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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성령강림절 조회 수 5224 추천 수 0 2014.08.17 21:27:03
설교듣기 : https://youtu.be/weW4GU7lLH8 
성경본문 : 로마서 11:1-2a, 29-32 

불순종의 역설

11:1-2a, 29-32, 성령강림후 제11, 2014817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손에 꼽으라고 한다면 바울이라고 대답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옳습니다. 복음의 신학적인 토대를 놓은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몸으로 뛰면서 복음을 유럽 곳곳에 전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글도 남겼습니다. 그의 글들이 나중에 신약성경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중의 대표적인 게 로마서입니다. 그가 고린도에 머물고 있던 기원후 55-56년 어간에 로마서를 집필했습니다. 그때는 그리스 지역 교회에서 모금한 돈을 들고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방문한 뒤에는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짰고, 가는 길에 로마교회를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이런 생각을 로마서에 다 담았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익명의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설립된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이 교회를 설립한 지역에 가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습니다만, 로마만은 예외였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선교 전략적으로 로마에 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로마교회가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에 로마 교회에 로마정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8장에는 바울의 고린도 선교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그는 유대인 부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납니다. 그들은 로마에 살다가 기원후 49년에 있었던 클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서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로마는 회당과 교회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도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로마교회에는 신학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교회 구성원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는데, 초창기에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많다가 클라우디오 추방령 이후로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전혀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같은 로마교회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점에서 입장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같은 교회에 나오지만 진보적인 성향의 신자들과 보수적인 성향의 신자들 사이에 입장 차이가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배경을 놓고 로마서를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를 얻고 구원에 이른다는 점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로마서에서 강조했습니다.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짓고,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죄를 짓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이야 원래 율법이 없었으니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는데 큰 저항이 없었지만 율법을 절대화하던 유대인들은 바울의 주장을 불편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반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도 바울의 주장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과 바울의 갈등이 갈라디아서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당시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토라를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유대 기독교인들의 가르침을 가리켜 다른 복음이라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단이라고 규정하면서 그걸 전하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극단적인 발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율법주의를 가리켜 롬 10:21절에서 사 65:2절을 인용하면서 불순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율법은 원래 선한 것입니다. 그걸 따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를 불순종이라고 말하는 건 언어도단처럼 들립니다. 예컨대 여기 법관이나 의사가 있다고 합시다. 이들은 사회에서 존경받습니다. 다른 한쪽에 조폭들이 있다고 합시다. 이들은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법과 의료를 통해서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나쁘다고 할 수 없고, 불법과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선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으로 본다면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를 보면 대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실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순종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율법에 충실했던 이스라엘이 바로 이런 경우였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불순종에 떨어졌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일까요? 초기 기독교 당시에 유대교 전통을 완전히 배척하려는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빼고 신약성경만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나름 일리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빌미를 주었고, 또 어딜 가나 실제로 말썽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던 시대의 로마에서도 황제들이 골치 아파 할 정도로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요즘도 팔레스타인 원주민들과 계속 싸우고 있는 데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롬 11:1, 2에서 명시적으로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나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즉 자비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거부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거부로 인해서 복음은 이제 이방인을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나가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음으로써 이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런 불순종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셔서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셨다는 게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바울의 해석입니다. 상당히 까다로운 논리니까 좀더 자세하게 봐야겠습니다. 우선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히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불순종의 책임이 사람에게 없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출애굽 과정에서도 성서기자는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은 책임이 파라오에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고 한다면 아담과 이브를 뱀이 유혹하지 못하게 하셨어야만 했고, 아담과 이브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셨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뱀의 유혹도 역시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냐 하는 반론이 성립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이미 알고 계셨다면 그걸 막았어야 했는데, 그냥 허락하셨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결국 유다의 배신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니까 유다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 생각은 성서를 오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순종에 사로잡히게 했다는 말은 그 불순종이 훈계나 계몽이나 지적 훈련을 통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이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2천 년이나 5백 년 전에 비해서 지금 모든 면에서 여유가 있고 공부도 많이 했지만 현대인들이 당시보다 더 순종적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라는 거창한 차원까지 갈 필요 없이 개인에게서도 이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제 수준이 높아지고 학력이 올라가고 교양이 많아진다고 해서 사람이 순종적이던가요? 정의롭던가요? 평화롭던가요?

 

성서가 말하는 불순종은 단순히 겉으로 교회와 사회질서를 잘 지켰느냐 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합니다. 마틴 루터는 본문의 불순종을 불신앙(Unglaube)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자기를 성취하려면 욕망이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이게 이상하게 들리시지요? 오늘의 시대는 늘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완성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순종과 불신앙은 이런 자기 집중에서, 자기를 높이는 교만에서 옵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세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히게 했다는 말은 이런 인간의 실존적 깊이를 정확하게 뚫어본 이야기입니다. 저는 바울의 이런 통찰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진술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이걸 경험해보셨는지요?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구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비인 이유는 칭의와 구원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만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구원사건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전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사람과 재산과 물건과 이념과 종교적 업적이 몽땅 사라져도, 아니 그럴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평화와 안식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그것을 죽어야만 얻겠지만 영적인 사람은 살아있을 때 당겨서 경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죽었고, 그와 더불어 부활했다는 사실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이런 신학적인 설명은 철저히 세속적이고 욕망 중심으로 작동되는 이 세상에서는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가장 근원적인 세계를 말하기 때문에 2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큰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능력으로 찾아올까요

 

오늘의 불신앙과 불순종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돌아가는 꼴을 보고 종종 절망합니다. 짜증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정의롭지 못합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도 좋아지지 않습니다. 요즘 로마가톨릭 교종(교황)이 한국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짧은 체류 기간에도 사회 문제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는 말을 했습니다. 청와대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들을까요? 우리 국민들도 저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요? 815일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강론에서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정신적 쇄신을 가져오는 풍성한 힘이 되기를 빕니다. 그들이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빕니다.” 우리나라가 로마가톨릭 국가가 아닌데 특이하게도 이번 교황 방문이 전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스컴이 대서특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지 그의 방문으로 인해서 우리 사회가 크게 달라졌으면 좋겠지만, 한 번의 신선한 이벤트로 끝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가 오늘 자본숭배와 무한 경쟁이라는 메커니즘에 완전히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교육, 군대, 법조계, 종교계가 다 그런 상황입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경제를 살리자.’고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성장, 성장만 외칩니다. 이게 지긋지긋하지 않습니까? 제 설교를 들으면서 당신은 지금 세상살이가 얼마나 살벌한지 몰라서 하는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세상을 너무 나이브하게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 분들도 계시겠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 살아야 되지 가난하면 모든 게 끝장이라고 말입니다. 가난으로 인한 고통이야 누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위협당하는 상황만은 서로 힘을 합해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허기에 시달리는 난치병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런 현실만 보면 될 대로 되라,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지 나와 우리 식구만이라도 잘 견디면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과 냉소가 우리의 영혼을 채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불신앙에 대한 바울의 진단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순종을 오히려 자비의 기회로 만드십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시고(creatio ex nihilo),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신(resurrectio mortuorum)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심으로써(justificatio impiorum)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은 늘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그걸 우리는 신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오늘 설교 본문 바로 다음 구절인 롬 11: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모든 걸 다 알아서 해결하실 테니, 더 나가서 나의 불순종과 불신앙까지 자비의 기회로 삼으실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살면 되겠군, 하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런 생각은 신앙적인 게 아니라 무책임한 겁니다. 신학적으로는 그걸 값싼 은혜주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깊다는 사실을 실제로 아는 사람은 자신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꾸준히, 그리고 치열하게 교정해나갑니다. 순종과 신앙의 차원으로 달음질합니다. 개인과 사회가 정의로워지도록 최선을 다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태도입니다. 바울이 고전 9:24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고백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무리 불순종과 불신앙에 찌든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고 심오하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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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또다른세계

August 18, 2014
*.98.145.105

월요일 출근길 아침...

늘 일과처럼 듣는 설교말씀이지만

불순종에 사로잡힌 저에게도 자비를 베푸셨다는 

하나님 말씀에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최근에 저에게 던져진 화두는 '내버려두라'였습니다. 

지난 한 주간 이사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고, 휴일에 아이들과 놀아주면서도

언젠가 목사님께서 언급하셨던 이 말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존재론적으로 어쩔 수 없는 제 자신을 내버려두고

하나님께서 저의 운명을 맡기고 하나님께 더 집중할 때

온전한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평소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롬11:33 말씀이

더 풍성하게 전해져오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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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18, 2014
*.94.91.64

또다른 님의 화두가 기독교 신앙의 정곡인데

웬만해서는 거기에 이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걸 못 견뎌하는 거지요.

목사들에게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신자들을 내버려 두지 못하고

목양이라는 이름으로 들들 볶습니다. ㅎㅎ

영적인 돌봄은 필요하지만

어디까지냐에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게 많지요.

가족관계도 그렇구요.

세상 일이 간단한 게 하나도 없네요.

야생초는 내버려두어도 잘 크는 것처럼

일단은 내버려 둠이 대원칙인 거는 맞아 보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바라는 태도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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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August 18, 2014
*.194.68.54

불순종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를 알고나니

하나님의 자비, 긍휼, 구원 등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존재론적으로 느끼고 본질에 집중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내 삶도 변화될 거라는 희망이 생기는 말씀입니다.


아주 잠깐 그 새로움을 감지하는 순간, 놀라운 환희와 참된 기쁨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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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18, 2014
*.94.91.64

아주 잠깐 새로움을 감지하는 순간이라!

정말 중요한 경험을 포착하셨군요.

그런 경험이 깊어지고 풍부해지는 게

기독교 영성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흔적들이랍니다.

그런 순간으로 우리의 삶이 꽉 차면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는 거구요.

예배의 모든 순서는 다 그런 경험들을 바탕에 둔 겁니다.

기도, 찬송, 말씀, 성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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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August 18, 2014
*.56.59.65

오늘 제게 필요한 말씀들인데..

절망하지 않고 다시 가야하는 이유를 

새삼 다시 생각합니다.

주님의 자비와 은혜.. 그것 뿐인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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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18, 2014
*.94.91.64

자비와 은혜 뿐이라고 말하시니

어제 주일의 제3독서가 다시 생각납니다.

마 15:21-28절에서 예수님은 이 이방인 여자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여자가 앞에서 한 발언이 그런 평가를 얻은 거지요.

1)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2) 주여, 저를 도우소서.

3) 부수러기를 먹나이다.

상투적으로 아니라 영혼의 중심을 다 담아서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저도 기도합니다.

이게 쉽지 않거든요. 음.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는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이런 고백이 술술 나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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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삶의 과제

August 18, 2014
*.169.0.104

설교말씀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주일 설교시간에 들을 때는 생각나지 않던 질문이 생각나 몇자 적어봅니다.


자기집중을 자기교만으로 예를 드셨는데, 자기비하도 여기에 포함되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이게 힘듭니다. 교만과 비하가 모두 자기집중에서 나온다면,
자기자신에 집중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하고

제 생각에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의 나'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글자로 적는 것은 가능하지만 과연 그 상태라는 것이 가능한지요?


또다른 방법으로 온전히 자기를 버리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보이지만 가능하다고 전제할 때),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관계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 가? 하는 것입니다.
관계라는 것은 둘 이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온전한 의존 상태는 '모른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조금은 뚱딴지 같은 소리지만 '존재하지만 알수 없는(모르는) 것'이 혹 신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질문을 드린다고 해 놓고선 주절주절 엉뚱한 말만 했습니다.

날이 궂습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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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18, 2014
*.94.91.64

삶의 과제 님이 짚은 제 설교의 그 대목에

약간의 비약이 있습니다.

설교의 전체 주제는 죄가 뭐냐에 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불순종을 설명하려다 보니 그런 비약이 생겼군요.

1) 자기집중에서 벗어나는 건

'있는 그대로의 나'라기보다는

주님께 집중하는 것으로 봐야겠지요.

2) 자기를 버림, 자기 부정이라는 말도

자기 정체성을 버리라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관심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거에요.

그럴 때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거지요.

3)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존상태는

막연한 신비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예수 사건에 자기의 운명을 일임하는 것이지요.

 

엉뚱한 말을 한 게 아니라 좋은 질문을 한 겁니다.

요즘 교회에서 만나도 이야기할 시간이 별로 없네요.

흙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 있으면 한번 글을 올려보세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야할 인간이니

나는 흙에 대해서 정말 관심이 많습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요.

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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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삶의 과제

August 20, 2014
*.99.241.30

목사님 감사합니다.
수시로 말씀해 주셨는데, 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네요.
제가 요즘 뭔가를 해 볼려는 자기완성(교만) 아니면 포기(비하)라는 양 극단의

자기집중에만 몰두하는 것 같아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뭔가를 해 볼려는 요 생각을 구체적인 예수 사건으로 집중해야 하는데,
현실이 녹록치 않습니다.

 

과학적으로 조금 배웠을(?) 뿐이지,
저도 흙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흙을 우주론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보는 건 목사님이 훨 나으신 듯 합니다.


저의 생각에

흙은 '지구의 시작과 현재 그리고 다가올 가까운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 않을 까 생각합니다.\

 

[용암으로 통해 지구의 시작 물질이 지표로 나와 존재하고
이들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질과 현상들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반응하고
이러한 반응들로 변화될 미래를(새 생명의 발아 등)
조금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가 '흙'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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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20, 2014
*.94.91.64

그렇습니다.

예수 사건에 대한 집중이 말로는 되지만

삶의 능력으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잘 나가는 목사나

신앙간증을 책으로 내는 그런 분들도

실제로는 늘 갈등을 겪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가거나

그런 갈등의 순간이 줄어든다는 것뿐이지요.

힘들면 좀 쉬어가면서 길을 가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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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viator

August 19, 2014
*.99.79.130

설교 동영상이 안보여요ㅠ

동영상에 관한 공지글 다 읽고 수행했는데도 그러네요.

음성파일은 재생이 되는데... 왜 그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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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또다른세계

August 19, 2014
*.98.145.105

ㅎㅎ 저도 그러네요~

아무래도 제공 파일의 문제가 아닐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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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19, 2014
*.94.91.64

동영상이 에러군요.

살펴봤더니 파일이 서버에 올라가지가 않았네요.

동영상 파일을 담당하는 분이 보통 월요일에 업로드하던데

이번에는 비가 와서 그런지 깜빡했나보네요.

설교 메뉴 작성에 대해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설명해야겠네요.

주일 설교 녹음은 엠피쓰리 녹음기로 내가 하고,

동영상은 대구샘터교회 한 청년이 녹화합니다.

그 파일을 각각 따로 보관하고 있으면서

이 사이트가 빌려 쓰는 서버에 따로 업로드합니다.

나는 먼서 음성 파일을 서버에 올린 다음에

곧 원고를 여기 사이트 올리면서

일단 음성파일에만 연결해 놓고,

월요일 밤에 동영상 파일을 연결합니다.

그때는 보통 담당자가 서버에 올려놓지요. 

휴, 설명이 복잡하군요.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으니

기다려보지요.

 

*추신: 담당자가 갑자기 먼 곳에 가는 바람에...

내일 오전에 해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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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파란하늘지붕

August 21, 2014
*.197.156.140

기계적으로 읽어오던 성경을 설교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조명되고 다른 빛으로 다가오는것을 많이 느낍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기독교신앙을 음악, 산을 오르는것, 운동과도 통하는 사통팔달을 새삼 깨닫습니다. 목사님이 늘 말씀하시듯이 목사님은 닦달하는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성령을 말할뿐이라고 하신다는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금한것은, '성령께서 이끌어 주실것이다'라는 말이, 실증적으로 잘 잡히지 않는것처럼 들린다는것인데, 목사님의 예를 다시 들면, 테니스를 칠때에도 고수가 테니스라켓은 이렇게 잡아야해, 스핀은 이런식으로 거는거야, 서브를 100번 여기서 저방향으로 해보자, 닦달하듯 가르쳐주는 열정적인 코치가 있지않겠습니까? 그러한 과정가운데 하수는 착오를 바로잡아가며 자신만의 느낌을 만들어가는거고요. 마치 '성령께서 이끌어주실것이다.' 라는 말이 고수가 뒷짐진채, 테니스 공이 날아오면 니가 동물적으로 반응할수있을것이야, 라고 말하는 것같습니다. 물론 목사님이 무슨 말씀은 알지만, 반대로 열정적으로 하나하나 잔소리하는 목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또한 수련의 과정으로서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왠지 목사님은 이런말씀을 하실것같습니다.

'성령의 말씀을 잠잠히 들으려고 하는것이 역설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열정적인 자세다.'라고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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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21, 2014
*.94.91.64

파란하늘 님이 테니스 레슨이라는 좋은 비유를 주셨고,

더 나가서 내 대답을 미리 딱 짚어주셨네요.

고맙고요, 그럼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ㅎㅎ

그냥 사족으로 답합니다.

 

테니스에서 반복 훈련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비아의 글을 반복해서 읽는 게 필요하듯이요.

열정이 있는 코치를 만나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다비아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답글을 달듯이요. ㅎㅎ

문제는 테니스를 잘 모르는 코치가 잘못 가르친다는 거겠지요.

테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거는 힘을 빼는 건데,

힘을 빼는 게 뭔지를 모르고 반복 훈련을 시키면

결국 엘보를 비롯해서 몸이 전체적으로 망가집니다.

기독교 영성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

종교적인 잔소리를 반복해서 듣는 거와 비슷합니다.

 

이런 거야 파란하늘 님이 이미 아시는 거고,

문제는 성령의 이끄심이 확 와 닿지 않는다는 거지요?

제가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좋은 공부가 최선입니다.

한국교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들,

예컨대 긍정의 힘, 목적이 이끄는 삶, 게으름, 낙타무릎 등의 책이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영성의 메인 스트림에 속한 책을 보는 겁니다.

개신교 신자이면서도 한국교회 신자들은

루터와 칼빈과 바르트의 책을 잘 안 읽잖아요.

아는 것만큼 보이게 될 겁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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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anuary 22, 2015
*.206.242.56

목사님 , 존재론적 불순종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바울이 설명하였고 목사님께서 다시 설명을 하시니 불순종의 의미와 자비와의 관계까지 잘 이어집니다.

불순종, 자비 그리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합니다.

치우치지 않으면서.

오늘 말씀 철학시간처럼 어렵게 시작해서 알고나니 기쁨이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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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January 22, 2015
*.94.91.64

기쁨이 전달되었다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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