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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은총 (신 4:1-2, 6-9)

성령강림절 조회 수 3694 추천 수 0 2015.08.30 20:22:26
설교듣기 : https://youtu.be/qNl2DAH_Nkc 
성경본문 : 신명기 4:1-2, 6-9 

법과 은총

4:1-2, 6-9, 성령강림후 열넷째 주일, 2015830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35백 년 전 이집트에서 소수 민족으로 설움을 받던 고대 이스라엘이 탈()이집트를 감행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생활을 마친 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를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구약의 신명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생각했지만 거기서의 삶이 녹록한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여러 부족들과의 생존 경쟁을 피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 신앙이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지난 시절 시집갈 딸에게 시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자세하게 가르치는 아버지의 심정이 여기 신명기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의 세계

신명기가 말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얻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상 외로 단순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구호처럼 유치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명기의 영적 세계는 깊고 아득합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경험한 사람, 즉 생명의 절대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이 말을 이해합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절대적인 겁니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자신의 이성, 지성, 합리성, 논리 내세우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뿐입니다. 순종이 아닌 것은 모두 불순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욥에게서 우리는 그런 영적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도 바로 그런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호렙 산에서 불이 붙었지만 타지는 않는 가시떨기나무 현상 앞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거룩한 대상 앞에서 그는 신을 벗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누구냐, 이름을 알려 달라,’ 했지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답변만 듣습니다(3). 세상 언어와 개념과 범주로 담아낼 수 없는 어떤 분을 경험한 그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즈음 화산이 폭발하여 구름과 불길과 연기가 가득한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으면서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 했지만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는 답변만 듣습니다(33).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즉 은폐의 방식으로 찾아온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도 바로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우리는 오늘 설교 본문(4:1-2, 6-9)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2절을 들어보십시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본문은 규례와 법도를 듣고 실천하라고 준엄한 명령을 내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규례와 법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칙들입니다. 보통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총체는 십계명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의 신 5장에 십계명이 나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로부터 시작해서 네 이웃을 ... 탐내지 말지니라.’로 끝납니다. 십계명에 율법 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이것은 한 국가의 헌법과 같습니다. 헌법은 그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국가에 헌법만 있는 게 아니라 온갖 법률과 시행세칙 등이 따라오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에도 십계명 외에 여러 가지 규례와 법도가 나옵니다. 모세는 그 모든 것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규례와 법도, 즉 율법을 지켜야 할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1) 산다. 2) 가나안에 들어간다. 3) 그곳의 땅을 얻는다. 이걸 한 마디로 줄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두 발을 딛고 편안히 살게 될 것이라는, 쉽게 말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런 삶이 곧 구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 민족이라 불릴 정도로 율법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오늘 본문 신 4:8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어 9절에서 이 율법을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면서 자손들에게도 알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모세는 무엇을 근거로 율법이 이스라엘 민족의 살 길이라고 선포한 것일까요? 그런 주장은 정말 옳을까요? 고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들은 광야생활을 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나안에서 이룬 것이 많습니다. 다른 나라처럼 왕정국가를 이루고, 예루살렘 성전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자수성가한 어떤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거기서 늘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주변의 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게 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지만, 순종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렸을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로 바꿔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포함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모든 일들이 늘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은 왜 율법 준수가 생명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말과 하나님의 말을 우선 구분해야 합니다. 모세의 말은 인간의 말기 때문에 그걸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4:1절은 율법을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하고, 2절은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모세의 말과 하나님의 명령이 다르다는 사실을 성경기자들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십계명만 놓고 봅시다. 이건 분명히 이스라엘의 역사에 그 뿌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스라엘 민족은 가장 가치 있는 명제를 열 가지로 완성한 것입니다. 신약성경도 이런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모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고,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글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이게 과연 말이 되나요? 여기에는 무슨 근거가 있는 걸까요

 

하나님에게는 사람과 같은 방식의 말과 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지만,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말과 글이 아니라 창조의 원초적 능력을 가리킵니다. 사람만이 말을 하고 글을 씁니다. 목사의 설교도 목사 자신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진 일을 상상해보세요. 선생님이 급한 일로 교실을 떠나면서 반장에게 학급 일을 맡겼습니다. 반장이 선생님의 형편과 선생님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하기만 한다면 그 말은 반장의 말이 아니라 선생님의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반장이 아무리 선생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한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잘못 전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호렙 산과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즉 절대 생명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경험으로부터 자기 민족이 나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을 인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어 너머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모세의 딜레마입니다. 자신의 하나님 경험은 분명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사실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가 바로 율법입니다. 그걸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의 신앙생활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차원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읽고 헌금을 드립니다.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도록 노력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목사의 설교는 물론이고, 또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곧 실제 하나님의 명령 자체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예로 든 선생님과 반장의 경우를 다시 보십시오. 반장이 선생님의 생각과는 다르게 오후 수업은 없다고, 또는 반대로 오후 수업 뒤에 대청소를 해야 한다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반장이 선생님의 생각을 어림짐작으로 전했을 수도 있습니다. 반장이 아무리 정확하게 전했다고 하더라도 말 자체의 한계로 인해서 선생님의 뜻이 바르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문자적인 차원에서 그대로 다 지킬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폴란드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카로그>, 이 제목은 십계명이라는 뜻인데,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십계명은 인간의 온갖 뒤틀린 욕망을 꿰뚫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그걸 얼마나 지켰느냐, 또는 지키지 못했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폭로하는 규범입니다. 십계명 앞에서 우리 모두는 절망합니다.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죄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모태 유대인이면서 바리새인이었고 율법 박사로서 율법에 자기 인생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율법에 충실했지만 거기서 생명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자기의 한계만 드러났지 하나님으로 인한 궁극의 기쁨과 평화가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율법의 본질을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한걸음 더 나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4:15).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경을 거기에 쏟아야 합니다. 어느 한 순간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수능시험에 목을 매는 입시생과 같습니다. 점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불안하고, 조금 올라가면 그걸 유지하거나 더 올리려고 노심초사합니다. 끝없이 자기를 성취해보려는 욕망이 거기에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죄라고 바울은 진단합니다. 죄로 인해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제3 독서인 막 7장에는 율법주의의 한 전형이 나옵니다. 율법의 전문가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왔다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게 당신 제자들은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제자들의 행동은 율법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 제기는 틀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소.’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 율법은 사람의 전통이었습니다. 율법을 완성한 모세도 사람이니 사람의 전통이라는 말은 옳습니다. 사람의 전통에 매달리면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폐기처분해야 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인간 사회의 유지는 불가능합니다. 법이 없으면 국가 운영이 어떻게 될지, 교칙이 없으면 학교 운영이 어떻게 될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교회도 교회법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습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배 순서 없이 신자들이 함께 둘러앉아서 은혜가 느껴지는 대로 서로 간증하고, 성경 읽고, 설교하고, 찬송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이에 비해서 예전 중심으로 드리는 우리교회의 예배는 율법적인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과 질서와 규범들은 나름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근거들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해서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실현되기 전까지는 일종의 필요악으로서의 율법이 없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다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은총의 세계

구약종교인 유대교는 율법에 신앙의 거점을 잡았다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신앙의 거점을 잡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바울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는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다가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돌아선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서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율법의 기능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짚은 뒤에 바울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어떤 궁극적인 사실을 언급합니다. 3:21-24절입니다. 공동번역의 내용을 발췌하는 식으로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율법에서 은총으로 옮겨졌다는 뜻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발언을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자유주의자이든 공산주의자이든, 남한 사람이든 북한 사람이든, 지성인이든 일자 무식쟁이든 아무 차별 없이 죄에서 풀어주셨다는 발언을 이해하고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들과 모범생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은총의 능력을 이해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상한 사람들과 자기가 동일 취급을 받는다는 게 못마땅한 겁니다.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는 아직 하나님의 은총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볼 때 ()법은 가깝고 은총은 멉니다. 세상의 작동 원리는 실체로 다가오고, 하나님은 관념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과연 은총으로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거야, 믿음만으로 세상을 버텨낼 수 있는 거야, 하고 말입니다. 설교자로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우선 은총의 빛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선다는 이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삶의 원리인 법이, 즉 세상살이가 눈에 보일 겁니다. 거꾸로 은총의 빛이 희미하면 율법과 죄의 질서에 숨이 막힐 겁니다. 악하면 악한대로, 착하면 착한대로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 아닌 것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의 빛과 능력에 기대서, 한걸음 더 나가 그 은총의 화염에 휩싸여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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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30, 2015
*.94.91.64

오늘 <설교듣기>의 음질이 다른 때와 비교할 때

좋아진 것 같다고 느낄 분들이 많을 겁니다.

잡음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대구샘터교회가 예배 처소를 옮기면서

앰프 자체에 녹음이 가능한 시스탬을 갖추었습니다.

마이크에서 직접 소리가 전달되어 녹음이 되는 거지요.

보통 때 나오는 <설교보기>가 없고 <예배보기>가 나옵니다.

예배 시작부터 끝까지 전체를 녹화한 내용입니다.

마이크를 한 군데 놓고 녹음 녹화를 하다보니

소리 전달에 문제가 있습니다.

앞으로 개선해보겠습니다.

언젠가 여건이 갖추어지면

예배 전체를 생중계로 내보낼까 합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교회에 직접 올 수 없는 분들을 위해서요.

금년 말이나 내년초 쯤이 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모두들 귀한 주일을 보내셨겠지요?

은총의 빛이 여러분의 삶을 환히 비쳐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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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August 31, 2015
*.194.68.169

교회 생활에 연관해서 생각했을 때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요즘 저희 교회는 큐티, 제자양육, 평신도 사역 같은 프로그램들로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훈련을 통해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하고

그런 메뉴얼을 통해서 똑같은 방법, 똑같은 신앙관을 익혀서 

하나님의 지상 명령인 전도하자는 취지 인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그것이 신앙의 중심일까?

믿는 대상에 대한 관심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다보니까 참여는 하면서도 자꾸 마음에 뭔가 부딪치게 되고

그렇다고 눈치 보여서 안 한다고 빠질 수도 없고 또 현실적으로 필요 없는 것들도 아닐테고 해서 갈팡질팡합니다.

점점 스스로 고립되는 느낌이랄까.

다비아가 환풍구가 되어 주어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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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31, 2015
*.94.91.64

문전옥답 님에게

다비아는 환풍구가 아니라

해방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교회 일 적당하게 하세요.

제가 보기에 제자 양육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보다는

마이스트 에크하르트의 책이나

몰트만 같은 신학자의 책을 읽는 게

신앙성자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오해는 마세요.

교회 일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적당하게 하라는 겁니다.

목사가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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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은빛그림자

August 31, 2015
*.34.51.129

목사님, 어제 이 설교를 듣고 뭐랄까.. 조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맨 마지막 문장, "은총의 화염"에 휩싸여 살아가십시오, 이 부분입니다.


1. 은총은 피조물이 자체적으로 생성해 낼 수 없고 하나님의 전권적인 행위인데,

그게 명령문으로 표현되어 있어서(서울샘터에서도 명령문으로 말씀하셨고요)

이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괜히 말꼬리를 붙잡기 위해서 드리는 질문이 아니고요,

제가 늘 고민하는 부분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은총의 화염에 휩싸이고 싶은데 그게 제 힘으로는 조금도 안 돼서요.

공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셔서 그렇게 하고는 있지만요.


2. 은총의 화염에 휩싸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이게 관념적으로는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는데요,

명확하게 무엇이냐, 누가 묻는다면 대답을 잘 못하겠습니다.

잘 모른다는 얘기죠.ㅎㅎㅎ


3. 1번 항목과 관련해서 "은총의 화염"에 휩싸이면 인식 주체가 소멸 내지 축소될 것 같은 느낌인데요,

그렇다면 스스로가 "은총의 화염"에 휩싸였는지 어떻게 인지할 수 있는지요.

이 부분 역시 참 고민되는 부분인데요, 신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나 자신에게 몰입하는 태도를 구별하고 경계하려 하다보니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인식 주체가 중심에 없는 "앎"의 행위가 성립할 수 있는가.. 고민이 돼서 말이죠.


질문이 줄어들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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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31, 2015
*.94.91.64

이렇게 좋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에요.

 

1. 은총의 화염은 하나님의 일이고

거기에 휩싸이는 것은 인간의 일입니다.

아니 횝싸이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억지로 노력해서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은총의 빛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어떤 사태를 그렇게 표현하 거에요.

 

2. 은총의 화염이라는 표현 자체는 이해하겠지요?

사랑의 불로 바꿔 생각해도 좋아요.

은빛 님이 첫사랑에 빠졌을 때를 상상해보세요.

온천지가 그 사람으로 가득하지요? ㅎㅎ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자신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게 은총의 화염에 횝싸이는 겁니다.

이 문제로 대구샘터교우들도 예배 후에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REALITY로 와 닿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걸 어쩌지요?

 

3. 인식 주체의 소멸과 축소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은총의 화염에 휩싸이면 이성, 인식, 지성은 더 투명해지고,

단지 자아가 축소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명과 구원에 대한 인식은 더 확대되는 거지요.

다시 사랑을 예로 들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 경험과 비슷하기 때문이에요.

어느 누구를 사랑하면 자아가 축소되지만

삶은 더 투명하고 풍요로워집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나요?

아니면 이제라도 한번 해보세요.

3번 후반부의 안다, 인식 주체, 앎의 행위 등등은

본인 스스로 정리되지 않는 표현을 한 거 같습니다.

 

질문이 줄지 않다는 것은

영혼이 졸지 않는다는 증거니,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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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부스러기 은혜

September 01, 2015
*.62.172.8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는것이 은총의 화염에 휩싸이는 것이다..

주신 댓글 앞에서
"누군 그렇게 안되고 싶은가?
  아무리 소원하고 아무리 간구해도
  구원의 선물이 쉽사리 손에 안잡혀지는데
  그럼 도대체 어떻게야 한단 말인가?"
   답답함이 가중되는군요

세상의 유혹과 위협은 언제나 생생하고
구원의 은총은 여전히 머리로만 인식되고....
머리의 지각과 실질적 인식과의 간극을 좁힐수 있는 길은  "신학공부가 답이다"
하실것 같은데요 ㅎㅎ

영어 회화 공부를 아무리 오래 해도
도무지 귀가 열리지는 것 같지 않아
포기할까.. 를 수없이 되뇌이면서도
계속 가다보면 어느 날부터 부지불식간에
하나 둘 단어가 들리기 시작하듯이
십자가 사랑도, 구원의 감격도
좌고우면 않고 수행하다 보면 그 사랑이 시나브로 만져지고 느껴지고 ..
그래서 내 영혼이 그 사랑에 눈 떠지고,
갈수록 온 영혼이 그 사랑에  압도당하여,
받은 사랑을 나누지 않고는, 전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그런 팔복의 심령이 되어갈까요?

구원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은총으로 주셔놓고,
그 사랑에 대한 감각과 인식은
왜 이리도 지난한 과정을 통해 애간장이 녹게 하면서
허락하시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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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September 01, 2015
*.94.91.64

나에게 질문한 거 아니죠, 맞나요?

이미 자신이 답을 알고 있으니

내 말은 필요 없어 보입니다.

영어회화 공부 예를 잘 드셨네요.

뭔가 들리는 순간,

뭔가 보이는 순간이 올 수도 있지만

안 올 수도 있으니 답답한 겁니다.

그걸 정말 답답하게 느끼면

발 벗고 나서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대충 살면 됩니다.

왜 애간장 녹는 듯하냐 하면

그분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완악하고 강퍅해서 그렇답니다.

영혼의 문을 단단히 잠가놓은 상태로

'어서 들어오십시요.' 하고 있으니  

그분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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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August 31, 2015
*.237.104.169

율법준수는 가나안에 들어갈수 있게하며, 땅을 얻게하고

인간사회 유지를 가능하게 하므로 부정할수없습니다. 지키며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율법성취에 매몰되면 율법주의가 되어버릴겁니다.

율법주의는 기쁨과 평화, 생명이신 하나님을 경험할수 없게합니다.

의무와 복종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타인에게 끝없이 의무를 강요하게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 아닌것에 지배받게 되므로

그것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낼수 있게되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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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August 31, 2015
*.94.91.64

예, 그렇습니다.

율법의 기능이 분명히 있기는 한데

그것은 늘 상대적인 거에요.

법이 양날의 검인 것처럼

한쪽을 세우면 다른 쪽은 무너뜨리게 됩니다.

설교 마지막 대목에서 한 마디 하고 지나갔는데,

그걸 포착하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거꾸로 은총의 빛이 희미하면 율법과 죄의 질서에 숨이 막힐 겁니다.

악하면 악한대로, 착하면 착한대로 차이가 없습니다."

에스더 님이 지적한 것처럼

율법을 기준으로 자신과 남에게

지속적으로 무언가의 의무를 강요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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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September 01, 2015
*.220.31.66

오늘도 설교말씀 잘 봤습니다.

사실 전 교회에 잘 나가지 않고 있는데,

예배 전체를 생중계 해주신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꼭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수고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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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September 01, 2015
*.94.91.64

예, 기다려보세요.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할지

연구 중에 있습니다.

위 예배 동영상을 보고

의견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말씀하세요.

회중들이 일어서고 앉을 때 의자 끄는 소리가

예배에 지장을 줄 정도로 크게 납니다.

사회자와 설교자의 목소리가 정확하게 전달이 안 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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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October 03, 2015
*.105.196.251

목사님 말씀은 제게 생수와도 같습니다.

율법이 무언지? 끊임없는 질문과 실천속에 자유도 평안도 없는..

하나님 은혜는 멀게만 느껴지는.. 그런 갈증속에 시원한 생수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간다"

오직 예수만 붙들어야할 이유지요?

전에는 목사님 설교가 어렵고 이해가 참 안갔는데요~

요즘엔 설교를 들을때 상상을 하며 들어요.

제가 글로 표현하기가 어려운데..설교 재미있어요.

좀더 듣고 싶고.. 이해가 되는게 감사하고 , 하나님 은혜가 감사하고 그래요.

세세한 생각까지 찝어서 말씀으로 터치해주시니까, 좋습니다.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의 빛과 능력에 기대어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은총의 화염에 휩싸여 살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목사님 귀한 말씀감사드려요.

 

 

profile

[레벨:97]정용섭

October 03, 2015
*.94.91.64

제 설교가 재미 있다는 은나라 님의 코멘트가

저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제 설교가 독백에 머무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전달이 된다는 거니까요.

처음에는 어렵다고 했지요?

그렇게 느끼는 분들은 끝까지 계속 그런 상태로 가는데,

은나라 님은 좀 다르시군요.

다행입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13]진인택

January 11, 2016
*.44.68.174

목사님, 정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만큼

다른 세상사의 지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은총의 빛을 바라보라는 손짓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법위에 은총이 늘 존재하게 하는 삶을 살도로 노력하겠습니다.


profile

[레벨:97]정용섭

January 11, 2016
*.94.91.64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만큼

우리는 세상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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