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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말고, 일어나라! (눅 7:11-17)

성령강림절 조회 수 6189 추천 수 0 2016.06.05 22:30:19
설교듣기 : https://youtu.be/WcahuJZqLuo 
설교보기 : https://youtu.be/oVtrDX1578Y 
성경본문 : 누가복음 7:11-17 

울지 말고, 일어나라!

7:11-17, 성령강림후 셋째 주일, 201665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지난 529일 제3독서인 눅 7:1-10절 이야기와 오늘 제3독서인 눅 7:11-17절 이야기는 비슷합니다. 앞의 이야기는 백부장의 종을 예수님이 고치신 것이고, 오늘 이야기는 과부의 죽은 아들을 예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두 이야기에 다른 점도 있습니다. 백부장의 종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백부장의 믿음이 높이 평가된 반면에 과부의 아들 이야기에서는 과부의 믿음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두 이야기는 똑같이 예수님이 특별한 능력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다는 두 번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요?

 

울지 말라.”

예수님 일행이 나인이라는 마을로 들어가는 중이었습니다. 나인은 갈릴리 호수에서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마을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과도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마을을 빠져나오는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그 장면이 어떤지 머리에 그려집니다. 본문 12절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 오고 있었다.

 

이 장면을 영화처럼 상상해보십시오. 마을에서 빠져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을로 들어가는 예수 행렬이 교차되는 장면입니다. 감독이라면 누구에게 카메라 앵글을 맞출까요? 예수님이 주인공이지만 과부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이 여자는 상복을 입고 처연한 모습으로 상여를 뒤따르고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의 아들을 둔 여자라면 나이가 마흔 살은 채 안 되었을 겁니다. 이름도 없이 과부로 불리는 이 여자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여자는 오늘만이 아니라 언제인지 모르나 남편의 상여를 따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자금 상여에 누워있는 외아들이 상주 역할을 했을 겁니다. 과부의 몸으로 아들을 키웠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과부로서 산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구약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을 자주합니다. 본인들 혼자서 생존하기 어려우니 이웃들이 돌봐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여자는 아들에게 희망을 걸고 자신의 운명을 버텼습니다.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유일한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으로 자기의 삶은 끝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례가 끝나면 자기도 아들을 따라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상여를 따라가고 있는데, 저 앞에서 마주 오는 행렬이 눈에 뜨입니다. 상여가 지나갈 수 있도록 그쪽 행렬이 길을 비켜줍니다. 행렬 맨 앞에 섰던 한 남자가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왜 저럴까? 저이는 누굴까? 나를 아는 사람인가? 이 여자는 울지 말라.’는 소리를 그 남자에게서 듣습니다.

 

지금 이 여자는 누가 봐도 울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슬픔을 억지로 참으면 오히려 병이 됩니다. 실컷 울라고 하는 게 좋습니다. ‘울지 말라.’는 말을 들은 순간에 이 과부는 말하는 그 남자를 쳐다보았을까요? 눈길을 주지 않고 무덤덤하게 지나치려고 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당연히 쳐다보았을 겁니다.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극한 슬픔에 빠진 한 여자를 향한 의례적 위로가 아닙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이 여자를 불쌍히 여겼다고 보도했습니다. 앞으로 당신 자신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될 때 영혼이 무너져 내렸을 어머니 마리아를 미리 예상했을지도 모릅니다. 똑같은 말이라고 해도 누구에게서 듣느냐에 따라서 그 말의 무게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때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이 여자도 똑같은 무게의 말을 지금 이 순간에 들은 겁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신의 영혼 전체를 위로하는 말씀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흔한 게 아닙니다.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경험입니다. ‘울지 말라.’


외아들의 상여를 뒤따르던 이 과부의 실존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운명에 떨어진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생존의 토대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요즘 뉴스 보기가 불편할 정도로 끔찍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남녀공용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살해당한 20대 젊은 여성이나, 서울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가 참변을 당한 19세 청년, 하청에 하청이 거듭되는 지하철공사 현장에서 붕괴사고로 숨진 노동자들, 한편에서는 전관예우로 한 건 당 수십억 원의 수임료를 받아 챙기는 변호사들이 있는 반면에 돈이 없어 위생 생리대를 구입하지 못하는 소녀들 등등, 제가 일일이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2년 전 세월호 유족들의 심정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의 심정과 같지는 않을까요? 그런 사고야 어디서나 다 일어나는 일이니 너무 거기에 매달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기 불편한 일이라 하더라도 끔찍한 불행에 빠진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노력은, 울지 말라.’고 진심으로 말을 건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건 단순히 슬픔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런 불행의 반복을 막거나 줄이는 길이도 합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나치에 관련된 사람들을 색출해서 단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행복한 조건을 두로 갖춘 사람도 근본적으로는 오늘 본문의 과부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괜찮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나 재물을 모두 잃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우리의 삶은 모두 상실의 과정입니다. 이 엄정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부러 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인이 상여의 뒤를 따르는 중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자기도 곧 상여에 몸을 싣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행복한 것처럼 포즈를 취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것에 속고, 그런 삶을 흉내 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런 행복한 삶의 조건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또는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삶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냐,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 불행을 미리 걱정하면서 사는 건 어리석은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본문에 나오는 과부가 겪고 있는 참척의 고통은 운이 나쁜 이들에게나 일어나지 운이 좋은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이미 모든 이들의 현실 삶에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운명이 죽음의 그림자처럼 비밀한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 불행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쉽게, 가장 즐겁고 행복한 순간을 기억해보십시오. 가족이 둘러앉은 밥상, 친구들과의 놀이, 여행, 돈벌이 등등일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공연장에 갔거나 영화관에 갔다고 합시다. 그 순간에는 다른 걸 잊겠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면 자기가 궁극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좀더 예민한 사람들은 그런 즐거운 순간에서 이미 자기가 상여를 따라가는 과부처럼 절대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동창들이나 이런저런 모임에서 겉으로는 웃고 떠들지만 속으로는 모두 울고 있습니다. 이게 피조물로서의 인간 실존입니다. 저도 이 엄정한 사실 앞에 설 때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8:23)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의 상여를 뒤따르고 있는 과부를 향해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실제로 울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그 말씀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죽은 자로부터 살아난 자만이 우리를 근원에서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그만이 궁극적인 의미에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이구나, 하고 상투적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고독과 절망의 끝자락입니다. 그것을 경험했던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울지 말라.’는 말씀의 능력과 하나 될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궁극적인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입니다. 부활의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울지 말라.’는 말씀을 생명의 화염처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일어나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별로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마디입니다. 한 번은 과부에게 한 것이고, 다른 한 번은 죽어 상여에 누워있는 그녀의 아들에게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아들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아들이 몇 살인지, 그리고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홀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다가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그는 혼자 남을 어머니를 생각했을 겁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상여에 누웠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닙니다. 뇌파를 검색할 수 있는 기계장치가 없던 고대 사회에서는 심장이 멈추고 숨이 멈추면 죽은 걸로 알았습니다.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까지 무덤에 묻히곤 했습니다. 관에 들어가 상여에 올라타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이 청년, 또는 소년은 조금씩 의식이 돌아왔는지 모릅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 걸까? 일어나서 어머니를 만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가위 눌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래 전 아버지가 타고 가던 그 상여에 자신이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이렇게 내 삶이 끝나는 건가?’ 그때 그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립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청년 이야기도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거 같습니다. 할 일도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습니다.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많은 일에 매달립니다. 스마트폰 시대는 어느 한 순간도 한눈을 팔지 못할 정도로 많은 세상살이의 정보들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이게 실제로 살아있는 것일까요? 혹시 가위 눌려 있는 건 아닐까요? 여러분들도 가위 눌린 경험이 몇 번씩은 다 있을 겁니다. 무서운 대상이 앞에 버티고 있는데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깨어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헛소리를 지르고, 식은땀을 흘립니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모두 가위 눌린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데 헛소리만 나올 뿐입니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더 어렵습니다. 이 상황을 누가 깨워줄 수 있을까요? 누가 일어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아프니까 청춘이다.’ 하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말씀이 어디 있을까요?


과부의 아들을 살린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는 오늘 제1독서인 왕상 17:8-24절에도 나옵니다.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한창 가뭄이 들었을 때 엘리야는 사르밧 마을에 사는 한 과부의 집에 가서 먹을 것을 얻습니다. 얼마 후에 그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아이가 살아났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비슷한 이야기가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에게도 있습니다. 왕하 4:17-37절에 나옵니다. 엘리사는 수넴에 사는 한 부부의 집에 가서 먹을 것을 얻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아이를 원한다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뒤에 죽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와 비슷한 방식으로 아이를 살립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나인 성의 과부 이야기를 하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독자들도 다 그렇게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보다 훨씬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를 바침으로써 죽은 아이의 생명을 불러왔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로 일어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권위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16절을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저는 앞에서 울지 말라,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했습니다. 그 말씀처럼 울지 않고 일어나고 싶지만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저건 비현실적이야, 하는 말이 튀어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위에서 인용한 16절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두려움, 영광, 선지자의 오심,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경험 말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 경험입니다. 우리는 늘 천편일률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삽니다. 거룩한 두려움과 영광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보다 좀더 나은 생활조건을 얻는 것에만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그걸 얻어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반복해서 경험하면서도 거기에 매달릴 뿐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수 믿고 그 사람 복 받았데, 하는 풍문에만 민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두려움과 영광을 경험한 사람만이 울지 말라.’일어나라.’는 그 말씀을 영혼의 깊이에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거꾸로 표현하면, 울지 말라와 일어나라는 말씀을 영혼의 공명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한 두려움과 영광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구샘터교회 설립 13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종교 친목 단체가 아니라 구원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듣고 있는지를, 그래서 그 말씀에서 궁극적인 위로를 얻고 있는지를, 가위 눌림과 비슷한 이 세상살이에서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지를, 그래서 매순간 생명을 풍요롭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실질적으로(리얼하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저는 대구샘터교우들이 오직 여기에만 매진했으면 합니다. 저도 담임 목사로서 오직 이 사실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반걸음만 더 나가서, 여러분 주변에 예수님의 이 두 마디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7:13,14절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읽을 테니, 여러분이 앞으로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 편안할 때나 불안할 때,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과 죽는 순간에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말라.’ 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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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June 07, 2016
*.220.31.66

목사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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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07, 2016
*.164.153.48

예, 상수리 님에게 제 설교가 도움이 된 것 같아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왕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으니

여기에 몰입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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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온마음

June 07, 2016
*.72.178.65

제가 지금 당장 ''울지 말고,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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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07, 2016
*.164.153.48

온마음 님만이 아니라

저에게도 저 말씀이 필요합니다.

참된 위로가 주님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좀더 실질적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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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07, 2016
*.97.90.75

목사님, 답해 주신 글 잘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을 설득하지 못하셨다는 말씀, 일리 있습니다. 서로가 틀렸다고 말하는 신학자들의 논쟁도 그렇고요.

 

목사님 말씀처럼,

1)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고,

2) 언어에 대한 이해도 다르며,

3) 이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 나름대로 진지하게 질문하고, 목사님은 목사님 나름대로 정성껏 답해주셨지만, 서로가 진리의 세계 그 어딘가에서 흐뭇하게 만나지는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사실언어와 종교언어라는 표현은 제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다른 의미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다른지요?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 목사님은 성서에는 당연히 사실도 있지만, 그것은 뉴스보도의 사실(fact)이 아니라 언어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사건(event)을 가리킨다고도 하셨습니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인지요? 하나님의 사건(event)은 사실(fact)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는 성서의 기록을 목사님은,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고 보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보아야 하는 건지요? 그렇게 보지 않고는 목사님이 제시하신 메시지(울지 말라, 일어나라)가 도무지 나올 수 없는 건가요?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려낸 사건도 사실은 죽지 않고 정신을 잃었을 뿐인데, 성경기자들이 고대인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죽었다고 오해했던 것인가요?

 

앞서 여쭈었던 질문을 다시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로 보시는지요? 아니면 부활도 사실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건가요? 만약 주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보신다면, 나인 성 과부의 아들도 완전히 죽었다가 완전히 살아난 것으로 볼 수는 없는지요? 굳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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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07, 2016
*.164.153.48

아름드리 님이 질문하신 내용들은

다비아에서 여러번 다룬 것들입니다.

아름드리 님에게는 처음인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비슷한 게 반복되는 거라

다시 처음부터 설명하기가 거시기 하네요. ㅎㅎ

부활은 일반적인 초자연적 기적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그것에 관해서 다비아 '신학마당'- '온라인강의실'로 들어가

카테고리 '조직신학'과 '사도신경해설'을 클릭해서

각각 '부활' 항목을 찾아서 읽어주세요.


죽은 자의 소생에 대해서만 한마디 하겠습니다.

종말이 이르기 전 중간 시간에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어긋하는 겁니다.

여기에도 물리학에서 말하는 불가역의 원리가 작동됩니다.

삶은 앞으로 갈 뿐이지 뒤로 돌아오지는 못하는 거지요.

같은 강물에 발을 두번 담그지 못하는 것처럼이요.

죽음은 다시 현재의 삶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걸 가리키고,

따라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사람들은

다시 다 죽었어요.

그건 종말에 일어날 부활과는 전혀 다른 사건인 거지요.

그런 코멘트 없이 설교해도 되지 않느냐, 했지요?

옳은 말입니다.

제가 다른 교회에서 설교했다면 그런 코멘트는 굳이 달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구샘터교회 신자들은 '소위' 은혜받는 설교보다는

성서텍스트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때

그 은혜를 더 절감하는 분들이라서,

저도 똑같은 입장인데,

그런 코멘트를 하는 거지요.

성서텍스트를 볼 때 공연한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핵심을 봐야 한다는 의미지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성서만이 아니라 다른 문헌에도 많아요.

고대사회에서는 약간 카리스마가 있는 위인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흔히 일어났습니다.

그런 걸로 예수를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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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부스러기 은혜

June 07, 2016
*.138.52.79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세상것들로부터의 자유
절대생명과의 조우
거룩한 두려움의 경험
그 분 한분만으로의 영혼의 만족,기쁨...

근자에 매주 올라오는 설교말씀을
꾸준히 묵상하는 다비안이라면
설교의 기저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인
구원의 징후들에 대해 단단히 주입이 되었겠죠?

그런데 그 거룩한 두려움으로의 경험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것인가요?
일평생의 구도자적 수행과정 속에서
그분을 그런 두려움으로 어느날 문득 조우할수도,
또 끝내 못하고 죽을수도 있겠죠?

그 비결을 혹시 영적 거인들의 조우과정을 통해서
힌트를 얻어볼 요량으로 추적해보았답니다


모세의 호렙산에서의 경험
베드로가 갈릴리 선상에서 처음 만난 예수 앞에서
터져 나온 고백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경험

그분을 거룩한 두려움으로 만난
그 날 그 시간까지
저들의 신앙여정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일천한 제 영적 통찰력으론
그 핵심을 도무지 추적해낼수 없어
도움 말씀을 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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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08, 2016
*.164.153.48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경험은 압축적으로 기술되어 있어서

거기까지 이르는 신앙여정을 본문에서 직접 읽어낼 수는 없고

그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공부가 여기서 필요합니다.

그 공부라는 게 정형화된 것이 아니라서

지금 제가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힘들고,

하나님 경험에 이르는 과정을, 또는 그 순간이나 현상을

아주 간략하게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비아의 글을 꾸준하게 읽은 것으로 보이는

부수러기 은혜 같은 분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요?)

다른 시인의 표현을 빌려오겠어요.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또는 '세상을 낯설게 경험하기'가 핵심입니다.

모세, 베드로, 바울, 어거스틴, 루터 등등이 다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낯선 것이(바르트 표현으로 절대타자) 눈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생각하고 경험하게 되는 거지요.

내 딸들은 원당에서 살고 있는데도

나무와 풀과 꽃, 새소리와 벌레, 별과 구름과 비를

실질적으로 경험하지 못해요.

그냥 지나가는 거지요.

기독교인들도 성서 이야기를 그냥 지나가는 식으로 읽기 때문에

거기서 하나님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별한 몇몇 사람들이 거기서 충격을 받는 거지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한 사람들의 신앙여정에서

첫출발은 '낯섦'에 대한 경험이 반복되고 축적되고 심화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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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08, 2016
*.97.90.75

목사님, 답해주신 글 잘 보았습니다.

다비아에선 여러 번 다루신 것을 제가 여쭈어서 번거로우셨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알려주신 대로 찾아가서, “조직신학: 5장 십자가와 부활을 읽어보았습니다.

제법 길었던 그 글 가운데, 목사님과 나누어야 할 대목은 여기인 듯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나사로 부활이나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의 부활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부활은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일반적인 육체가 아닌 신령한몸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다.”

 

그러니까 목사님은 주님의 부활은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보시는 거네요.

물론 저도 예수님의 부활이 나인 성 과부의 부활과는 성격이 다르다고는 생각합니다.

 

제 질문은,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이 창조원리에 어긋난다고 하신 목사님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불가역의 원리도 작동한다고 하셨네요.

 

어째서 목사님은,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말씀하시면서, ‘창조를 말하는 성경의 어떤 기록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 지으시나요? ‘창조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으신 건가요? 성경에 나오는 창조는 믿고 부활도 믿는데, 갈멜산 사건이나 나인 성에서 있었던 일은 그대로 못 받아들이신다는 거잖아요. 왜 어떤 것은 그대로 믿고, 어떤 것은 거르시나요일관적이지 않고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결국 제가 보기엔 이런 게 다 목사님이 판단하시는 어떤 기준(신학? 성서해석학?) 때문인 것 같은데, 그게 너무 목사님 중심적이지 않은가, 이게 저의 솔직한 생각입니다. 성경이 있고 나서, 신학이 있는 게 아닐는지요? 마치 중세에 교회의 권위가 성경보다 위에 있었던 것처럼, 목사님의 성서해석이 성경보다 위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또 번거롭게 해드린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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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08, 2016
*.164.153.48

ㅎㅎ 오해가 많습니다.

1) 나는 부활을 성서가 말한대로 믿지 않습니다.

    성서는 손가락이기에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믿습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게 뭔지, 묻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2) 창조에 대해서- 성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고대인의 신화를 통해서 말하기에

    나는 성서기자들이 말하는 창조는 믿지만 신화 자체는 믿지 않습니다.

    신화를 재해석해야겠지요.

3) 성서와 신학은 하나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서기자들이 신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4) 신학없이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바둑에서 정석 공부 없이 바둑을 두겠다는 거와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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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이상인

June 10, 2016
*.47.225.251

교회설립13주년 축하드립니다. 


신앙의 길을 안내하시는 선배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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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10, 2016
*.164.153.48

예, 이상인 님,

기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8]쌀알

June 13, 2016
*.30.166.90

어제 설교도 올라 오겠죠?

설교 들으러 왔다가 안올라와 있어서 당황했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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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맑은그늘

September 01, 2016
*.212.139.114

설교링크입니다.

https://youtu.be/oVtrDX1578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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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November 14, 2018
*.102.1.247

세상에 몰입할 때마다 피조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크나큰 공허감 불안함을 느꼈습니다. 희로애락의 크기가 클수록 더 크게 느꼈었고 이 공허감, 불안감을 잊으려고 노력해왔고 결국엔 그러한 것들을 무의식에 강제로 넣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밀려 들어간 많은 불안한 의식들은 무의식 속 어딘가에서 번지도 없고 모양도 달라진 에너지로 되돌아 올라오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전쟁을 일으켰고 온몸은 화기에 눌려 병까지 얻었었습니다. 결국, 치료는 몰랐던 거대한 짓눌림의 실체를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해체하거나 진정한 모습을 알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치료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한 반복에 반복이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없는 문제였고 세상에서 완치는 없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요. 울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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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November 14, 2018
*.182.156.135

주님이 '울지 말라'라 하셨으나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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