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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성령강림절 조회 수 4698 추천 수 0 2016.06.13 23:49:31
설교듣기 : https://youtu.be/EBOYq7eKnL4 
설교보기 : https://youtu.be/cHeJCqgvEWA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2:15-21 

율법과 십자가

2:15-21, 성령강림후 넷째 주일, 2016612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여러분은 오늘 설교 제목 율법과 십자가를 확인하고,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각자의 생각이 다르겠지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분이 있을 거고, 저런 정도는 다 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마음에 별 감동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요. 율법과 십자가의 관계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을 알면 기독교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오늘 얼마나 충실하게 전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긴 하지만, 설교자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차원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여러분을 율법과 십자가가 가리키는 신앙의 세계로 안내해볼까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 여정에서 오늘이 일종의 터닝 포인트로 기억되는 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독서인 갈라디아서 2:15-21절에서 바울은 율법 중심의 신앙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강한 어조로 분석하고 비판했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만 간추려서 읽어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세 번, 19절에 두 번, 21절에 한 번 나옵니다. 그게 다 율법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행해야 할 삶의 규범들을 가리킵니다. 그 내용은 구약성경 중에서 주로 모세오경에 나옵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압축입니다. 율법은 기본적으로 다 좋은 겁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율법 자체라기보다는 율법을 절대화하는 율법주의, 또는 율법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 신앙이 개인과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대해서 바울은 오늘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갈 2:11-14절에서 구체적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으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안디옥 교회에서 벌어진 겁니다. 안디옥 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섞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거기서 교회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게바, 즉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안디옥에 머무는 동안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아무런 문제없이 잘 어울려서 지냈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 교회(대표자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파송한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밥을 먹던 베드로가 자리를 피했습니다. 이유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이방인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서 그 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인 것입니다. 어느 장로가 술 담배를 하다가 목사가 들어오자 자리를 피한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이런 행동을 가식적인 것이라고 보고, 베드로를 따끔하게 충고했습니다. 일종의 해프닝이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을 언급한 뒤에 바울은 율법주의 신앙의 문제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자세하게 피력했습니다.

 

율법의 길

이런 논쟁적인 문서를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은 논쟁의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대상이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되 토라, 즉 율법도 지켰습니다. 더 나가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도 토라와 할례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무조건 잘못된 거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울타리 안에 자리하고 있어야 안전할 뿐만 아니라 율법 자체가 교회의 질서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신앙성장에 현실적인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십일조와 성수주일을 절대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거와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유대 기독교인들은 현실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너무 과격하게 전함으로써 유대교와 충돌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이들과 달리 바울은 과격한 쪽을 선택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복음의 본질에 천착한 겁니다. 16절이 중요합니다. 다시 읽을 테니 잘 들어 보십시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고 처음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서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사실 의롭게 되는 것은 모든 인생의 목표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옳다는 뜻인데, 실제로는 훨씬 포괄적인 뜻입니다. 자유, 행복, 성공, 기쁨, 구원 등등이 여기에 다 포함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성실하게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영웅들을 살펴보십시오. 아브라함, 요셉, 모세,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은 모두 율법을 성실하게 지킨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인 차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실제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 잘하고, 사회 규범을 잘 지키고, 모범생으로 사는 사람들은 누가 봐도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사회가 그런 사람들을 인정합니다. 그런 인정을 받으려고 사람들은 평생 율법의 행위에 매달립니다. 바울은 그걸 부정합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b).


근거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이룰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도 이미 이런 대답이 나옵니다. 143:2절은 이렇습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게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바울이 볼 때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죄에 빠지고,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죄에 빠집니다. 일상적인 것으로 바꿔 말하면, 법을 잘 아는 법조인들은 법과 함께 죄에 빠지고,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법 없이 죄에 빠진다는 겁니다.


둘째, 율법은 사람을 상대적인 우월감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경건생활을 더 많이 했다거나, 다른 사람보다 도덕으로 더 우월하다는 생각에 치우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이런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당연히 죄인으로 여겼고, 더 나가서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지 못하는 유대인들도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자신들만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도 이상한 사람으로 비쳤습니다. 예수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6:1-18절에는 유대인들의 세 가지 경건생활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이 나옵니다. 구제, 기도, 금식이 그것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이 세 가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표시가 나도록 열정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 표시 나지 말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 그들은 구제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도할 때도 거리서 서서 자랑하듯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표시 나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라면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 중의 어떤 분이 하신 말이 기억납니다. 그분은 평생 교사생활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자신이 기도생활에 대한 열등감이 많았다는 겁니다. 교사생활에 충실하니 교회의 기도 모임에 자주 참석하지 못했던 겁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바울의 주장은 옳습니다.

 

믿음의 길

바울은 의로움을 얻는 데에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실천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주장이 허황된 것으로 들릴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의롭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다고, 오히려 더 이기적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그런 비판을 들을만한 구석이 우리에게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도덕재무장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주장이 나쁜 건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런 운동을 펼친다고 해도 기독교인의 삶이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본질만 왜곡시킬 위험성이 큽니다.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는 신앙의 토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신앙의 토대로 돌아가는 게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분들 중에서도 바울의 이 말에 실감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더 나가서 뭔가 어색하게 느낄지도 모릅니다. 바울의 설명에 좀더 귀를 기울이십시오. 바울은 삶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모르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2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자기의 영적 실존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하나 되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처형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말고도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은 로마 시대에 많았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일반적인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이들은 율법을 절대화하는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법을 절대화하는 로마의 정치 권력자들입니다. 종교와 정치를 대표하는 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종교법과 정치법이 악이라는 증거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율법의 무효화 선언입니다. 즉 율법이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바울의 표현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로 더 이상 율법은 의로움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의 당연한 선택입니다. 아침에 태양이 뜨면 밤에만 필요했던 손전등을 손에서 내려놓는 거와 같습니다.

 

삶의 혁명전 전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이제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삶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혁명적으로 달라진 겁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는 말이 너무 관념적으로 들리지요? 시인이나 예술가는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시와 예술이 자기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겁니다. 바울은 이제 종교적인 업적을 쌓는 방식으로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을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목사인 저의 입장에 비추어서 바울의 주장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목회에 성공해야 한다거나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거나, 내 이름을 떨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여기서만 내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목사나 신학자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저와 똑같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이런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의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지 못한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설명이 실감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율법중심의 삶에 완전히 길들여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율법에 매몰되면 예수 사건, 즉 예수 세계에 들어올 수 없고, 예수 세계가 또렷하지 않으면 율법에 매몰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완전히 기울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둘 수 없습니다. 소유지향적인 사람은 존재지향적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이 대목에서 혹시 세상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오직 교회생활에만 전념하라는 말이냐, 하고 저의 설교를 오해할 분들은 없겠지요. 우리는 여전히 육체’(사르크스)로 살아야 하기에 세상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일상의 삶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 따르면 그 모든 것들은 믿음 안에서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된다는 말을 이해하기 좋게 해방이라는 말로 바꿔도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해방되었습니까? 그 해방을 향해서 가고 있는 중입니까? 아니면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율법의 강요에 여전히 머물러 있습니까? 말이 해방이지 실제로는 그와 반대되는 길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아주 거대하고 매력적인 힘으로 작용합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도 역시 많은 경우에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바울 혼자 이에 저항했습니다. 그 저항의 단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 율법주의자들과 치열하게 투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일종의 업적주의, 성공주의라 할 율법주의를 극복하고, 거기서 해방 받게 하는 힘입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믿으십니까? 믿기 어렵습니까? 아예 아무런 생각이 없으십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하고 있는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시기를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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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14, 2016
*.97.90.75

목사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이번 말씀도 잘 보았습니다.

율법과 믿음에 대한 목사님의 해설에 동의합니다.

 

지난 번, 목사님이 답하신 글에서 나는 부활을 성서가 말한 대로 믿지 않습니다.”고 하셨는데요

이번에는 어떠신가요

베드로가 밥 먹을 때 벌어진 일은 그대로 인정하시는 건지요? 여기에도 여러 쪼개진 전승들이 합쳐진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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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14, 2016
*.164.153.48

아름드리 님은 따지듯이,

또는 트집잡듯이 대글을 쓰시는군요.

부활 문제에 대한 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 베드로 이야기에 끌어들였네요.

아름드리 님과는 성서해석에 대한 대화를

정상적으로 나누기가 불가능합니다.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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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또다른세계

June 15, 2016
*.128.140.154

과거 청교도 신앙에 바탕을 둔 신앙 생활을 했던 제게

율법과 십자가는 언제나 커다란 모순이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면서도

교회는 끈임없이 행위를 강조했고, 자유와 기쁨이 아닌 좌절감과 죄책감의 나락으로 빠지곤 했거든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충고했던 것처럼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전형적인(?) 신앙생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울증을 겪는 환자처럼 한껏 교만했다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러기를 반복하고...


오늘 다시 읽게 된 바울의 고백,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씀은 그때와는 사뭇 다르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A4 용지 열장 분량으로 상세히 정리할 수는 없지만요 ^^

낮고 낮은 이곳에 살고 있지만, 높고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성취된 구원을 바라보는 것만큼 더 놀라운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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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15, 2016
*.164.153.48

ㅎㅎ 'A4 용지 열장 분량!'이라,

저 단어에 참 많은 의미가 들어있는데,

또다른 님을 통해서 다시 들으니

느낌이 새롭군요.

영적인 조울증이라,

또다른 님이 새롭게 사용한 저 단어에도

참 많은 사연과 사건과 아픔들이 들어 있지요.

그리스도를 통한 해방,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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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쌀알

June 15, 2016
*.30.166.90

금요일이 다가올때마다 예배 드릴 생각에 마음이 지치는데 목사님 설교가 있어서 그나마 영혼이 숨쉬며 사는거 같습니다.
십자가 설교를 들을 때면 항상 신비의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표현이 그렇게밖에 안되네요ㅎㅎ)
이성적으로 역사적 예수가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성령의 강력한 힘이 기독교 신앙을 이끌어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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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15, 2016
*.164.153.48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율법에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바울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리키는 해방의 세계를 경험하고

얼마나 놀라워하고 감격해하고 기뻐했을지

저도 나이가 드니 좀더 생생하게 느끼게 됩니다.

우리 모두 같은 길을 가는 도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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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주안

June 16, 2016
*.69.199.48

온통 율법으로 가득한 이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게됨을 감사합니다

더욱 배워감으로써 더 깊은 믿음의 자리에서 기쁨과 자유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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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16, 2016
*.164.153.48

예, 십자가의 복음이 어떤 능력인지를 아는 사람은

자기 삶을 전혀 새롭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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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온마음

June 16, 2016
*.72.178.65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단순한 사건이 아닌 혁명과 같은 사건입니다. 율법과 업적으로부터의 자유가 가능하게 된 사건이죠. 오히려 이 시대는 율법과 업적으로 퇴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 쇠사슬을 끊고 참된 자유를 통한 해방을 꼭 맛보고 말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악순환을 끊어야겠죠! 비상하고 싶습니다. 무언가에 도취되고 싶은데 그게 진리의 영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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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16, 2016
*.164.153.48

복음이 율법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마태의 표현으로는 완성하는 것이고,

헤겔의 표현으로는 지양하는 것이고,

바르트 표현으로는 품는 것이고,

루터 표현으로는 이원론적으로 보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루터의 생각이 좀 이상하지요?

이상한 거 없어요.

이게 율법주의는 결코 아니고,

세상의 작동원리를 인정하는 것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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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16, 2016
*.97.90.75

목사님, 위에 답해주신 글, 잘 보았습니다.

먼저 제가 드린 질문이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짧은 글로 생각을 적다보니, 마음이 불편하셨나 봅니다.

부디 마음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목사님, 저는 그저 질문을 한 것뿐입니다.

목사님이 쓰신 것처럼,

제가 부활 문제에 대한 목사님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면,

설명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너무 번거로운 일이라면, 그만두셔도 되고요.

 

성경을 어떤 때는 그대로 보고,

어떤 경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목사님 판단대로 자유롭게 상상해서 보고,

왜 그러시는지를 여쭈었을 뿐입니다.

 

목사님은, 저처럼 목사님과는 다른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사람과 정상적으로성서해석에 대한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곳 다비아는 목사님의 생각과 같은 생각만 이야기해야 하는 건가요?

그건 일종의 독단이 아니겠습니까?

성서해석에 관한 패권주의적 독단.

 

꽤 많은 분들이 목사님의 설교에 공감하며 고마워하고 있는 것, 잘 압니다.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사님의 모든 생각에 다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목사님과 다른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면서도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을 텐데,

그런 사람들은 아직 뭘 몰라서 그런 거다’,

성서해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라는 식으로 낮추어 보시는 건 아닌지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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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June 17, 2016
*.222.164.212

그저 질문한다고 

그저 답변해야하는 건 아니지요.


님의 첫번째 댓글보다, 

이 댓글이 제 개인적으로는 더 불편하네요.


목사님이 성경을 자유롭게 상상해서 본다거나,

독단이나 패권주의ㅋ적이라는 표현이 

어떤 표현인지 알고나 쓰시나요?


목사님의 설교나 신학은 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수십년의 신학공부와 신앙이 녹아있는 설교입니다.

본인이 이해 안된다고 목사님 마음대로 상상한게 아니고요 ...


저 평범?해보이는 설교 아래로는 수십, 수백권의 페이퍼가 

레퍼런스로 주렁주렁달려 있을겁니다 ... 


님이 질문한다고 그 레퍼런스의 내용들을 모두 말해줄 수가 없는 거잖아요 ...

본인이 공부해야 하고, 

그 공부가 목사님과 다비아가 말하는 핵심중 하나인 수행이고 구도의 길입니다.


저는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막 치부될 건 아니지요 ....


그리고, 이렇게 생각이 다른 저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만큼, 

제가 아는 가장 자유롭고 열려있는 기독교 공간입니다.

(살짝 old 한 느낌은 있 ..... 죄송 ..ㅠ )


그러니까, 이따위 댓글 쓴거에 대해서 사과하세요. 쿨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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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캔디

June 17, 2016
*.72.247.134

와!  역시나!

staytrue님의 댓글

죽^주네요. ㅋㅋㅋㅋ


제가 글재주가 있었다면

딱!  이렇게 쓰고 싶었던 거였어요.ㅋㅋ

딱! 한줄만 빼고....ㅋㅋㅋ

감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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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流水不爭先

June 16, 2016
*.173.40.137

아름드리님 안녕하세요

님의 궁금증을 십분이해합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의 정용섭목사님의 설교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갑자기 생겨난것은 아니구요

오늘이 있기까지 이곳 어딘가에 있는 수많은 글들이 빙산의 몸체와 같이 존재합니다

궁금하신것이 많으시지만서도

이곳 사이트에 있는 글들을 천천히 읽어 보세요

몇 년이 걸린다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날마다 좋은 날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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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물가의나무

June 17, 2016
*.173.189.227

며칠전 맨위의 댓글중 아름드리님의 질문에 정목사님께서 답글을 주신 것을 보고, 제가 용기를 내어 아름드리님께 조언을 한답시고 댓글 올려 놓고나서 보니 상처 받았을 신자에게 주제 넘은 짓한것 같아 제가 스스로 내렸는데요,

아름드리님의 또 다른 답글을 보니니 정목사님과 많은 다비안님들께 한 말씀 아니 드릴수가 없어 올립니다.

아름드리님의 지금과 이전 댓글들을 보면 다분히 트집과 시비조인 것이 어느정도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하여 정목사님, 그리 찬바람 쌩하게 하시면 일반 신자들은 정말 큰 상처가 되고 여러생각이 교차 합니다. 그것을 알아 주시옵고 조금만더 인내 해주실수는 없겠는지요?

용기를 내어 댓글을 써야할 대상은 아름드리님께가 아니라 지도자이신 정목사님께인것 같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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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온마음

June 17, 2016
*.72.178.65

저도 그 부분이 이해가 안갔습니다. 정목사 님께서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주시면 어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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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은목오크

June 17, 2016
*.104.250.13

저도 아름드리님과 정목사님 오고가는 글들을 지켜보며

그 분위기와 내용을 공감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중 이었습니다.

아는 내용이라도 그 대상에 따라 표현법이 달라지니까 깨닫는 농도도 달라지는데요....

제3자의 객관적 시각으로 한 말씀 드리자면,

정목사님은 겉으로 보여지는 성품은 따뜻한 부분은 조금 약하신 분이신 듯 하고요

(그러나 행간을 읽어보면 세미하고 다정한 분이시라는 걸 알수 있습니다.)


아름드리님은 뵌 적은 없으나

그 성품이 강가의 수양버들 보다는, 집 뒤의 대나무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런 글들이 오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까지 염려하며 글을 써야 하는 우린

정말 나약한 인간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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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온마음

June 17, 2016
*.72.180.253

음...저는 아름드리님의 심경이 이해가 갑니다. 사실 정목사님의 글에는 (정목사님 글 뿐만 아니라 모든 글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짧은 글에서 그것을 구차하게 다 해명하기도 힘들고 그것이 중심주제도 아니라서 한계가 있습니다. 빙산의 일각이라고 했듯이 정목사님의 여러 글을 천천히 읽어 보시면 또 다른 성품이 느껴지는 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모습이 보이지요. 누군가를 천천히 하나하나 알아가듯이 조급한 마음을 버리시고 구도정진 해보시길 바랍니다.  사실 초짜가 고수의 글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고도의 경지로 간 사람은 없듯이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씩 알아가 보셔요.

사실 일부 글만 보면 정목사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더라구요. 마음이 약한 사람이나 초짜는 여기 글을 읽기가 좀 힘들 수가 있는 것 같아요.  정목사 님께서 좀 더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시면 어떨지...그게 바람직한지는 모르겠지만.. 제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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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물가의나무

June 17, 2016
*.223.33.15

다비안 님들, 스테이님 캔디님 왜들 그러십니까? 질문 같지 않은? 질문 하고계시는 아름드리님에게만 왜들 이러시는지요. 아름드리님이 공부해야 하는것, 구도정진해야 하는것 분명 필요해 보이시는 신자분인것 같아 보이는 것은 제 부족한 눈에도 띕니다만
그렇다고하여 신자에게만 집중 포화를 가하는것은 분명 진리에서 멀어도 너무멀죠.

저는 정목사님을 잘 알진 못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목사보다 가장 존귀한 분으로 존경합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바램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 하자면, 신자는 목사로부터 핀잔을 들으면 매우 힘들어 집니다. 물론 모르지 않으시겠죠. 당연 아시겠으나 이미 쓰여진 글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공동체라면 나는 천사의 말을 안다해도 천사말 근처도 못가고 있는 지체에게 따뜻한 사람말 한마디가 필요한것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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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캔디

June 17, 2016
*.72.247.134

물가의 나무님!

위에서 제가 장난스레 댓글을 쓰기는 했지만...장난이 아닙니다.


요근래에 아름드림님이 목사님께 질문하고 답변한 글들을 빠뜨리지 않고 자세히 읽어 보셨나요?

님이 언급하신것처럼 " 신자는 목사로부터 핀잔을 들으면 매우 힘들어 집니다"   아름드리님이 정말 그럴까요?

반대로 아름드리님의 핀잔으로 목사님과 다비안? 들이 불쾌감으로 힘들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제 생각입니다만.

제 닉을 언급하셨길래 드리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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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June 17, 2016
*.222.164.212

나무님 ^^,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 인줄 안다.' 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저도 살면서 자주 그런 케이스를 겪다보니

이제는 친절하지 못한 사람이 되가는 것 같습니다.


전 이번 경우가 호의가 계속되었던 

그런경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면에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가 되기도 한다는 ... ;;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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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물가의나무

June 17, 2016
*.223.11.95

캔디님, 스테이님! 네. 잘알았습니다. 주님안에서 평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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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17, 2016
*.97.90.75

여러분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써주셨네요. 모두 고맙습니다.

우선 제 글 때문에 불편하다고 하신 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또 글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언짢으신 분들이 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쓴 글에 나오는 질문과 어떤 표현들이

정용섭 목사님이나 그분과 같은 생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분들에게는

따지거나 공격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솔직히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 자체를 마치 무시하듯이 답하지 않고

대화를 그만하겠다고 하신 정 목사님의 태도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정 목사님의 입장을 제가 아예 이해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닫고, 어떻게 답하나 보자, 하는 식으로 질문한 것은 아니거든요.

 

저는 이 대화가 불필요한 감정다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질문은 여전히 제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정 목사님과 같은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하며 기쁨을 누리고 있는 분들은

제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갖고 있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 목사님의 글과 강의를 들어라, 하는 식 말고,

그걸 많이 읽고 들으신 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가 정 목사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이런 말도 언짢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뜻에서 한 말은 아닙니다.

정 목사님의 설교와 글은 저도 종종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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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석진혁

June 17, 2016
*.44.87.173

안녕하세요 아름드리님^^  님께서 답답해 하시는 것은 정말 공감합니다. 저는 기독교 문자주의 보수 꼴통이었는데요

 다비아에 와서 많은 신학공부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많이 댓글도 달고 싸우기도 하고 완전 미친사람처럼 내가 생각한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질문하고 산고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구요

그래도 이해가 안되고 상충되는 점은 많습니다만 

지금은 정용섭 목사님이 쓰신글과 책을 보면서 이해 안되는 것은 놔두고 이해 되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를 하려고 노력합니다만 신학 내공이 딸려서 잘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웠던 문자적인 성경관은 틀렸다라는 것은 제가 압니다. 그것만은 큰 수확이고 만족입니다.


배덕만 교수님이 지은신 근본주의 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읽기가 힘드시면 유투브에서 베덕만 치면 강의하신 내용이 나올겁니다 

한번 한국개신교 역사가 어떻게 되고 어떻게 과정으로 한국에 개신교가  정착되었는지를 공부해서

아시면 여러가지 의문이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지금은 저는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공부하고 정용섭 목사님 글과 책을 보니 이해가 훨씬 빠르더군요

목사님께서 그러한 과정을 때로는 설명없이 글을 쓰시니까 샘터교우들 빼놓고는 저같은 경우는 조금 신학적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강조드리지만  저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잘못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구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부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있는 기적도 저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기적도 결국

2000년전의  고대인들의 삶과 환경에

의해서 그들이 체험한 것을 그들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기에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같은 사람을 양산해온 한국 개신교 목사님들과 신학교와

개교회 중심적인 마케팅적인 교회 부흥역사가

 결국 성경을 바른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수많은 잘못된 성경해석

정보가 성도들에게 전달되고 그러한 결과로 인해

미신적이고 이단적인 교회를 양산하고 기복적인 신앙인들을

양산해 내는 점에 대해서 저는  개탄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에서는 최소주의자 와 최대주의자가 있는데요  이곳의  성경관은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진보적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성서를  풀어가십니다. 설교말씀이 거의 그렇습니다. 그러한 점은 굉장히 보수적이십니다.

한국교회 유명 목사님들은 외국에서 공부할때 전부 성서 비평학을 공부하고 진보적인 성경관을 배우고 박사논문을 썼으면서 한국교회에 와서는 완전 성경해석을 달리하는 것을 볼때에 위선적이다 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아무튼 그런 것은 성도들의 책임도 정말 크다 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여기는(다비아)성서 해석을 굳이 말하자면 중간쯤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님께서 계속 신학공부를 해나가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샘터교인도 아니고요  거의 매일 들어와서 보는 사람이지만 아름드리님의 열정을 좋다고

생각합니다. 늘 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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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June 17, 2016
*.143.57.209

저 역시 제 댓글의 과격한 표현을 사과드립니다.


댓글을 읽어보니, 제가 오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듭니다.

답답한 마음이셨겠네요.


그리고, 제 댓글에는 오해의 여지가 없네요.

그냥 아름드리님의 댓글을 읽고 울컥해서 쏟아낸 댓글이니,

마음에 담지 말아주세요.


신앙에 대해서는

정목사님의 늘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도승처럼 신학공부의 길로 깊게 들어오라는 겁니다.

제 생각에 아름드리님이 조금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수도승처럼 다비아의 신학의 세계의 들어오시기를 추천합니다.

(저는 반만 동의해서 완전히 들어가지는 못하는 실정이고요.)


도덕경에 

발꿈치를 들고 서 있으면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은 오래 걷지 못한다

고 합니다.


진리의 길이 멀고 오래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법이 나를 지킨다고 하더군요, 

기독교에서는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한다고 합니다.


중요한건 진리지 

정용섭 목사님이나 여기에 댓글을 달고 있는 우리의 캐릭터가 아니니,

정용섭 목사님의 태도나 저와 혹은 다른분들의 태도에 

마음쓰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건승을 바라겠습니다.


화이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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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물가의나무

June 18, 2016
*.173.189.227

스테이님, 님의글들은 많이 보아서 어느정도 알고있습니다. 글도 잘쓰시고 아는것도 많아 보이시고, 하지만 너무 큰 모순들이 발견 됩니다.

자신이 쓴글(말)에서 사과할것이 발견되었다면 그저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하면 충분치 않겠습니까? 이미 개구리는 돌맞아 죽었는데 여전히 개구리를 가르치려 하시는것 같아 보입니다.

진리와 태도를 구분 짓고 계시네요. 태도가 좀 엉망이라도 진리가 참되니 참고 넘어가자구요?
천만에 제가 아는 진리는요 이 둘은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뗄래야 뗄수없는 상호유기적 관계로엮여있다고 봅니다.

법이 나를 지키고 진리가 나를 지킨다는 것의 제가아는 속뜻은, 진리를 네가 안다면 겸손하고 온유하라는 것일 것이고
그걸 풀어 보면, 아 나는 그게 결국 안되는 속물이구나 라는 것을 지금 알아 먹으라는 것이죠. 해서 안된다는 것을 알아 가는 불가(세상의 모든 종교)에서는 더욱 구도정진 하려하는 것이고, 우리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내게는 당신만이 필요합니다를 깨우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동의하신다면 진리가 참되니 태도쯤은~~하는 위험 천만의 자세는 이제라도 고려해보심이 어떠실지요.
개구리 죽어나갑니다. 걍 죄송합니다 한마디면 충분 할 듯 합니다.

제가 이런 댓글을 계속 쓰는 것은 대표이신 정목사님을 향해 있습니다. 워낙 드나드는 이들이 많다보니 별별 사람들이 다있을 것입니다. 해서 좀 골치아프게 하는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 회피 하고 싶으시겠죠. 또 그래야 할 것 입니다만, 아름드리님은 그단계가 아직은 아닐듯 싶다는거죠. 제 판단에.
아름드리님의 글들을 왜 아니 보았겠습니까. 그런 소견 저도 느낍니다. 그렇다고 쌩하시면 결국 우리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입니다.

결국 정목사님의 그런 결정(회피의 방식)들을 규정 짓게한 어떤 원인(진리)들이, 알게 모르게 함께 공유하고 배워가는 이곳 공동체의 지체들 속(글들)에서고스란히 드러나는듯 하기에, 그리고 그런 색깔을 증명이라도 하듯, 스테이님 캔디님 등등 오직 정목사님만을 싸고돌며, 그리고 질문자는 결국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라는 댓글들로만 채워지는 것 처럼 보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아직 잘 모르셔서 그런것 같으니 천천히 쫓아와 보세요. 한마디면 충분하지 않겠냐구요. 여기 어느 누구가 자기가 공부 잘해서 이 진리에 들어왔노라는 망발 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은총 아닙니까? 나를 은총으로 이끄셨다면 좀 모자라 보이는 이 지체도 주의 성령께서 이끄실것 아니겠는지요. 그럼 우린그때까지 기다려 주면 될터인데 그걸 못 기다리네요. 아쉽게도~~~ 무엇이 그리 바쁜 걸까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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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June 18, 2016
*.143.57.209

네. 고맙습니다.

잘 말씀해주셨네요. 

제가 아직 멀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다시 깨닫습니다.


간단히 변을 하자면,

이번 제 댓글은 나무님의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좋은 의도였고,

도움이 되고자 했는데 소경이 길을 가르치는 꼴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론이 2가지 정도 있습니다.


태도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인간인 이상 태도가 어떻게 완벽할 수 있습니까?

태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나무님의 태도는 흠없이 완벽하신가요?


혹시 완벽하시길 바라나요? 그러시다면, 제가 아는 신앙에서 님은

분명한 율법주의자입니다. 인간은 그럴수가 없습니다.


로마서의 말처럼 우리중의 의인은 하나도 없고,

남을 판단하는 자는 판단하는 그일을 자기도 행하므로 

스스로 정죄하는 꼴이 된다고

바울이 말하지 않던가요?


결국,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손가락이 아닌 가리키는 곳을 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런 가운데 우리의 태도가 

조선시대 선비님처럼 고상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해지고 어린아이처럼 깨끗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웃고, 어린아이처럼 싸우고, 울고 하는 거 말이죠...


님이 말씀하신 태도와 진리의 일치에 대한 생각은 이렇게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둘째로, 정목사님의 회피술에 대해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위 댓글과 같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가 된다'고요.


이미 님의 댓글에는


정목사님의 그런 의무이행을 강요하는 듯한 말투가 있던데 아닌가요?


왜 그런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까?

정목사님도 한명의 인간이고 개체에 불과합니다.

100년후에는 이땅에서 사라져버릴 모두 허망한 존재자들이라고요.


무엇이 그리 바쁜걸까요 우리는? 이라고 끝내셨습니다.


느릿하게 갈 수 있지만 흠결많은 인간이기 때문에 마음에 싫고 좋은 것들이 각기 있는 겁니다.


정목사님도 그런 인간이고요.


뭐 이상으로,

오랫만에 다비아에 와서

좋은 댓글 못남겨서 그냥 안타깝네요.


아무튼 좋은 주말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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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물가의나무

June 18, 2016
*.246.69.79

어찌 저의 짧은 글조차 이렇게 둔갑이되나 그저 허탈합니다.

1.완벽을 요청 하거나 강요 했나요? 만일 그렇다면 말씀 하신대로 저는 율법주의자 입니다.

2. 정목사님을 향해 의무이행을 강요 합니까? 제글이 그렇게 보여지시나요? 그렇다면 다시 한번 강조 할께요. 정목사님이 진리를 가르치고 계시다면 그 진리란 것은 어떤 모습을 동반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가르치시는 진리(이곳 다비아)에 순응 하지 못하는 지체나 나아가 거스르는 지체가 있다면 물론 회피의 어떤 방식을 사용 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좀 더 부드러우면 좋지 않겠느냐 하는 직언이고 요청입니다.

3. '호의가 권리' 라고 하는 그런 말씀은 주님을 좇는 기독인 이시라면 정말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끝까지 호의를 베푸십시오.

4. 고맙습니다. 말씀 잘해주셨습니다. 라는 절차적 말씀은 차라리 하지 않으셨으면 더 좋았을것 입니다.
저의 말에 하나도 동의하는게 없으신데 무어 아직 먼것이 있고, 무엇이 고맙고 무엇을 깨달으셨다는 것인지~~

이렇기에 대화가 필요한가 봅니다. 글로 쓰려니 도대체~~ 그저 얼굴 맞대고 피튀는 시간이 있어야 서로의 오해도 풀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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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캔디

June 18, 2016
*.72.247.134

이제 그만들 하십시다.

이정도 했으면 충분합니다.

내일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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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June 19, 2016
*.143.57.209

ㅎㅎㅎ 정말 그만해야되는데 ... ㅎㅎㅎ

일단, 제가 부족하다는 말은 

형식적으로 한 이야기 아니에요 ㅠ


그리고, 반론은 그냥 반론으로 제기해본 것 뿐임돠 ㅠ


그리고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직접 얼굴보고 하는 대화가 중요하다는데에 동감합니다.


역시, 글은 .... 양날의 검인가 봅니다.

저도 앞으로 이 검을 더욱 조심해서 사용하겠습니다.


훈훈하게 마무리짓고 싶은데, 무슨 글을 써야 할지

글쓰기가 더 조심스러워 지네요.


그럼 좋은 주일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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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June 17, 2016
*.119.67.189

다비아가 제 일상의 삶과 특히나 신앙생활에서의 유일한 환풍구가 되기 전에,

저도 정목사님의 강의나 책을 보면서 어느 부분에서는 조금 갸우뚱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기적과 서술이 신화적인 방식이라거나 

저자에 따라 편집되고 윤색됐다고 말씀하실 때 등등에서요.

그래서 어설픈 질문도 해보고 혼자서 '좀 이상한데?' 라고 고민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총이었는지 다비아를 계속 드나들게 되었고

다비아에 올라와 있는 많은 강의들과 성경 공부들, 그리고

목사님께서 종종 추천해주시는 책들을 읽고 생각하면서

적어도 기독교 신앙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대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야기하다보니 위에 말이 제가 다비아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인 것 같네요.)

물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저의 생각을 a4 10장 분량으로 써내려 갈 수도 없고

여전히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처음 부분에 언급한 대로 다비아는 저의 환풍구이자 생수가 흐르는 샘터와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아름드리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조심스럽지만

인내를 갖고 꾸준하게 다비아에 있는 글과 강의들을 보시는 거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거 말고라고 하셨는데 송구하네요.)

'그저 나는 순수한 궁금증이다.'라고 말씀하셔도 옆에서 보기엔 

정목사님께 무례 아닌 무례가 되는 것 같아서 한 말씀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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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June 17, 2016
*.105.196.251

"율법과 십자가" 는 제목부터 기대가 되는.. 정말 듣고 싶은 설교 내용이었습니다.

과연 정목사님은 어떻게 설명하실까? 하구요.

항상 들어도 잘모르겠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제목들이거든요. '율법' '십자가'는..

이 귀한 말씀앞에서.. 이 굉장히 깊은 샘물같은 말씀앞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십자가사랑 앞에서.. 좀 너무한 댓글들이다.. 싶습니다.


질문과 답은 각자의 마음대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름드리님처럼 저도 생각했었습니다.

목사님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목사님의 답변을 주욱 따라가면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사님 설교나 강의는 그 내용의 단면만 볼게 아니라..

단지 손가락일뿐임을 항상 염두해두고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 무엇인지?를 잘 따라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아름드리님은 왜 손가락이 기냐? 짧냐?

왜 손톱은 그 모양이냐?

손가락이 너무 가늘은거 아니냐? 하는 집중하지 않아야 할것에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는거 같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이 귀한 설교내용의 깊이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딴다리 긁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한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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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온마음

June 17, 2016
*.72.178.65

너무 아름드리 님을 비난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드리 님께서 이해가 안가는 부분에 대해서 오해를 풀고자 질문하시는 거 같은데 어떤 부분에서 입장 차이가 있는지 혹은 없는지 정도만 설명해주면 안되는  건가요? 아름드리 님의 글을 너무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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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물가의나무

June 18, 2016
*.173.189.227

그 설명이라는 것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종이 열장 분량 정도가 아니라 평생 걸립니다. 아니될 수도 있습니다. 해서 안다는 자들은 최선을 다해주고 기다려줘야 합니다. 헌데 이과정이 머리 지진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피의 방식도 필요 합니다만, 다만 그 방식이 이곳 다비아 공동체는 쌩하는걸 느낄뿐입니다. 해서 저도 이곳에 늘들락 거리지만 과연 나도 과연 다비안인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다비안일 필요성은 없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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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맑은그늘

September 01, 2016
*.212.139.114

설교링크입니다.

https://youtu.be/cHeJCqgvE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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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November 16, 2018
*.102.1.251

갈라디아서 2:20-21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입니다.

하지만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율법에 함몰된 자들에게 그만큼 율법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였건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는커녕 예수 님을 율법 중독자들이 십자가에 처형시켰다. 율법 지상주의가 구원을 가리는 장막이 된 것이다. 그 장막을 치는 자들, 누구인가? 구원보다는 형식과 파벌을 공고히 쌓아가는 마귀의 자식들이다. 그들이 행하는 결과는 마귀가 하는 짓과 같다.

 

그 자식들은 율법으로 분칠한 권력으로 생명을 경시하는 자신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심판을 속으로 두려워하며 그 마음을 깊은 세계로 덜어내느라 고생들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자식들의 무의식에 알게 모르게 콤플렉스가 집단으로 쌓이고 있다. 그 부끄럽고 예민한 집단콤플렉스를 누구든지 건드린다면, 자신들만의 율법을 내세우며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결국, 집단콤플렉스가 율법 맹신주의자들을 움직이고 있다. 더 많은 신자, 더 많은 헌금, 더 많은 집회, 더 많은 파송, 더 큰 건물과 대지에 집착하게 하고 목회자들을 경영자로 내몰고 있다. 매주 건축계획과 파송 계획을 발표한다. 신앙의 깊은 성찰과 공부는 뒷전이다.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영수증.

진정으로 심판의 십자가에 못 박힐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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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November 16, 2018
*.182.156.135

교회 생활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한국교회에는 꽤나 많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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