 많습니다. 섬기는 삶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이런 건 그야말로 일종의 퍼포먼스에 불과합니다. 백화점 식료품 코너에서 행하는 맛보기 행사와 비슷합니다. 이런 행사가 이 세상의 계급적 질서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 같은 분들의 봉사는 어떻습니까? 그녀의 사랑과 희생은 휴머니즘의 극치입니다. 많은 이들이 테레사에게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았겠지만, 이 세상의 험악한 위계질서는 요지부동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장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은 아마 칼 마르크스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는 프롤레타리아(무산자)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능력만큼 노동하고 필요한 것만큼 가져갈 수 있는 세계를,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레닌과 모택동은 마르크스의 이념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서 방해가 되는 인간을 숙청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상황이 더 나빠졌는지 모릅니다. 그 어디에서도 주인이 허리에 띠를 띠고 종들을 시중드는 모습을 발견하기 힘듭니다. 시늉을 내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는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한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모르고 이상적으로만 말씀하신 거라고 말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삶의 짐입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주인이 섬김을 받습니다. 이걸 부인하기가 힘듭니다. 기독교인들도 역시 주인처럼 섬김을 받으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질서를 가르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기독교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삶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조건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소유를 지금 모두 처분해서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있으며, 노숙자와 알코올중독자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씻기고 입히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한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계속하기는 힘들 겁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이 허리에 띠를 띠고 종을 섬기는 일은 바로 주인이 하는 것입니다. 참된 봉사와 섬김은 주인에 의한 배타적 행위입니다. 그 주인은 구체적으로 이 세상 마지막 때 올 ‘사람의 아들’입니다.(40절) 물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는 섬길 줄 모릅니다. 이 세상의 질서를 우리는 바꿀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변혁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개량에 머물 뿐입니다. 무한 경쟁에 빠져든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모토로 시작된 공산주의도 결국 관료주의에 빠져들어 몰락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의 질서는 우리의 몫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인 종말에 우리에게 다시 오신 ‘사람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몫입니다. 세계의 진정한 혁명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우리가 무력감이나 패배주의에 빠져 있어도 괜찮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우리의 능력이 닿는 대로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는 세상을 향해야 앞으로 나가야겠지요. 학벌과 학력으로 인간이 재단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나가야겠지요. 오늘 우리는 이런 꿈을 꿀 수 있을까요? 대통령을 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 세상 말입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하면 어떨까요? 만약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게 훨씬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만 한다면 아무리 옆에서 대통령을 하라고 해도 아무도 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수상을 뽑아야 하는데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하네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정치적인 관심이 많은 건지, 아니면 자기의 삶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이전투구 식으로 대통령을 하려고 나선다는 게 그렇게 좋은 모양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새로워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노력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래와 위가 바뀌는 질서는 천지가 개벽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우리에게 실현될 세계입니다.

깨어 있는 문지기
우리에게 큰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할 일은 있지 않을까요? 이제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는 세계전복을, 또는 세계혁명을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그렇게 엄청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지듯이 다행스럽게 이 사명도 아주 단순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십시오. 그 종은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지기의 역할이 바로 그 종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대 혁명은 문을 여는 데서 시작됩니다.
문을 여는 일은 대단한 게 아니지만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 문지기는 일단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온다고 했으니 그거 당연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더 나아가서 확신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도 늘 이런 위기에 부딪쳤습니다. 예수 재림의 지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이런 문제 때문에 교회 공동체를 떠난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둘째, 이 문지기는 깨어있어야만 했습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깨어있다는 건 간단하지 않습니다. 본문 40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우리의 의지는 믿을 게 못 됩니다. 아무리 다짐해도 우리의 의지는 쉽게 흔들립니다. 주님의 재림이 일정하게 결정되어 있으면 거기에 맞추어 준비할 수 있지만 언제인지 모른다면 준비하겠다는 우리의 의지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저는 위에서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는 그런 새로운 세상은 그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문지기입니다. 하나님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그 때에 맞추어 문을 열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도 그걸 느낄 겁니다. 깨어 있지 못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물론 깨어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또는 실제로는 깨어있지 못하면서 깨어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어떤 분은 새마을 운동 차원의 일을 하면서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고 계시더군요. 누가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하는 게 무엇인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음악의 존재론적 깊이를 경험한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주인이 온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40절 말씀처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온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새로운 ‘에온’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선 구약성서의 ‘에온’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에온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세상을 공간적인 의미의 ‘코스모스’라고 생각했지만 유대인들은 시간적인 의미의 에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의 세상은 악한 권세가 다스리는 과거의 에온입니다. 이제 오게 될 세상은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리시는 새로운 에온입니다. 그 새로운 에온은 이 땅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입니다. 단순히 무늬만 달라지는 세상이 아니라 체질 자체가 달라지는 세상입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 사이에 유비(analogia)는 없습니다. 애벌레 상태에서 나비 상태로 되는 세상을 비교할만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결국 묵시문학의 방식으로 그 세상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니엘의 환상과 이사야의 환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세상의 질서가 완전히 전복된 세상이 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극단적인 상징도 이것을 말합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큰 붉은 용이 나오고, 하늘이 종잇장처럼 말립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서에 나오는 그런 서술이 너무 낯설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의 세상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원래부터 이렇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산은 바다였고, 바다는 산이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게 바뀔 수도 있습니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대접을 받고 종이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단정하고 살아갑니다. 그게 세상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 묶여 있는 한 우리는 성서의 세계를 전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 세계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공생애에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의 가르침은 오직 이 사실 하나에 집중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됩니다. 노동시장에서 열 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이 모두 한 데나리온씩 받았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을 잘 섬겼다고 자랑하던 사람은 외면당하고, 주님을 위해서 한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인정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세상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오늘 우리가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이런 질서가 완전히 해체되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전적으로 새로워진 질서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부활생명의 실체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혁명입니다. 그리고 그 혁명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깨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깨어서 준비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단 하나의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처한 형편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전혀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실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 새로운 세상,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새로운지, 얼마나 혁명적인지, 얼마나 전복적인지 영적인 눈을 여는 게 중요합니다. 또한 오늘 우리 개인의 삶과 사회 질서가 얼마나 새롭게 달라져야 하는지 인식하며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분명히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 하는 문지기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시작된 세상의 참된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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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August 19, 2007
*.244.165.224

목사님의 설교를 챙겨 듣고있었는데, 오늘 설교의 제목은 매력적이어서 당장 열어보았읍니다.

성서의 얘기로 충분한데 왜 맑스를 끌여들였는지,
벌써 여러번 제기했던 것이기도 했는데 다시 한번 의문을 보냅니다.

1. 왜 사회학인 맑시즘을 종교와 비교하는가?

대상범위와 가정하는 시간대가 근본적으로 다른 두 대상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타당한가?

사회학: 당대사회를 대상으로 인간이성을 이용 (원인과 책임 모두가 인간에게 한정됨)
종교: 우주의 시작과 종말, 유사이래의 인간의 모든 이성과 감성, 영혼, 이 모든것을 관장하는 신

(당대 사회를 대상으로 인간 이성이 다다를 수 있는 최대의 사회를 지향했던 사회학으로서의 맑시즘, 그것도 전체주의로 결론이 나버린 소련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맑시즘의 전통을 부정할 수 없는 유럽의 사민주의에 대한 언급은 배제한 채, 즉 가장 나쁜 예에 해당하는 맑시즘의 한 예를 들면서 성서의 아름다운 비유와 비교하는 방식은, 비교의 대상은 등가여야한다는 기본적 전제를 부정한 논리적 오류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2. 하나님의 혁명은 미래적 경험으로 유보될 수 밖에 없는가?

(현재적인 경험으로 기능하기위해선 당대성을 벗어날 수 없다.
기독교적 혁명과 전복을 맑스없이 충분히 설명가능할텐데, 굳이 기독교의 우위를 해명하기위해, 맑스의 사회적 전복을 지나치면서도 편리하게 단순화시켜, 위아래가 전복되는 하나님나라의 혁명을 해명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개인화 관념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자칫 당대성을 벗어났다라는 오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예화를 사용할 때, 불교도가 기독교를 비방하면서, 약자들을 방치해서 거둬들인 돈으로 십일조를 내고, 이런 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독교적 논리가 성서안에 있다라고 하면서, 성서의 전체맥락을 무시한 채 어느 한 구절을 제시하는 것으로도 연결될 수 있는 위험이 있을 수 있는 것이죠)

3.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 묵시적 종말은 기족교의 궁극적인 관심사일 것이다. 이 궁극적 관심의 실현을 위해 과연 맑시즘은 폐기처분되어야만 하는가?

(맑시즘의 부분적 오류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맑스가 옹호하고자했던 사회적 가치들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유럽의 사민주의, 그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있는 소위 미국주도의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만들어내고있는 경쟁과 파괴......)

* 지 목사님의 "인류는 사회주의를 할 만큼 훌륭하지 못했다"라는 말씀에 비유하여
저는 맑시스트가 될 만큼 훌륭하지가 않습니다.

저는 맑시스트라기 보다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로서는 이 둘이 크게 상치되지않읍니다.
왜냐하면 맑시즘은 사회학이니까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죠.

건전한 기독교도가 있고, 가끔은 아주 기계적이거나 광신적인 기독교도가 있을 수있죠.
가장 나쁜 모습을 비교의 예로 끌어들일때, 이미 그 말하는 사람의 기본태도가 보이죠.

진화론이 창조론과 동행하듯이,
아니 진화론이 기독론에 부드럽게 안길 수있듯이,
사회학으로서의 맑시즘, 오류가 없지않은 사회이론으로서, 버릴 것 버리고, 끌어안을 것 끌어안으면서,
기독교와함께 나아갈 수있는 여지는 없을까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정의가 왜 사랑의 전제로서 중요한지 아는 사람들에게는 요구하고싶네요.

글이 다소 논리적이지않을 수 있을듯 합니다. 만약 무례한 것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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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9, 2007
*.181.51.23

권 선생,
오랜 만이구료.
별 일 없이 잘 지내시고 있으시오?
위의 설교에서 내가 막시즘이 옳다거나 그르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실 거요.
인간 이념과 행위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
막시즘을 인용한 것 뿐이오.
왜 막시즘을 인용했을까요?
제목이 <혁명 ...>이니까 인용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소?
나는 막시즘을 나쁘게 말할 생각이 하나도 없소이다.
오히려 자본주의보다 공산주의가 훨씬 낫다는 뉘앙스로 언급하기도 했소이다.
양적인 면에서 전체 설교에서 막시즘에 관한 언급은 아주 짧은 한 패러그래프에 불과해요.
권 선생이 번호를 붙여 질문했으니까 그것에 따라서 답변하겠소이다.

1. 사회과학인 맑시즘과 종교인 기독교를 비교한 것에 대해.
글쎄, 나는 비교한다기보다는 성서의 세계를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서 인용했을 뿐이오.
위에서도 말했듯이 설교 전체가 맑시즘과 기독교의 비교로 진행된 건 결코 아니오.
그냥 지나가면서 한 마디 했을 뿐이오.
그리고 원칙적으로 말하면 맑시즘과 기독교는 매우 깊은 연관성이 있소이다.
사회주의는 원시 기독교에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소.
이런 문제는 아주 할 말이 많은데요.
그리고 여기에 관한 논문도 무지하게 많소이다.
왜 비교(?)할 수 있느냐하면,
맑시즘이나 기독교나 모두 인간, 해방, 구원, 역사를 말하기 때문이오.
누가 말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맑시즘은 기독교 종말론의 세속화라는 말도 있소이다.
그만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거지요.
둘다 해방을 말하기 때문이지요.
둘다 혁명을 말하기 때문이오.
아마 맑스도 신약성서와 구약의 희년 전승을 많이 공부했을 거요.

2. 하나님의 혁명과 미래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이오.
여기서 종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권 선생이 말하는 '당대성'이 언급될 수 있을 거요.
나는 언제가 신앙의 관념성과 개인주의화를 경계하면서 신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개량주의와 역사 진보주의를 넘어서고 있다고 믿소이다.
역사는 언젠가 단절된다는 거요.
그 언젠가가 곧 예수의 재림이며, 심판의 때이며, 세상 완성이고, 새로운 시작이라고 믿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역사 패배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런 종말론적 시각이야말로
역사 패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소.
비록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현재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절망하지 않는 거요.
종이 주인처럼 섬김을 받는 진정한 전복과 혁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졸지에, 우리가 자고 있는 한 밤중에 도적처럼 임할 것이라고 믿고,
또한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오.

3. 맑시즘의 폐기처분
권 선생은 사실관계를 호도하시는군. ㅎㅎ
나는 저렇게 말한 적이 없소이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지요.
맑시즘은 극단의 휴머니즘이라고 믿소.
그걸 왜 폐기처분한단 말이오.
그런 세상을 향한 우리의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누누이 말하고 있소.
다만 그것으로 세상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짚는 거요.
만약 그것으로 세상이 완성된다고 믿는다면
결국 인간은 절망하게 되고 말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런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걸 포기하겠소이다.
하나님 나라는 <전적인 새로움>이오.
그런 새로운 생명 앞에서는 휴머니즘도 상대화될 뿐이오.
참고적으로,
맑시즘은 매우 윤리적이고 당위적이지만, 비현실적이오.
오해하지 말아요.
나쁘다는 뜻이 아니오.
나는 우리 집에서도 정의와 평등을 이루지 못했소이다.
가족 사이에도 그건 안 되더이다.
그게 이루어진 집단을 나는 한번도 못 보았소.
수도원도 마찬가지일 거요.
그래도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에서
가치있는 삶을 실천해야 할 책임이 있는 건 분명해요.
그렇게 살아갑시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가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오.
이게 옳은지는 차치하고,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오.

조금 길게 썼는데,
이건 권 선생만을 향해서 쓴 건 아니오.
다비아의 정체성을 해명하는 데도 중요한 주제 같아서
관심이 있는 분들은 모두 보라고 이렇게 썼소이다.
다른 다비안들도 이런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해서요.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해묵은 질문보다는
권 선생이 제기한 이런 주제들이 우리의 신앙을 훨씬 건강하게 만들 것 같소.
이제 한 주간만 지나면 새 학기가 시작되네요.
수고하시고,
아자.
진정한 세상의 혁명과 전복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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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August 20, 2007
*.244.165.224

현실역사와 인간의 상대성을 강조하느라,
현실의 대부분의 것을 상대적이라는 범주에 밀어넣어,
신적인 영원과 비교되어질 위험이 여전히 있는 듯 합니다.

혁명을 얘기하면서
인간의 현실변혁의 노력은 상대적인 것이고, 찰나적인 것으로 환원되어질 수 있죠.

완벽한 정의와 평등, 실현 불가능하죠.
그러나 어느정도는 이루어갈 수 있죠.
이것이 인간의 피조성을 인정하는 겸손한 노력이 될 수도 있지않을까요?

이런 면에서도 상대성을 인정하지않을 수 없네요.
어제보다 정의와 평등이 이루어진 오늘의 상대성.
보다 바람직한 세상을 위한 현재로서의 현실이론이 갖는 정합성과 상대성.

묵시적 세계관의 강조가 가져올 수 있는 전복성과 순응성을 동시에 보는 듯 합니다.

위의 질문은 크리스쳔으로 살아갈 저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도인들이 갖는 '의식의 상투성'이
왜 이렇게 끈질기게 남아서 위력을 발휘하는지
늘 의문이었는데,
조금씩 발견해간다는 생각입니다.

맑시즘이 어설프게 기독교와 연결될 때,
모두에게 별 도움이 안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짧게 해보았읍니다.

위의 문제는 다시는 재론하지않으려했었는데,
역시 제가 실수한 것 같읍니다.

오늘 저녁 성서읽기 시간에 뵙겠읍니다.
오늘의 난해한 주제인
"부활"에 대해 고민해봐야겠읍니다.

긴 답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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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도루박

August 21, 2007
*.136.92.57

천상적인 것을 인간의 언어로 완전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로 표현하려는 노력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나라도래'라는 종교적인 관념을 맑스혁명에 빗대어 설명하려는 것이 '등가의 비유'원칙에 당연히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의미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자어인 '革命'이 쿠데타나 리볼루션보다 훨씬 성서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자의 발을 씻기심',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예는 단순히 주인이 충실한 종을 칭찬한다는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혁명적인 사건이고 이런 혁명적인 사건의 클라이막스가 神이 인간을 위해 죽으신 예수의 대속입니다. '능력껏 일하고 필요껏 분배하자'는 맑시즘과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우주론적 혁명'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31) 언젠가 역사의 종점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의 기다림, 또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언제올지 모르는 죽음 이런 것들에 대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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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August 21, 2007
*.244.165.224

도루박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혁명개념에 대하여서는요.

저의 댓글의 논지는
사회학일 뿐인 맑시즘을
우주적 퍼스펙티브를 가진 기독교적 혁명개념을 설명하기위해
부정적으로 이용하고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바는
이미 맑시즘에 대해 부정적인 기독교도인이 많은데
(제가 받은 인상으로는
맑시즘에 대해 꼼꼼하게 연구하거나 고민해본 사람이 많지않으면서 비판일색인듯 했습니다.)
왜 가장 나쁜 부분을 부각시켜,
부정적인 관념을 더 크게 할 뿐 아니라
공부해야할 필요성조차 없애버리게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죠.

제가 이러는 것은
맑시즘을 옹호하기위해서라기보다는
현실진단의 키워드인 맑스의 여러 중요개념없이
역사와 혁명을 얘기하는 것이
자칫 당대성을 망각한 정신적 위안에 머무를 수있기 때문이죠.

과거 제가 기독교 비판론자였을 때 (지금은 이런 사람들로 에워싸여있읍니다)
기독교적 교리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읍니다.
기독교도가 된 지금,
하나님 나라를
부분적으로 현재에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미션과 연결될 수 있는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는 신학적 틀로서, 세계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겠죠.

당대성을 잃어버린
혁명의 논의가 과연 얼마나 현실적일까요?

내가 몸담고있는 이 사회의 기본적 성격에 대한 진단과 비판없이
주인과 종이 뒤바뀐 상황이란
우리의 관념속에선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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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권요안

August 21, 2007
*.61.20.97

저도 역시 하나님나라와 마르크스의 사상을 단순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려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아니라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그 필요성이 과연 "하나님 나라를 부분적으로 현재에 만들어가는" 혁명의 "당대성"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지만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부분적으로 현재에 만들어가는 것"은 예컨대 앞서 댓글에서 말씀하신 "어제보다 정의와 평등이 이루어진 오늘"과 같은 의미일텐데, 그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정의와 평등'과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에서 실현될 "완벽한 정의와 평등"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정의와 평등일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완벽한 정의와 평등,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정의와 평등'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등'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묵시적 세계관에 있어서 "인간의 현실변혁의 노력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 때 방점은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변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한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한 현실변혁은 상대적인 변혁일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울여야할 노력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같은 상대적 현실변혁을 위한 노력이 아닌 절대적인 변화를 위한 다른 형태의 노력, 즉 목사님이 말씀하신 "깨어서 문을 열 준비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렇게 '깨어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 물론 인문학 전반이 모두 포함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 마르크스의 사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있어서 '혁명'은 부수적인 결과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혁명이 마르크스 사상의 전부라고 한다면 이미 소련의 붕괴와 함께 용도폐기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마르크스에 있어서 핵심은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해부'에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에 몸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인 한 말씀하신대로 마르크스의 사상은 여전히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의미있고 유효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부분적으로 현재에 만들어가는" 혁명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늘 우리 개인의 삶과 사회 질서가 얼마나 새롭게 달라져야 하는지 인식하"기 위해서 마르크스의 사상과 신학은 더 적극적으로 만나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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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August 22, 2007
*.244.165.224

권 요안님의 결론을 보면,
"마르크스의 사상과 신학은 더 적극적으로 만나야 하는 것 아닐까"라고 하셨읍니다.

그러나
만나는 지점은
"오늘의 '정의와 평등'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등'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처럼 신학적 연결관계때문이 아닌 것이죠.

이 지점에서 저의 의문은
당대성을 벗어난,
묵시적 상황에서 이루어질 혁명이란
묵시적 시기까지 유보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혁명이란
오늘을 살아가는
구체적 개인의 관념 속에서만 가능한 미래사건이 되고맙니다.

신학적 혁명개념을 관념화, 개인화의 위험에서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관념화는 불가피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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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권요안

August 23, 2007
*.61.20.97

마르크스의 사상과 신학이 만나는 연결고리는 '혁명'이 아니라 '깨어있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혁명'에 두면 '정의와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연적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룬 정의와 평등은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등과는 (냉정히 말하자면) 무관한 것입니다. 결국 혁명을 매개로 마르크스의 사상과 신학이 만나게 되면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을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해부'에 두고 현실 분석 도구로 삼는다면 현재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을 보다 근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현실을 명확히 파악하게 되면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등에 대한 이해 또한 점점 명료해지고 그에 대한 소망도 더욱 간절하고 확고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에 대한 근원적 파악이라는 '깨어있음'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깨어있음'을 연결고리로 한다면 마르크스의 사상을 통해 신학이 더욱 풍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관념화, 개인화의 위험"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신학적 혁명개념"이 관념화되는 것은 혁명이 "묵시적 시기까지 유보"된 때문이라기보다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시간에 대한 관념'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날 우리의 시간 개념은 직선적입니다. 직선적 시간 개념 안에서 "묵시적 시기"와 "오늘"을 수직선 상의 두 점, 그것도 아주 멀리 떨어진 두 점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묵시적 상황에서 이루어질 혁명"은 "당대성을 벗어난" 것이 되고 마는 것 아닐까요.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실천'을 너무 좁은 범위로 한정하고 있지 않은가하는 문제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기다림'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분명 기다리는 '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보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다'는 동사가 분명한데도 종종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고 보고만 있을거야?'라고 말합니다.

만약 현재를 지배하는 가치관을 전복하고, 현실의 불의와 불합리를 제거하는 것만 '실천'이라고 한다면 "묵시적 상황에서 이루어질 혁명"은 "오늘을 살아가는 구체적 개인의 관념 속에서만 가능한 미래사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실천'은 현재를 지배하는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기 위해 '깨어있는 것', 구체적인 현실의 불의와 불합리를 명확히 '보는 것' 그리고 "이미 예수님의 부활에서 시작"된 혁명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깨어서 보고 기다리는 실천을 하는 한 혁명이 관념 속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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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초신자의 특권

August 23, 2007
*.244.165.224

그렇죠.
맑스없이 기독교적 혁명은 설명이 가능합니다.

맑스는 역사발전, 그것도 인간이 만들어가는 역사발전을 전제합니다.
맑스에게 모든 가치의 준거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묵시적 상황에서의 혁명은 이런 직선적 시간을 상정하지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우선성을 강조하다보니까
인간의 노력은 "깨어서 보고 기다리는 실천"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시간을 크로노스, 카이로스, 어떻게 표현하든, 묵시적 상황은 미래이죠. 2000여년 동안 유보되어왔죠.
아니 선취(?)된 것인가요?

이렇게
이 둘은
기본전제와 궁극적 관심사, 시간관, 인간관, 자연관 등등이 너무나 다릅니다.
어느 한 쪽을 부정적으로 이용하는 한은요.

권요안님의 결론, 가능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우주적 시간을 상정하기때문에 뒤따를지도 모르는 '추상화의 오류'란 인간학적 용어일 뿐일까요?
이렇게 긴 시간을 가정하고있기때문에
자칫 당대에 대한 관심이 모조리
세상을 쫒는 것으로 추상화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죠. (부르조아 혁명이 부르조아 독재로 변질되었듯이 모든 현실적 노력이란 불완전하다라는 논리로)

그러나 이런 추상화의 오류로부터 신학적 혁명개념을 건져내는 방식은
현재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 속의 예언가들이 모두 당대성 속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했던 것 아닐까요?
어느 왕조를 옹호한다라는 당파성에서부터
저울의 추가 공정해야한다는 사회적 정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이 당대적 실천일 수밖에 없는데도불구하고,

현실의 개입이 주는 긴장과 불완전성을 내세우면서
혁명적 상황을 계속 미래로 유보하면서
기다리는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면서
기존질서를 강화시켜나가는 데 기여하지않기를 바랄 뿐입니다.(이 부분은 권요안님의 글에서 느꼈다는 것이 아니라, 당대성을 약화시키고, 미래적 내용만 강조할 때 자칫 생길 수도 있는 우려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권요안님은 맑시즘과 기독교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하셨는데......

저와는
연결방식이 조금 다른 것 뿐 아닌가라는 생각도 드네요.

하여튼 저의 고민은
기독교적 논리를 (세속적) 지식인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려는 노력이자
개인화, 관념화로 흐르면서 기독교적 흐름이 자칫 독백으로 되어지는 경향을 분석하고자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을 듯 합니다.

기독교가 개인의 신앙차원일 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외연을 넓혀나가는 길은
저는 맑시즘을 잘 선용하면 어느정도는 도움을 받을 수 있지않나 라는 생각을 하는
초신자입니다.

개개 기독교인을 만나보고난 뒤,
기독교가 우리 사회와 지구에서 행하는 역할을 보면서
독백을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를 잠깐 고민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진단과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제가 발견한 것은
기독교(도)가 역사니 혁명이니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만,
너무나 큰, 그리고 먼 하나님나라를 전면에 내세우며
당대 역사적 의미를 찾지않고,
그런 개념들을 개인의 아니면 묵시적 차원으로 지나치게 좁히거나 넓힌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보았읍니다.

이런 생각들이 어떻게 변화, 발전되어갈 지 저도 궁금합니다.
profile

[레벨:2]솔나무

August 24, 2007
*.179.6.78

목사님,
바뻐서 늦게 설교를 새벽시간에 들었습니다.
다른때의 설교보다 참으로 귀하게 들었습니다.
감사하며...
우리들의 삶속에 예수의 혁명이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점점 성장되어지길 간절히 바라며...
profile

[레벨:3]코람데오

August 24, 2007
*.109.124.38

정목사님의 간동적인 설교말씀 잘 읽었으며 소중한 댓글들 잘 읽었습니다.
맑시즘은 매우 윤리적이고 당위적이지만, 비현질적이란 말씀 공감합니다.

사실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조차도 맑시즘보더 훨씬 윤리적이며 높은
도덕적 당위성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를 통하여 재 해석된 율법 즉 새로운
개명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사회는 맑시즘에서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사회의 모형을 담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초신자의 특권님의 아래 질문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지점에서 저의 의문은
당대성을 벗어난,
묵시적 상황에서 이루어질 혁명이란
묵시적 시기까지 유보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혁명이란
오늘을 살아가는
구체적 개인의 관념 속에서만 가능한 미래사건이 되고맙니다"

묵시적 시기까지 유보된 혁명 때문에 혁명은은 관념속에 가능한 미래
사건이 된다고 말씀 하시는데 저는 그 반대로 생각 합니다.

즉 묵시적 시기까지 유보된 혁명을 소망하며 그 혁명에 참가하고자하는
소망을 가진자에게, 오늘 현재속에서의 혁명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묵시적 시기까지 유보된 혁명은 현재적인 것 이며 현실이며 오늘의
사건이 되는 것 입니다...

묵시적 시기까지 유보된 혁명을 믿음으로 소망하지 않고 현재의 혁명에 치중하면
인간의 "죄성"은 결단코 오늘의 혁명에 성공하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 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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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푸른적토마

August 25, 2007
*.84.242.69

설교듣기 실행이 않되는데 방법좀 알려 주세요
profile

[레벨:1]원숭2

August 26, 2007
*.248.77.47

1.Windows Media Player의 상단의 '도구'를 클릭하시고 '옵션'을 클릭하신후에,
2.'파일형식'탭에서 모두선택을 클릭 하시고,
3.'네트워크' 탭의 '스트리밍 프로토콜'에서 TCP,HTTP 두개만 체크하시고, '스트리밍 프록시 설정'의 '구성' 을 클릭하신 후에 '프록시 서버 사용안함'에 체크하신 후
4.맨아래의 '적용'을 클릭하시고, '확인'을 클릭하세요.

저도 목사님 설교를 듣고 싶었는데 듣지 못해서 고생한 적이 있거든요. 네이버에서 알아보고 여러번 시도 끝에 이 방법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한 번 해보세요. 꼭 들을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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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균형

August 26, 2007
*.96.174.252

진지한 토론을 통해 여러 생각거리를 얻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사회학에서 다루는 문제와 관점을 종교의 영역에서 다루는 시각에 대한 초신자 특권님의 이의 제기이지요. 과거를 근거로 미래를 예측하고 당위를 확보하려는 의도에 대한 지적인가요?

일정부분 공감 합니다. 미래를 기준으로 과거를 판정하는 시각은 비록 지향성은 담보할지라도 역사성은 결여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입니다. 좀더 확대해 보자면, 미래를 기준으로 그 기준에 함몰되서 현재를 진단하는 시각 역시 역사의 단절성을 가져올 수 밖에 없겟지요. 쉽게 말해 현실성의 결여라 할까요. 결국 역사관의 차이로 이해됩니다. 과거, 현재와 미래가 단절된 역사관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역사관으로요.

정교수님, 이 기회에 평소에 궁금했던 질문 입니다. 그간 역사적 진보를 강조하시면서 댓글 에서는 단절된 역사관을 피력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신지요? 역사발전 혹은 진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연속성을 근간으로 하지 않는가요? 이러다가 내재와 초월의 분절인가 연속인가 라는 처음(?)의 질문으로 이어지겠네요. 차원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단절이라면 동의 합니다. 의문은 이러한 견해가 한국 기독교를 진단하는 경우에도 활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간 여러비평을 통해 언급하신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서 하나님의 나라 이지요.

한편으로 보면 이는 초월과 차별에 대한 강조이지만 동시에 현재와 미래간의 단절이기도 합니다. 곧 현재의 기독교와 미래의 기독교간의 이질적인 상극(?)을 암시합니다. 현재와 미래간의 단절이라는 신학구도(?)에 이의를 제기하는 연유는, 단절된 사관에서 하나님은 결국 방임자에 불과 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개입하시고 주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시는지요? 미래만 준비하시고 뒷짐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오해(?)는 어떻게 해명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기존 한국 기독교안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이건 아니야!’ 라고 한 마디로 일축 하시려는 의도는 아니시지요. 이 기회에 하나님 나라의 연속과 단절에 대한 설명 부탁 드립니다.

초신자의 특권님, 혹시 사회학을 공부하시나요.
폄하의 늬앙스가 아니라 진지한 의문차원에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사회학을 흔히 학문의 왕자라고 어느 선생님이 말씀 하시더군요. 사회학은 팔방미인이라는 뜻이지요. 심리,의학,정치,문화 심지어 종교까지 사회학의 대상입니다. 막스 역시 그의 이론에는 종교에 대한 나름의 분석과 대안이 되함되어 있습니다. 막스의 이러한 시각이 허용될 수 있다면 역으로 종교에서 사회학자인 막스를 보는 시각도 허용될 수 있지 않을가요? 인류가 당면한 문제와 이상에 대한 해법에서 보이는 차이가 결국 종교와 사회학의 차이가 아닐지요?

전자가 열린/초월된 미래를 추구한 다면 후자는 그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 가능하다는 시각의 차이 이겠지요. 양자간의 대립(?)을 연결하는 끈이 있다면 현실에 소흘하지 않는 미래의 추구이며, 기독교의 용어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이상이 아닌지요? 물론 그 무게추가 지나치게 현실에 기울어졌다는 정 교수님의 지적은 숙고해야 하겠지요. 현실진단에 대한 부 정확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정 교수님.

초신자의 특권님과 권요한 님의 견해가 이 기회에 보다 자세하게 사랑채나 쟁점 토론방에서 개진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두 분 모두 수고하셨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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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순둥이

August 26, 2007
*.206.89.69

제가 볼때는 이번 정 목사님의 설교는 맋스와 기독교의 상관관계가 요지가 아니라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가
새로운 생명과 부활 신앙에 참여한 지금의 우리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신것 같습니다
설교의 핵심은 혁명과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와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 하고 있을진대
맋스에 너무 치중 안하셔도 좋을듯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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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순둥이

August 26, 2007
*.206.89.69

그리고 균형님에게 제가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
역사에 개입하시고 역사를 주도 하시는 하나님인줄
저도 믿고 있는데 그걸 딱히 어떻게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균형님은 여기에 답변이 가능 하다면
하나님이 어떤 방법과 뜻으로 역사를 이끌고 계신지
설명 좀 부탁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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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6, 2007
*.181.51.23

원숭2 님,
설교듣기 문제를 해결해주었군요.
앞으로 나에게도 도움이 많이 되는 정도네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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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26, 2007
*.181.51.23

균형 님,
질문의 요지는 평소에 진보사관에 기울어 있다가
이 대목에서 왜 단절된 미래사관으로 옮겨 앉았느냐, 하는 거지요?
이런 문제는 결국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사관도 역시
헤겔의 역사철학이라는 구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묵시사상이나 기독교의 종말론도 역시 역사관입니다.
종교적인 지평으로 사회학인 맑스를 판다하는 게 잘못이라는 초신자 님의 지적은
이런 점에서 정당하지 않아요.
맑스주의와 종말론이나 동일하게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니까요.
아마 초신자 님은 묵시사상과 종말론을 현실역사와는 전혀 다른 관념으로만 보는 것 같습니다.
신학이 무언가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더군요.
초신자 님이야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으니까
또한 기존의 교회에 신학무용론이 팽배하고 왜곡이 심각하니까
초신자 님의 오해야 당연한 거겠지요.
더 심각한 것은 기존의 설교자들, 목사와 일부의 신학자들이
신학을, 더 정확하게는 기독교 영성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건 접어주고 이번의 주제인 묵시사상과 종말론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게 곧 역사관이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이 세상의 역사학이나 사회학 앞에서 기독교 역사관을 변증해내지 못합니다.
신앙은 겨우 개인들이 실존적으로 위로를 얻거나
사회 변혁에 앞장 서거나 도덕적인 변화를 얻는 동기로만 받아들인다는 거지요.
신학의 역사에서 볼 때 신학은 철학에 가깝습니다.
세계관이라는 뜻이에요.
교부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장 정확한 철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미 진리를 선취한 철학으로 자기 정체성을 변증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기독교의 도그마입니다.
도그마는 이런 점에서 오랜 시간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얻어진
기독교 영성의 엑기스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 종말, 칭의, 성화, 죄 등등,
심지어 성만찬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독교 도그마는 세계관입니다.
떡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보다
더 혁명적인 사유가 어디 있을까요?
물질의 영화이잖아요.
말이 자꾸 옆으로 나가는군요.

내가 평소에 말하는 진보와 이번에 말하는 역사 단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념입니다.
상관이 없다기 보다는 서로 다른 지평의 문제입니다.
진보라고 해서 늘 연속적이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진보는 단지 과거회귀나 현실안주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역사는 앞으로 나간다는 뜻이지요.
앞으로 나가되 이 역사가 일종의 기게론적인 방식으로 나가는 게 아닙니다.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적 역사철학은 이런 점에서 부분적으로만 옳지요.
맑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역사관도 역시 기계적입니다.
반드시 와야 한다고 보았거든요.
도대체 역사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반드시 와야하나요?
아니거든요.
역사에는 다른 힘들이 개입됩니다.
아주 이질적인 힘이지요.
우리는 그걸 하나니의 섭리라고도 하는데요.
신학적으로 말하면,
종말의 빛이며,
철학적 용어로는 우연성이기도 하겠지요.
역사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단절을 말하는 겁니다.
균형 님과 내가 이렇게 다비아에서 대화할 거라는 것을
10년 전에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이런 역사는 결코 기계적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런 역사를 종말까지 확장해보세요.
내가 말하는 단절이라는 것은
기계적 역사관을 넘어서는 역동적 역사관을 가리킵니다.
이건 저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철학자, 신학자, 내가 많은 영향을 받는 판넨베르크,
더 나아가서 성서기자들의 역사관입니다.
묵시사상과 종말론, 대림절 신앙, 부활신앙 등등이 그렇습니다.
이건 단순히 연속과 단절, 내재와 초월의 대립이 아닙니다.
도대체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버린 이 역사, 세계를 무슨 수로
우리의 몇몇 사유로 범주화할 수 있겠어요.
우리 신학자와 설교자들은 성서에 근거해서,
그리고 2천년 신학의 역사에 근거해서,
더 나아가 오늘의 인문학적 사유에 근거해서
우리가 던져져 있는 그 세계를 해석할 따름이지요.
기본적으로 창조자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한다는 이 사실을 전제한다면,
(자기계시 개념도 엄청난 세계관인데, 설교자들이 이걸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겸손하게 거기에 응답할 준비를 하는 게 최선이 아닐는지요.
이런 점에서 저는
혁명은 아래로부터가(인간) 아니라
위로부터(하나님) 온다고 믿는 겁니다.
마라나타!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26, 2007
*.181.51.23

순둥이 님,
위의 대글을 다신 분들 중에서
순둥이 님이 가장 정확한 걸 말씀하셨군요.
저는 기독교의 종말론과 맑시즘을 비교하려는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맑시즘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었구요.
마찬가지로 테레사 수녀도 비판한 것도 아니거든요.
기독교가 그런 사상보다 우월하다는 걸 말한 게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전복성, 그 혁명성을 말하는 것뿐이었지요.
좋은 밤!
profile

[레벨:2]푸른적토마

August 26, 2007
*.84.242.69

감사합니다원숭2님 지금부터 해보렵니다
profile

[레벨:1]균형

August 27, 2007
*.96.174.252

순둥이님, 처음 대화를 나누는 군요.
이 공간은 제가 나서서 무언가를 설명하고 주장하는 자리가 아니라서 좀 망설여 집니다.
주신질문이 쉽지 않습니다.
역사에 개입하시고 주도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제가 드릴수 있는 답은 저도 모르며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정교수님의 입장처럼 그걸 굳이 규정화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지요.
이 문제를 규정하고 공식으로 만들수록 하나님의 역사개입이 해명되기 보다는
오히려 가려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입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제한된 언어를 통한 해명에 기대하기 보다는
이를 넘어선 믿음의 차원에서 바리볼 수 있지 않을가요.

하나님의 섭리와 뜻 혹은 역사 방식를 좀더 가까이 체감하고 싶은 욕구는
모든 신앙인의 바램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만큼이라도 감지 할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저는 그것이 바로 성경이라고 고백합니다.

주신 질문은 조직신학의 신론에서 그 기초를 다루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다양한 글들을 접해 보셨으면 합니다.
끝으로, 님과 동일한 질문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제게 좋은 생각거리를 안겨준 책 한 권을 소개해 드리지요.
아더 핑크(AW Pink),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 The Banner of Truth Trust. 입니다.
profile

[레벨:1]균형

August 27, 2007
*.96.174.252

정교수님, 이번에도 친철하신 설명으로 답해 주시는군요.
기계적 역사관 을 넘어선 역동적인 역사관으로서의 단절 (다른차원) 이라는 해명과
이를 접근하는 겸손한 태도에 대한 강조라고 이해 됩니다.
왠지 우문현답이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릅니다.
그럼에도 이 원리에 따른 각론과 적용에 대한 질문은 다음 기회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곧 임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마라나타!
profile

[레벨:11]초신자의 특권

August 27, 2007
*.244.165.224

며칠 들어오지않은 사이에 댓글이 많이 늘었네요.
균형님, 저는 영문학도입니다.

일단 저의 문제제기는 이 설교의 결론이나 세계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 설명에 맑시즘을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이용하는가에 대한 것이었읍니다.

순둥이님 반갑습니다.
이 설교의 결론에 도달하기위해 사용되어진 맑시즘을 문맥을 따져가며 살펴보십시오.

이 설교의 목적이 둘의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것입니다.

사회학적 지평과 종교적 지평이 목사님이나 순둥이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엄연히 다른데,
왜 비교제시하면서, 맑시즘의 가장 실패한 부분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느냐라는 것이었읍니다.
프롤레타리아적 역사관, 즉 사적 유물론의 실패를 인정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위세를 떨치고있는 지금,
그 모순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있고,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모순을 심화시켜나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죠. 즉 자본주의 다음단계로의 이행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도 있기때문에 사적 유물론의 성공여부는 더 두고봐야한다는 관점도 있죠.

현재에 있어
맑시즘의 내용중
사적 역사관의 실패에 방점을 찍느냐
아니면 현실에 대한 총체적 관심에 방점을 찍느냐하는 점에서 개인의 세계관이 많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관점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다른 이론을 단순화시켜 부정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자칫 기독교의 교리가 그렇게 이용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묵시적 혁명을 설명하면서,
역사를 배제하지않는다고 하면서,
당대사회에 대한 관심은 배제하고,
지평이 다르다고 해명하시면,

기독교가 자칫 당대사회와의 대화를 소홀히하는
독백적 신학으로 존재하게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지평이 다르면
지평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신학적 해명을 해나가는 것으로 충분하지않은지......
profile

[레벨:14]순둥이

August 27, 2007
*.235.184.120

초신자의 특권님 저도 반갑습니다.
간단하게 얘기 하겠습니다.
막스의 사상이 저도 나쁘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상은 결과적으론 현실적으로 적응되기 힘든
부분이 너무 큽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결국 실패한것이 맞다는 것은 님도
동의 하시는것 같군요..

목사님이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새 세상을 설명 하면서
잠깐 인용한 부분이 뭐 이렇게 논쟁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것은 우리는 막스의 세계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그의 나라에
촛점을 맞추기도 바쁜 시점에
궂이 막스에게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입장은 막스를 기독교와 비교 분석하는 자체가
본문 설교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profile

[레벨:11]초신자의 특권

August 27, 2007
*.244.165.224

순둥이님

순둥이님처럼 단순화시키면,
당대성을 떠난 신학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사상은 결과적으론 현실적으로 적응되기 힘든
부분이 너무 큽니다."
이러한 순둥이님의 논리적 잣대가 유효하려면
똑같은 잣대가 신학적 체계에도 적용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위의 묵시적 혁명론이
현실적으로 적응될 수 있나요?

그리고 저는 맑시즘이 부분적인 결함이 있다고 말씀드렸지
실패했다고 단정내리지 않았읍니다.

신학이 역사변화와 더불어 변증의 페러다임이 바뀌어가듯
맑시즘도 맑스자신의 이론이 전부가 아니라,
그 후속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비판받고 조명받고 하면서 그 이론을 새롭게 해나가고있는 중입니다.
한 예로 들뢰즈 라는 사람은 라깡의 심리학과 맑스를 연결시키면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킨 후기모더니즘 사상가입니다.

저의 문제제기의 핵심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profile

[레벨:14]순둥이

August 27, 2007
*.206.89.69

초신자의 특권님은 혹시 마르크스의 신봉자 이신가요?
저는 막스와 예수 그리스도와는 별 관계가 없다고 보는터라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고저 합니다..
저에게는 알아듣기 쉬운 설교를 님께서 어렵게 역사와 사상과
접목 시킬려 하니 그건 제가 믿는 하나님 나라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rofile

[레벨:11]초신자의 특권

August 28, 2007
*.244.165.224

대화는 여기에서 끝내도 상관없읍니다.
어차피 처음의 내용에서 별로 진전되어진 것이 없읍니다.

당대현실에 대한 과학적 관심과 신학이 별 상관이 없다고 전제했을 때
생길 수있는 여러 질문과 오류의 가능성에 대해서
크리스쳔으로 생각해본 것 뿐입니다.

내부자들끼리의 독백으로 굳어지지않기를 바랄뿐입니다.

내용의 핵심을 파악하는 일은 직접적인 내용 뿐 아니라
그것이 파생되어갈 여러 가능성과 결과들까지도 고려해야하는 것이니까요.

이 벽의 내용을 저는 고민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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