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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차별성과 보편성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871 추천 수 1 2011.08.07 23: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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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로마서 10:5-15 

구원의 차별성과 보편성

로마서 10:5-15, 성령강림절후 8째 주일, 2011년 8월7일

 

     그리스도교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대충 윤곽만 압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부활 승천하신 뒤에 그를 따르던 이들이 모여서 그의 말씀을 나누고 유월절 만찬을 나누면서 그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초기 구성원들입니다. 그들이 그런 모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당장 그리스도교라는 하나의 종교가 역사에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천천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시 논란의 중심은 율법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경우로 말한다면 대한민국 법과 같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대한민국의 법을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가 태동되던 당시에 율법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제자들을 비롯해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구원성들은 당연히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들은 대다수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절대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당연히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듯이 초기 그리스도교 사람들도 율법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 세계로 전파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살던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예루살렘 종교회의를 다루고 있는 행 15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결론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그것으로 간단하게 해결된 게 아닙니다.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신학적인 갈등으로 남았습니다. 그런 기간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다가 결국은 각각 제 갈 길로 갔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분열입니다. 다시 하나로 결합되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신봉하던 유대 그리스도교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그것을 거부하던 이방 그리스도교만 역사에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예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방 그리스도교의 신학적인 토대를 놓은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도 원래는 율법주의자였고,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정도로 유대교에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왜 율법의 길을 버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서술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그는 율법을 무조건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변증법적으로 극복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복음은 율법의 부정이 아니라 율법의 지양(止揚, Aufhebung)입니다. 바울의 이런 신학적 패러다임 쉬프트로 인해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역사에 확고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두 가지 의(義)

     오늘 설교 본문인 롬 10:5-15절은 이것에 대한 신학적 해명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의를 대립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5절이 말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이고, 다른 하나는 6절이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먼저 5절을 보십시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레위기 18:5절의 인용입니다. 율법을 실천하면 사람은 의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기본입니다. 문제는 아무도 율법을 온전하게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미 앞부분에서 충분히 해명했습니다. 율법을 실천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이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롬 3: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롬 5:20) 율법은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합니다. 양심을 자극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각성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거기서는 인간의 근본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실정법이 인간을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법은 일종의 필요악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두 번째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6절)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행위에 초점이 있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존재에 초점이 있습니다. 인간 구원 문제에서 행위와 존재의 관계는 매우 미묘합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거나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거꾸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거나 나무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전자는 행위의 관점이고, 후자는 존재의 관점입니다. 행위가 없으면 존재를 인식할 수 없고, 존재가 없으면 행위의 근거가 실종됩니다. 이것을 믿음이 우선이냐 아니면 믿는 자답게 사는 윤리가 우선이냐의 관점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배제하지는 않지만, 어디에 무게의 중심을 두느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당연히 믿음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믿음의 열매인 행위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반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을 올바른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 하는 주장입니다. 그런 주장이 바로 율법정신입니다. 오늘의 실정법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류 문명이 제시한 인간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회를 가리켜 문명사회라고 합니다. 매우 세련되어 보입니다. 도덕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것은 결국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비판하고 있는 율법주의의 한계를 그대로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은 윤리적으로 아무리 훈련을 받아도 실제로는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작년에는 옥한흠 목사님이 돌아가시더니 일주일 전에는 하용조 목사님이 훨씬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분들은 홍정길, 이동원 목사님과 더불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4인방에 속한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한 시대를 풍미하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목회 특징은 평신도 교육입니다. 특히 제자훈련을 한국교회의 트렌드로 올려놓으신 옥한흠 목사님이 선두 주자였습니다. 약간 다른 성격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삶의 변화라는 동일한 관점으로 교회를 크게 키우신 분은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이십니다. 그분들은 평신도의 제자다운 삶과 성화를 일관되게 외치셨습니다. 그런 목회와 설교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혹독한 제자훈련을 받고 감칠맛 나는 성화 설교를 들었어도 신자들이 변하지 않더라는 것이 그분들의 한결같은 소회였습니다. 그동안 사람을 너무 나이브하게 대하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의 구원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계속해서 “당신, 똑바로 살아야 돼!” 하고 닦달해야 하나요?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방식의 신앙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충고를 듣는 걸 즐거워합니다.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 태산과 같습니다. 지교회도 봉사해야 하고, 해외 선교도 해야 하고, 도덕적으로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 의사였다가 나중에 가톨릭의 사제가 된 이태석 신부의 책이 계속해서 베스트셀러입니다. 그는 수단에서 한센씨병, 일명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서 살다가 대장암에 걸려 50세도 채 안 되는 나이에 죽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만한 분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이 복음인 것처럼 주장되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철저하게 율법적으로 살았던 바리새인의 삶이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에게 영적으로 부담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특히 세리와 죄인들에게 그런 삶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오늘 그것을 요구합니다. 복음이 아니라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중들은 그런 요구에 적당히 반응하면서 나름으로 종교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일종의 영적인 나르시시즘(자기연민)입니다.

 

     차별 없는 하나님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는 업적의(業績義)라고 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칭의(稱義)입니다. 업적의는 사람이 자신의 업적으로 통해서 의를 획득하는 길이라면 칭의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사건을 믿음으로 의를 획득하는 길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라, 도덕적으로 살아라, 양심적으로 살아라,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해서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하라고 해서 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사람과 사람이 사는 세상이 바뀐다면 이 세상은 이미 천국으로 변했을 겁니다. 중심의 존재론적 변화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변화이고, 오늘 본문에 따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구약에 근거해서 해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구약성경이 유독 많이 인용됩니다. 레 18:5, 신 30:12, 신 30:14, 사 28:16, 욜 2:32, 사 52:7절이 그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내용을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실에서 맞춰서 해석했습니다. 그 현실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입니다. 본문 1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하면 차별이 있습니다만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차별이 없습니다. 놀라운 시각입니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바울에 의해서 이제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율법이라는 걸림돌이 제거되었습니다. 율법주의는 가고 복음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구원의 차별성에서 구원의 보편성으로 방향이 달라진 것입니다. 차별적 구원에서 보편적 구원으로의 전환입니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의 바로 앞인 롬 10: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에 의해서 예수 복음의 정체성이 빛을 발하는 대목입니다.

     바울의 이런 가르침은 혁명적입니다. 이렇게 바꿔 놓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으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으로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냐 하고 화를 낼 겁니다. 그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 안에 들어온 몇몇 소수의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도 율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율법을 빙자해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을 넘어서 모든 이들의 구원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는 이들은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도 포함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성실하게 산 사람도 포함되지만 성실하게 살지 못한 사람도 포함됩니다. 수능을 못 본 학생들도, 경쟁력이 없어서 최저 생활비도 못 버는 사람들도, 몸을 파는 여자들도, 우리나라에 돈 벌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도, 공산주의자들도, 여러분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다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런 보편적 구원의 종말론적 현실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방식으로 차별이 고착화되는 오늘의 이 세상에서, 돈이 사람을 점점 더 심하게 차별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요? 우리 모두 각자가 감당해야 할 삶의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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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르네상스

August 09, 2011
*.33.96.231

목사님의 설교말씀은

사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교회생활을 해오면서 항상

크게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믿는 자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항상 고민이었죠.

 

로마서에서는 행위로 구원 얻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하고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니

뭐가 맞는지도 헷갈리고... 그런 부분에 대해 고뇌를 많이 했었죠.

 

요즘 한국사회가 윤리적, 도적적으로 많이 부패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러 가지 악한 범죄들이 참 많죠.

그것을 보고 한국교회 내에서 '교회가 도덕적 주도권을 회복하도록 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청소년 순결 서약 운동 등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도 한국사회는 잘 변화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역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믿음이나 행위의 문제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이루셨는가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에 주목하며 신앙생활하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이 아무런 차별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 그리 쉽게 이해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시기에

그것이 또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 이야기는 곧

하나님이 원래 그런 분이시라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다른 그 어느 누구를 말하기 전에

저부터 그런 하나님의 차별 없는

온전한 구원에 보다 마음을 열고

영적인 시선을 집중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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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09, 2011
*.120.170.250

김종원 님,

설교를 깔끔하게 정리했군요. ㅎㅎ

김종원 님도 앞으로 설교자로 평생을 살게 된 텐데,

설교를 잘 하냐 아니냐에 앞서

우선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거에요.

그냥 아는 게 아니라 소화된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그게 쉽지 않아요.

일반 신자들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의 모른 채

그냥 교회생활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거나

성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경험과 그 해명이라는 게

손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게 대답이에요.

종말에 가서야 확연하게 마주치게 될 그분과의 관계에

깊이 들어간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더구나 우리의 일상이라는 게

그런 쪽으로의 생각을 막아버리기도 하구요.

하여튼 힘을 내 봅시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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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삐쭉이

August 10, 2011
*.182.131.202

보편적인 구원과 토기장이의 권한에 대해서는 잘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진노의 잔과 긍휼의 잔이 하나님이 정하신 배역이라면 이또한 큰 구원의 틀에서는 구원의 기준은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니란 뜻일까요? 그저, 나의 관점에서는 만인이 진행형혹은 미래완료형의 구원으로 가는 길상에 있다는 인식만이 하나님으로 부터 내가 받은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목사님, 삐쭉이는 가면을 벗은 저의 본명(아내가 부르는)입니다.

항상 진리의 공명을 이 우둔한 돌덩이에게 계속 두드려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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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0, 2011
*.120.170.250

ㅎㅎ 삐죽이 님,

아내 되는 분이 남편을 "삐죽이!" 이렇게 부르나요?

질그릇과 토기장이 이야기를

굳이 구원의 보편성과 대립되는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택적 구원과 보편적 구원의 문제를

인간이 어떻게 결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어요.

구원의 은총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구원의 빛이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도할 뿐이지요.

기도는 그렇게 믿는다는 뜻이면서

그렇게 살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 구원을 완성하실지 기다려봅시다.

삐죽이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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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August 10, 2011
*.179.178.110

목사님께서는 예수를 믿어도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받아들이는 것

곧 칭의에 의해서만 존재론적 변화가 가능하시다고 했는데, 사실 그 사건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는 걸까요? 존재가 변화되었다는 걸 무엇으로 확증할 수 있는지요?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켜주신다고 했으니까 의심하지 않고 변화된 줄로 믿어야 하는 건지요? 그게 존재론적 변화인지요?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존재론적 변화가 어떤 건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 추가질문입니다.

이태석 신부에 대한 것인데요, 그 분의 삶을 복음으로 착각하면 안된다는 말씀은 정확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의 삶이 곧 복음은 아니지만, 그 분이 복음적인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면 틀린건가요?

복음과 복음적인 삶은 어떻게 연결되나요?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을 존경하는 것은 그 분의 삶을 곧 복음으로 받아들였기 보다는

복음적인 삶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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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0, 2011
*.120.170.250

오메가 님,

핵심적인 질문을 주셨네요.

신학적으로 많은 해명이 필요합니다.

또 말로 설명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칭의가 존재론적인 변화라는 말을 설명해야겠군요.

설교에도 있지만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을 했어요.

겉으로는 달라진 건 없지만

내면으로는 새로워졌다는 거에요. 

여기서 겉을 육체로,

내면을 마음으로 보진 마세요.

새로워졌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문제에요.

흔한 비유로 설명하면

누구에게 집에 양자로 들어간 거와 비슷합니다.

양자로 입양되어도 인격과 사고방식이 그대로 남지만

존재는 달라지는 거에요.

아버지가 그를 아들로, 딸로 인정하는 거지요.

칭의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건이에요.

그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존재론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질문했지요?

그건 실증이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구원의 확신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성령의 열매들이 따라올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건 아니에요.

이 확신을, 또는 실증을 애써 찾으려는 신앙운동이

바로 각성운동, 청교도운동, 부흥운동 등이에요. 

오메가 님이 원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요.

교회는 그걸 두 가지 차원에서 제시합니다.

하나는 세례와 성만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과의 공명입니다.

이걸 다시 설명하려면 또 길어지겠지요?

이 정도로 정리하겠어요.

이태석 신부님에 대한 것은 오메가 님의 의견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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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August 11, 2011
*.214.88.73

감사합니다.

귀에 쏘~옥 들어오게 설명해 주셔서

잘 알아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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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August 10, 2011
*.119.241.122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 설교 말씀을 설교시간에 직접 듣지 못하고 설교말씀의 원고만 보면 깊은 신학적 통찰을 갖지 않고는 사실 처음 보는 사람은 오해의 소지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주일학교때부터 단순하고 명확한 사고에 길들여져 있기에 목사님 말씀에 제가 따라 가려면 몇번 씩 듣고 읽어야 하니 제가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구원의 보편성을 저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기회의 보편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지금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기회는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종말때까지 그길은 열려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용기목사님이나 릭웨릭 목사님이 때로 말하는 것처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문은 열려 있다 라는 뜻은 아니시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오직 모든 구원은 예수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성취될수도 없으며 그것은 성경의 구속사적 사관이지 않습니까?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구원의길은 하나이지만(절대자와의 만남) 그길은 여러갈래이다 라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씀은 아니라고 인지됩니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보면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차별과 폭력은 기독교인들이 바른 구원관이 있으면 없어져야할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로만 전도하는 행위는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교회내에서 봉사로만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도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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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0, 2011
*.120.170.250

삼송 님,

이번 여름은 비, 바람을 맞다가 다 지나가는가 봅니다.

저의 설교에 대글을 달 때 편하게 생각하세요.

너무 조심스러워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내가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지만

삼송 님보다 생각을 정확하게 하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요.

'모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성취될 없으며...'라고 하신

바로 그 문장에 모든 게 달려 있는 것 같네요.

그렇지요?

그게 상대화되면 근본이 허물어진다는 거니까요.

옳습니다.

나도 그걸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이에요.

구원의 보편성이라는 말도 그 안에서 하는 거에요.

설교에서 인용한 건데,

그리스도는 ... 율법의 마침이 되셨어요.(롬 10:4)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이 허물어진 거에요.

차별을 넘어서 보편의 세계가 열린 거지요.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겁니다.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서 나오는 겁니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겁니다.

자연의 구원까지 영향을 미친 겁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미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태양이 착한 사람이나 못된 놈이나 모두 비추듯이 말입니다.

위 설교는 이 관점을 강조한 겁니다.

2)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칼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말했는데요.

마지막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 이런 게 있어요.

양과 염소의 비유에요.(마 25:31 이하)

오른 편에 온 사람은 자신들이 임금에게 아무 것도 해 준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상송 님이 말한 '기회의 보편성'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군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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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August 11, 2011
*.109.42.2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기를 소망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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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August 12, 2011
*.23.36.90

목사님의 설교내용중

 "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으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으로 말입니다." 라는 말씀이

오해의 소지를 낳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 구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미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런데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말은 자칫

타종교에서 신봉하는 분들로 인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는 말로 들릴 수 있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을 타종교인에게도 구원이 있고, 타종교도 구원의 대상에 속한다로 바꾸면 어떨까요.

물론 안바꿔도 알아서 알아들으면 되지만...

혹시 이렇게 바꾸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고자 것과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면...

밖에 비가 엄청와서 그런지 말이 횡설수설 하는 것 같네요^^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먹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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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2, 2011
*.120.170.250

눈사람 님의 지혜를 좀 저도 배워야겠습니다.

똑같은 말도 어와 아가 다른 법이니

가능하면 오해가 없는 식으로 말할 필요가 있겠군요.

고맙습니다.

여기는 맑았다 흐렸다만 하지

비는 오지 않는군요.

휴가는 잘 다녀오셨겠지요.

나는 집에 있는 게 휴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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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한글

August 12, 2011
*.250.32.242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잘라서 보면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겠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이해하는 교리에 갖힌 분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려울것 같지 않습니다. 로마서 10장 말씀도 결국 그 구원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전 인류에 대한 보편적이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도바울도 고백했듯이 그분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때 우리의 죄를 지고 가셨다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모르는 자나 오해한 자나 모든 이의 죄값 역시 그 십자가 위에 다 얹혀 있다고 말입니다. 이 때의 죄는 율법에 따라 정죄되는 죄이겠지요. 성경은 따라서 새로운 법에 따른 죄를 정의 했는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러한 구속역사를 이루셨다는 것 (아버지의 일, 예수를 인정하는 것/믿는 것)을 인정하는 가 그렇지 않는가가 그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인류는 율법의 죗가인 첫번째 사망에서 언젠가는 부활되고, 새로운 죄의 정의에 따른 두 번째 사망에서는 생명과 영원한 죽음으로 나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좀더 나가자면, 로마서10장의 구원에 대한 기술의 "마음으로 입으로 시인"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해석되고 이해되는가가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가 합니다. 1세기 당시 로마 황제의 절대권력 아래서 이교도의 메시아를 주로 시인하는 것과 지금의 풍요로운 물질문명, 자유주의 문명 아래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 동일한 무게를 갖지는 않겠지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속성을 기억하고 묵상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피조물들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이 시대의 고백이요 주로 시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요즘 생각이 많습니다. 불평등과 타락이 난무한 이 시대에 참 구원받은 자의 정신은 무엇을 고민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하는지 자꾸 주변만 돌아보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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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2, 2011
*.120.170.250

한글 님,

닉이 기억하기 좋군요.

신학을 공부하는 분인지,

또는 현재 목회자인지 모르겠으나

바울 신학에 대한 해석이 깊으신 것 같네요.

고민, 행동, 삶....

그분의 승리를 내다보며 오늘도 진도를 나가봅시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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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ugust 12, 2011
*.220.104.49

늘 경계를 하는 것이 오늘 말씀해주신 내용에 들어 있습니다.

내가 의로운 길을 가는가에 질문을 하고 율법에 메이는 신앙에 못 가게 멍에를 나에게 꿰어 놓아도 이상한 것은 그 멍에의 고통을 이기고 어느덧 법에 법을 더하는 신앙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만족, 자기슬픔에 빠져 집단 속의 볼트나 너트가 되어버립니다. 복음의 핵심, 곧 내입으로 주님을 주로 시인하며, 부활의 주님을 마음으로 믿어야 함이 얼마나 중요하며 한 영혼을 진리로 순탄하게 인도함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영혼을 전도함에 매진함도 위대한 일이지만 스스로가 법에 법을 둘러쓰고 입으로는 복음을 외치는 형국이면 어찌 될는지.,  그 모양새가 아니다고 말 하는 것이 위세에 눌리고 있습니다. 천페이의 성경을 암송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목사님의 오늘 설교내용처럼 한 줄의 명료한 진리가 벽을 무너뜨리고 구원의 발화점이 됨을 모른다면, 산 더미 같은 장작이 쌓여 있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정작 손에 쥐어지는 성냥이 없는데..

 

특정 교회를 비난하는 일은 아닙니다. 비난은 폭력과 결부되는 것 같아서 문 내렸습니다. 지금 말하는 이 내용은 죄의 지배를 받는 나에게 하는 말입니다.

율법의 테두리를 뛰어 넘게 한 바울의 패러다임 SHIFT가 미지근한 복음의 생각, 율법에 나를 구원의 대비책으로 담그려는 나의 생각을 넘어 서게 합니다. 패러다임 SHIFT, 정말 후덥지근한 요즘 날씨에 시원한 냉수 같은 말씀입니다. 학교 전공시간에 그래프 무지 많이 그렸습니다. 수요, 공급,탄력,변곡점,SHIFT, ROTATE..

경제학에서 그래프의 SHIFT는 그 그래프가 안고 있는 요인들이 전부 한꺼번에 이동할 때 SHIFT되었다고 합니다. 그와는 달리 한 부분에 문짝의 경첩처럼 고정되어 있는 요인이 있고 나머지가 고정 점을 회전 점으로 그래프가 돌 때 ROTATE한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제 믿음에도 ROTATE SHIFT가 번갈아 존재합니다.

목사님 말씀 읽고 나니  머리가 시원해집니다. 오늘 아침을 시원하게 열어줍니다.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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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2,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패러다님 쉬프트는 혁명로만 가능하다는데,

영적인 변화가 곧 혁명이겠지요.

공학을 전공하신 분이래서 그런지

신앙의 세계를 공학용어로 해명하시는군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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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August 12, 2011
*.179.178.110

목사님께 한 가지만 더 여쭈고자 합니다.

간혹 안티들이나 기독교인들 중에 성경에 목사제도가 있냐,

성경대로 해야 하지 않느냐 하고 제도권 교회의 목사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 주는 게 좋을까요?

어떻게 그들에게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답변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이들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보면 또 다른 형태의 근본주의자가 아닌지요?

이들은 무조건 성경대로 하자니 솔직히 답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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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2, 2011
*.120.170.250

오메가 님,

성경에 목사제도 운운은 대답할 가치도 없어보이네요.

트집을 잡으려는 것, 또는 기초를 모른다는 것이겠지요?

그리스도교는 성경의 문자와 당시 삶의 형식을 절대화하지 않는답니다.

그것은 제가 흔히 사용하는 메타포로 설명하면 손가락이거든요.

달을 보는 게 핵심이라면

손가락이 엄지든지 검지든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면 되겠네요.

신앙은 형식을 넘어서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이에요.

신부나 목사제도는 형식이에요.

어느 때가 되면 목사제도도 없어질 수 있겠지요.

아직은 여전히 필요하구요.

아마 계속 필요할 겁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전문가가 필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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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ugust 13, 2011
*.239.93.193

목사님, 그 동안 다녔던 교회에서는 稱義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다비아에서 말씀듣는 동안에도 잘 몰랐었는데 오늘 본문과 답변을 찬찬히 읽어 보면서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의로움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눈길을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 생각 자체로도 내가 변함을 느끼게 됩니다. 

저도 글을 쓰고 대화를 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하지만 몇년전부터는 왠지 모임에 나가서든지 회사에서든지 의무적으로 주어진 말을 해야 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긴말을 하지 않습니다.  귀담아 들을 수 있는 말도 많지만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와 취향이 전부 자기의 의도를 팽창코져 하는 기미가 늘 깔려 있기에 쾌하지는 못해서 듣는 척 합니다. 대신 전 짧게, 핵심만 말하고 얼른 다음 사람에게 마이크를 넘깁니다. 오늘 무척이나 귀한 뜻을 담고 있는 말을 알게 되어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아침에 글을 올릴 때만해도 몰랐었는 데 아내가 잠들고 조용해서 (깨어 있을 때도 조용합니다.) 잘 생각을 해서 보니 굉장한 뜻을 담고 있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시원하게 시작했고, 이제 잠들어야 하는 데 목사님께서 주신 설명을 머리에 담아서 두번 세번 .... 아마 앞으로 평생 잊지 못하겠죠.  칭의를 몰랐어도 수많은 주장을 할 수 있었는 알고 나니 그말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중요한 길임을 다시 알게 됩니다.

 

혹자는 약간의 성경의 내용을 CD에 담고, 최고의 행사로 전도를 하로 가자고 계속 부추깁니다. - 부화뇌동..



목사님 울산은 아무래도 다비아의 변방이겠죠.  두 달 전쯤에 다니던 교회를 부인하였습니다. 언쟁이나 맘 상함 없이 조용히 나왔습니다.  막상 틀에 잡힌 사이클에 변동이 생기니까.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짜피 아닌길을 내가 따라 간다는 것은 내가 나를 힘들게 하는 꼴이어서 힘들게 결정하였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둥지와 같은 교회를 떠나는 날지 못하는 어린 새인양 나를 바라 보고 있습니다.  다르게 보는 시각도 많고요.

이제 믿음과 분명한 구원의 길을 가기위해서 말씀을 주는 교회를 찾아야 하지만 선택이 과거와 같은 결과를 낳을 까봐 금방 몸을 옮기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나홀로 주일아침에 성경을 읽고 다비아를 방문할 때면 약간의 외로움도 있답니다. 앞으로 어찌될지 아직까지 하나님께 깊게 기도드린적이 없습니다.  비교가 전교회를 폄하하는 내용으로 직결되어도 어쩔 수 없이 말하고 싶습니다. 전 저만을 놓고 볼 때 가슴벅찬 일들이 다비아에서 훨씬 많았습니다. 

때가되면 방문자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알고 지내던 형제로 목사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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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3,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칭의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말은

미안하지만 믿기 힘드는군요.

칭의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거든요.

혹시 다른 단어로 전해들은 아니신가요?

인의론(認義論)!

인의론과 칭의론은 똑같은 개념의 다른 말이에요.

또는 이런 전문적인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업적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을 들었겠지요.

그것을 낱말뜻으로 아는 것과

그 개념 안으로 들어가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지금 진인택 님은 그 개념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신 것 같네요.

이게 시작이구요.

믿음과 구원과 그 나라의 신비 안으로

점점 깊이 미끌어져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기만 하다면요.

이를 위해서 신앙의 선배들이 쓴 글을 읽는 거는 아주 중요합니다.

교회를 정하기 전까지

가끔 대구샘터 교회에 오세요.

요즘 각 지역마다 교회를 소개해 달라는 분들이 있어서

추천 교회 리스트를 작성해볼까 생각 중이랍니다. ㅎㅎ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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