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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와 예수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012 추천 수 59 2008.07.13 15: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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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태복음 13: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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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7.13. (마 13:24-30)

마태복음 13장은 ‘비유의 장’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도 여러 편의 비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1-9절에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24-30절에는 ‘가라지’의 비유가, 31-32절에는 ‘겨자씨’의 비유가 나오고, 33절에는 ‘누룩’의 비유가, 44-51절에는 각각 ‘보물’, ‘진주’, ‘그물’의 비유가 나옵니다. 전체가 일곱 개이며, 그 사이에 비유에 대한 해설까지 나옵니다. 앞의 세 개는 농사와 연관되고, 네 번째 누룩의 비유는 가정일과 연관되며, 보물과 진주는 장사, 그리고 그물은 고기잡이와 연관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는 인간의 삶을 총망라한 것입니다. 비유는 어떤 진리를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서 그것과 비슷한 것을 비교하는 가르침인데, 예수님의 이 비유는 바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가 교차적으로 사용됩니다. 동의어라고 할 수 있지요. 고대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생각해서 두 용어를 똑같이 사용했습니다. 오늘 하나님 나라가, 또는 하늘나라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 비유 이야기를 잘 들으십시오.  
오늘 설교의 본문인 마 13:24-30절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소위 ‘가라지의 비유’로 일컬어지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이것도 역시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 개역개정과 루터 번역은 이 공동번역과 조금 다릅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두 번역의 뉘앙스가 약간 다릅니다. 공동번역은 하나님 나라가 씨를 뿌린 행위로 보고, 뒤의 번역은 좋은 씨를 뿌린 사람으로 봅니다. 크게 보면 비슷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개정개역과 루터 번역이 원본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설교가 진행되면서 저절로 드러날 겁니다. 성서 본문이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농부는 누군가?
예수님의 이 비유는 아주 단순하고 확실합니다. 하늘나라는, 또는 천국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비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말이 될까요? 하늘나라는 잘 먹고 잘 산다거나, 영원히 사는 곳이라고 해야 옳은 게 아닐까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늘나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집에서 아무런 배고픔도 없이 행복하게 사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라는 예수님의 비유도 역시 부자가 죽은 다음에 간 곳을 뜨거운 불구덩이로, 거지 나사로가 간 곳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묘사합니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하늘나라는 인간이 죽어서 가는 행복한 장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조금 다른 표현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은 다음에 가는 행복한 장소와는 다릅니다. 신학자들이 쓰는 용어로 바꿔 말하면 하나님 나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와 사랑이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통치에 근거해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병을 고치고,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의 조직을 절대화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과 행위를 용납하지 못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하나님 나라를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자부하고 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게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이 다르면 그렇게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오늘 말씀에 따르면 하늘나라는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농부입니다. 농부가 하늘나라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늘나라는 이런 농부와 비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어떤 것을 비유하는 방식으로만 조금씩 알아갈 뿐이지 단정적으로 무엇이다 하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실증의 방식이 아니라 비유의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비유의 이 말씀은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그 실체를 따라가기는 어렵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하늘나라를 실증의 방식이 아니라 비유로만 말하는 이유는 그 나라가 곧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 자체입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직면하지 못했다면 결국 하늘나라도 직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것만큼만 우리는 겨우 따라갈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늘나라를 어떤 농부와 비교한 것입니다. 그게 가장 가까운 설명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농부는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요? 이 비유의 해명인 마 13:36-43절에 따르면 농부는 바로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입니다.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이며,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을 비롯한 모든 복음서 기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을 바로 하나님 나라로 인식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것이 지난 2천년 기독교 신앙의 토대였으며,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대답을 잘 알고 있겠지만, 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를 설명하기는 힘들겠지요. 우리가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공식은 알고 있지만 그런 공식에 이르는 과정을 잘 모르듯이 말입니다.
하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가 무슨 근거로 하나인지를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그 하늘나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아 보입니다. 저는 앞에서 하나님 나라가 곧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복잡하게 들리지요? 그래도 그런 방식이 아니면 우리는 성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늘나라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셨나요? 하늘나라에 가면 가장 높고 가장 좋은 자리에 하나님이 앉아 계시고, 그 오른 쪽에 예수님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는 각자 믿음의 능력에 따라서 여러 집에 흩어져서 천년만년 살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형식들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처럼 최고의 복지가 실현된 세상을 천국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 생각이 아무 절실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를 좋아하는 어린 아들이 자기는 커서 어머니와 결혼해서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 공동체가 하늘나라를 예수님과 하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하나로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인간예수에게 성육신했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이고, 세상을 완성할 심판자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 증거는 물론 부활입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궁극적인 생명으로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그 생명은 곧 하나님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부활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겠지요. 그것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대라고 요구할 겁니다. 우리는 이런 요구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요구에 대한 대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시겠으나, 먼저 믿은 우리에게도 그것을 전달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을 비롯해서 모든 성서는 바로 그런 책임에서 나오는 대답입니다. 그리고 2천년 기독교 신학도 역시 그런 대답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런 대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대답을 찾는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말까지 계속됩니다. 이런 점에서 항상 깨어있어서, 기도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옳습니다. 영적으로 긴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이 질문인지도 모르고 대답을 찾을 생각도 못합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할 수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진리에 무감각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추수 때까지
마태복음 공동체도 “예수가 하늘나라인 증거를 대라.”는 이런 문제 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 있던 초기 기독교라고 해서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는 확정적인 대답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게 본문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십시오.
농부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뒤에 밤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합니다.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패자 가라지도 함께 자랐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를 본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이르기를, 좋은 씨만 뿌렸는데 가라지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뽑아버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가라지를 뽑아야만 밀이 건강하게 잘 자랄 테니, 종들의 질문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주인은 가라지를 그냥 두라고 일렀습니다. 그 이유는 밀보다 뿌리가 강한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가라지를 놓아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인은 추수 때까지만 놓아두라고 했습니다. 추수 때 가리지는 먼저 뽑아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버리고, 그 다음에 밀을 곳간에 모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비유의 진행과정을 읽으면서 무엇을 생각하셨나요? 농부의 지혜인가요, 농부의 인내심이가요? 아니면 마지막 심판인가요? 다음과 같은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우리는 가라지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이 농부의 말에서 신약성서 시대의 다른 종파들의 세계관과 기독교의 세계관이 구별되는 한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대표적인 유대교 종파에는 바리새인, 열심당, 에세네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을 선과 악의 이원론적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늘 의와 불의가 투쟁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열심당은 로마의 권력에 빌붙은 사람들과 로마 권력을 향해서 무력투쟁을 불사했습니다. 에세네파는 이 세상을 완전히 타락한 것으로 보고 쿰란 지역으로 도피해서 자기들끼리 소종파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약간씩 다르지만 그들 모두 가라지를 당장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입니다. 이들에 반해서 예수님과 그 공동체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심판보다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해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본문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에 대한 믿음과 연관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마태공동체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믿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면 그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이나, 그분이 활동할 때나, 그가 떠난 뒤에나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이 세상은 밀만이 아니라 늘 가라지도 자라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마태공동체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 승리를 하셨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악이 득세합니다. 누가 구체적으로 행한 악만이 아니라 천재지변을 통해서 벌어지는 악도 많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악이라고 한다면 천재지변도 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너무 거창하다면 여러분 개인의 실존을 들여다보세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겠지만 구원과 거리가 먼 일들이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일어날 겁니다. 이런 문제를 극단적으로 해결해보려는 사람들이 구원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면 실제로 모든 악으로부터 벗어났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정은 인정하겠지만, 참으로 유치한 주장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단지 심리적으로 구원받았다는 자기 확신 안에 숨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구원 사건이 갖는 우주론적 깊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랄 수밖에 없다는 오늘 본문에도 어긋나는 생각이지요.
여러분, 예수님을 손오공처럼 신출귀몰하는 초능력자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그런 현상들은 단지 인간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나라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와 대립되는 가라지를 내버려두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가라지를 모두 싹쓸이 해야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추수 때에 증명됩니다. 모든 생명이 완성되는 종말에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종말까지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시간은 속히 옵니다. 그 추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과 자기 자신 안의 가라지로 인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추수 때의 영광에 그의 영혼을 집중시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 세상의 생명을 완성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면 종말에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앙으로 가라지가 많은 세상을 견디십시오. 그분이 도우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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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김재남

July 13, 2008
*.185.234.185

아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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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July 13, 2008
*.55.139.98

진실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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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돌파구

July 14, 2008
*.105.34.150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 세상의 생명을 완성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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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ly 14, 2008
*.181.51.93

생명에 대한 고정관념 깨기가 바로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랍니다.
깨는 데만 머무는 게 아니라
세우기가 필요하겠지요.
생명이 완성되는 종말까지 우리는
생명의 계시를 기다리고 거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그 생명 세우기의 토대는
바로 창조자, 아들, 영으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지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존재 신비에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맡기며,
좋은 한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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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July 14, 2008
*.136.37.162

저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꼭 참여하길 소망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참여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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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희망봉

July 14, 2008
*.82.136.189

목사님!
책읽기 마져 힘들어 하는 접니다
하지만 열심히 읽고... 쓰기까지 도전(?)해 보겠습니다

누가요 말씀하는데 제가 정목사님을 흉내낸데요(말투가)..ㅎㅎ
제겐 영광이죠 모방은 제2의 창조....죄송.

이 세상과 내안의 가라지들로 인해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추수때의 영광을 기다리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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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ly 15, 2008
*.150.14.168

희망봉 님이 그렇게 책읽기를 싫어해요?
문자를 넘어섰다는 뜻이겠지요.
좋아요.
아니에요?
그러면 이제부터라도 책읽기를 해보세요.
늙어서 활동하기 어려워지면
책읽기보다 더 좋은 게 없을 테니
그 준비를 위해서라도...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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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글로리아

July 16, 2008
*.127.200.56

목사님, 제가 오해했다면 교정해 주세요.
다름이 아니라, 목사님께서는 계시록 21장의 '새예루살렘'을 일반인들이 으레 생각하는 '천국'을 전제하시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뉘앙스가 풍겨서요. 윗 글에서의 서술하신 부분-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늘나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집에서 아무런 배고픔도 없이 행복하게 사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도 새 예루살렘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면, 저는 새 예루살렘이 '천국'이 아니라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제까지 알고 있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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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ly 16, 2008
*.181.51.93

글로리아 님,
요한계시록은 기본적으로 묵시사상의 책이랍니다.
묵시사상에 따르면 현재의 '에온'(세상)은 멸망당하고,
새로운 에온이 하나님의 초능력으로 일어납니다.
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이 모두 그런 새로은 에온을 가리킵니다.
글로리아 님이 지적한 그 구절은 더 전문적인 문헌 연구를 해야겠지만,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그 답을 나옵니다.
새예루살렘은 교회를 가리키는 게 아니지요.
새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를 보세요.
<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켤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글로리아 님이 생각한 그것은
전형적인 알레고리 해석인 것 같군요.
우리의 성서읽기는 우선 역사비평에서 시작해야 한답니다.
그 문서가 기록된 그 시대의 눈으로 보면서
역사적으로 비평하는 거지요.
역사비평이 절대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기초라는 뜻이에요.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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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글로리아

July 16, 2008
*.127.200.56

목사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는 군요.
저는 이것이 단순한 역사비평의 부재에서 오는 문제이거나, 알레고리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문맥이 그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게 알레고리라고 할 때는 그것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해서 풍유화시킨다면 모를까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요?

새 예루살렘에 대해 계21:21에서 ‘단순한 직유’로 묘사된 것이
계21:9에 보면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가 나옵니다. 그리고 천사가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기 위해 요한을 인도한 곳이 11절에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입니다.

그래서 저의 물음은 여기 ‘그리스도의 신부’란 ‘어린 양의 아내로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것은 제가 웨신 이필찬 교수의 영향을 받은 건데요, 바로 이 부분[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새 예루살렘(The New Jerusalem in the book of Revelation, 박사학위 논문/튜빙겐 출판사)]으로 많은 신학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21:9-22:5은 ‘내가 본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 곧 교회가 종말에 어떠한 축복을 경험할 것인지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면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대부분의 요소들도 또한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당위성이 주어진다. 여기서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건축적 요소와 종말에 회복하게 될 새 예루살렘 안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배경으로 하여 그려지고 있다....

<새 예루살렘의 요소들>
1.새 예루살렘의 요소로서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은 성벽이다...

...먼저 저자가 성벽의 치수로서 144큐빗이라는 숫자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44는 12x12로서, 약속으로서의 구약의 교회(12지파로 대표)와 성취로서의 신약(12사도로 대표)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2.새 예루살렘의 성벽은 열두 문을 가지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서 열두 문과 그 열두 문에 새겨진 열두지파의 이름들은 겔48:30-35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3.열두 문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12절)
그리고 성벽의 열두 기초석에는 신약교회의 기초인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14절)

이는 새 예루살렘이 약속인 구약백성과 그 성취인 신약백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두 백성이 아니라 하나의 백성이다.

4.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 되신다.(21: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여기에서 먼저 성전 건물이 없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건물로서의 성전이 없는 것이지 성전자체이신 하나님 자신이 성전이 되시므로 성전은 엄연히 존재한다...새 예루살렘에서 성전으로서의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의 임재는, 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를 상징하며(21:2,9),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고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말씀(21:3)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성전 없음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대신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 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 요한이 그 당시 유대사회에 현저하게 보편화된 성전재건에 대한 열망을 의식하여 그것에 기독론적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새 예루살렘을 구속사적인 절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5. 새 예루살렘의 중요한 부분이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보석 하나 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하여 풍유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환상 전체의 내용과 상충된다. 보석의 의미는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보석은 전체적으로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의 영광, 순결성, 아름다움 그리고 소중함’을 나타내 주고 있다. 21:2과 관련해서 이러한 보석의 기능은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의 아름다움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이사야 54장은 이런 개념을 구약적 맥락에서 보여 준다. 사54:4-6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묘사된다. 사54:9-10에서 하나님의 아내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새 예루살렘의 재건에 의해 표현된다. 그리고 사54:11-12에서는 이러한 예루살렘의 재건은 예루살렘이 여러 가지 종류의 보석들로 장식되는 것으로 묘사된다....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아내 된 이스라엘의 단장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신다. 이 말씀을 배경으로 볼 때 요한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이 여러 종류의 보석으로 장식된 것은 어린양 예수의 신부로 새 예루살렘을 순결과 아름다움으로 단장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6.나라와 왕들이 그 영광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 올 것이라고 한다.

7.새 예루살렘인 종말적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 에덴의 완전한 회복을 통해 첫 창조의 목적이 완전히 회복된다.(22:1-5)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교회의 종말적 모습은 단순히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그러한 종말적 특징들을 이미 지금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이 보여주고 있는 메시지다.(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 265-271/ 내가 속히 오리라,이레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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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까마귀

July 16, 2008
*.151.108.166

자끄 엘룰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한번 보시지요. 한들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이레서원보다 한들이 한수 위인것 같은데요. 최소한 제게는 말입니다.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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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글로리아

July 16, 2008
*.127.200.56

그럼, 까마귀님께서 여러 다비안들이 이해할 수 있게 그 내용을 한 번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네요.
까마귀님은 '책 내용'이 아니라 '출판사'군요. 그렇다면 한들출판사 보다 박사논문을 출판한 '튜빙겐 출판사'와 비교해 보심이 더 좋을텐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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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빈이

July 16, 2008
*.66.180.14

"새 예루살렘"을 "종말적 교회 공동체"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다르게 말하기' - 알레고리적 해석 아닌가요?
제가 알레고리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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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ly 16, 2008
*.181.51.93

글로리아 님,
좋은 정보를 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하빈다.
이필찬 교수님과 그분의 책은 잘 모릅니다.
인터넷에 이름을 치니
요한계시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도 교수의 책을 번역하셨네요.
그런데 그분의 박사학위 논문을 낸 출판사가
튜빙겐, 맞아요?
영국에도 튜빙겐 출판사가 있나 보군요,
나는 독일의 그 유명한 튀빙겐을 생각했는데요.
이필찬 교수의 지도 교수도 요한계시록 전문가시군요.
지도교수는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영국 교수님이시구요.
기회가 주어지면 이필찬 교수의 책과 지도교수의 책을 읽어보겠습니다.
위에서 자세하게 알려주신 내용을 중심으로 논쟁을 하기는 힘들겠네요.
일단 나는 성서학자도 아니고,
더구나 요한계시록은 정말 자신이 없어서요.
그냥 마지막 대목만 상식적으로 짚어볼께요.
이렇게 말하셧군요.
<7.새 예루살렘인 종말적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 에덴의 완전한 회복을 통해 첫 창조의 목적이 완전히 회복된다.(22:1-5)>
인용한 계 22:1-5절을 교회에 대한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5절은 이렇습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이런 구절도 역시 현실 교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는 거지요?
"새 예루살렘인 종말적 교회 공동체의 삶"이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교회는 물론 메시아적 종말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곧 궁극적 구원에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둔다는 것이지
종말적 표상을 성취했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계 224절이 표현하듯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나 가능한 거겠지요.
철저한 묵시적 환상이 아닌가요?
여기까지만요.
앞으로 요한계시록은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물어볼께요.
계시록은 새예루살렘을 교회로 보는 이 필찬 교수의 입장이
어느 정도로 보편적 지지를 받고 있나요?
그분의 지도교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지도교수는 어떤 장소로 보더군요.
글로리아 님,
계시록의 새예루살렘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더운데, 건강하게 지내세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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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0]웃겨

July 17, 2008
*.112.118.37

가라지 많은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보라고 하시니...참~!
속에서 열불이 나네요.
그냥, 확 제초제라도 뿌려서 말려 죽이고 싶은데
암튼 성질도 나고, 참 무기력하기도 합니다.
종말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믿음이 왜 이리도 약한지요.
( 아! 그런데 그 가라지에서 제가 제외된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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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까마귀

July 17, 2008
*.151.202.223

그럼, 까마귀님께서 여러 다비안들이 이해할 수 있게 그 내용을 한 번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네요.
까마귀님은 '책 내용'이 아니라 '출판사'군요. 그렇다면 한들출판사 보다 박사논문을 출판한 '튜빙겐 출판사'와 비교해 보심이 더 좋을텐데요. ㅎㅎ
1.이필찬과자끄엘룰비교:신학은"총체성"(totality)문제입니다.그리고특히자끄엘룰의주석서원제는 "움직이는 건물"(L'apocalypse Architecture en Mouvemant)입니다.이필찬의 주석방식과는 다릅니다. 그건 마치 이필찬과 자끄엘룰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2. 튜빙겐출판사: 몰지벡이 정확한 명칭이고, 이 단체는 우리 한국의 출판사와는 다릅니다. 철학과 신학 관련 책들을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보조금을 받아가며 만드는 곳입니다. 특히 신학서적(특히 박사논문)은 몰 지벡(Mohr Siebeck)에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제본소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출판물에도 시리즈가 있어서, 융엘이나 가다머(진리와 방법 같은 책도 몰지벡에서 나왔습니다) 같은 최일류의 저자들 책은 같은 몰지벡이라도 박사논문과는 다른 시리즈로 나옵니다.
3. 한들출판사: 신학전문 출판사입니다.
4. 신학은 관용과 사랑으로 함께 가는 것입니다. 승리도 없고 패자도 없습니다. 진리를 한 개인이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함께 나누고 공유할 따름입니다. 물론 니편 내편도 없지요. 비트겐슈타인이 블루노트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두 부분이이다. 그 첫째 부분은 여기에 쓴 것이다.그런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둘째 부분이다" 그럼 이렇게 말씀하실건가요? "왜 둘째부분은 쓰지 왜 안쓰니?". 진리를 사랑했고, 그렇게 살았던 비트겐슈타인을 안다면 다르게 들리지요. 너무 많이 많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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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까마귀

July 17, 2008
*.151.202.223

칼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입문"을 권하고 싶습니다. 신학이 무엇인지, 신학적 논의가 무엇인지등에 대해서, 말년에 70이 넘어서,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것입니다. 따질려는 자세가 아닌, 평생 신학을 연구한 노신학자가 말년에 은퇴해서 평신도들을 앞에 놓고 말씀한 것입니다. 가능하면, 우리말 번역본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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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July 17, 2008
*.250.45.117

까마귀 님. 칼 바르트의 정확한 스펠링 좀 가르쳐 주셔요.
꼭 찾아서 읽고 싶군요. "복음주의 신학입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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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이길용

July 17, 2008
*.141.163.77

Karl Barth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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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July 17, 2008
*.250.45.117

thank you, 이길용 선생님!!
be well in His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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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글로리아

July 18, 2008
*.127.200.56

앗! 제가 없는 사이에 댓글이 주렁주렁...
목사님, 어줍잖은 정보를 좋은 정보로 보아 주시니 감사하군요.
제게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아는 데 까지 답변하겠습니다.

1. 먼저 계22:1-5의 문제

아마 제 생각에 정목사님께서는 이 부분의 이미지가 ‘교회공동체’ 보다는 ‘새 하늘과 새 땅(새 창조)’ 을 묘사하는데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 생각도 이 부분(22:1-5)에 있어서는 교회공동체 보다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더 가까운 묘사로 보이는데요?

이에 대해 이필찬 교수는 계22:1-5에서의 에덴의 모티브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것을 혼돈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 공동체의 삶이 새 창조에서 주어지기 때문에 그런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에덴의 회복으로써 가나안 땅에서 에덴의 삶을 누리기도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곧 에덴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기에, 저자 요한은 사실상 에덴 모티브를 새 예루살렘 공동체에 적용시키고 있지만 그것이 새 창조(새 하늘과 새 땅)에 적용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에덴에서 출발한 구속사적 지향점의 최종목표를 요한은 새 창조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 즉 교회의 삶에 맞추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덴적 묘사를 새 예루살렘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만일 에덴적 묘사를 새 창조에 적용시킨다고 해도 신학적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새 예루살렘에 맞추고 있는 것은 저자가 그 중요성을 교회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그러니까 요한 계시록의 주제를 단연 ‘교회’로 보고 그 극치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명시합니다)

2. 새 예루살렘인 ‘종말적 교회공동체의 삶’이란?

저도 이게 종말을 ‘대망’하는 교회 공동체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새 창조’에서의 삶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이필찬 교수께 물어봐야 겠네요. 위 1번에 의하면 후자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3.계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것은 ?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섬기는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이해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일종의 표어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욥33:26;시17:15;42:2;요삼11) 특별한 종말적 축복으로 여겨졌다(민6:26;시84:7;마5:8;요일3:2;히12:14 등)(Aune,1179-80)[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이레서원,923]

4.새 예루살렘 (리챠드 보캄 vs 이필찬)
제가 몇 년 전 차를 타고 어디로 이동 중에 제 옆 자리에 앉은 이교수께 ‘새 예루살렘’에 관해서 그의 스승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의 문제에 관한한 리챠드 보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새 예루살렘'에 관한한 다소 입장차이가 있다고 하더군요. 이교수는 '새 예루살렘'을 단순히 ‘교회 공동체’로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데 반해, 보캄은 거기(교회 공동체)에 더해 ‘장소로서, 또 하나님의 임재로서의 새 예루살렘’을 구별하여 본다고 하더군요.[참조: 리차드 보쿰, 요한 계시록의 신학 187-210]

평안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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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글로리아

July 18, 2008
*.127.200.56

아차! 하나가 빠졌군요.

5.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을 교회로 보는 이 필찬 교수의 입장이 어느 정도의 지지를 받고 있는가?

최근 들어 많은 학자들이 새 예루살렘을 천국으로 이해하지 않고 교회로 본다는 군요. 아래의 백석대학교 이우제 교수의 글을 보시면 그게 더 선명해 질 겁니다.

“...주님이 초대하시는 찬란한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은 마지막에 완성될 교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본문21~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찬란한 장면들을 죽어서 갈 천당의 모습으로 해석해 왔다. 그런데 밑바닥에 도사리는 정신은 물질주의적 가치관이다. 그래서 마치 천국을 12개의 문이 있는 보석이 지천에 깔려 있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들어 많은 학자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을 천국으로 이해하지 않고 교회로 이해한다.'

거기에 보이는 보석과 아름다운 성의 외적인 모습은 교회가 주님의 계획 가운데서 완성될 것을 말해 준다...

(계21:2~8)은 사탄의 신부인 바벨론과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 공동체의 최종적인 영광을 드러낸다. 이 점에서 본다면 본문의 새 예루살렘을 ‘천당’의 모습에 대한 자세한 스케치라고 보기 보다는 ‘어린양의 신부로서 교회’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21:9~27)은 결국 교회가 누리게 되는 찬란한 광휘와 아름다움은 교회가 받아 누릴 축복이 어떤 것인지 말해 준다...
22:1~5에서는 교회가 누릴 삶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밝혀 준다."

(요한계시록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목회와 신학 편집부, 두란노 아카데미,43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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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머리를 비우고

August 08, 2008
*.117.199.100

위엣 분들의 글들을 이해 하려면 제가 한참 더 배워야 할거 같습니다.
저의 지식과 두뇌의 용량이 매우 작아서...
그런데 너무 문자에 집착하는 느낌이 좀 듭니다. 물론 그게 중요한 주제이긴 하지만요...
그냥 제 느낌입니다. 목사님은 큰 관점의 차이를 이야기 하시는 것 같은데요...

요즘도 많은 사람들은 종들 처럼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일들을 뽑지 못해 안달이지 않습니까?
촛불집회나 정치하는 분들의 모습이나 뉴라이트와 친미집회 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면 잘못된 것인가요?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다 뽑아 내고 싶어 하는듯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래선 안된다는 것 아닙니까?
결국 조금 더 인내하고 지켜 볼 일을 두고 보지 않고 사람이 건드리기 시작하면
즉, 뽑아낸다면... 나타나는 증상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흑백논리와 비교주의와 자기우월감의 위험성 처럼 하나님은 쏙 빠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예전에 함석헌 선생도 뜻으본 한국사 라는 책을 쓰셨는데...
전 그책 보면서 정말 가슴이 뛰었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그런 선동적이고 원색적 내용 때문에 가슴이 뛰는 느낌이 아닌...
그런데 그 책의 결론이 너무 황당했습니다.
"칼을 꺽고 더 생각해 보자!"는 거 였습니다.

정말 화가 나고 허무해서 집어 던졌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인거 같습니다.
뭐 나중에 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며 살아오신 분이 그런 주장을 펼수 있다는게....
어찌보면... 변절자나... 아니면 사변적 논리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목사님 설교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니...
하나님 앞에서 앞서 가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감히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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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성령강림절 거짓 예배, 참된 예배 [7] 2007-11-11 12025
242 성령강림절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13] 2007-11-04 11121
241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8436
240 성령강림절 이 사람의 믿음 [12] 2007-10-21 9603
239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9427
238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8116
237 성령강림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9] [1] 2007-09-30 13276
236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8464
235 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9] 2007-09-16 8740
234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9297
233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8103
232 성령강림절 믿음의 완성 [26] 2007-08-26 11545
231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9328
230 성령강림절 우리는 하나다! [9] 2007-08-12 8496
229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8435
228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9354
227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8252
226 성령강림절 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13] 2007-07-15 9593
225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9] 2007-07-08 9232
224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8466
223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9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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