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1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0127.mp3 
성경본문 : 누가복음 4:14-21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누가복음 4:14-21, 주현절후 제3주, 2013년 1월27일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랍비 예수의 설교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 즉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유랑 랍비들이 많았는데, 예수님도 그런 분들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랍비들은 회당에서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회당에서 자주 말씀을 전했습니다. 나중에 유대교 고위층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힌 뒤에는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15절과 16절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사실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특히 16절의 이야기는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아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나오듯이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 전통이 기독교 예배에도 부분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성경읽기와 설교와 찬송입니다. 기독교 예배는 이런 회당 전통과 성찬식이 결합된 겁니다. 회당예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사람들은 회당에 들어가면 먼저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고, 다음에는 쉐마(신 6:4-9)를 공동으로 고백하고, 테필라(Tephillah)와 쉐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라는 유대인들의 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이어서 성서일과에 따라서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은 주로 오경을 가리킵니다. 훗날 선지서도 성서일과에 포함되었습니다. 성경은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읽습니다. 성경읽기가 끝나면 다시 기도를 드리고, 이어서 랍비 같은 사람들이 설교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카디쉬(Qaddish)라는 기도문을 함께 외웁니다.

 

예수님은 성경 맡은 사람에게서 전달받은 이사야의 한 부분을 펼쳤습니다. 이사야 61:1,2절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두루마리로 된 이사야서를 덮어 그걸 맡은 사람에게 건넨 뒤에 회당에 앉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이것으로 회당 이야기가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뒤로 가면서 이야기가 꼬이게 됩니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절) 자신들과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 대단한 사람 흉내를 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십니다. 옥신각신 끝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면서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이런 폭동이 예정대로 계속 진행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돌을 던지게 될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 사이를 빠져나와 피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험악하게 끝났습니다. 회당예배로부터 종교재판으로 뒤바뀐 겁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예수님의 설교를 듣던 청중들은 왜 돌변해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일까요?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을 누구로 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나사렛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랍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자기 고향에서 훌륭한 랍비가 나왔다는 자부심도 있었겠지요. 예수님도 그런 정도의 역할만 했으면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자신에게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이 사실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를 사칭한다고 본 것입니다. 메시아를 사칭하는 자는 용서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훗날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신성 모독죄로 고발당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다른 종교나 세상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논쟁거리로 남을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겁니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순히 습관적으로 믿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선택을 받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무조건 믿는다는 말로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이사야의 예언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응하였다는 말은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했을 겁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면 메시아를 사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이 과연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느냐 하는 게 관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펼쳐 읽으신 이사야의 글에는 메시아로 인해서 벌어질 일이 네 가지로 나옵니다. 1)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 2) 포로로 잡힌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 3) 시각 장애인에게 시력을 준다. 4) 눌린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이런 일들은 ‘주의 은혜의 해’에 일어날 것들입니다. ‘은혜의 해’는 희년을 가리킵니다. 이때는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판 땅을 되돌려 받는 해입니다. 종으로 팔렸던 사람들도 모두 돌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꿈꾸었던 메시아적인 희망입니다.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실제로 사채에 쪼들리던 사람이 모두 탕감 받았다고 말입니다. 또는 남북통일이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내일이라도 기차를 타고 북한을 거쳐서 북경이나 베를린까지 갈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구의 모든 핵무기가 완전히 제거되고, 더 이상 장애인도 없고, 실업자도 없고, 불치병도 없고, 노후에 대한 염려도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도 개인적으로 여러분의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겁니다. 그걸 성취할 사람이 나온다면 그는 분명히 메시아라는 말을 들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실제로 행하셨을까요?

 

네 가지 일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십시오. 1)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은 가난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가난은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합니다.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많은 혁명가들이 민중들에게 가난을 면케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 약속이 부분적으로 지켜질 때도 있었고, 단지 말로 끝날 때도 있었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도 결국 복지 운운하면서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약속들이 판을 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못하셨습니다. 2) 포로생활도 삶을 파괴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로마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셨습니다. 3) 시각장애를 비롯한 모든 장애와 불치병은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병과 장애를 고치기는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애와 병을 고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목적으로 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4) 눌린 자 문제는 두 번째로 언급된 포로생활과 비슷합니다. 예수님 이후로도 세상에는 여전히 억압적인 질서가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경제, 정치적인 억압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메시아적 희망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들은 아마 예수님을 사이비 교주쯤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고향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마을 밖 낭떠러지로 끌고 갔습니다. 메시아를 사칭한 젊은이 예수를 징벌하려고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지금 혼란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기 독단에 빠져서 자기가 메시아라고 외치는 사이비 교주입니까? 아니면 이사야가 꿈을 꾸었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투쟁하자고 선동하는 혁명가인가요? 그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에게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한 것일까요? 본문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하면 이사야 예언의 성취 운운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누가복음 기자의 신앙 고백적 진술입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누가의 영적 통찰을 통해서 예수님 사건을 훨씬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누가는 무엇을 근거로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에게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본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

 

메시아가 행하게 될 네 가지 사건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판단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메시아사상에 근거할 때만 옳은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보다 5백 년 전에 선포되었던 이사야의 예언을 새로운 차원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차원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을 비롯해서 복음서와 모든 신약성서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 새로운 차원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과 운명은 하나님 나라와 직결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첫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수님은 온 몸으로 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치병이나 비유 이야기 등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토대로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영혼을 바친 예수님의 운명은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그것은 곧 사랑이며 창조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영적 관심을 거기로 집중시키셨습니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며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여기서 ‘모든 것’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내용까지 포함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전념하는 사람에게는 가난, 포로, 눈 멈, 눌림도 모두 해결된다는 선언이자 약속입니다. 이런 말씀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시나요?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어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또는 거꾸로 모든 문제가 실제로 다 해결됐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 나라와 그 통치는 실제적인 문제의 해결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한 밤중에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전등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걸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웁니다. 그렇게 싸우는 중에 아침이 옵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손전등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싸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아침이 올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회심하라는 말씀은 아침이 온다는 사실에 영혼의 방향을 정립하라는 명령입니다.

 

이제 문제는 하나님 나라를, 그의 통치를, 그의 능력을 일상에서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구체적으로 언급한 가난, 포로 등등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밤이 어두운 것처럼 그런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운 좋게 손전등을 하나 얻었다고 해도 세상은 캄캄합니다. 아무리 삶의 조건이 좋아져도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는 여러분은 다 아실 겁니다.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없으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그 방향전환을 성서는 회심(메타노이아)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사야의 메시아적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회당에서 그 말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오늘도 우리를 구원해줄 메시아를 찾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 중에도 회당 사람들과 비슷한 생각에 멈춰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복음 기자의 증언을 여러분들에게 똑같이 전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생명의 현실(reality)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침침하고 어둡고 손전등 하나로 다툴 수밖에 없는 밤의 현실에서 살지만 손전등이 전혀 필요 없는 낮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그의 통치에, 그의 부활생명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의 진정한 성취자이신 우리의 메시아이십니다.

profile

profile

삶의 과제

January 28, 2013
*.230.165.185

목사님!

설교말씀 잘 들었습니다.

사실 주일 설교시간에 이성을 가리는 장막(??)이 한없이 찾아와 비몽사몽간에 설교를 들었습니다.

왜 그리도 눈꺼풀이 무거운지요!

 

졸음!

자고있음과 깨어있음의 경계.

깨어있을 땐 잔다는 것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자고있을 땐 깨어있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혹 우리의 삶이 졸음은 아닐런지?

졸음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잔다는 것과 깨어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는......

그래서 졸음의 끝은 완전한 깨어남이자 영원한 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다림이란 이 경계가 있다는 것과 경계가 궁극에는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은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는데, 결국 존 것에 대한 변명만 남았습니다.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십시오.

profile

정용섭

January 28, 2013
*.149.31.175

ㅎㅎ 삶 님,

잘 졸았습니다.

아마 설교가 지루해서 졸았다기보다는

영혼이 편안해서 졸았을 겁니다.

약간 다른 말이지만

삶에도 졸음이 필요한 것 같아요.

현대인은 너무 각성되어 있어서

오히려 영적으로 병들어가는 게 아닐는지요.

잠간 졸다보면 인생이 이미 끝나 있겠지요.

아니 끝났다기보다는 완성되어 있겠지요.

걱정하지 말고

졸면서 살아봅시다.  

profile

클라라

January 28, 2013
*.34.116.82

목사님,

이번 주 설교말씀을 통해서

성서기자들의 놀라운 영적 통찰력을 다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난 회심한 자인가?

회심한 자라면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 그의 부활생명에 전적으로 의존할텐데,

과연 그러한가 하고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또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 부인하지도 못하겠고요.

성서기자들처럼 '그런'영적 통찰력의 부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어둠속에서 빛을 발견한 사람들,

정말 많이 부럽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한 동안 가슴앓이에 시달리게 될 것 같습니다.

profile

정용섭

January 28, 2013
*.149.31.175

Recommend
0
Not recommend
-1

라라 님은 영혼이 부드러운 분이라서

늘 배우는 태도를 잃지 않으시는군요.

성서기자들은 우리의 영적 멘토들입니다.

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그곳을 향해서

우리의 영적 시야가 열려야 할텐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방해를 하는 거지요.

저도 그런 한계를 늘 느낍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길을 가봅시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가 옷입혀졌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말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profile

2C120

April 22, 2013
*.21.50.208

Recommend
0
Not recommend
-3

성경 안에
우리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로 옷 입혀졌다”(??)는 구절 말씀이
(우리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입혀진” 것이 아니라 ??)
어디에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가리키고 있는 바, 즉 사도들의 “손가락”은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졌다”
라는 성서 진리를 말하고 있는데 반해
이 게시물 안에서는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 의(義)로 옷 입혀졌다”
라고 하는 다른 이야기, 다른 “손가락”이 나오고 있으니,

성서 기자들의 진술과 이 게시물 댓글에서의 그런 진술은
그 자체가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이자,
서로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는, 서로 전혀 다른 “손가락”들이니 만큼
성서 진리 면에서 분명한 분별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PS) 
아울러 이 댓글에 마찬가지로 또, 비추천 표시해 놓으며 비방 의사를 밝혀 놓은 회원들에게도
한 말씀 놓습니다.
다비아가 ‘진리 추구를 위한 열린 교제’라는 걸 표방하고 있는 걸 님들이 안다면

<정 용섭 목사님 글에 대해서는 무조건 '찬양 일색' 댓글만이 달려야 한다>는 님들의 그 같은 입장에서
목사님 글에 대해 찬양, 찬동 내용이 아니라 질의 사항을 내놓은 경우에는
무조건 음성적으로 ‘비추천’하거나 양성적으로 ‘비방을 위한 비방’ 댓글들로 공격하곤 하는
그간 보아 온 그런 조잡한 짓들을 일삼을 게 아니라
적어도 다비아의 그런 표방 명색에 걸맞게,
찬양, 찬동이 아닌 이런 질문 형태의 댓글에는 무조건 반대와 비방부터 해 대며 나서는 대신
님 자신의 그 “제대로 된” 비방 “이유”와 '근거'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의사 표명을 해 놓아야만
(적어도 님들이 자칭 “성서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 운운 하고 있는 한)
열린 교제” 안에서 저나 다른 독자들도 더 생각해 보고 더 토론해 볼 수 있는, 바람직한 기회가
된다는 걸 알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긴, '타이틀에 대한 그런 맹신' 플러스 '비방을 위한 비방'이 바로
님들이 생각하는 "평신도로서 목사님께 배우는 자세"(?)인 거라면, 그렇다면 뭐, 물론 이쪽으로서도,
그럼, 님은 그냥 그 모습 그대로 계속 그렇게 사시라고 할 수밖에는 없겠습니다만.

 
profile

진인택

June 13, 2013
*.176.175.67

하나님의 존재방식의 설명을 최선을 다해서 최후까지 부활로 예수님께서 설명을 하셨습니다.
표현방식은 유사한데 차원이 다른 두가지가 혼선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현실의 삶에서 해결과제를 원만하게해결 해주는 리더를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배고프고 다급하면 당연히 저도 삶의 간절함때문에 해결사에게 집중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늘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떠오릅니다. 배부르다고 다 해결 되나, 배가 고프고 가진게 없을 때가 어쩌면 마음이 가난한자가 되기에 주님을 더 바라볼 수 도 있을지도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무리 복음서를 읽고 또 읽어도 찾아내지 못한 중요한 부분을 한줄씩 이해할 수 있게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profile

정용섭

June 13, 2013
*.94.91.80

그렇지요.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라고 기대합니다.
예수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그걸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실존이라는 게
늘 뭔가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있어서
메시아를 갈구합니다.
문제는 어떤 메시아냐에 달려 있어요.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은
예수에게서 충족될 수 없었지요.
그들은 정치 경제적인 메시아를 기다렸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거절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도 상당히 많은 경우에
유대인들과 비슷한 메시아 관으로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형식은 기독교이지만
내용은 유대교인 거지요.
List of Articles
No. Subject Date Views
Notice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Feb 16, 2007 183710
491 성령강림절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눅 8:26-39) [15] Jun 24, 2013 22105
490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17] Jun 16, 2013 21620
489 성령강림절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왕상 17:8-24) [7] Jun 09, 2013 24767
488 성령강림절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9] Jun 02, 2013 23150
487 성령강림절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8] May 26, 2013 23100
486 성령강림절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요 14:8-17) [4] May 20, 2013 24228
485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May 12, 2013 21095
484 부활절 환상을 보는 사람들 (행 16:6-15) [12] May 06, 2013 24035
483 부활절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6) [10] Apr 28, 2013 25765
482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요 10:22-30) [8] Apr 22, 2013 22517
481 부활절 나를 따르라 (요 21:15-19) [10] Apr 14, 2013 35082
480 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14] Apr 07, 2013 20301
479 부활절 생명과 죽음 (눅 24:1-12) [8] [1] Mar 31, 2013 25151
478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Mar 24, 2013 31831
477 사순절 의식하지 못한 은총 (요 12:1-8) [10] [2] Mar 18, 2013 23777
476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2] [1] Mar 10, 2013 26510
475 사순절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 (사 55:1-9) [17] [3] Mar 03, 2013 39502
474 사순절 예수와 헤롯 (눅 13:31-35) [8] [1] Feb 24, 2013 23859
473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Feb 18, 2013 21194
472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8] [2] Feb 10, 2013 21294
471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Feb 03, 2013 25412
»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Jan 27, 2013 32437
469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Jan 21, 2013 37256
468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Jan 13, 2013 34831
467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Jan 07, 2013 30332
466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Dec 30, 2012 36310
465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Dec 24, 2012 31982
464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Dec 17, 2012 35865
463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Dec 09, 2012 39288
462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Dec 02, 2012 35132
461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Nov 21, 2011 31051
460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Nov 13, 2011 36303
45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Nov 06, 2011 32810
458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Oct 30, 2011 25479
457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Oct 23, 2011 36176
456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Oct 17, 2011 33129
455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Oct 09, 2011 25408
454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Oct 02, 2011 23217
453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Sep 26, 2011 19829
452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Sep 19, 2011 19760
451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Sep 11, 2011 19713
450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Sep 05, 2011 19890
449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Aug 29, 2011 21578
448 성령강림절 건지시는 하나님 (출 2:1-10) [14] [1] Aug 22, 2011 23118
447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에 관한 이야기 [10] Aug 15, 2011 23072
446 성령강림절 구원의 차별성과 보편성 [20] Aug 07, 2011 20430
445 성령강림절 다리 저는 야곱 [10] Jul 31, 2011 21375
444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Jul 24, 2011 23521
443 성령강림절 악을 대하는 태도 [20] Jul 18, 2011 20668
442 성령강림절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14] Jul 10, 2011 20182
44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8] Jul 04, 2011 23109
440 성령강림절 아들을 바쳐라! [17] Jun 26, 2011 21547
439 기타 세례를 베풀라 [8] [2] Jun 20, 2011 20353
438 성령강림절 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13] Jun 12, 2011 36351
437 부활절 하나님의 영광이 답이다 (벧전 5:6-11) [15] Jun 07, 2011 21595
436 부활절 부활은 심판이다 [12] May 29, 2011 20910
435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12] May 22, 2011 30602
434 부활절 예수의 기이한 빛 (베드로전서 2:1-10) [16] May 16, 2011 31543
433 부활절 눈이 밝아진 그들 [11] May 08, 2011 22733
432 부활절 부활의 증인 공동체 [17] May 01, 2011 33815
431 부활절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17] Apr 24, 2011 31259
430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Apr 18, 2011 26217
429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Apr 11, 2011 23953
428 사순절 빛의 자녀, 빛의 열매 [25] Apr 03, 2011 34588
427 사순절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18] Mar 27, 2011 31771
426 사순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13] Mar 21, 2011 30369
425 사순절 생명의 왕국 [5] Mar 13, 2011 22503
424 주현절 메시아는 비밀이다 (마 17:1-9) [17] Mar 07, 2011 23069
423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4] Feb 27, 2011 23789
422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16] Feb 22, 2011 30444
421 주현절 하나님이 생명이다 [10] Feb 15, 2011 24240
420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Feb 06, 2011 24336
419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다 [3] Jan 30, 2011 32241
418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7] Jan 23, 2011 23811
417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Jan 17, 2011 29773
416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4] Jan 09, 2011 30238
415 성탄절 그리스도 찬양 [11] Jan 02, 2011 23493
414 성탄절 은총의 깊이로! [14] Dec 26, 2010 35997
413 성탄절 영광과 평화의 노래 Dec 26, 2010 34063
412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file [8] Dec 20, 2010 34770
411 대림절 "당신은 메시아인가?" file [10] Dec 12, 2010 25304
410 대림절 소망의 하나님, 우리의 소망 file [5] Dec 06, 2010 36903
409 대림절 인자가 오리라 file [8] Nov 28, 2010 33522
408 성령강림절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file [12] Nov 22, 2010 33477
407 성령강림절 새로운 창조의 하나님 file [9] Nov 14, 2010 20142
406 성령강림절 죽음, 삶, 하나님 file [13] Nov 07, 2010 20540
405 성령강림절 믿음과 구원 file [4] Oct 31, 2010 32661
404 성령강림절 영과 구원 file [9] Oct 24, 2010 20166
403 성령강림절 기도와 믿음 file [20] Oct 19, 2010 33854
402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file [6] Oct 10, 2010 23477
401 성령강림절 믿음과 종됨의 관계 file [18] Oct 04, 2010 30592
400 성령강림절 하나님은 누구인가? file [8] Sep 26, 2010 30415
399 성령강림절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다! file [5] Sep 20, 2010 21556
398 성령강림절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 [20] Sep 12, 2010 23231
397 성령강림절 토기장이 하나님 [11] Sep 06, 2010 38495
396 성령강림절 안식일과 해방 [10] Aug 22, 2010 23677
395 성령강림절 주는 우리의 평화! [19] [1] Aug 16, 2010 22551
394 성령강림절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8] Aug 09, 2010 30971
393 성령강림절 생명과 소유 [8] Aug 02, 2010 22061
392 성령강림절 음란한 여자와 결혼한 호세아 [21] [1] Jul 25, 2010 46179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