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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949 추천 수 0 2014.08.10 20:38:46
설교듣기 : https://youtu.be/wijmKVas2fE 
성경본문 : 마태복음 14:22-33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14:22-33, 성령강림후 제9, 2014810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대구샘터교회 근처에 수성 못이 있습니다. 대구에서는 가장 유명한 못입니다. 어떤 사람이 수성 못의 물위를 저벅저벅 걸어 건너가는 장면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외계인이나 유령처럼 보일 겁니다. 아니면 신발에 특수 장치를 장착한 것으로 보이겠지요. 사람을 비롯해서 네발 가진 짐승은 아무도 물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얼마든지 물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든지, 또는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물위를 걷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런 이야기는 제자들이 뭔가를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이에 관해서 보도하고 있는 오늘 설교 본문을 우선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이 있은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라 말씀하시고, 당신은 혼자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바람이 크게 일어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중에 어부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풍랑이 너무 심한 탓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이 밤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새벽이 가까워올 때쯤 예수님이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 제자들이 얼마나 놀랬을지 상상이 갑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26, 27절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호수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저건 유령이지 사람이 아니라고 한 제자들의 말은 옳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고민에 빠집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무조건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성경이 전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우선 가장 확실한 사실부터 확인해나가는 게 좋습니다.

 

가장 확실한 사실은 마술을 통해서 사람의 눈을 속이거나 일부러 거짓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이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력을 이용해서 수영은 할 수 있지만 물위를 두 발로 걸을 수는 없습니다.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는 유령입니다.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 즉 사람은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과 예수님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볼 때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물위를 걷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 기자들이 없는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말이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성서기자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물위를 걸은 게 아니라 호숫가를 걸었을 뿐인데, 밤새 풍랑과 싸우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제자들이 물위를 걸은 것으로 착각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의 다른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기억과 구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원래 일어났던 사건의 실체와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설명이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는지의 여부가 여기서 핵심 사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다는군, 정말 신통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야.’ 하고 생각하는 건 성경읽기에서 크게 빗나간 겁니다. 본문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평소 나서기를 좋아하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자기도 물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라.’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물위로 뛰어내렸습니다. 그 순간에 그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면서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당황한 그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베드로의 언행이 돌출적으로 보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밤새도록 풍랑과 싸우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난파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고 빨리 안전한 곳으로 먼저 피하시라고, 우리가 곧 뒤따르겠다고 말하는 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도 물위를 걸어보겠다고 불쑥 제안한 겁니다. 그러다가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와 얽힌 이 에피소드는 똑같이 본문 사건을 이야기하는 세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베드로의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서 본문의 핵심을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 핵심은 나를 구원해달라는 베드로의 외침이 있은 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명에 담겨 있습니다. 본문 31, 32절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베드로라는 이름은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의 한 사람인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으로 주신 것인데, ‘반석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반석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거꾸로 믿음이 작은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의 믿음이 작은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호수로 뛰어들기는 했지만 풍랑으로 인해서 그런 믿음이 흔들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마태공동체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반석처럼 강한 것 같아 보였는데 실제로는 믿음이 작고 약했습니다. 풍랑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계속 흔들렸습니다. 이들에게 풍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1) 인생살이의 실제적인 어려움들이 하나의 대답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인생살이가 늘 편안하게 전개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일들이 부단히 일어납니다. 병이 들고, 실업자가 되기도 하고, 배신도 당하고, 큰 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치거나 죽기도 하고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이럴 때 신앙이 흔들입니다. 2) 삶의 무의미가 또 하나의 대답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고, 생명의 충만감도 없고, 삶이 지루하고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로 인해서 늘 기쁨이 넘칠 줄 알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베드로가 본 풍랑처럼 우리를 두렵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근본에서부터 허뭅니다. 3) 다른 하나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뭔가 믿음의 확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게 희미해집니다.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겁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에서 별로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기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우리와 달리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믿음이 출중했을 거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접 목회를 하던 시대였고, 성령의 활동이 지금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그들의 믿음이 우리보다 좋았다고 여기면 곤란합니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영성가들과 신학자들과 수도자들은 늘 믿음이 확실해서 어느 한 순간도 흔들림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다 신앙적으로 흔들립니다. 요즘도 자신의 믿음이 굉장히 강해서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를 비롯한 교회 명망가들에게서 그런 언행들이 많이 보입니다. 기도했더니 기적처럼 모든 일들이 해결되었다거나, 하나님으로 인해서 늘 기쁨이 차고 넘친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에 속지 마십시오. 어느 한 순간에 그런 경험을 할지 모르나 계속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에서도 작은 믿음으로 인해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삶이 계속 흔들립니다. 그걸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행복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 하고, 더 나가서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조건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합니다. 그런 조건들을 성취하지 못하면 불행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더 행복한 거 같다거나, 거꾸로 저 사람은 나보다 불행할 거 같다고 판단합니다. 모든 관심이 거기에 쏠려 있습니다. 티브이 드라마는 그런 생각을 우리에게 주입시킵니다. 그런 걸 보면서 부러워하고, 또는 대리만족합니다. 거기에 나오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허상입니다. 티브이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허상을 실체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행복과 불행의 문제는 물질적인 것에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봉사 하는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자기 삶을 헌신했다고 해서, 그리고 그런 일로 괜찮은 상을 받고 명예를 얻었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닙니다. 가끔 이런 연예계 뉴스를 들을 수 있습니다. 티브이에 잉꼬부부로 나왔는데 결국 이혼했다고 말입니다. 잉꼬부부 행세를 할 때 이미 폭행이나 돈 문제로 멀어진 상태였다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법관이었던 분의 자제가 며칠 전에 자살했다고 합니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그 이유가 취업 문제였다고 합니다.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서 우리의 삶은 계속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난 사람은 없으니,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포즈에 속지 말도록 하십시오.

 

물속에 빠진 베드로의 손을 잡으신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은 믿음이 작은 사람의 영적 태도입니다. 의심은 헬라어로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에게는 풍랑을 피해야 하는 길과 예수에게 가야 하는 길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길을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의심입니다. 결국 물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 길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과 연관된 것입니다. 하나의 길은 예수에 대한 전적인 믿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얻는 삶의 조건에 대한 염려입니다. 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 이것과 더불어 저것은 안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 생활을 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세상에 대한 염려를 떨치지 못합니다. 우리의 운명에 무언가를 채워서 좀더 안전한 길을 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풍랑을 보고 무서워지고, 결국 물에 빠집니다. 어떻게 예수에 대한 믿음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냐, 그것은 신앙적으로만 타당한 거지 실제 삶에서는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으신가요?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법 많을 겁니다. 이런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거는 없지만, 그게 바로 믿음이 작은 자라는, 즉 의심하는 자라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그런 시행착오를 많이 거쳤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앞으로 그런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말라는 뜻으로 바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의 길로 나서라는 겁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물속에서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절대적으로 무기력한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졌습니다.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밖에서 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손을 붙들고 말씀하신 뒤에 함께 배에 오르시자 곧 풍랑이 그쳤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존할 때만 구원이 임하고 풍랑과 같은 세상의 모든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은 예수와의 관계입니다.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맡길 수 있느냐 하는 게 관건입니다. 그게 안 되면 우리는 의심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입니다

 

당신 말을 들으니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다는 것은 알아듣겠으나 그게 현실로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걸 제가 억지로 설명하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교회에 잘 나와서 헌금과 전도 많이 하고 교회에 헌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제가 딸들에게 설거지의 즐거움에 대해서 간혹 말합니다. 그릇을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봐라, 손과 수세미와 세제와 그릇 사이에서 요정처럼 움직이는 물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그걸 존재론적으로 느껴봐라, 그러면 설거지 행위와 일치되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설거지 영성이라고 그럴듯하게 이름 붙인 이런 말이 딸들에게 전달될까요? 아버지의 말이니까 어쩔 수 없이 설거지는 하겠지만 즐거움까지는 모르겠다고 하겠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와 닿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의심이 많으면 무서움이 많아지고, 무서움이 많아지면 물속에 빠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초기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반복해서 풍랑을 무서워할 것이고, 물속에 빠질 것입니다. 삶의 무의미와 절망으로 빠져듭니다. 거꾸로 삶의 환락에 도취하는 것도 역시 무의미와 절망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잠시 물속의 상황을 망각할 수는 있어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과 구원이, 즉 인생살이가 꽤 복잡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단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곧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러분은 물속에서 나와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오르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 경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생명과 구원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믿을 때 여러분의 인생에서 바람이 그치고 영혼의 평화가 은총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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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부스러기 은혜

August 10, 2014
*.192.29.120

염려와 전적인 믿음!

결코 양립할수 없는 두 길의 경계선을 매일 들락거리는 우리의 믿음.

믿음없음을 불쌍히 여겨 주시길 구하긴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속에 빠져 생명이 경각에 달리고 나서야 주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을 갖게 된 베드로처럼,
우리도 절망스런 외길 낭떠러지 상황으로까지 내몰려야만

그제야 비로소 그런 믿음을 갖게 되어 구원의 손길을 만날수 있는건가요?

주님을 향한 전적인, 온전한 믿음을 우리가 늘 염원하고 있으면서도
베드로의 그 날 상황과 방불하게
우리의 실존이 상상하기도 두려운 그런 나락에 빠져야만 그 믿음을 갖게 된다면
우린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베드로가 경험했던 절망과 두려움보다 더한 위기 가운데로

어서 우리를 내몰아 주시옵소서....

차마 그 기도는 죽을때까지 못드릴것 같은데,
거기까지 내몰려야만 그런 믿음을 가질수 있다면,
지금의 내 믿음이 정말  못마땅하긴 하지만,

차라리 지금 이 믿음의 분량만을 고수하며 살고 싶을것 같네요

말씀을 묵상하고 나면 늘 의문을 갖게 되고,
그 의문의 답을 그 분께 구하러 나가곤 했는데,

오늘 말씀은 "이 의문을 어떻게 정리해서 기도드려야 할것인가? "
많이 고민하게 해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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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11, 2014
*.94.91.64

부스러기 님의 고민이 나날이 깊어지는군요.

진일보가 일어날 겁니다.

물속에 빠지는 절망적인 상황은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1) 평범한 사람들은 실제로 극단적인 어려움에 빠져야 그걸 느낍니다.

2)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제가 설교문에는 쓰지 않았으나

실제 설교에서는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실존을 백척간두로 들여야 볼 줄 압니다.

인간 삶 자체가 물속인데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는 게 우리의 문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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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August 11, 2014
*.194.68.54

말씀을 통해 실존적인 위기 앞에서의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불신을 드러낼 수 밖에 없음을 느낍니다.

제가 지금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강해를 공부하면서 깨우치고 배울 당시에는 '맞아! 이게 진리지'하며

어떤 충만감이 들다가도 막상 일터에 나오거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맘에 안드는 사람에 대해 불평하고 

조금의 손해도 안보려고 발버둥치는 제 자신을 보고 있자니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네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저랬는데 하며 위안이 되면서도 

끊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무의식의 죄 때문에 인간은 결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하며 한 주간도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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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11, 2014
*.94.91.64

문전옥답 님의 고백은 우리의 모두에게 동일한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출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속세에서는 영혼의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처럼 속세를 떠날 형편이 아니라면

복음의 본질에 대한 말씀을 반복해서 접하는 게 최선입니다.

이런 준비가 된 교회에 나가든지

아니면 그런 선배들의 책을 읽든지,

어떤 방식이든지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자극이 없으면 영혼은 깊은 잠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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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August 11, 2014
*.194.68.169

다비아가 바로 저에게 좋은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예배도 참석하고 목사님의 설교도 직접 듣고 싶은데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웹상으로 밖에는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긴 제가 워낙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웹상이 차라리 편할 수도 있겠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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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11, 2014
*.94.91.64

ㅎㅎ 좋습니다.

다비아는 일종의 변형된 사이버 교회 비슷한 거니까

문전옥답 님에게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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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August 11, 2014
*.72.188.140

그런걸 다른데서는 습 또는 업이라고 하나요? ㅎ


한 가지 정말 다행스러운 건, 그렇게 자신이 죄인이고 부족한 걸 알고 인정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딸아~', '아들아~'  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쓰담쓰담 해주셨던 지점이

마음에 큰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됩니다 ... ^^


그럼, 오늘 하루도 평안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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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August 11, 2014
*.194.68.54

'습'이라는 것은 처음 들어 봤네요..^^


목사님의 몇 주전 설교 중에

존재론적 힘을 가진 죄 앞에 바울이 고백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정지니님과 제가 예수로 말미암아 건짐받길 소망합니다.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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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또다른세계

August 11, 2014
*.98.145.105

귀한 말씀 중에 설거지의 영성이 

가장 큰 여운을 남기고 있으니...목사님께 죄송하네요~

저도 개인적으로 설거지를 좀 하는 편이라서요~ㅎㅎ


지난 주말 둘째 녀석과 뒷산인 수락산에 올랐습니다. 

아직 유치원생이라 높이 오른 것은 아니지만 참 재미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도토리도 줍고, 매미도 찾아보고, 탈피한 매미 껍질도 주워왔습니다. 


아들 녀석이 재미있게 노는 동안...

저는 따사로운 햇살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곤충들의 소리도 들으며, 햇빛으로 반짝이는 수만 가지 녹색잎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기쁨이 가득했고, 잠깐이지만 더 이상 세상적인 필요가 

불필요한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은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스스로가 어쩌지 못하는 제 자신에게서 눈을 떼고

내 모든 관심과 삶의 중심을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에 천착할 때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으나, 그 문제들이 해체되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다른 세계로 다가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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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11, 2014
*.94.91.64

또다른 님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다른 세계'가

앞으로 점점 깊어지고 넓어질 겁니다.

테니스도 뭔가를 알아야 재미도 늘고

하고 싶은 열정도 많아지는 것처럼이요. 

일단 그 길로 들어서는 게 중요한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창조, 영광, 통치, 새하늘과 새땅,

그리고 칭의, 약속, 희망, 재림 ... 등등을

자신들이 세상에서 경험한 기준으로 표상할 뿐이지요.

기독교 신앙이 실용의 차원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가끔 내가 소개하는 책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도

그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책 마지막 장면으로 생각되는데

소피라는 소녀의 종아리를 휘감는 바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서는 바람을 영이라고도 말하잖아요.

그 영, 그 바람이 지금 지구 곳곳에 가득합니다.

내 서재 창문을 통해서 보는 대나무의 흔들림도

바로 그 영, 바람에 의한 것인데,

지금 나는 영을 보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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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August 11, 2014
*.72.188.140

오늘도 말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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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11, 2014
*.94.91.64

예,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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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부스러기 은혜

August 14, 2014
*.192.29.120

목사님!
이번 말씀에서  "의심이란 풍랑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과, 예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

그 두 마음을 동시에 갖는 것이요,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때

구원이 임하고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하셨지요

이 '전적으로'라는 것과,  '의심'의 그 경계가  모호하게만 여겨지고, 

그래서 야고보서 1장 6절 이하 '의심'과  '두 마음' 문구도 거듭 읽어 봤지만

그 구분이 선뜻 와닿지가 않아 다시 댓글을 달았습니다.

 
내게 닥친 고난과 생존을 위협하는 세상적 조건들의 붕괴 앞에서

염려와 두려움을 갖는건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런 본성이요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과 지혜로
봉착한 문제를 해결하려 안간힘을 쓰는것 또한 신앙의 잣대로 '믿음없는 소행이다'
판단받을 일은 아니겠지요?

두려움과 염려에 온 영혼이 압도되어, 흡사 바람앞에 촛불처럼 무너져가는 마음을 갖고

그 분 앞에 꿇어 엎드려, 우리의 필요를 감사함으로 아뢰긴 하지만,
기도를 마침과 동시에 문제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두려움 또한 눈녹듯 사라지진 않잖습니까?

그 분께 맡겼으니 이 문제로부터 구원해주실거라는 확신에 대해 눈꼽만큼의 의심도
갖지 않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이는 여전히 믿음이 작은 자인가요?

기도를 드렸다고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한 나의 안간힘은 그 순간부터 중단시키는게 아니겠지요?
내가 기울여야 될 노력을 여전히 강구하되
그 과정에서 두려움 또한 여전히 내재되어 있음이 정상 아닌가요?

그러면서 두 마음을 가진 그 못난 모습에 자책하고,

그래서 나의 믿음없음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 또한

곁들여할수 밖에 없는게 우리의 실존 아닌가요?

그분을 향해 온전하고도 전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 

그 분을 의지하되  비상 상황을 대비해 인간적인 방책을 강구하느냐..

하는 두 마음을 가졌다는 판단 잣대가 무엇일까요?
한 점 의심과, 근심도 염려도  없는 내 안의 심리상태인가요?

그게 가능한가요?

바람과 파도를 맞닥뜨린 상황속에서, 그 두려움속에서,

그분께로부터 얻게 될 구원이란 것이 결국
바람과 파도가 잔해지고, 가시적 문제해결로 인해 내 안에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어쩌면 그분의 관심사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자초한 일이든, 내게 불가항력적인 일이든,

나를 절망케 하는 정황속에서

그 문제가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그 분을 만나고,

그 문제가 아니었으면 찾지 않았을 그 분을 찾아가는,

그래서 그 문제를 통해 이전에 알지 못햇던 그 분을 새롭게 만나가는 과정,

그것이 오늘 말씀 속에 나오는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아닌가요?

그 속에서 문제 해결은 요원하지만 세상이 줄수없는 평안을 얻는것

그것이 구원이 아닌지요?


우리 시각으로 보자면 문제를 '인내' 하고, '극복'해가는 과정('해결'은 이기적인 표현같아 피하고 싶습니다) 속에서,

문제 해결의 조짐이라고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본 구름 한 조각 조차  없는 그 절망적 상황속에서

그분과 우리와의 더 깊은 관계형성속으로 인도하심이 어쩌면 그분의 관심사요
그걸 훈련시키고자 함이 그 상황에 직면하도록 허락하신 그 분의 선하신 뜻이 아닐런지요?

profile

[레벨:97]정용섭

August 14, 2014
*.94.91.64

예, 질문이라기보다는 본인의 여러 생각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정리를 잘 하셨구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전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으며,

의심으로 인해 봉착한 위기로 인해서

새로운 믿음의 차원을 경험한다는 것도 옳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그의 운명 한 가지에 마음을 둘 때

참된 평화의 차원에 이른다는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하는 건 중요합니다.

 

질문의 핵심은 전적으로와 의심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하다는 거지요?

그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적인 내공이 깊어지면 '전적으로'를 향하게 된다는 거지요.

테니스를 할 때도 공에만 전적으로 집중하는 단계가 있는 것처럼이요.

그런 세계가 점점 더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profile

[레벨:23]모래알

August 16, 2014
*.56.59.65

저희 딸네 식구들이 섬기는 교회 벽에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그림이 걸려 있어요.

누구 작품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흔히 보는 그런 그림하고는 조금 다른데..

며칠 전 만 일곱살된 외손자녀석이(6주 여름캠프동안 제가 데리러 가는데) 그 그림을 흘낏 보더니

왜 예수님이 물 위로 걸으셨냐고 묻는거에요?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지 잠시 좀 헷갈렸어요.

설명을 한다고 하긴 했는데.. 목사님 설교 말씀을 미리 좀 읽었으면 좋았으려나? ㅎㅎ

고맙습니다. 물 속에서 아직도 들락달락 하는 제 모습을 봅니다.

profile

[레벨:97]정용섭

August 16, 2014
*.94.91.64

ㅎㅎ 일곱살 짜리 아이가 그런 질문을 하다니 재밌군요.

대개는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갈 텐데요.

아마 그 예수님이 공연히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아닌지 하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일곱 살 아이의 영혼은 사물의 정곡을 들여다볼 줄 알 거든요.

profile

[레벨:13]진인택

January 19, 2015
*.176.175.230

흔들리고 괴롭고 아파도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시는 주 예수님이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괴롭고 아플때 가장 사람은 단순해 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하자, 이렇게 하자로 결국은 선택을 하게 되니까요.

인생은 선택이요, 새 생명은 믿음인데 선택속에서 자기를 구원하려하니 답이 없었습니다.

저도 매일 하루하루가 긴장을 놓을 수 없읍니다.

쉬는 날도 일생각으로 계속 연결이 되고 쉬는날이 단지

걱정을 하는 장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특히나 사람한테 걱정스런 일들이 일어나면

스트레스 엄청입니다. 속이거나, 바꾸거나 할때면 힘이 듭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원인이 나로부터 비롯된걸 알게 되면 더 힘이 듭니다.

이런 아픔속에서도 말씀을 읽고 글을 올리면서 믿음을 키우는게

때로는 바쁜하루의 업무 일정속에서 의무적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시간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그 길로 이렇게 저렇게 손짓하시면서 인도해주시는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시간이 행복입니다. 행복하면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겠죠? 목사님

profile

[레벨:97]정용섭

January 20, 2015
*.94.91.64

ㅎㅎ 치열하게 살아가고 신앙도 투쟁하듯 하시는군요.

좋은 열매가 맺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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