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모세와 예수 (출 1:8-2:10)

성령강림절 조회 수 8880 추천 수 0 2014.08.24 21:49:23
설교듣기 : https://youtu.be/2YzMa0W2wDs 
성경본문 : 출애굽기 1:8-2:10 

모세와 예수

1:8-2:10, 성령강림후 제11, 2014824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2: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구약인물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모세입니다.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 또는 이슬람교도들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세계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세를 다 압니다. 모세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로 <십계>가 있고, 어린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영화 <이집트의 왕자>도 있습니다. 그의 일대기는 이런 영화의 소재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입니다. 이스라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공주의 양자가 되어 살다가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미디안 광야로 달아납니다.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해 살다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이집트 파라오와의 대결을 승리로 이끈 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횡단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죽어 모압 어느 골짜기에 묻혔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출 1:8-2:10절에는 모세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대한 비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주신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에서 살게 된 연유는 창세기 후반부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야곱 시대에 극심한 흉년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 덕분으로 이집트의 곡창 지대 중의 하나인 고센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른 뒤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파라오가 권좌를 차지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지는 걸 두려워했습니다. 전쟁 시에 이스라엘이 적과 내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산율을 낮추기 위해서 노동 강도를 높였습니다. 1:11절과 14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당시 이집트의 건축 토목 사업은 이집트를 지탱하는 근본이었습니다. 피라미드, 스핑크스, 오벨리스크, 왕궁 등이 즐비했습니다.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합니다. 고대의 토목과 건축은 거의 사람의 손을 빌려야만 했습니다. 노예들을 통해서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소수민족들을 강제 노역에 차출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스라엘도 이런 경우에 해당되었을 겁니다. 강제노역이 출산율 저하 정책에 기인한 것이라는 출애굽기 기자의 시각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출산율까지 지켜주신다는 신앙고백이라고 봐야합니다.

 

강제 노역으로도 출산율이 떨어지지 않은 탓인지 이집트 왕은 새로운 정책을 실행합니다. 이스라엘 산파 두 사람, 즉 십브라와 부아에게 이스라엘 여자의 해산을 돕다가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 아기면 살려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산파들은 왕에게 자신들이 산모에게 가면 이미 해산이 끝났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했습니다. 이들 산파가 왕의 명령을 그대로 지키지 않은 걸 보면 강제 명령이었다기보다는 회유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정책이 실패하자 이집트 왕은 더 노골적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면 살려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이 이스라엘 백성에만 해당되는지 이집트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되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출생 시에 헤롯이 베들레헴과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아이들 중에서 두 살 아래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이야기와(2:16) 비슷합니다. 마태복음이 출애굽기보다 15백년 후의 이야기라는 걸 전제하면 예수 출생 설화가 모세 출생 설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 합니다.

 

그 와중에 레위 지파에 속한 한 부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석 달 동안 아들을 숨겨서 키웠으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나일강가에서 자라는 갈대로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아기를 넣고 갈대가 자라는 나일 강가에 띄었습니다. 이건 남자 아기를 나일 강에 던지라는 왕의 명령을 형식적으로나마 따른 겁니다. 아기의 누이는 멀리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딸이 시녀들과 함께 물놀이를 하러왔다가 갈대숲에서 그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 든 남자아기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라는 걸 알았지만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마침 아기의 누이가 모른 척하고 나타나 유모를 구해줄 수 있다고 말하자 이집트 공주는 속사정을 모른 채 여자 아이의 말에 따라서 상자 속의 남자 아기를 유모에게 맡겼습니다. 물론 유모는 이 아기의 친모입니다. 그 아기는 친모의 손에서 어느 정도 자란 뒤에 파라오의 딸이 있는 왕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상황을 출 2:10절은 이렇게 간단하게 전합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여기까지가 오늘 설교 본문이 말하는 모세의 출생에 얽힌 에피소드입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건져 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파라오의 딸이 지은 이름이니 물론 이집트 식의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민족적인 자부심이 컸기 때문에 이집트 이름을 숨기고 싶어할만한데도 모세라는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인 이유는 모세의 역할과 운명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절대적이었다는 데에 있을 겁니다. 모세는 두 가지 점에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얻었습니다. 하나는 이집트로부터의 민족 해방을 이끌어낸 정치지도자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을 완성한 종교지도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세를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을 비롯해서(12) 그에게 도전장을 냈던 사람들은 모두 나가떨어졌습니다. 그에게는 신적인 카리스마가 넘쳤습니다. 그를 통해서 일어난 엄청난 일들은 일일이 셀 수도 없습니다. 34:29-35절에 따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을 들고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신약성서 기자들도 모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17:1-13절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이 어느 산에 올라가셨을 때 용모가 변화되고 옷에 광채가 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두 역사적 인물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히브리서 3장은 모세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세와 예수님은 모두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온전히 충성한 분들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일했으며, 예수님은 아들로 일했다는 겁니다. 종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종의 역할에 머물러야만 합니다. 집안의 재산을 처리할 권한이 그에게는 없습니다. 집안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도 직접 참여할 수 없습니다. 아들은 대를 잇는 사람이기 때문에 늘 아버지와 대면하면서 중요한 일에 직접 참여합니다. 모세를 깎아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세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종과 아들이라는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그 유명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의 발언을 통해 모세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더 정확하게 해명합니다. 그것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입니다. 5: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율법은 모세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의 기원은 출애굽에 있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와의 대결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으로 가까스로 이집트를 빠져나온 뒤에 두 가지 과업을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는 광야를 무사히 횡단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가나안에 잘 정착하는 겁니다. 이 두 과업 모두 만만치 않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안정적으로 끌어갈 수 있는 법전을 만드는 게 우선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빌론의 하무라비 법전처럼 말입니다. 광야생활의 초반에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율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모세가 받아쓴 것처럼 보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완성된 법전이라고 봐야 합니다. 다만 모세의 영적 권위에 기대서 이것을 모세율법이라고 부른 겁니다. 어쨌든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적인 차원이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나 모든 기준을 율법에 두었습니다. 구약의 모세오경만이 아니라 불문법이나 여러 랍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행규칙들도 크게 봐서 다 율법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은 절대적인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율법과 대치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친 일들이 그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을 지필 수도 없고, 대략 1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서도 안 됩니다. 모든 노동이 멈춰야 합니다. 환자를 고쳐서도 안 됩니다. 당장 죽을병이 아니면 다음날까지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이런 부분만 보면 안식일이 무지몽매한 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안식일 법은 인간의 안식을 기본으로 하는 겁니다. 특히 노동에 숙명적으로 묶여 있던 계층의 사람들을 향한 노동해방 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에는 주인만이 아니라 종들도 쉬어야 하고, 나그네도 쉬어야 하고, 짐승들도 쉬어야 합니다.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노동해방을 외친 마르크스는 이 안식일 법에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노동에 중독된 한국사회에서는 안식일 법이 더 강제적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입시 노동에 노예처럼 시달리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안식일 법이 정말 필요합니다.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만은 모든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 당시에 율법의 근본정신을 놓치고 율법 조문에 매달려서 결국 인간 해방이 아니라 인간 속박으로 작동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11:28절이 전하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분도 기억하실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구절을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져야 할 짐을 예수님이 다 대신 져주신다는 말씀이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여기서 짐은 당시 율법이라는 종교적 짐입니다. 원래는 선한 데서 출발한 율법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절대화되어 삶을 파괴한다는 게 율법의 문제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유대교의 율법은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복음공동체라는 이유로 율법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집단들도 있었습니다. 주로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서 그런 주장이 많았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이들은 계 2:6,15절에 나오는 니골라당입니다. 이들은 영지주의의 한 분파로서 영혼의 구원만 주장하기 때문에 율법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바울도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강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완전히 배척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율법을 폐기처분 했다고 보면 안 됩니다. 그는 철저하게 율법의 근본을 지켜나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마태복음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복음은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완성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마 5:21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동일한 문장 형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이 전통으로 어떠어떠한 말씀을 들었지만(그것은 모세 율법인데)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는 형식입니다. 그걸 반명제(反命題), anti-these라고 합니다. 5:21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5:27절 이하에서는 간음에 대해서, 33절 이하에서는 맹세에 대해서, 38절 이하에서는 눈은 눈으로에 대해서, 43절 이하에서는 이웃 사랑과 원수 증오에 대해서 같은 형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모세의 율법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율법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5:21절이 말하는 살인에 대한 말씀을 보십시오.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화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만 본다면 예수님이 더 철저한 율법과 강령을 내리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과 규범과 윤리적 지침은 사실 지키라고 해서 지켜지는 것도 아닙니다. 화를 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나요? 화를 낼 때마다 예수님을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고 자책해야할까요?

 

복음이 율법을 폐기하는 것도 아니고, 또는 좀더 고상한 율법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종잡기 힘들다,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실제 신앙생활에서 혼란을 많이 느끼실 겁니다. 그래서 양극단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금과 교회출석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미 복음으로 자유로워졌으니 헌금과 교회출석이라는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더 철저히 매달립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대충 어중간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할 겁니다.

 

복음 안에서 율법이 완성된다는 말씀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모세의 율법을 무조건 폐기하는 게 능사는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도 바른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마 5장에서 모세의 율법에 대한 반명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헤겔 철학 개념으로 설명하면 율법의 지양(止揚, Aufhebung)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율법이 새로운 차원으로 지양, 즉 끌어올림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율법은 부정되지만 동시에 복음 안에서 새로운 빛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복음의 빛을 경험하셨는지요. 그 빛으로 세상과 인생을 새롭게 보게 된 경험이 있으신지요. 초기 기독교인들과 지난 2천년 역사에서 바른 신앙의 길을 갔던 사람들이 경험한 바로 그 진리의 빛 말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그를 위해서 하는 일들이 힘든 게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자유로 경험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복음의 빛은 우리로 하여금 모세의 율법에서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차원에서 더 책임감 있게, 더 성실하게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 복음의 빛으로 여러분의 삶이 환해지기 바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24, 2014
*.94.91.64

원고에는 없지만 실제 설교에서 말한 것 중에

오류가 있어 바로 잡습니다.

앞 부분인데,

중국에 사는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인 한민족을

한족이라고 말했습니다.

조선족을 잘못 말한 거니 양해를 바랍니다. 

다른 때보다 설교가 길어진 이유는

모세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한다고 하다가 길게 끌은 탓입니다.

다 아는 이야기니 과감하게 줄였어야했는데

좀 아쉽군요.

 

목사들은 주일 저녁이 가장 편안합니다.

저만이 아니라 저의 동료, 선후배 목사님들도

다 느긋하게 주일 저녁을 보내고 계시겠군요.

모든 다비안들도 한 주간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profile

[레벨:18]르네상스

August 25, 2014
*.45.241.218

신학자 칼 바르트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기존의 신학적 도식을 '복음과 율법'으로 바꿔서 말했죠.

성경 안에는 놀라운 세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이고 은총이다, 세리나 창녀가 율법학자들이나

대제사장들보다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놀라운 복음과 은총의 세계를 발견하고 난 뒤에

바르트는 '율법과 복음'이 아니라 '복음과 율법'이라고 말했죠.

또한 바르트는 기독교윤리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고

비기독교윤리와 달리 기독교윤리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죠.

 

목사님께서 자주 설교 시간에 말씀하셨듯이, 이 세상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인간의 존재 자체가

완벽한 율법 준수를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빛나는 것이지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인 것이지요.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한국 교회는 대체적으로

율법을 규칙, 규범, 윤리, 도덕 등으로 이해를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헌병'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십일조 잘 내고 계십니까?

주일성수 잘 하고 계십니까? 하루에 성경은 몇 장 읽으십니까?

하루에 기도 몇 시간 하십니까? 일 년에 전도 몇 명 하십니까?

새벽기도 하십니까? 금요철야 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율법의 본질을 알면 그렇게 '헌병'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하지 않을 텐데

율법의 본질을 잘못 오해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율법이 가르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겠습니다.  ^^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25, 2014
*.94.91.64

헌병 모습의 신앙생활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해보이는군요.

자유와 책임이 복음 안에서 긴장과 종합을 이루기를...

profile

[레벨:24]또다른세계

August 27, 2014
*.62.163.65

오늘에서야 정독하듯 설교를 듣고 찬찬히 문장으로도 말씀을 읽었습니다.

요즘같은 불경기에 바쁜 것은 회사로서는 좋은 일이나, 신학공부를 위해 

어떻게 하면 더 추가적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은 아닌 듯 합니다. 적당히 바쁘면 참~ 좋을텐데요~ ㅎㅎ

설교 초반에는 좀 느긋하게 듣다가 나중에는 귀를 쫑끗하고 집중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완전 제 이야기...니골라당으로 살았다가, 철저한 바리새인으로 살았다가...

그리고 비춰지는 복음의 빛...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씀...참 자유와 소망...

오늘 설교 말미에 나오는 말씀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전체를 바꾸시는 방법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전인격을 바꾸시는 거듭남...그리고 참 기쁨과 평안...

바울이 알기를 바랬던 은혜의 풍성함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죠? ^^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27, 2014
*.94.91.64

예, 회사가 바쁘게 돌아간다니, 좋은 일이구요.

그래서 신학공부의 간절함이 더 간절해질 테니,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설교에서 별로 강조하지 못했는데도,

설교 스타일이 쭈욱 밋밋해서...,

삶과 세상을 새롭게 비추는 복음의 빛을 잘 따라가셨군요.

제가 판단할 일은 아니나

은혜의 길을 잘 가고 계십니다.

그렇게 가다보면 속도의 완급은 있지만

결국 바울을 비롯해서 수많은 영성가들이 가려고 했던 그 고유한 길을

자신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또렷하게 경험하게 될 겁니다.

주의 평화! 

 

 

profile

[레벨:13]진인택

January 23, 2015
*.206.242.56

법의 가시마져 누그러뜨리는 복음이 놀랍습니다.

법이 나를 보호해준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법이 나를 답답하게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으로 법이 때린 아픔을 달랠 수 있습니다.

법은 아직도 스스로를 증식시키고 있습니다. 자기 약점이 있어서.

복음은 언제나 놀라울 뿐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23, 2015
*.94.91.64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 화염처럼 우리 영혼을 불살랐으면 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45
648 성령강림절 귀신 이야기 (눅 8:26-39) [43] 2016-06-19 11924
647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37] 2016-06-13 8219
646 성령강림절 울지 말고, 일어나라! (눅 7:11-17) [16] 2016-06-05 14457
645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3
644 성령강림절 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11] 2016-05-22 11525
643 성령강림절 교회는 성령공동체다 (행 2:1-21) [10] 2016-05-15 12145
642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07
641 부활절 바울과 루디아 (행 16:9-15) [9] 2016-05-01 13916
640 부활절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15] 2016-04-24 15133
639 부활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 (요 10:22-30) [13] 2016-04-17 6633
638 부활절 죽임 당한 어린 양 (계 5:11-14) [9] 2016-04-10 7743
637 부활절 부활의 증인이란? (행 5:27-32) [9] 2016-04-03 7708
636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240
635 사순절 예수 죽다! (눅 23:26-49) file [7] 2016-03-21 9034
634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2841
633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5] 2016-03-06 9147
632 사순절 유예된 심판 (눅 13:1-9) [6] 2016-02-28 9516
631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3] 2016-02-21 7299
630 사순절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 (신 26:1-11) [6] 2016-02-14 7736
629 주현절 변모의 예수, 하나님의 아들 (눅 9:28-36) [3] 2016-02-07 8490
628 주현절 사랑, 하나님의 존재 방식 [9] 2016-01-31 7904
627 주현절 종말의 능력과 현실 (눅 4:14-21) [5] 2016-01-24 5923
626 주현절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사 62:1-5) file [18] 2016-01-17 9466
625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눅 3:15-17, 21-22) [4] 2016-01-10 8256
624 성탄절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의 축복 (엡 1:3-14) file [6] 2016-01-03 9415
623 성탄절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file [5] 2015-12-27 9715
622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2
621 대림절 마리아 찬송 (눅 1:46-55) file [8] 2015-12-20 9355
620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85
619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file [7] 2015-12-06 8450
618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9718
617 창조절 알파와 오메가 (계 1:4-8) [12] 2015-11-22 8997
616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8] 2015-11-15 7143
615 창조절 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14] 2015-11-08 11060
614 창조절 쉐마 이스라엘! (신 6:1-9) [4] 2015-11-01 15510
613 창조절 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6] 2015-10-25 9175
612 창조절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히 5:1-10) [8] 2015-10-18 8223
611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2
610 창조절 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14] 2015-10-04 10853
609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437
608 창조절 고난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11:18-20) [12] 2015-09-20 8195
607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4
606 창조절 행위와 믿음 (약 2:1-10, 14-17) [4] 2015-09-06 7717
605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37
604 성령강림절 갈곳 없는 사람들 (요 6:56-69) [15] 2015-08-23 8848
603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693
602 성령강림절 하늘의 양식 (요 6:35, 41-51) [8] 2015-08-10 7829
601 성령강림절 영원한 생명의 양식 (요 6:24:35) file [15] 2015-08-02 8048
600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568
599 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10] 2015-07-19 8626
598 성령강림절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29) [10] 2015-07-13 19455
597 성령강림절 은혜의 자족성 (고후 12:2-10) [13] 2015-07-05 8742
596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7
595 성령강림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 17:32-49) [8] 2015-06-21 21370
594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695
593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6] 2015-06-07 7211
592 성령강림절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 6:1-8) [10] 2015-05-31 7077
591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899
590 부활절 사도의 직무 (행 1:15-17, 21-26) [12] 2015-05-17 6781
589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0
588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323
587 부활절 믿음과 사랑의 계명 (요일 3:16-24) [5] 2015-04-26 9195
586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2969
58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42
584 부활절 "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8) [8] 2015-04-05 6902
583 사순절 고난의 그리스도 (사 50:4-9) [8] 2015-03-29 8291
582 사순절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4] 2015-03-22 7460
581 사순절 믿음의 능력 (요 3:14-21) [14] 2015-03-15 9652
580 사순절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25) [10] 2015-03-08 8514
579 사순절 생명과 존재의 근원 (롬 4:13-25) [7] 2015-03-02 7332
578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29
577 주현절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막 9:2-9) [4] 2015-02-15 8332
576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758
575 주현절 악령과 예수 (막 1:21-28) [2] 2015-02-02 8644
574 주현절 만물의 무상 앞에서 (고전 7:29-31) [12] 2015-01-25 8987
573 주현절 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2015-01-18 9630
572 주현절 태초에 ... (창 1:1-5) [7] 2015-01-11 8783
571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214
570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544
569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1725
568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4
567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21
566 대림절 그 날과 그 때 (막 13:24-37) [8] 2014-11-30 14692
565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4] 2014-11-23 16791
564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2
563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2
56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874
561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을 넘어 (마 22:34-46) [2] 2014-10-26 12204
560 창조절 교회는 성찬 공동체다 (막 14:22-25, 고전 11:23-26) [7] 2014-10-19 7259
559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5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5
557 창조절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4] 2014-09-21 13013
556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355
555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4
55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7] 2014-08-31 13299
» 성령강림절 모세와 예수 (출 1:8-2:10) [7] 2014-08-24 8880
552 성령강림절 불순종의 역설 (롬 11:1-2a, 29-32) [17] 2014-08-17 7645
551 성령강림절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18] 2014-08-10 14744
550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171
549 성령강림절 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6] 2014-07-28 9284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