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메시아는 비밀이다 (마 17:1-9)

주현절 조회 수 16678 추천 수 0 2011.03.07 16:48:57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2011/dawp_0306.mp3 
설교보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110306.wmv 
성경본문 : 마태복음 17:1-9 

메시아는 비밀이다

마태복음 17:1-9, 산상변모 주일, 2011년 3월6일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절 마지막 주일이면서 동시에 예수의 산상변모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주현절과 사순절 사이에 산상변모 주일이 들어있는 셈입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현현하셨다는 사실을 기리는 절기이고,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당하신 고난의 40일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이 놓여 있습니다. 주현, 수난, 부활이 그것입니다. 그 중간에 변모가 자리합니다. 그 변모 전승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신성과 내재적인 인간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는 이유에 대해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아무 말이 없지만 누가복음은 기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산은 기도하기에 적당한 곳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골방이 기도하기에 더 좋을 수도 있고, 중세기 사막의 교부들이 그랬듯이 사막이나 광야가 기도하기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산이 거론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을 따라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산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었고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났으며, 옷도 빛처럼 희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형체가 전체적으로 빛으로 둘러싸인 것 같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UFO를 발견했다고 떠들썩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특히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킨 인물들로 유명합니다. 모세는 호렙산의 불붙는 가시떨기, 갈라진 홍해, 만나와 메추라기 등, 크고 놀라운 사건들의 장본인입니다. 엘리야도 못지않습니다. 그는 당시 독재 왕조인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 왕비를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특히 갈멜산에서 아합의 어용 제사장들과 싸운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에 올려놓은 제물을 모두 태우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크고 작은 기적들이 늘 그를 뒤따랐습니다. 결국 그는 일반 사람들처럼 죽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다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산, 불, 빛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오늘 본문의 변모 전승과 연결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일까요? 이 질문에 반응이 제 각각일 겁니다. 당연한 사실이라고 믿는 분들도 있고, 믿기 힘들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일단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나타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 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 역사에 등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이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억지를 피우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교 신앙은 불합리를 합리로 뒤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 신비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합리적인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마태복음을 비롯한 복음서 기자들이 변모 전승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거론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게 합리적인 이해의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는 별로 중요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말하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다고 전할 뿐이지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이 어떤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즉 모세와 엘리야는 이 이야기에서 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연극으로 치면 모세와 엘리야는 소품입니다. 소품은 연극의 중심 서사를 돕는 데만 필요합니다. 연극을 보는 사람도 소품에 한눈을 팔지 말고 본줄기를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본줄기는 바로 예수의 변모 사건입니다. 본문은 오직 이 한 가지 사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마 17:5절에 또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변모한 예수님이 그 자리에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와 말하는 것을 본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가 나서서 초막 셋을 짓자고 엉뚱한 제안을 합니다. 베드로다운 제안입니다. 황홀한 경험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그 순간에 갑자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모두 덮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은 그 소리를 듣고 엎드렸고, 심히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제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현상이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이 본 것이 무엇일까요? 잠시 환각 상태에 빠졌다가 빠져나온 것일까요?

     성경을 꼼꼼히 읽는 분들이라고 하면 이 변모 사건이 예수의 세례 장면과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겁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고 합니다. 하늘과 비둘기를 산상변모 사건에 등장하는 모세, 엘리야와 비교해보십시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절대적인 경험을 이렇게 신화적인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오늘도 예술가들은 이런 경험을 합니다. 이 절대적인 경험이 하늘로부터 울리는 소리로 묘사됩니다. 변모 사건 때 울린 소리와 세례 사건 때 울린 소리가 놀랍게도 똑같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변모 사건 때의 소리에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만 더 붙어 있고, 나머지는 완전히 똑같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절대적인 경험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에 몰입했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냥 전하면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고대인들의 종교적 메타포인 빛, 구름,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 하늘, 하늘로부터의 소리를 통해서 전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알아듣는 것보다 훨씬 잘 알아들었을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 17:9) 왜 침묵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여기서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인자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는 이 대목만이 아니라 앞뒤로 몇 번 나왔습니다. 마 16:21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뜯어말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가리켜 사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감당해야 할 고난, 십자가 죽음, 부활을 거부했을까요? 마 17:22, 23절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난, 죽음, 부활에 대해서 전해들은 제자들이 심각하게 근심했다는 겁니다. 마 20:17-19절에는 제자들의 반응은 없이 고난, 죽음, 부활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4번이나 자신의 운명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한결같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도 이런 전체적인 구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자들을 포함해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머리가 나쁘거나 인격이 비틀어진 탓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탓도 아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메시아 사건은 근본적으로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변모 사건에 대한 경험을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떠벌려봐야 사람들은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이 왜 비밀일까요? 왜 비밀이어야만 할까요? 세상을 구원할 분이라고 한다면 모두 알아보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지금 완벽하게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죄한 자들이 고난 받는 이유를 우리는 지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일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세계는 지금의 잠정적이고 모순적인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메시아 사건이 왜 비밀이어야만 하는지를 모르지만 그것이 비밀이라는 사실 자체만은 압니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 십자가 죽음, 부활을 예고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가야 할 운명이었고, 메시아의 길이었습니다. 여기서 부활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바로 그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완전히 맡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에서 핵심은 억울한 고난과 죽음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운명을 그렇게 뜯어말리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메시아의 길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인정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등, 유대교 지도층과 민중들의 생각이 어땠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의 길을 부정했습니다. 그 길이 불행한 삶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길이 바로 신성을 모독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길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의 길이라는 예수의 믿음과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던진 예수의 결단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메시아의 고난은 비밀입니다.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은 비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비밀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의 비밀이고, 생명의 비밀이고, 하나님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비밀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대한 정확한 표현입니다. 전혀 새로운 사건, 또는 새로운 행위라는 뜻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렇게 유별난 게 아니라 성서가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과 홍해, 만나와 메추라기, 바벨론 포로 귀환 등,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예수의 운명에 일어난 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하나님의 메시아 사건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역시 비밀입니다. 사람들에게 숨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사실을 알고, 어떤 사람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복음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의 메시아 사건을 비밀로 알지 못하고 밖으로 떠벌려야 할 어떤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교회당을 크게 짓고, 신자수를 늘리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의 일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심지어 각 교단마다 총회장 선거나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에서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뿌려댑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메시아 사건은 이미 널리 선전하고 광고해야 할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교회는 몸을 파는 창부처럼 자신의 상품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 온갖 치장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목적으로 뭔가를 떠벌린다는 것은 메시아 비밀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메시아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밭에 감춰진 보화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간접적으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마 13:44) 메시아 사건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로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서 보화가 묻힌 밭을 사듯이 영혼을 다 기울여 예수의 메시아 사건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그 구원과 생명 사건이 완전하게 드러날 그 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에는 희망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March 07, 2011
*.139.124.107

목사님, 어제 예배 드리면서 함께 드렸던 "오늘의 기도"가

가슴에 가득차서 잠시 숨이 멎을 것 같았는데(아바도 흉내군요^^)

이어지는 설교 말씀에서도 그 감동은 계속 되었어요. 

마치 설교가 기도 같기도 하고, 기도가 설교 같기도 하고요..^^

 

<오늘의 기도>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

여기저기 흩어졌던 믿음의 가족들이 지금 한 자리에 모여

당신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영광을 찬송하나이다.

우리의 생각으로 다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맑은 날 햇살처럼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나이다.

신비한 방식으로 생명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그 너머의 우주 전체에 가득하나이다.

박테리아처럼 작은 생명체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민들레 같은 식물로부터 노루 같은 동물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전에 존재했거나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영광임을 믿나이다.

우리에게 바른 이성과 건강한 영성을 허락하시어

모든 생명의 근거이며 중심이신 하나님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신뢰하고 희망하게 하소서.

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셨으며,

앞으로 영생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당신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영광을 찬송하나이다.

-주님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분이십니다. 주님께 찬송드립니다.

*하나님의사랑이 맑은 날 햇살처럼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나이다.

'맑은 날 햇살 같은 주님의 사랑' 과연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살아 있는 것 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전에 존재했거나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영광!!

-주님, 주님은 참으로 신비중의 신비이십니다.

지금은 알 수 없으나, "내 주님, 영광의 옷 입고 문 열어 주실 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그 '비밀'을 알 수 있겠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7, 2011
*.120.170.250

라라 님,

설교 이야기가 아니라 기도 이야기군요. ㅎㅎ

사실은 설교가 기도이고

기도가 설교이겠지요.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인간의 언어도 담아낼 수 없으니

우리가 설교를 하면서도

동시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교는 최대한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라면

기도는 빈틈을 메워달라는 호소이겠지요.

하나님은 앞으로 이 세상에 어떤 것들로 채우실까요?

혹시 인간을 대체할 다른 생명체가 나오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것도 없고

섭섭해 할 것도 없고,

그분의 섭리에 순종할 뿐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profile

[레벨:38]클라라

March 07, 2011
*.139.124.107

예, 목사님, 사실은 어제 설교와 기도가 같은 내용으로 제게 들려졌나 봅니다.

사실은 어제만은 아니지만요.

아마도 제게는 설교가 주님의 우리를 위한 중보기도로 들려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주님의 애타는 마음이 절절히 배어진 것 같아 저는 가끔 울음이 타는 마음으로 듣게 됩니다.

 

목사님, 그리고..

위 기도문은 사실은.. 설교댓글에 달려고 했던 건 아니고요.

호주에 계시는 시몬 목사님께 들려 드리고 싶어서 달았습니다.^^

그 분의 시심(?)에 저도 탄복을 했거든요?

맑은 햇살, 비가 그친 뒤의 교회당 앞의 푸른 잔디..

참 완벽한 조화지요?^^

 

profile

[레벨:3]Simon

March 10, 2011
*.33.33.197

감사합니다. 라라님!

뜻 밖의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이 기도문을 우리 교회의 공동기도문으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주일마다 공동기도문을 작성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군요.

 

시심이라니요. 과찬이십니다.

시 한줄 때문에 밤새 가슴앓이 했던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이제는 다만 시를 삶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시적인 삶'이 아닌)

 

profile

[레벨:38]클라라

March 10, 2011
*.139.124.107

당근이지요. 시몬 목사님^^

그런데, 혹시, 이거 제가 작성한 기도문으로 알고 계시는 건 아니시지요?

즈이 샘터교회에서는 대표기도는 없고 공동기도"오늘의 기도"를 드린답니다.

그러니 기도문 작성은 당근 정용섭목사님 몫이지요. ^^

아마 목사님께서 마구 퍼가시라고 하실 거예요.

혹시 더 필요하시면, 샘터교회 홈피에서 주보란을 클릭하시면 되실 거예요.

대구샘터교회가 잘 정리되어 있네요.

 

나중에 목사님의 기도문도 소개해 주세요!!^^

profile

[레벨:2]somang74

March 07, 2011
*.113.36.198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작년 12월부터 대구 설교모임을 참석중인 전도사입니다.^^

지난 3월 6일 오후예배설교를 같은본문에 제목만 바꾸어서(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준비를 하면 할수록 설교란것이 참 힘이들고 어려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얼마전 교수님께서 쓰신 '설교란 무엇인가?'란 책을 통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고있습니다.

전임전도사가 되면서 설교할 횟수가 많아지면서 더욱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하는 요즈음입니다.

학부는 신학을 전공하지않아서 교수님의 강의는 한번도 들은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교수님의 저서를 통해서 많은 통찰들을 얻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오후에는 역시 설교모임에서 주신 로마서5장 본문으로

 '아담과 그리스도'로 제목을 정하려고 하였다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설교문을 작성하려고 준비중입니다.

참고도서로는 바르트의 로마서주석과 국제성서주석, 죄의 원리와 보응(원세호/국제신학연구소), 인간학1(판넨베르그)을 보려고 합니다. 설교모임에서 그리고 목사님의 저서와 글들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으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7, 2011
*.120.170.250

예, 74년생 소망 전도사님,

수고가 많습니다.

설교 준비와 공부에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 같아도

그게 쌓이면서 어떤 세계의 깊이로 들어갈 거에요.

그런 공부는 기술의 차원이 아니라

해석의 차원이에요.

그게 손에 잘 잡히지 않으니까

설교자들이 손에 잘 잡히는 것에만 마음을 둔답니다.

그 결과는 설교자가 아니라 연설가가 되어 가는 것이에요.

먼 길을 천천히 잘 가봅시다.

이건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바로 설교자 우리 자신의 영성을 위한 길이니까요.

다음 공부하러 올 때

설교문을 하나 출력해서 가져와 보세요.

내가 한번 검토해볼게요.

좋은 한 주간 보내시오. 

 

profile

[레벨:29]모모

March 08, 2011
*.40.130.130

목사님, 안녕하세요?

늘 목사님을 통하여 신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전에 마가복음 묵상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식하신 것은 아니며

예수님의 수난예고도 예수님이 직접하신 말씀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의 부활후 초대교회의 신학적인 해석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대해

인식하셨으며 수난예고도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둘사이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요?

저로서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궁금점입니다.

어리석은 질문이 아닌가 두렵군요.

늘 강건하십시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8, 2011
*.120.170.250

모모 님,

안녕하세요?

내가 신학대학교 시절인가

<모모>라는 책과 노래가 인기를 끌었던 것 같은데요.

모모 님 같은 분들이 있어서

섣불리 설교할 수도,

강의할 수도 없습니다.

마가복음 묵상의 한 부분을 기억하시다니요. 음.

지금 내가 그 충돌을 해명하기가 좀 궁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지요.

할 수 있는 정도는 해야겠지요.

성령이여, 지혜를 주소서.

일단 다음을 구분해 주셔야 합니다.

복음서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할 때

어떤 대목이 원래의 내용인지를

늘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밝힐 뿐이에요.

가장 오래된 원본에서 크게 달라져서

본래의 의미가 왜곡될 염려가 있을 때는 그런 분석을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런 작업이

청중들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공부할 때는 가능한 그걸 밝히려고 노력하지요.

예수의 고난, 십자가, 부활 예고 본문을

이번 설교에서는 얼마나 예수님의 친언에 가깝냐 하는 걸 밝히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거에요.

그렇다면 설교자 기분에 따라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할 수 있냐, 하고 질문이 들지요?

그런 건 아니에요.

수난, 십자가, 부활 예고는 예수님의 생각이 기본적으로 담겨 있으면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수님에 대한 재해석이 담겨 있어요.

그게 서로 복합적으로 연결되면서

구전 전승이 문서로 자리를 잡고

그것이 다시 편집이 되면서 성경이 된 거지요.

복잡하게 들리지요?

성경을 너무 일반 역사적 문서로 다루는 거 아닌가, 불안하지요?

어쨌든지 위 전승에서 분명한 것은 다음입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십자가는 당연히 예견하셨어요.

그걸 제자들에게 말했겠지요.

마가복음 묵사에서 내가 그것마저 부정했나요?

문제는 고난과 십자가가 부활과 연결되었다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차원의 부활이었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말릴리가 없었구요.

예수님 스스로 그 길을 불안하게 생각했을리가 없습니다.

오늘 여기까지만 설명하겠어요.

모모 님은 어리석은 질문을 한 게 아니라

지혜로운 질문을 하신 거고,

내 대답을 통해서 성경을 좀더 친근하게 대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모모는 철부지'라는 가사만 생각나는군요.

좋은 꿈 꾸세요.

 

 

 

profile

[레벨:29]모모

March 09, 2011
*.40.130.130

목사님,

자꾸 질문 드려서 죄송합니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군요.

예수님이 고난과 십자가는 예견하셨지만

부활은 예견하시지 못한것으로 이해됩니다.

예수님도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인 부활은

예견하시지 못했단 말씀이시지요?

위에서 말씀하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차원의 부활"이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 차원의 부활로 이해되는 데요.

여기서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제 영성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군요.

아득하고 그저 막막할 따름입니다.

성경의 세계와 부활의 세계에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군요.

목사님, 이 막막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주실수 있으신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9, 2011
*.120.170.250

모모 님,

죄송할 거 없습니다.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게 나의 목회이거든요.

새벽기도회도 없고 대심방도 없으니

이런 대답이라도 성실하게 해야지요.

질문이 꼬리를 문다고 했지요?

이젠 됐습니다.

그게 핵심이에요.

이제 모모 님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천천히 들어가려고 준비가 된 겁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본인이 노력하게 될 겁니다.

부활을 지금 우리도 잘 모른답니다.

부활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른다는 게 아니라

그것의 실체가 무언지 모른다는 거에요.

모른다는 말에 실망하지 마세요.

궁극적인 것은 아무도 몰라요.

그것은 하나님만 알고 있는 겁니다.

그걸 아는 척하는 사람은

사이비 이단에 가깝습니다.

성서기자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어요.

내가 다른 데서도 누누히 말했지만

바울도 자기가 아는 것이 부분이라고 했고,

거울도 보는 것처럼 분명하지 않다고 했어요.

왜 부활의 주님을 믿고 따르냐고 질문하고 싶나요?

그에게 궁극적인 생명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인식하신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이

오늘 우리가 부활 후의 예수님 운명에서 배우고 믿는 부활과 딱 일치하는 건 아니에요.

설명이 쉽지 않군요.

일치하는 거 맞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뜻이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거에요.

여기서 또 어렵네요.

완전히 예측이 불가능한 거라는 뜻은 아니에요.

구약에서도 부활에 대한 표상이 없는 건 아니에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적인 표상에서

예수 부활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으니까요.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예수 부활은 이미 컴퓨터에 프로그램으로 저장된 것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생명이, 그것은 종말에 드러날 것인데,

선취의 방식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더 막막해졌으면

이건 무조건 내 책임입니다.

수고하세요.

profile

[레벨:17]아우

March 09, 2011
*.179.178.110

목사님,

잠정적이고 모순 투성이인 세상에서

메시야는 비밀일 수 밖에 없다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해석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을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많이 느낍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늘 감사의 맘이 듭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읽다가 요나서에서 근본적인 의문이 들어서 (질문방)에 질문을 올렸는데

아마도 목사님께서 못 읽으신 것 같아서 질문을 이곳 설교방으로 갖고 왔습니다.

제 궁금증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

 

구약성경 정경화 결정은 주후 90년 얌니아회의에서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구약성경에서 아주 독특한 요나서인데요,

요나서는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선민의식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도 활짝 개방돼 있다는 메시지를

요나라는 한 예언자의 운명을 통해서 전하려 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주후 90년 얌니아회의에서 유대교가 요나서를 구약성경에 포함시켰다는 것은

당시 유대교가 견지하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신관(배타적인 신관-유대인들만의 하나님)으로부터

요나서가 그리고 있는 세계열방에 대한 열린 하나님으로 인식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인지요?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자신들의 전통적인 신관(유대인들만 구원하는 하나님)에 변함이 없다면

유대교에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요나서를 구약성경 안에 편입시켜 놓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유대인들은 요나서를 오늘의 기독교와 같은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기독교와 다른 방식으로 읽고 해석하는지, 만일 다르다면 요나서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09, 2011
*.120.170.250

오메가 님,

안녕하세요.

구약신학은 내 몫이 아닌데요.

내 설명은 상식적인 수준이라는 걸 감안해주세요.

오메가 님의 질문을  자세하게 검토하려면

요나 신학을 먼저 공부해야겠는데,

이 자리에서는 곤란합니다.

오메가 님의 생각처럼

요나서는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이방인에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구원의 보편성이 극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상은 요나서만 말하는 건 아니에요.

구약성서 곳곳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시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구요.

선지자들도 그런 신탁을 많이 전했습니다.

심지어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왕을

하나님의 사자로 증언하는 예언자도 있어요.

그리고 구약성서는 기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온 세상의 창조주로, 온 민족의 주인으로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도 역시 구원받아야 할 민족이라는 말이 됩니다.

요나서의 주제는 구약성서의 전체 사상과 대립적인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참고적으로,

구약성서는 매우 다양한 사상을 복합적으로 다룹니다.

이방인들이 멸망당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지만

모두가 구원받아야 한다는 입장도 있어요.

한 두 가지 관점으로 구약성서를 재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수고하세요.  

profile

[레벨:6]한밀

March 11, 2011
*.231.141.176

목사님,

"매일묵상"란에 들어가서 변화산에 대한 목사님의 글들을 읽고

설교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십여편이 넘는 글들을 읽고 나니 훨씬 이해가 좋은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중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불합리를 합리로 뒤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 신비에 대한 경험입니다."

만약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면,

그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하는 우리의 신앙현실에서 힘든 부분이기도하겠지만,

평신도들이 그러한 성서해석의 바탕에 서서 교회공동체안에서 살아가는것도

쉽지많은 않은 현실인것 같습니다.

언제나 이런 현실의 차이들이 좁혀질수 있을지.....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나라들이 성서해석에 있어서 공통적인 시행착오들을 경험 하는것인지

아니면 더 많은 시간이 지나가야 저희 한국교회에도 인문학적인 성서해석이

설교강단에서 자리 잡아 갈 수 있는것인지............누구의 죄(?)입니까........?

 

한가지 참고적으로,

설교본문을 올려주시면 그 말씀을 읽으면서

설교말씀을 읽어내려갈텐데...

목사님의 강조점이 설교본문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막상 저는 설교본문도 찾아서 읽지않고 대충 어떤 내용이겠거니 하면서

목사님의 설교로 바로 들어가는 게으름(?)의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보다, 성경말씀의 내용이 더 드러나야 할텐데.....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2, 2011
*.120.170.250

한밀 님,

좋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일단 성경본문을 읽는 게 우선이겠지요.

각자가 설교를 읽거나 듣거나 보기 전에

미리 성경을 찾아서 읽기는 힘들테니

여기에 아예 올리는 게 좋겠군요.

지금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13]진인택

March 12, 2011
*.239.93.193

반갑습니다. 이번주 초부터는 컴퓨터 바이러스, 재설치 관계로 늦게 인사를 드립니다. 목사님께서 성경말씀을 전하시는 또 다른 기자가 되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맞는 상황과 설명, 비유, 전개를 이끌어 주신 것 또한 감사 드립니다. 비밀중의 비밀 곧 메시아의 비밀을 벅찬 희망으로 간직할 줄 알게 됨이 지금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비밀이기에 제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비밀을 꺼내서 저도 저와 같은 비밀을 간직할 수 있는 누군가를 전도 하고 싶은 생각 또한 간절해 집니다. 오늘의 설교를 듣고 메시아의 비밀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알게 되었다고 말씀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모세와 엘리야를 작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 예수의 비밀이 하나님의 알지 못할 통치를 더 순종적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오늘 비밀의 하늘에서 별이 빛나고 있지만 오늘 낮 일본의 큰 지진이 일어나서 안타깝습니다. 상처 받은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항상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3,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위 설교를 꼭꼭 씹어서

영양가 높은 음식물로 만드셨군요.

비밀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정말 중요한 개념이랍니다.

그것은 분명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종말론인 깊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번 일본이 당한 재해가

아무래도 너무 큰 재앙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허락해주십시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32
448 성령강림절 건지시는 하나님 (출 2:1-10) [14] [1] 2011-08-22 15735
447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에 관한 이야기 [10] 2011-08-15 16433
446 성령강림절 구원의 차별성과 보편성 [20] 2011-08-07 13870
445 성령강림절 다리 저는 야곱 [10] 2011-07-31 14463
444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2011-07-24 17503
443 성령강림절 악을 대하는 태도 [20] 2011-07-18 13979
442 성령강림절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14] 2011-07-10 13376
44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8] 2011-07-04 15918
440 성령강림절 아들을 바쳐라! [17] 2011-06-26 14208
439 기타 세례를 베풀라 [8] [2] 2011-06-20 11494
438 성령강림절 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13] 2011-06-12 24593
437 부활절 하나님의 영광이 답이다 (벧전 5:6-11) [15] 2011-06-07 14744
436 부활절 부활은 심판이다 [12] 2011-05-29 13798
435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12] 2011-05-22 18971
434 부활절 예수의 기이한 빛 (베드로전서 2:1-10) [16] 2011-05-16 20086
433 부활절 눈이 밝아진 그들 [11] 2011-05-08 15921
432 부활절 부활의 증인 공동체 [17] 2011-05-01 22440
431 부활절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17] 2011-04-24 19624
430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2011-04-18 18022
429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2011-04-11 17092
428 사순절 빛의 자녀, 빛의 열매 [25] 2011-04-03 23394
427 사순절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18] 2011-03-27 19900
426 사순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13] 2011-03-21 19052
425 사순절 생명의 왕국 [5] 2011-03-13 15883
» 주현절 메시아는 비밀이다 (마 17:1-9) [17] 2011-03-07 16678
423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2] 2011-02-27 16961
422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16] 2011-02-22 18832
421 주현절 하나님이 생명이다 [10] 2011-02-15 17116
420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2011-02-06 17255
419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다 [3] 2011-01-30 20763
418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7] 2011-01-23 16745
417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2011-01-17 18311
416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4] 2011-01-09 18768
415 성탄절 그리스도 찬양 [11] 2011-01-02 15774
414 성탄절 은총의 깊이로! [14] 2010-12-26 23526
413 성탄절 영광과 평화의 노래 2010-12-26 21608
412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file [8] 2010-12-20 18710
411 대림절 "당신은 메시아인가?" file [10] 2010-12-12 15894
410 대림절 소망의 하나님, 우리의 소망 file [5] 2010-12-06 21613
409 대림절 인자가 오리라 file [8] 2010-11-28 17969
408 성령강림절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file [12] 2010-11-22 21736
407 성령강림절 새로운 창조의 하나님 file [9] 2010-11-14 13752
406 성령강림절 죽음, 삶, 하나님 file [13] 2010-11-07 14043
405 성령강림절 믿음과 구원 file [4] 2010-10-31 21003
404 성령강림절 영과 구원 file [9] 2010-10-24 13428
403 성령강림절 기도와 믿음 file [20] 2010-10-19 22359
402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file [6] 2010-10-10 16667
401 성령강림절 믿음과 종됨의 관계 file [18] 2010-10-04 19035
400 성령강림절 하나님은 누구인가? file [8] 2010-09-26 19095
399 성령강림절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다! file [5] 2010-09-20 14822
398 성령강림절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 [20] 2010-09-12 16560
397 성령강림절 토기장이 하나님 [11] 2010-09-06 26487
396 성령강림절 안식일과 해방 [10] 2010-08-22 17103
395 성령강림절 주는 우리의 평화! [19] [1] 2010-08-16 15745
394 성령강림절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8] 2010-08-09 19478
393 성령강림절 생명과 소유 [8] 2010-08-02 15400
392 성령강림절 음란한 여자와 결혼한 호세아 [21] [1] 2010-07-25 34631
391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군가? [16] 2010-07-19 18260
390 성령강림절 이웃에 대한 질문 [16] [2] 2010-07-11 17088
389 성령강림절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가? [8] [1] 2010-07-05 26538
388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17] 2010-06-27 24337
387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라 [10] 2010-06-21 14276
386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신앙 [19] 2010-06-13 15654
385 성령강림절 한 말씀만 하소서 [17] 2010-06-07 18709
384 성령강림절 지혜의 영, 창조의 영 [7] 2010-05-30 16288
383 성령강림절 성령경험과 구원경험 [2] 2010-05-23 14471
382 부활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3] 2010-05-17 12422
381 부활절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12] [3] 2010-05-09 14229
380 부활절 창조의 위기와 구원 [10] 2010-05-03 15766
379 부활절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 [27] [2] 2010-04-25 16728
378 부활절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 [4] [1] 2010-04-18 13191
377 부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14] 2010-04-11 13961
376 부활절 새 창조와 새 생명 [4] 2010-04-05 14294
375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 [11] 2010-03-29 20371
374 사순절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27] 2010-03-22 19059
373 사순절 축제의 능력 [5] 2010-03-15 12981
372 사순절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 [2] 2010-03-08 20446
371 사순절 아브람의 거룩한 두려움 [8] 2010-03-01 14578
370 사순절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 [8] 2010-02-22 27844
369 주현절 주는 영이시다 [3] 2010-02-15 13012
368 주현절 거룩한 생명의 씨 [10] 2010-02-08 16069
367 주현절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15] 2010-02-01 15316
366 주현절 교회 일치의 신비 [11] 2010-01-25 15584
365 주현절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 [17] 2010-01-18 18811
364 주현절 성령 임재와 마술 [21] 2010-01-11 18122
363 성탄절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 [21] 2010-01-04 15828
362 기타 세겜의 약속을 기억하라 [9] [1] 2010-01-01 17778
361 성탄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2009-12-28 23448
360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와 구속 2009-12-25 16585
359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몸’ [8] 2009-12-21 15179
358 대림절 성령 세례와 심판 [36] 2009-12-14 20301
357 대림절 주의 날과 십일조 [49] 2009-12-07 19530
356 대림절 그 날이 임하리라! [17] 2009-11-30 15736
355 성령강림절 구름기둥과 불기둥 [25] 2009-11-23 30000
354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2] [1] 2009-11-16 12499
353 성령강림절 신앙경험은 새롭게 '봄'이다 [18] 2009-11-09 16927
352 성령강림절 복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 [10] 2009-11-02 21689
351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8914
350 성령강림절 재물과 하나님 나라 [22] 2009-10-19 14557
349 성령강림절 번제의 길 [22] 2009-10-12 15942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