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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사순절 조회 수 5153 추천 수 0 2016.03.13 23:22:33
설교듣기 : https://youtu.be/Fn1l1JKB7zg 
성경본문 : 요한복음 12:1-8 

마리아를 가만 두라!

12:1-8,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16313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베다니에서

오늘 제3독서인 요 12:1-8절에는 한편으로는 가장 아름답거나 거룩한,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세속적인 이야기가, 또는 기쁨이 넘치거나 슬픔이 가득한 한편의 삽화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예루살렘에 가까운 베다니에서 벌어졌습니다. 한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곳은 아마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오빠인 나사로가 사는 집으로 보입니다. 마르다는 잔치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나사로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들고 예수님 발앞에 무릎 꿇고 앉아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았다고 합니다. 뜻밖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 꾸짖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일년 연봉에 해당되니까,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대략 3천만 원이나 4천만 원쯤 됩니다. 이 향유는 마리아의 혼수품이었겠지요. 그 비싼 물건을 한 순간에 다 써버린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돈에 욕심이 난 거라고 비판적으로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유다는 예수 공동체의 회계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요즘으로 하면 교회의 재정 부장입니다.

 

여러분은 이 마리아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우리도 유다처럼 마리아의 행동을 못마땅하거나 어리석은 것으로 여길 겁니다. 일년 연봉을 한 순간에 날려버린 마리아의 행위는 사리분별을 못하는 광신자의 행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좋게 봐서 예수님을 향한 끔찍한 사랑이 재물을 포기하게 했다 해도, 방법이 이상했습니다. 향유를 통째로 예수님께 드리면서, 이걸 좋은 데 쓰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유랑 공동체를 꾸리던 예수님에게 돈이 필요한 것은 당연했으니까요. 그런데 향유를 발에 쏟은 겁니다. 누가 보더라도 마리아의 행위는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쓰는 게 옳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은 예상 외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듯 말듯합니다. ()문답처럼 들립니다. 평소 예수님의 생각과 행동에 근거해서 본다면 마리아를 꾸중하는 게 옳아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에게 마리아를 가만 두라고, 이 여자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1)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 당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2)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만 예수님은 곧 세상에서 떠납니다. 근거가 두 가지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입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 의식에 해당됩니다. 이것보다 더 엄청난 일, 더 본질적인 일, 더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자를 가만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마리아는 누굴까요? 본문에서는 마리아를 마르다, 나사로와 남매지간으로 설명합니다. 본문 바로 앞의 요 11장에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10:38-42절에는 그 유명한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자 마르다는 음식 준비에 바쁘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가서 음식 준비에 바쁜 언니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는 마리아를 좀 타일러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대략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마르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 그대는 너무 많은 일로 마음이 분산되어 있는데, 사람이 한 가지만 잘해도 됩니다. 그대의 동생 마리아는 좋은 걸 선택한 거니까 뭐라 할 거 없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마리아가 바로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와 동일 인물일까요? 그렇다면 마리아가 한번은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만 들었고, 다른 한번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향유를 부었다는 말이 됩니다. 동일한 사건을 누가와 요한이 약간 다르게 설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자 이야기는 오늘 본문의 병행구인 마 26:6-13과 막 14:3-9만이 아니라 눅 7:36절 이하에도 나옵니다. 누가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죄를 지은 한 여자가(이름을 나오지 않습니다.) 바리새인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예수님에게 와서 울면서 예수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아주 극진한 예의를 갖춘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소문이 좋지 못한 여자를 가까이 오게 허락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이 죄 많은 여자야말로 사랑이 많은 여자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이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으니 평안히 가라.’(7:50)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따라서 약간 씩 사실관계가 다르기는 하지만 한 여자가 예수님에게 고가의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논란이 벌어졌으며, 이 논란을 예수님이 일언지하에 물리쳤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 향유 사건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양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유월절 엿새 전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절기입니다. 출애굽은 유대인들이 소수 민족으로 고통당하던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사건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유대인들의 탈출을 끝까지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아홉 가지 재앙이 임할 때까지 버텼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 사람들의 장자와 짐승의 맏배를 다 죽이는 열 번째 재앙이 일어난 다음에야 손을 들고 항복했습니다. 마지막 재앙 때 그 죽음의 천사가 유대인들의 집은 그냥 지나쳤다 해서, 이 절기를 유월절(踰越節, Passover)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 때 가정 마다 양을 잡습니다. 양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바로 유월절에 바쳐질 어린 양이라고 보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러오는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은 주변 사람들에게 요 1: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Agnus Dei)이로다.’

 

이런 신앙에서만 철없는 행위로 보이는 마리아의 향유 사건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의 죽음에 최선의 예를 바치기 위해서 일 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향유를 붓는 일은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닙니다. 예컨대 자기 가족이 난치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새로운 의학 기술이 나와서 치료될 길이 열렸습니다. 다만 돈이 문제였습니다. 집 한 채 값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면 집이 아니라 더 큰 재산이라도 포기할 겁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인류 구원과 연관된 것이기에 더 할 나위 없이 가치 있는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간혹 교회의 존재 이유를 구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제 행위 자체는 소홀히 할 수 없지만,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인류 구원이 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어린 양이신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마리아의 행위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부정될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이라는 사실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하나는 사람이 죄로 인해서 파멸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죄는 단순히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더 근본적인 사태를 가리킵니다. 자기중심성이 죄입니다. 여기서 많은 충돌이 일어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판단하다보면 파괴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가서 세상에서 자기를 성취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일에 더 매달립니다. 성경이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2)유월절 어린 양이 가리키는 다른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인류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설명을 허무맹랑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교회 나오는 분들도 이런 말이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걸 관념적인 기독교 교리로 치부해버리고 맙니다. 이 문제는 제가 설교할 때마다 반복해서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마리아의 향유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다는 게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설명이 간접적으로 예수를 통한 죄의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거룩한 낭비

나드 한 근을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는 마리아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분명히 낭비로 비쳤을 것입니다. 합리성과 실용성을 최대 가치로 여기는 현대인들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낭비를 딱 질색합니다. 촌음을 아껴서 삽니다. 일찍 일어나서 늦게 잡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이 힘듭니다. 취업했다고 해도 견뎌내기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대기업에 취업한 젊은이들을 보니, 모든 삶을 포기하면서 회사 일에 매달립니다. 우리나라 노동 시간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학생들도 삶에 대해서 생각할 틈이 없이 입시에 매달립니다. 유치원 아이들부터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바쁘게 삽니다. 교회도 바쁘게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가치 있는 삶이라고 모두들 생각합니다. 시대정신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혼자만 정신적으로 고상한 것처럼 유유자적하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을 돌려보십시오. 우리가 분초를 다투듯이 분주하게 살면서 이룬 것이 실제로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은 그만한 보상을 받을 겁니다. 잘 안 될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만 보면 노력한 것만큼 보상이 따릅니다. 그 돈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줄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흔한 말로 죽을 때 돈을 싸들고 가지 못합니다.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있고, 자선단체나 교육단체에 기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자기의 삶을 몽땅 쏟을만한 가치가 돈에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기 집을 장만한다는 생각만 하지 않아도 우리가 이렇게 바동거리면서 살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도 정 목사가 세상이 얼마나 각박한지 물정을 모르고 저런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돈으로 우리의 생명이 풍요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크다고 해서 신자들이 영적으로 행복하거나 건강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단순한 낭비가 아니라 거룩한 낭비입니다. 그런 낭비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거룩한 낭비는 생명을 얻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간은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거룩한 경험이 얼마나 있으신가요? 기쁨과 평화로 영혼이 충만한 순간들 말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떨리는 경험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매개는 무미건조하거나 자극적인 일상에만 떨어집니다. 하이데거 표현으로 일상으로의 퇴락입니다. 사람은 이런 상태에서는 결코 영적인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상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집에서, 맛있는 걸 먹고, 건강한 가운데서 온갖 취미생활을 즐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그 모든 것이 지루해집니다. 저는 3년 전에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생활 조건이 쾌적합니다. 그러나 내 영혼이 새로운 시각을 유지하지 않으면 그런 조건이 더 이상 매력적인 게 아닙니다.

 

자신의 재산 전체를 쏟아 부을 정도로 마리아의 영혼을 뒤흔든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나중에 천국에 가서 한번 물어봐야겠습니다.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가 행한 거룩한 낭비는 자기 존재 전체에 걸린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관점이 없으면 영혼이 흔들리고 공명되는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존재 전체는 연봉이 얼마인가, 연금을 얼마나 받느냐, 하는 게 아니라 영혼 구원과 연관됩니다. 그런 시각이 열릴 때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이라는 사실에 영혼 전체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다른 것은 다 상대적인 차원으로 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외의 다른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이게 구원 경험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영적인 태도로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영적인 태도가 그렇게 낭만적인 것은 아닙니다. 주변에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제가 낫다고 비판한 가룟 유다처럼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왜 그렇게 어리석냐,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인생을 그런 일에 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 차라리 땅을 파라고 합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사회봉사에 힘을 쏟는 게 옳다고 비판합니다. 신자로 사는 것보다 휴머니스트로 사는 게 더 가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에게 여러분들은 딱히 반론을 펼치기 힘들 겁니다. 우리가 말을 해도 그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이런 세상 앞에서 두려우신가요?

 

여러분에게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리아를 가만 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마리아는 예수님을 절대 생명으로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사실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녀를 가만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길, 진리,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가만 두라.’는 말씀은 동생 마리아를 타일러 자기를 돕게 해달라는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좋은 걸 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 차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영적으로 몰입하는 우리의 선택은 예수님에 의해서 보장받았으니, 굳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생명을 주지는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져도 좋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가던 길을 계속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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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제이맨

March 14, 2016
*.101.20.146

목사님,

유월절 어린 양의 장례를 준비한 '거룩한 낭비'앞에서 일상의 분주한 셈법은 또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

마르다와 동일한 입장에서 생각을 정리해 봅니다.

 

좋은 것(예수님)을 택한 마리아는 영혼의 울림을 경험하고,

좋은 것을 옆에 두고 일상에 빠진 마르다는 형평성에 대해 불만을 갖으며,

 

영혼의 깊은 곳을 본 마리아는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차이에 대해 깨닫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 한 제자(가롯 유다)는 돈을 낭비한 것에 불만족하며,

 

마침내 마리아는 중요치 않은 것에 대해 '자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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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March 14, 2016
*.94.91.64

베이맨 님이 방정식을 풀듯이

본문의 주제를 잘 풀어주셨네요.

향유를 들고 예수 님에게 가까이 올 때

마리아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영혼이 거룩한 떨림으로 가득했겠지요.

그런 경험을 우리가 한평생

몇 번이나 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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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은빛그림자

March 14, 2016
*.108.104.204

어제 몇 푼 더 벌어보겠다고 예배 중에 나갈 생각에 뒷자리에 착석했더니

이건 뭐 목사님 얼굴도 보이지 않고 집중도 안 되고 설교 내내 다음 스케쥴 생각하면서

듣는 둥 마는 둥 계속 딴 생각이 오락가락하여 참.. 인생 얼마나 산다고

일주일에 한 번 듣는 설교에 집중도 못하고 사나.. 싶은 게 좀 힘이 빠졌습니다요. 으흐흐흑.

그런데 맨 마지막에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요... "걱정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말씀 안에서 가던 길을 굳게 가라"

저는 그렇게 들었는데(즉석에서 더 넣으신 말씀인 줄 알았는데 본문에 있어서 뭔가 더 완벽한 느낌이랄까..ㅎㅎ)

본문에선 살짝 달랐지만 아무튼, 또 울컥해가지고(이건 뭐 하나님이 나를 정말 위로하고 계시구나..싶은 것이..ㅎㅎ)

앞의 내용은 다 까먹고 오직 저 대목만 생각하고서 가열차게 일을 했...습...니..다요.ㅎㅎㅎㅎ


거룩한 낭비, 참 세련된 말입니다. "낭비"는 목사님 말씀하신 것처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꺼려지는 단어 중 하나겠지요.

아무리 "거룩한"의 수식을 받고 있다 해도 본질은 "낭비"로 인식되기에

비효율성, 어리석음, 심지어 무능력까지도 등가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 경쟁 사회에서 도태 혹은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기꺼운 도태, 자발적 퇴보, 말은 쉽지만 이것이 생존과 연결되면 또 간단치는 않습니다.

예전에는 늘 이런 문제 앞에 서서 분을 품고 막 화를 내고 딱 떨어지는 해명을 듣지 않으면 속이 뒤집힐 것 같았는데,

이제 그런 증상은 덜합니다. 때때로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냥 가던 길을 잘 가볼란다..뭐 그런 마음이죠.

사실 그런 마음도 아주 사소한 일에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고 이건 뭐 엉망진창인 느낌일 때가 참 많습니다.

잘... 가고 있는 걸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드는 시기였는데,

걱정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서서 가던 길을 가라고 하시니 크게 안심이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이 길을 잘 가볼 생각이니 목사님께서도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 또 계속해서 잘 걸어가시길 당부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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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March 15, 2016
*.94.91.64

세상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또는 더디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원인인 거는 분명해요.

이를 헤쳐나가는 최선의 길은 신앙공부에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시니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거에요.

알고 있지만 실감이 가지 않는 한 가지 신앙공부를 짚으면,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고상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차이가 아주 미미한 건데

그게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면 좀 우스꽝스러운 현상인 거지요.

큰 교회 목사님들이나 저처럼 작은교회를 맡은 사람이나

그것 자체는 신앙의 깊이에서 너무 작다는 겁니다.

세상살이도 그렇게 대비해보면 답이 나오는 거에요.

이거 뻔한 이야긴데,

자꾸 놓치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요.

마리아의 영혼을 가득 채운 게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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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부스러기 은혜

March 15, 2016
*.138.52.79

밭에 감추인 보화가 보화인지를 모르기에
전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사고자 하는 결단을 우리가 못내린채 예수를 믿듯이,
우리는 예수를 통한 절대생명, 절대구원의 그 두렵고 떨리는 인식과 경험이 없기에 마르다같은 신앙행태를 보이고 있는거겠죠?

'마리아를 내버려 두어라...' 하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믿는다 하지만, 왜 내가 이땅에 와야 했는지, 너희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지... 여기에는 무지한채, 그저 자기 열심에만 갇힌 마르다와 똑같구나...' 하시는듯 하는군요


아...
마리아의 영성을 갖기엔 우리는 도무지 구제불능인가요? 머리로 인식한 교리를 내 손과 발끝으로까지 녹아나게 하려면 그 훈련기간이 평생이 요구되는걸까요? 그나마 소천하기 전날까진 그게 가능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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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March 15, 2016
*.94.91.64

마리아의 영성에 이르는 길이 멀게 느껴지는 건 당연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착각 중의 하나는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에 머물러서

신앙의 수행과정을 놓친다는 사실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기독교의 믿음은

사실 동일한 종교 차원입니다.

해탈을 위해서 화두 잡고 애를 쓰잖아요.

법정이 젊었을 때 성철에게 해탈을 어떻게 할 수 있냐고 질문하자,

성철은 5계를 말합니다.

3시간 이상 자지말고,

말하지 말고,

글 읽지 말고,

적게 먹고,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네요.

선승들에게 하는 충고라서 우리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종교의 절정이 평생의 수행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거지요.

겁 먹지는 말고

기본에 충실하면서

가는 데까지 가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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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온마음

March 15, 2016
*.144.187.184

현대인들의 고상한 교양이 오히려 신앙을 방해하는군요. 박애주의자나 휴머니스트 모두 자기의를 드러내기 위한 이들같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중심성이 더욱 강한 사람같습니다. 처세술과 심리전의 달인들이며 영혼이 그런 것들에 사로잡혀있죠. 그들이 고상해 보여도 정신에너지의 대부분을 자기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쓰고 있죠.

오늘의 설교 결론도 그런 것들로는 참된 평안이 없으니 참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에 온전히 집중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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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March 15, 2016
*.94.91.64

박애주의 자체는 문제가 없어요.

그걸 절대화할 때 문제가 되는 거지요.

기독교인이면서 박애주의자로 사는 건 옳지만

박애주의를 절대화하고 신앙을 상대화 하는 건 문제가 되겠지요.

이 문제가 그렇게 칼로 무를 자르듯이 우리 삶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통해서 바른 길을 찾아가야겠지요.

어쨌든지 현대인들이 교양과 경험들이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데 방해가 되는 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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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流水不爭先

March 20, 2016
*.173.40.129

우리가 가진 소유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 하나만을 택할때

가장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두번째 좋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 하려면 가장 좋은 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분과의 실존적 만남이 너무 어렵군요

머리와 가슴과 온 몸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목사님 글을 통하여서 그럴 수 없는 것이 인간 실존이란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실감합니다

칼바르트 말처럼 해석하라, 해석하라, 해석하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알아볼수만 있다면

 

주님 저에게 은총을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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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물가의나무

March 20, 2016
*.173.189.227

과연 마리아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아 보고 지금 그 일을 하고있을까요? ㅎㅎ 소망은 나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에만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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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March 21, 2016
*.164.153.48

흐르는물 님,

잘 지내시지요?

오랜만에 반갑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예수 경험이 계량화 되어서,

그것은 교회 생활의 수치화인데,

근본을 찾는 신자들이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총의 빛을 바랄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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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JY

March 24, 2016
*.145.64.106

많은 교회들이 거룩한 낭비의 구체적인 내용을 교회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일상을 도피하는 것으로 신자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렇게 되면 박애주의나 일상으로부터 멀어진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은 마리아처럼 거룩한 낭비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더군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냐'라는 주변의 질문에 대답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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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March 24, 2016
*.164.153.48

지용 군이구나.

자네가 말한 것처럼 교회에서 좋은 말은 다 사용하는데,

그 내용이 좀 천박하다고 할지,

생뚱맞다고 할지,

어쨌든 거시기 할 때 많지.

탄탄한 컨텐츠를 채우는 게 중요한 거야.

인생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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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맑은그늘

September 19, 2016
*.212.139.114

설교링크입니다.

https://youtu.be/ZGsLXzUCS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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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08, 2017
*.222.51.58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원천적이고 아름다운 나의 본성,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돈을 버느라 가려지고 밀려나고 찢어 졌습니다. 다행히 조금 남은 본성과 목사님의 도움으로 구원받고자하는 심정을 내면으로부터 더 열심히 많이 퍼 올렸습니다.

이제는 애초에 주신 신령한 마음을 다 돈을 덮어버리고 말라 틀어진 깡통 마음으로 떠드는 시끄러운 소리엔 크게 신경 안 씁니다. 능력이 가난함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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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7]정용섭

March 09, 2017
*.164.153.48

예, 우리의 삶은 유일회적이고,

더구나 아주 짧아서

공연한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요.

나의 것은 하나도 없으니,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니,

빚진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집중하면서 사는 게

최선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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