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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이야기 (눅 8:26-39)

성령강림절 조회 수 6528 추천 수 0 2016.06.19 21:56:37
설교듣기 : https://youtu.be/5sYhp3kXxro 
설교보기 : https://youtu.be/IYhHv7CXjTs 
성경본문 : 누가복음 8:26-39 

귀신 이야기

8:26-39, 성령강림후 다섯째 주일, 2016619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자그마치 2천 년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면 삼국시대(BC1-AD7세기) 초기가 그 시기에 해당됩니다. 그 시기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와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차이로 인해서 예수님 이야기를 읽을 때 한편으로는 오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3 독서로 읽은 눅 8:26-39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갈릴리 호수 서쪽에서 배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 지역은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서 유대인인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기에는 꺼림칙한 곳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 중에서 이런 일은 예외적입니다. 마가복음(5:1-20)과 마태복음(8:28-34)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초기 기독교에 잘 알려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 땅에 들어가서 처음 만난 사람은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귀신 들린 자라고 말합니다. 그 장면을 누가복음 기자가 어떻게 묘사하는지 보십시오. 27절입니다.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여기에 등장하는 귀신들린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완전히 벌거벗었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정상적인 옷차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 살지 않고 공동묘지에서 지냈습니다. 이 사람의 운명에 많은 사연이 들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이런 사람이 동네마다 한 사람씩은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불쌍하게 생각해서 헌옷을 입혀주기도 하고, 먹을거리를 주기도 했습니다. 미친 사람이 동네에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이 놀리곤 했습니다.

거라사의 광인은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면서 엎드려서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의 고함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이 문장만 보면 이 광인이 예수의 정체성을 이미 알아봤다는 말이 됩니다. 거라사까지 퍼진 예수에 대한 소문을 이 광인도 들었겠지요. 어쩌면 내심 예수를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광인의 이 외침은 미친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귀신의 소리입니다. ‘당신 때문에 귀신 노릇 해먹기 힘들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가 이렇게 외친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더러운 귀신에게 명령을 내려서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고대인들은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거나 나올 수 있는 인격체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심리와 정신현상을 의학적으로 해명하기 어려웠던 고대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와 미친 사람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예수가 그에게 네 이름이 뭐냐?” 하고 묻자 광인은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군대는 헬라어 로기온의 번역입니다. 로기온은 로마 군직제로 볼 때 군사 6천명 크기의 부대를 가리킵니다. 광인은 예수에게 악한 영이 모이는 곳인 무저갱으로 들어가게 하지 말라 사정했습니다. 이어서 만화 같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마침 그곳에 돼지 떼가 방목되고 있었습니다. 광인은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예수가 허락하자 귀신들이 광인에게서 나와서 돼지에게 들어갔으며, 곧 돼지 떼는 귀신과 함께 갈릴리 호수에 빠져들어 몰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귀신을 마음대로 호령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엑소시스트><곡성>이라는 영화를 본 것처럼 뭔가 찜찜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도대체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이제 이야기는 다른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놀라서 도망칩니다. 마을로 들어가서 자기들이 본 것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확인하려고 사건 현장으로 갑니다. 그들은 거기서 더 놀라운 장면을 목도합니다. 미친 사람이 옷을 입고 단정한 자세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본 겁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광인은 원래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무덤 사이에서 고함이나 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정신 말짱한 사람처럼 앉아 있는 겁니다. 이미 눈빛도 달라졌겠지요. 그들은 광인이었던 이에게 검사가 피의자를 심문하듯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었습니다. 광인은 전후 사정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이 소문이 인근 지역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 지역에서 떠나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는 그곳을 떠나려고 배를 탔습니다. 미쳤다가 제 정신을 회복한 이 사람은 예수를 따라가고 싶어 했습니다. 보통 때 제자들을 향해서 나를 따르라.’ 하셨던 예수가 이번에는 오히려 그를 돌려보내면서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그 말씀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에 강한 울림으로 남습니까? 우선 이 전체 이야기에서 서로 대비되는 두 인물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미쳤다가 예수를 통해서 정신을 차리게 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삶을 자기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은 5:1절 이하에서 이 사람의 형편을 좀더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미친 사람이 광기를 부릴 때 위험하니까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로 묶었지만 그것도 별로 소용이 없었습니다. 광인은 쇠사슬을 툭툭 끊어내곤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 사람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했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아낙네가 혼자서 마당에 빨래를 널고 있는데 이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가족들이 저녁밥을 먹고 있는데 머리가 산발된 모습의 이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서 배고프다고 죽는 소리를 내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민폐가 막심한 사람입니다. 5:5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거라사 지역에는 로마군 14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광인은 어린 시절 로마 군대의 만행을 경험하고 정신이 이상 된 거로 보입니다.

오늘 현대인의 모습도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거라사 광인과 비슷한 게 많습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공격적입니까? 얼마나 자학적입니까?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해서 공동묘지를 배회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며칠 전 유럽연합 탈퇴 건(브랙시트)으로 국회의원을 살해한 영국이나 툭하면 일반 대중들을 향한 묻지 마총질이 벌어지는 미국에서 보듯이 소위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 우리에게는 그런 현상이 일상적으로 나타난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몸을 건강하게 하는 데는 민감하지만 정신 건강에는 소홀합니다. 거라사 광인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끔찍한 사건을 요즘은 청소년들은, 특히 남자 청소년들은 인터넷 게임으로 간접 경험하고 있습니다. 게임은 대개 전쟁 이야기입니다. 전쟁은 적을 죽이지 않으며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논리로 작동되기 때문에 이런 게임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그게 머리에 각인이 되어 세상을 그런 방식으로 살게 됩니다.

병적으로 나타나는 사회현상만을 귀신 들림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 안정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도 공격적이거나 자학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교회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지난 설교 율법과 십자가를 듣고 어떤 분이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이런 대글을 달았습니다. ‘과거 청교도 신앙에 바탕을 둔 신앙생활을 했던 제게 율법과 십자가는 언제나 커다란 모순이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면서도 교회는 끊임없이 행위를 강조했고, 자유와 기쁨이 아닌 좌절감과 죄책감의 나락으로 빠지곤 했거든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충고했던 것처럼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신앙생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울증을 겪는 환자처럼 한껏 교만했다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를 반복했습니다.’ 프로이트나 니이체 등이 이미 진단한 것처럼 교회가 집단 히스테리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스스럼없이 행합니다.

 

다른 한 인물은 거라사 마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으로 광인에 대처하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광인을 쇠사슬로 묶거나 마을 밖으로 축출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미친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좋은 훈계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공부 안 하고, 말 잘 안 들으면 너도 저렇게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들을 보고 자기 딸에게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요즘도 많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에게 광인은 한편으로 불편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익한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의 우월감을 보상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마을이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숨 막히는 평화이긴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광인이 제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까요? 잔치를 베풀고 광인을 고친 예수를 큰 스승으로 대접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요청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들이 오랫동안 구축해놓은 마을 질서가 흔들릴 것을 걱정한 것일까요? 거라사 사람들 가운데에 우리도 이미 섞여 있을지 모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광인이 귀신 들린 사람입니까? 아니면 광인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마을 밖으로 쫓아낸, 급기야 광인을 고친 예수마저 쫓아낸 마을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입니까?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광인의 소리를 이렇게 전합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죽였다.’ 맨부커 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에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채식을 고집하던 여자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 과연 정신병에 걸린 것일까요? 제가 설교 시간에 사회 문제를 자꾸 거론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는 거니까 이해해주십시오. 해외 원정 도박 건을 변호하는 일로 50억 원을 받은 변호사가 있습니다. 전관예우에 의해서 한 해에 백억 이상의 수임료를 올린 변호사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나 모르게 일어나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귀신 들린 게 아닐는지요. 그래서 곳곳에서 곡성(哭聲)이 터지는 게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제 정신을 잃고 무엇인가에 귀신 들린 채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저는 여기서 모두가 한꺼번에 치유될 수 있는 만병통치 비법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나온 이 광인이 어떻게 치유되었는지를 보충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광인은 우연하게 예수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우연하게 예수를 만난 거와 같습니다. 모태신앙이라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다 우연하게 예수를 만난 겁니다. 만났다고 해서 모두가 이런 광기를 치료받을 수 있는 건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하거나 피상적으로만 대합니다. 구경꾼으로만 남는 경우도 많습니다. 본문의 광인은 예수를 가장 깊이 있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 받았습니다. 본문은 그런 것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지만 저는 광인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그 문제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광인도 광인 나름입니다. 모든 순간에 정신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지만 이따금 제 정신을 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치매에 걸린 분들이 모든 정신 활동을 못하는 게 아닌 거와 같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광인도 정신이 날 때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인간으로 대해주는 사람을 주변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증상이 더 심해졌습니다. 학교에서 문제아를 모두 문제아 취급하면 증세가 더 심해지는 거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처음으로 자기를 생명의 심층에서 대해주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변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만행에 의한 트라우마에 더 이상 묶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옷을 바르게 차려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제 정신을 차린 겁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삶의 방향이 또렷해진 겁니다.

지금 우리는 제 정신으로 사는 시간이 얼마나 되고, 제 정신을 놓치고 사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계산해보셨나요? 거라사 사람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위험스러워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예수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마을에서 떠나주기를 요구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자신들이 이루어놓은 것을 잃을까 하는 염려가 반복되면서 숙명적으로 거기에 묶이는 삶의 태도를 귀신 들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우리 인생에 너무 많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이방인들의 염려가 우리의 삶을 다 지배해버렸습니다. 그런 것으로 인생을 다 소비합니다. 신앙의 차원은 제쳐두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인생의 남은 시간을 계산해보십시오. 20, 30년이 남았나요?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0년은 넘지 않습니다. 중간 나이인 40대 신자라고 한다면 넉넉잡아 50년쯤 남았습니다. 이 시간이 긴가요? 늙고 병든 시간을 빼면 얼마나 될지 모릅니다. 그 시간을 어떤 일에 쓰는 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돈 버는 데 씁니다. 죽을 때까지 거기에 모든 걸 쏟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사람들이라면 어쩔 수 없긴 합니다만 현대인들은 생존과 상관없이 모든 시간을 돈벌이에 쏟습니다. 사회 시스템이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개인이 벗어나기도 힘듭니다. 우리 모두 돈이라는 귀신에 들린 겁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와의 만남에 남은 인생을 쓰는 게 최선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서만 우리는 제 정신을 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공지능이 현실로 다가왔다고 떠벌리는 21세기에 오히려 귀신 출몰과 비슷한 현상이 많아집니다. 누가 귀신 들린 사람이고, 누가 제 정신을 차린 사람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삶의 중심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의 힘이 귀신처럼 현대인들의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서로 소외시키거나 소외당하고, 서로 공격하거나 자기를 파괴합니다. ‘나는 아니다.’라고 확신하십니까? 죄와 죽음이라는 귀신을 향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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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온마음

June 20, 2016
*.36.146.23

사실 아담 이후로 제정신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모두 편집증,강박증, 우울증, 불안증을 부분적으로 겪으며 살겁니다. 이게 지나쳐서 삶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질병으로 명명하죠. 사실 이런 구분도 애매합니다.

잘먹고 잘사는 문제보다 영혼의 참된 만족이 무엇인지 구도정진하고 이 시대의 귀신을 분별할 수 있는 영성가가 되는데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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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20, 2016
*.164.153.48

온마음 님이 짚은 것처럼

모두가 정도의 차이만 있지 정신 질병을 앓고 있어요.

겉으로 보는 건 대충 포장된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도 그중에서 진리를 찾아 구도정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리도 그런 무리의 한 사람으로 살아야겠지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온마음 님이 이미 몽땅 다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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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June 21, 2016
*.220.31.66

제가 너무 감상적으로 말씀을 들었나요? 어찌 그리도 제 마음이 울리는지 눈물이 납니다.

서로를 환대하지 못하고 소수자들을 갈라 격리시키고 - 목사님 말씀데로 예전에는 동네에서 미친 한두사람은 같이 어울려 살았는데 언제부턴지 그 사람들은 어딘가로 배제해야 할 대상이 된 것 같습니다. 돈에 안 보이게 하고 없는 것처럼 - 그러면서 자신들은 자괴감에 빠지고, 무엇이 도대체 이런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이러한 사실에 목사님께서 깊이 공감하시는 말씀에 매번 감사드립니다. 귀신 들린자가 누구인지 그 근원의 깊이를 보도록 요청하는 방식. 그 방식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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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22, 2016
*.164.153.48

상수리 님의 눈문은 감상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과 같이

여러가지 방식으로 삶에서 도태당하고 있는 이들을 향한

따뜻한 연민입니다.

동물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인간만의 특성이지요.

침팬치 등에게서도 그런 특성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어서

질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게 좋습니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그 인간의 본성, 특질이

점점 더 심각하게 실종되고 있어요.

미안한 말이지만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가장 부족한 게 그것처럼 보이네요.

세월호 참사 앞에서 미봉책으로 넘어가고

유가족들이 귀신 들린 것처럼 무덤 사이를 떠돌어다니는 오늘날,

누가 과연 귀신 들린 이들인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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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June 22, 2016
*.220.31.66

미안한 말이 아니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연민이라고 하셔서 생각이 납니다.

 예전에 목사님께서 천정근 목사님이 쓰신 '연민이 없다는 것' 책 추천해 주셔서 너무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천목사님 페이스북 팔로우 하고 있고 간혹 쓰시는 컬럼도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천목사님이 저와 같은 연배시던군요 -

여하간 혹시 목사님께서는 따로 소통하시는 SNS가 있으신지...있다면 주소 부탁드립니다.

- 제 생각에 그런 방식을 별로 선호하지 않으실 거란 생각은 듭니다 - 오해는 마십시요. 목사님께서 소통을 안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홈페이지의 매일 묵상을 통해서도 간간히 말씀해 주시지만, 지금 이 사회의 부조리 또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정황에 대해 목사님의 생각(어떤 사유하는 방식?) 을 좀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너무 말이 길었습니다. 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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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22, 2016
*.164.153.48

천 목사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으면

저의 안부를 전해주세요.

상수리 님의 예상대로 저는 SNS를 하지 않습니다.

원래 인터넷 자체를 잘 하지 않았고,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피도 만들지 않다가

어떤 분이 강권해서 시작하게 되었지요.

이제는 다비아 홈피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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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22, 2016
*.97.90.75

목사님, 위의 설교 잘 보았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지난번에 나누었던 대화에 이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좀 불편하시더라도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번 설교에도 목사님은, ‘만화 같은 이야기’,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같은 표현으로 본문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귀신이 돼지 떼로 들어가 돼지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부분을 그렇게 보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 느낌인지는 몰라도, 이전 설교에서 표현하신 것에 비해 조금은 강도를 낮추어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1. 목사님께 여쭙습니다.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보고 동의할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 몇 번 질문을 올렸는데, 목사님은 몇 번 대답을 하시다가 일방적으로 그만두셨습니다. 저로서는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러실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도 또 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겠지요.

 

다만 목사님과 저와의 대화를 보고 이런저런 의견을 쓴 다른 분들이 적지 않은데, 그런 분들의 글에도 목사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으시네요. 이건 좀 이상한 일 아닌가요? 목사님의 설교에 공감하는 분들의 글에만 댓글을 달고, 목사님과 생각이나 입장이 다른 사람에겐 별 대답이 없다면, 이상하지 않나요? 이곳은 목사님이 난 다시는 너와 말을 섞지 않겠다고 하시면, 조용히 알아서 물러나야 하는 곳인가요?

 

목사님은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비평하셨지요. 저도 그 글들을 보았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고, 좋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자신이 하신 설교에 대해 다른 말을 하는 저 같은 사람의 의견에는 별 반응이 없으시네요. 물론 목사님이 하셨던 비평과는 수준이나 내용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대화마저도 아예 주고받지도 않겠다는 목사님의 태도는 타인의 설교를 비평하신 분답지 않아 보입니다.

 

2.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다른 분들께 여쭙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의견!

저에게 이곳에 있는 글들을 읽어보라고 하신 분들이 있으시지요. 고맙게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또 앞으로도 그러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런 식의 대답 말고, 여러분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궁금하게 여겼던 부분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게 알고 싶어요. 정용섭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생각하신다... 같은 대답 말고 여러분의 생각, 말입니다.

 

이를테면,

-정용섭 목사님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는데, 목사님께 많은 것을 배우고 계신 분들은 목사님의 이런 생각을 어떻게 보시는지,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은 사실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라는 목사님의 생각은 어떤지,

-구약성서에 나온 엘리야, 엘리사가 살린 아이들도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고 보는지,

-성경을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서, 어떤 부분은 그대로 보고 또 어떤 부분은 다르게 받아들이는 근거는 무엇인지...

 

저는 지금 시비를 걸거나 따지듯이 이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정용섭 목사님의 해석이 여러분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가 정말 궁금합니다.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기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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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22, 2016
*.164.153.48

아름드리 님,

저에게 주신 질문의 요지가 무엇인가요?

대화하다가 중단하는 이유가 뭔가, 인가요?

이런 건 아예 질문 거리가 되지 않는 겁니다.

상대가 말하기 싫어하는구나, 하고 느끼면 안 하면 되는 거지

왜 안 하냐, 하고 물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도 마지못해 답변을 드린다면

아름드리 님과의 대화가 의미 없는 거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판단에 무슨 근거가 있냐, 하고 또 물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세상과 성서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다르다는 게 근거입니다.

천동설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사람과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 사이의 대화가 무의미한 거와 같습니다.

그래도 진리를 위해서 대화와 논쟁을 계속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가능하나

거기에 제가 시간을 쏟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군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대화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요?

아름드리 님이 바리새인이고 내가 예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이 틀리면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랍니다.

예수님도 많은 경우에 옆에서 물어도 침묵하셨습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하시고

'나와 생각이 틀리구나.' 하고 지나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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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June 23, 2016
*.220.31.66

반갑습니다.

목사님 의견이 아닌 각자의 의견을 물으셔서, 간단한 의견 드립니다.

'있을 수 없는 일', '완전히 죽은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연구가 필요하다면 또 다른 학문분야에서 실증을 통해 연구되면 되겠지요.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은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예를 들면, 죽음에 관해 만약 진짜 누군가 죽었다 살아난 이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겠지요 - 성경이 말하니 그것으로 믿으면 된다는 식은 그것이 말하는 참을 놓치기 싶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다만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좀 더 집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이 세계에 벌어지는 일들도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삶의 토대에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름드리님의 진리를 찾아가는 방식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고, - 문득 '여시아문' 이라는 불교용어가 생각나는군요 -  조금씩 가다보면 결국에 그 분이 우리를 이끌었음을 고백할 수 있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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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햇빛처럼

June 23, 2016
*.156.90.197

 

 

삭제하면 정목사님의 글도 같이 날아갈까봐 수정을 눌러 내용삭제했습니다.

삭제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있었지만,  다시 읽으면 제 얼굴 뜨뜻해지는 게 싫어서...

미안합니다.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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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23, 2016
*.164.153.48

햇빛처럼 님, 누구세요?

내가 닉네임과 실제 사람을 헷갈렸던 거 같습니다.

저를 직접 본 적이 있어요?

궁금해서 쓰신 글과 대글을 찾아보았더니

내가 착각한 게 맞네요.

신학공부를 하신 분이네요.

장신인가요? ㅎㅎ

시간 날 때 답변을 주라고 하셨는데,

시간이야 고무줄과 같아서 낼려면 얼마든지 내고

안 낼려면 얼마든지 안 낼 수 있으니,

아름드리 님의 질문 주제와 직접 상관없이

햇살처럼 님의 글을 읽고 마음이 동한 김에

간단하게나마 보충 발언을 하겠습니다.


설명하신 칼빈의 성서해석 원리에 나는 동의합니다.

판넨베르크도 당연히 동의할 거에요.

더 올라가서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어거스친, 터툴리안 등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기독교 역사의 영웅들의 성서해석에도

대부분은 다 동의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거룩한 영에 감동받아 기록된 것' 말입니다.

이걸 부정할 사람은 기독교인 중에 하나도 없어요.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거룩한 영', 그리고 '감동받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에 대한 생각에

차이가 있을 뿐이에요.

햇살처럼 님의 설명에 '이성'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칼빈은 이성에 근거한 비평방법을 쓰지 않았다고 했는데,

넓은 의미에서 그의 모든 신학잡업은 이성적인 거지요.

논리적으로 생각할 줄 알았다는 겁니다.  

칸트가 이성을 순수이성, 실천 이성 등등으로 세분화한 거 같은데,

성서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이성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위대한 신학자와 영성가와 선교사들은 다 이성적인 사람이었어요.

롬 12:1에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문장이 나와요.

'로기콘 라트레이안'을 개역개정은 영적 예배라고 번역했고,

루터는 '이성적 예배'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진정한 예배'라고 번역했어요.

헬라어 로기코스에는 두 가지 뜻이 있어요.

 rational, spiritual이라는 뜻인데,

우리는 이걸 반대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지만

성서기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거지요.  

영적이라는 말과 합리적, 또는 이성적이라는 말은 차원이 같은 겁니다.

영적으로 투명한 사람은 이성적으로도 투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성을 진리의 절대 규범으로 볼 수는 없겠지요.

인간이 이성적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살고, 열정으로도 살고,

또는 단순히 느낌만으로도 사는 거니까요.

말이 옆으로 나가는군요.

칼빈도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서 성서를 해석했다는 뜻입니다.

루터도 마찬가지고요.

그가 볼 때 야고보서는 지푸라기와 같은 거지요.

지푸라기도 필요할 때가 있긴 합니다.


'... 전통의 밧줄에 단단히 몸을 묶고...'를

판넨베르크 신학을 추종하는 정 목사는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예단하셨는데, ㅎㅎ

그렇지 않다는 걸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씀드려야겠네요.

판넨베르크는 전통주의자들 중에서 솝꼽히는 전통주의자입니다.

교부신학에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판넨베르크만큼 예수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주장하는 신학자가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별로 없을 걸요?

문제는, ㅎㅎ (늘 이렇게 단서가 붙지요?)

무엇을 전통으로 보느냐에 있는 겁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머리를 천으로 가려야 한다는 바울의 권고를

전통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런 권고들은 다 시대적 산물이잖아요.

동성애에 관한 바울의 충고를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성경 해석에서 중요한 건

시대적 산물은 그것대로 풀어내고,

성서의 중심, 즉 하나님 경험을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해내는 작업입니다.


점심 시간이 되었군요.

맛있게 드세요.

위 대글은 삭제하지 마세요.

저도 거기서 배운 게 많기도 하고,

그걸 삭제하면 내 답글도 어디론가 날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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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June 23, 2016
*.87.80.105

와 ~ 햇빛처럼님, 처음뵙는데 이런 말씀 죄송스럽지만,

대박 짱짱맨이십니다.

정목사님의 자리를 넘보시는 거 아니시죠? 

잘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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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물가의나무

June 23, 2016
*.70.14.13

아름드리님.

1번질문은 정묵사님의 답변이 적절해보입니다. 질문 요지가 좀 분명하질 못 해보이구요 또 적절치 못한 느낌이 듭니다.
2번질문 또한 답을 얻기가 매우 소원 해보이는 질문 입니다. 밑에 은나라님의 댓글 처럼 많은 공부 또한필요한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저의 결론은 그냥 살살 들락날락 해보세요. 이전부터 지금까지 질문 식으로 하시면 님이 얻는것은 아마 아픔뿐일수 있을것입니다. 멘토를 만나셔서 오프라인에서 많은 대화를 권장합니다.

그리고 은나라님 평소 느낌으로보아 조금 실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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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June 22, 2016
*.105.196.251

아름드리님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 궁금한것은 자유지만, 왜 그런것이 궁금한지? 그게 더 궁금하네요..

무엇이 알고 싶은가요? 예수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가 누구신지?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지?

그게 궁금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제가 보기에 아름드리님은 정목사님을 비롯하여 여기 다비아님들 모두를 우롱하고 또한 그것을 즐기시는거 같아 보입니다. 시간이 많이 남아 도십니까?

그럼 책을 읽으세요. 성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기독교가 어떻게 생겨난건지? 먼저 책을 읽어보세요.

지금 그런 상태로는 정목사님 글모두를 읽더라도 그 궁금증은 사그라지지 않을 겁니다.

시험에 안들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입만 벌리고 있으려고 하십니까?

정목사님이 알고 싶고, 정목사님께 배운 우리들의 생각이 알고 싶으시면..

책을 어느정도 읽으시고, 기독교의 많은 갈래들도 알아보시고, 왜 그들은 그렇게 다르게 생각하고 갈라졌는지?

연구도 좀 하시고, 그리고 나서 생각들을 나누면 서로의 글을 이해하기도 쉬울듯 합니다.

지금 아름드리님은 예전의 저와 같아요..

전혀 정목사님의 글을 한개도 이해를 못하고 있어요.

이글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을 공부하세요..

이것보다 더 빠른길은 없습니다. 공부하다보면..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를 만났던 생수를 맛보게 될거예요.ㅎ

아름드리님께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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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석진혁

June 23, 2016
*.7.15.67

은나라님의 글도 굉장히 선동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아름드리님의 의문은 충분히 공감이됩니딘 정목사님은 여러사람들에게 선의적으로 글을 썼다가 본의아닌 어려움도 많이 당하셨기에 상대에 따라서 위의 댓글처럼 반응  하실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은나라님이쓰신글은 상대를 무시하는태도입니다 . 신학을공부하면 항상 생수를맛봅니까?

글쓰시는태도가 영! 거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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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웃음

June 23, 2016
*.195.198.250

설교 댓글 댓글에 대한 답글들이 너무 너무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모두 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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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June 23, 2016
*.87.80.105

아름드리님,

이번에는 절박함이 느껴지는 듯해서 

도움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간략히 댓글남겨봅니다.


우선, 햇빛처럼님이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댓글을 적어주셨는데, 

아마 낯설게 느껴지실겁니다.

제가 아는게 없고, 글재주가 없어서 저런 댓글을 못달지만,

보는 눈은 있어 정말 좋은 댓글인 것은 확실합니다.


햇빛처럼님의 댓글은 나중에라도 다시한번 읽어보세요.


일단, 제가 보기에 혼란의 원인은 성서에 대한 접근방식이 완전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거칠게 말씀드리면,

다비아의 접근방식은 과학적이고, 

아름드리님의 방식은 종교적, 믿음적?이라고 크게 보시면 

우선 어떤 느낌인지가 와닿을겁니다.


그럼, 과학적이라는 말을 해명하면, 

실제로 과학자처럼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고 이런식의 접근이 아니라,

성경을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귀신이 돼지에 들어가거나, 오병이어나, 홍해가 갈라진다거나 하는 등등의

이야기가 이해되지는 않잖아요.

님도 이런게 이해가 안되니 다비아에 와서 글을 읽는 것일테고요.


그런데, 확실히 처음에는 목사님의 설교나 글들이 혼란스럽습니다.

왜냐면 기존에 너무나 명료한 신앙과 성경해석이

갑자기 모호해지면서 헉 이거뭐지, 그럼 내가 그동안 믿어왔던건 뭐지라는 절망도 좀 느낄거에요.

아마 모든 다비안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일거에요.


그런데, 너무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보았을 때 다비안이나 정목사님의 신앙이 

아름드리님의 신앙과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니까요.

그 뿌리는 같다고 감히 말씀드려봅니다.

이건 아름드리님이 말씀하신대로 글을 읽고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차츰 확인이 될겁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인 생각은,

정목사님 생각의 반만 동의합니다.


일단, 기존의 '닥치고 믿어라' 식의 신앙관이나 성서해석방법을 버렸으면,

새로운 성서해석방법, 즉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편 타당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이건 공부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다비아는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를 알려면 배워야죠. 안배우고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 사실 저는 이부분을 좀 엘리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비아의 이런저런 글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러 신학자와 그 신학자와 연관된 별별 철학자와 여러 문학, 과학, 예술 기타 등등의

많은 이야기가 오고갑니다.


사실 이건 소위 좀 배운분들, 가방끈 길고 먹물좀 한사발씩 들이키신 분들의 이야기가 맞습니다.


물론, 신학이 학문의 왕?이라고 하나요? 아무튼, 모든 학문의 꼭대기에 있는 것이니,

엘리트 중에서도 초엘리트들의 학문인것은 맞습니다만,

진리문제는 길가에 초라한 거지에게도, 사창가의 창녀에게도, 대학교수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고 쉽게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저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다비아나 정목사님의 접근 방식이 틀린건 아니죠.

신학 공부라는 수행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하는 건 분명하다고 봅니다.

다만, 다른길을 저도 알지 못하고, 다비아도 알지 못할 뿐이죠.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엘리트적인 부분에 대한 반대로,

불교나 현대철학을 간간히 탐독하고 수행하고 있습니다.


뭐 그것도 공부아니냐라고 할 수 있지만,

이건 개념이라는 탑들을 쌓아올리는 공부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올린 개념들을 해체하는 공부라서 나름 재미가 솔솔 하더군요.


이상으로 제 생각까지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정목사님 책도 몇권 읽어보았습니다.

정목사님 책도 사서 보시면 도움이 많이 되실겁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처음에는 좀 어려움이 느껴지실거에요.

중간중간에 어려운 용어들이 나오거든요.


저는 그에 앞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이라는 책을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철학, 문학, 과학, 신학을 가로지르면서 기독교의 기초적인 문제제기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거의 완벽하고 쉽게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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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물가의나무

June 23, 2016
*.253.92.111

이 댓글을 읽다 문득 누구지? 했는데요 불교...하실때 아!~~~했네요.
참 좋은글을 보았네요. 전혀스테이님 답지 않은(?)^^
공감 백프로 입니다.

그리고 아름드리님,
스테이님께서 "종교적, 믿음적" 이라고 하신 부분은요, 현재 우리나라 대한민국만이 취하고 있는(교단구분 없이)보편적 신학과 신앙 사상 이라고 보시면 이해가 더 빠를듯 합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하면서도 지독하리 많치 독보적인 이기적 기독교를 만들었고 만들어 가는중입니다.

님이 지금까지 그런류의 신앙을 교육 받으시고 알게모르게 그렇게 젖어 오셨다는 반증이 지금과 같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고, 이곳 다비아에서 이방인과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습니다. 천천히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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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red

June 23, 2016
*.135.198.155

"형제여 침묵하시오."

언젠가 들었던 문구입니다.

때론 침묵과 묵상이 나을 때도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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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23, 2016
*.97.90.75

여러분들이 답글을 올려주셨네요. 고맙습니다.

 

1. 정용섭 목사님께

목사님께 드린 질문의 요지는, 왜 대화를 중단하시느냐? 가 아닙니다.

목사님이 타인을 비판하신 만큼 저 같은 사람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태도입니다.

 

2. 상수리 님에게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다만 성경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가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겠지요.

저는, 정용섭 목사님이 그런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것이 이상합니다. 이를테면, “갈멜 산 사건에는 누구나거부감을 느껴야 합리적이라는 말씀 같은 겁니다. 정 목사님 개인이 거부감을 느끼신다면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떻게 누구나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하시나요? 또 정 목사님은, “이 이야기는 각각의 다른 경우가 오랜 전승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묶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해가 갑니다.”라고 하셨는데, “그래야만 이해가 간다.”는 식의 말씀은 지나친 게 아닐까요? 저는 목사님처럼 보지 않고도 이해가 가거든요!

상수리 님이 열린 마음으로 답해 주셔서 참 고마웠습니다.

 

3. 햇빛처럼 님에게

반갑습니다! 그리고 정말 놀랍습니다. 이렇게 길고도 자세한 답을 해주시다니! 특히 그동안 본인의 신학여정을 솔직히 알려주셔서 금세 가깝게 친해진 기분이 확 들었습니다. 만나고 싶은 생각도 들던데요?

정 목사님이 목회적 마인드로 댓글을 달아주신 게 목사님으로선 최선이라는 문장을 읽고 한동안 웃음 지었습니다. 또 정 목사님의 답변을 유도해내서 서로 이익 좀 보자는 말씀도 재미있었어요. 배우려는 마음이 있다면, 정중하게 질문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접하더라도 절제하며 기다리는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씀, 고맙게 받아들입니다.

저는 햇빛처럼 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성경에 대해 보수적이진 않습니다. 성경엔 오류나 모순이 있을 수 있다고 봐요. 히브리어나 아람어 그리고 헬라어 성경 아래의 본문비평에 나오는 수많은 사본들이 단적인 증거가 될 수 있겠지요. 글에 언급하신, 칼빈의 역사문법적 주석이나 김지철, 성종현 교수님들의 견해에도 대체로 동의합니다. 멋진 표현을 쓰셨는데요, “새로운 사조에 헤엄쳐 들어가되, 전통의 밧줄에 단단히 몸을 묶고 헤엄치는 자세가 요구된다.” 직접 쓰신 문장인가요? 다만 저는, 새로운 사조에 마음껏 들어가고 싶긴 하지만, 그 어떤 전통이나 권위에도 매이고 싶진 않습니다.

정 목사님의 신학적 입장이나 성서관에 대해 언급하셨네요. 저는 정 목사님의 성서관에 대해 시비를 걸고 싶진 않습니다. 그분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든, 그건 그분의 자유겠지요. 제가 문제 삼는 것은, 그분의 표현방식이 단정적이며 배타적이라는 점입니다. 자신과 다른 입장의 성서관이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서, 수준이 낮은 것처럼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걸립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자면, 정 목사님께 배우시되, 그분의 생각에 햇빛처럼 님의 사고가 멈추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정용섭 목사님을 믿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댓글은 삭제하지 마셔요. 많은 분들에게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4. 물가의나무 님에게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1번 질문에 대해서는 위에 정 목사님께 직접 드렸습니다.

2번 질문에 대한 답이 아쉽네요. 저도 그동안 정 목사님의 글과 설교를 꽤 보았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정 목사님의 메시지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제가 문제 삼는 것은 그 과정이지요. 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아니라고 하고서, ‘메시지를 이끌어내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목사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다 쳐도, 설교라면 적어도 설교자는 본문 아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는 목사님이 본문을 내려다보고그 위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더러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다가 여기서 상처를 받을까봐 염려해 주셨네요. 고맙습니다. 그 점은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5. 은나라 님에게

제가 이곳에 드나드는 분들을 우롱하고 또 그걸 즐기는 것처럼 보셨네요. 그렇진 않습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미안합니다.

다만 어떤 표현들은 좀 지나치시네요. 시간이 남아도느냐,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입만 벌리고 있느냐, 하나님을 공부하시라... 그리고 결국 제 질문에 대해 은나라 님 자신의 대답은 없네요. 저는 그걸 물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제게 주님의 평화를 빌어주신 점은 고맙게 생각합니다!

 

6. 석진혁 님에게

저와 비슷한 질문을 갖고 있나 봅니다. 전에도 제게 좋은 글 주셨지요? 고맙습니다.

은나라 님의 글이 저도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본인이 믿고 따르는 정 목사님을 제가 언짢게 했다는 것의 표현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7. staytrue 님에게

다시 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위에서도 썼지만, 저는 정 목사님의 신학적 입장이나 설교가 혼란스럽지는 않습니다. 물론 분명히 저와는 다른 점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혼란스럽지도 않고, 당황스럽지도 않습니다. 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분의 태도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저마다의 입장이나 생각이 있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님은 자신과 다른 입장에 대해서는, 이런 건 의미가 없는 대화다, 그건 질문도 안 된다, 이런 일에 시간을 보내는 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는 식으로 대응하십니다. 진리와 생명의 깊은 차원을 아시는 분의 태도로 보기엔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귀신이 돼지에 들어가거나, 오병이어, 홍해가 갈라진 사건들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지요. 하지만 저는, 그걸 굳이 받아들이지 말고 시작하자는 것이 이상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을 굳이 있을 수 없는 일로 규정하며, 대립할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물론 그런 초자연적 기적이 몹시 걸려서 성경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에겐 정 목사님 같은 분의 생각이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목사님은 꼭 그렇게 봐야 한다는 식이거든요.

진리문제는 길가에 초라한 거지에게도, 사창가의 창녀에게도, 대학교수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고 쉽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신학이라는 학문이 배운 사람들의 어려운 소리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쉬운 소리가 되려는 겸손한 노력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겠지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 귀한 책을 소개해 주셨네요. 기억하고 있다가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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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물가의나무

June 23, 2016
*.173.189.227

ㅎㅎ제가 아름드리님을 착각하고 있었네요. 저의 염려가 기우였음을 깨닫습니다. 발뻗고 잘수있겠네요.
저 보다 더 많은걸 아시는 분이었네요. 더 깊은 성장이 있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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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June 24, 2016
*.36.156.4

한국교회의 문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초자연적 기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하기때문에
기성 한국 기독교와 대립각을 세우는 겁니다.

노회찬님이 한국정치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삼겹살 굽는 불판을 바꿔야 한다고 ...
그러려면 당연히 기존에 불판과는 각을
세울 수 밖에 없는 없는것이고,
그 불판은 가장근본적인 성경접근 방식이 되는 거겠죠.

새술은 새부대가 적당하니까요 ...

목사님의 태도는 ... ㅎㅎ
목사님 단 한번도 진리를 아신다고 한적 없습니다.
제 댓글에 자신도 길 위에 있는 것 뿐이라고 말씀하셨던게 생각나네요.

이전 댓글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모두 인간입니다.
저는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는 점을 받아들일때,
서로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진리는 배우고 알아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많은데 아버지는 없다라는 성경구절이였나요?

바울의 가르침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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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햇빛처럼

June 24, 2016
*.156.90.197

저의 주제 넘게 여겨질 수 있는 말을 좋게 받아주시니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쓴 글에서 밑줄 쫙 그은 문장은 장신대 신학노선에 대한 개념을  '중심에 서는 신학'이라고 정의한 고 김이태 장신대교수님이 역설하신 겁니다.

정목사님의 신학사상에 갇히지 말라고 조언해 주신 말씀을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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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24, 2016
*.164.153.48

햇빛 님,

아름드리 님이 실제로 신학대학 교수님이라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정식으로 이 주제로 논쟁, 또는 대화할 수 있고,

제가 바라던 바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글을 단 후에, 

모든 진정성 있는 질문에 정 목사가 친절하게 대답해주기를 바란다는

온마음 님의 대글에 답을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 글이 없어져서,

(아마 본인이 내렸던지, 아니면 다시 정리해서 올릴 건지 모르겠으나,

지금 제 눈에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내 생각을 보충하니 그렇게 이해해주세요.

아름드리 님의 질문에 대해서 제가 여러번에 걸쳐서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게 남아 있을 테니 찾아서 확인할 수 있어요.

내가 수없이 말했던 내용으로 대답을 한 겁니다.

그게 저에게는 좀 지루한 작업이에요.

저만이 아니라 다비아를 꾸준히 드나드는 다른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대답을 했는데,

진도가 더 나가게 되니 제가 그만 해야겠다고 한 거고,

당신이 대답할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밀고 들어오시니

제가 두손을 든 겁니다.

그건 그렇고

온마음 님이 이 와중에 상처를 받지 말아야 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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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부스러기 은혜

June 23, 2016
*.138.52.79

국내 신앙의 재야강호들이 다비아에 다 모여있었구나.. 절감케하는 댓글들을 구경하면서, 저같은 초짜에게 도전이 많이 되는 댓글들이었습니다.

우물안 개구리가 바깥 세상을 살짝 경험하고 와
그 감동과 경이의 여운에 흥분이 가시지 않는 심정이라고 할까요
저는 언제나 이런 논박의 장에 명함을 내밀어볼까...
부럽기만 하였지요
새삼 많이 배웠습니다

행간에 녹아나는 내공이 여간 아닌듯 보이는 고수들이 주고받는 논박은, 흡사 무림영화 와호장룡의 클라이맥스를 떠올리게 할만큼 스릴이 넘치었지요

목회자의 권위가 우리나라 교단만큼 하늘을 찌르는 곳이 어디 있을까요?
흡사 '짐이 곧 국가다..'를 떠올리게하듯
'내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인비져블 파워 앞에서
아멘으로 화답하지 않으면 정 맞는 돌이 되기
십상인 분위기속에서, 감히 설교에 대한 반박은
돌 맞을 각오를 않는한 언감생심이겠지요

다비아가 유료회원에게만
제 콘텐츠들이 오픈 되는것도 아니기에
정목사님은 설교 원고를 게재할 의무도,
댓글을 허락하고, 또 거기에 답변을 달 의무도 없는 분이겠지요.

국내 어느 교회 목회자가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한 이런 공간속에서
본인이 가진 신학적 식견의 낱낱을 발가벗김 당하는,
밑천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그 과정에서 때론 수치스런 명예손상까지 감수하는 용기와 실력과 자신감과 넉넉함을 가진 목회자가 있을까요?

본인의 신학적 통찰이 못따라가서
아니면 혹여라도 정목사님의 성경해석에 어떤 오류가 있어서, 아니면 우리 모두 장님 코끼리 만지고 있는 격이니 내가 승복못하는 의문점이야 얼마든지 가질수 있겠죠?

전 댓글 올린 여러 고수들의 신학적 식견에
그저 왕눈이가 되어 부러움속에 수차례 댓글을 열독하는 정도의 초짜이기에, 신학의 입문수준에서조차논할 식견이 없습니다

단지 지난 설교 댓글부터 지켜본
아름드리님이 올린 댓글 행간에서
청자가 듣기 불편한 뉘앙스의 표현들이
눈에 띄었지요
이는 님의 의도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본인이 가진 한글 표현력의 한계때문이 아닌가 싶었답니다

우리의 어쩔수 없는 한계와
매일 반복되는 실패와 실수조차도
디딤돌이 되게 하실 그 분의 선하신 손길이
다비아 가족 모두에게 드려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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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June 24, 2016
*.36.156.4

저는 사실 다비아에서 좀 눈쌀을 찌푸려지는게
정목사님 찬양하는 글들이 좀 그랬습니다.

저도 한때 그랬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러지 않았는데 ,
이유는 정목사님도 인간인데,
그렇게까지 치켜 세워야 하는가라는
생각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찬양했던 정목사님이
인간적인 태도를 취하니까
확 실망하는 거죠 ㅋㅋ

그런데 위에서 말씀하신 이렇게
자신을 완전히 까발려 놓고
이런 이야기의 장을 만들어놓으신거는 ...

대한민국의 어느 신학자와 목사가 이런 사이트를 만들었나요?

신학자로써의 대단한 자신감이고,.
복음 전파에 대한 대단한 사명감입니다.

이건 정말 기립박수를 1시간동언 쳐도 부족한 거 아닌가라는 ... ㅎㅎ

아무튼 이런 귀한 곳에서
저포함 쉬어가는 가객들은
존중하며 대화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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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캔디

June 24, 2016
*.72.247.134

staytrue님

위에

이게 뭡니까?

"저는 사실 다비아에서 좀 눈쌀을 찌푸려지는게
정목사님 찬양하는 글들이 좀 그랬습니다."


그렇다라면 다비안들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김일성찬양.

김정일찬양.

김정은찬양.

이렇게 쓰여져야 하는것 아닙니까?


터진 공간이라고 그러시는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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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June 24, 2016
*.143.57.209

ㅎㅎㅎ 터진입을 터진공간이라고 돌려 말한거 맞죠? ㅋㅋㅋ


그런데, 이정도 표현도 허락안되고,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시는거 보니  '찬양' 이 확실한 거 같군요.


모든 다비안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그런 글들을 보았다는걸 이야기 한건데

캔디님이 다비안을 대표하신다면 다비안 모두가 

찬양하는게 맞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봐요.


그리고, 제 댓글에 방점은 인간입니다.

정목사님도 인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하나의 개체고 밥먹고 똥싸고 애도낳고 개인의 

호불호가 있고 뭐 그런걸 말한거죠.


그리고 예수도 우리처럼 먹고 싸고 

막달라 마리아랑 밤에 붕가붕가도 좀 하고

삐지고, 싸우고 헤어져도 보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물론, 애도 낳고 흙수저로 애키우는게 얼마나 힘든지 

체험도 좀 해봤으면 좋았을텐데 

워낙 인간으로써 극한의 체험을 하셔서

모든 인간이 겪는 걸 안다고 하시니 그정도까지는 안겪으셨나 봅니다.

아니면 어디 사생아가 몇명 있었을지도 ...


이건 뭐 그냥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니, 

당연히 인간이 겪는 것들을 대부분 겪어봐야 한다는게 제 생각이라서 댓글 남겨보는 거고요 ...


사실, 다비아와 정목사님의 긍정적인 점은 제가 댓글에서도 말했고,

워낙 다비안들 스스로 입에 침이 닳도록 칭찬하니 접어두고,

다비아의 단점을 보자면,

상아탑속에서 탁상공론하는 면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뜬구름 잡는 면이 있다는 거죠.

사실 말이됩니까? 

주중에 계속되는 야근과 주말 특근에 투잡 쓰리잡을 해내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온갖 신학자들과 인문학자들 기타등등을 공부해야 한다는게 ... 

그게 수행의 길이라는게 현실적인가요?


그래놓고, 이게 진리로 가는길입니다. 

후회하지 않을겁니다 라는게 맞는 말인가요? ㅋㅋ 

그래도 인정합니다. 

저도 쪼~끔 공부해보니 이길이 틀린길은 아닌거 같더군요.

다만 현실적이지 않고, 현질적이지 않은 길이 정말 진리의 길일까라는 마음한켠의 의문이 남아있긴 하죠 ...


아무튼, 제가 요며칠새

간단한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관계로 

시간적여유가 좀 되서 대화에 많이 참여했는데

앞으로는 참여 못할거 같군요.


ps) 개인적으로 캔디님에게 어떤 나쁜 감정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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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5]캔디

June 25, 2016
*.72.247.134

아닌데요.

"열린 공간"을 저의  감정을 좀  실어서 터진 공간이라 한겁니다.

터진 입이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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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ne 25, 2016
*.164.153.48

두 분 대화에 제가 끼어들어 미안하기는 하지만

다비아에 대한 오해가 있는 거 같아서 한 마디 드립니다.

스테이 님이 볼 때 다비아가 다(?) 좋으나,

평소 좀 못마땅하게 느껴지던 것을 차제에 그걸 짚은 거지요?

두 가지 점이에요.


1) 다비아에서 정 목사 찬양이 너무 심하다.

어느 집단이나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는 때가 오면

소위 말하는 '빠'가 생길 수도 있고,

정말 깨닫게 되는 점이 많아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거니

그냥 애교로 봐주면 안 될까요?

그런 표현을 하는 분들은 정 목사가 비주류이니

(스테이 님의 표현으로 하면 저는 신학적으로 흙수저거든요.)

옆에서 용기를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저만이 아니라 다비안들은 대다수가

영적인 노숙자들입니다.

정통 교회에서 떠돌이처럼 지내다가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비아에서 확인하니까 기쁜 거고,

그걸 신학적으로 정리해준 정 목사가 고마운 거지요.

그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도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다 외로운 사람들이니 서로 위로의 말을 해줘도 좋습니다.

다비안이라면 그런 위로와 덕담으로

주제파악 못할 사람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아요.


2) 다비아 정체성이 탁상공론, 뜬구름, 비현실적이다.

예, 그렇습니다.

그게 다비아이니 어쩌겠어요.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는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겁니다.

다비아 소개 http://dabia.net/xe/info를 참조해주세요.

출발부터(벌써 16년째군요.) 인문학적 성서읽기를 표방했답니다.

당장 입에 풀칠 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이게 무슨 수행의 길이냐, 하는 질문이 생긴다고 말씀하셨군요.

그런 분들에게는 어떤 길이 제시되어야 할까요?

순복음교회 조 아무개 목사의 가르침은 아니겠지요?

공부 말고 현실적인 대안이 있으면 약간만이라도 설명해보세요.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스테이 님의 마음을 이해는 합니다만

그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서 해결해야지

인문학 성서읽기를 표방하는 다비아에서

그걸 요구하는 건 다비아에 대한 기대가 지나친 겁니다. 

예수의 인간 삶에 대한 경험 부분에서,

왕자로 태어난 석가모니보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가 훨씬 깊이 이해하지 않았을까요?


교통사고를 당하셨군요.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하니 다행입니다.

속히 쾌차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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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June 25, 2016
*.175.118.96

목사님 글이나 설교를 통해 

기독교 신앙이든 인문학적 시각이든 조금이라도 배우는 게 있다거나,

성경의 해석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듯한 경험 내지는 공명이 되어 울림이되는 느낌이 있었다면

당연히 다비아에 점점 애착이 갈 거고 

목사님께 감사 인사 드리고 싶을 거고

때로는 추켜세우는 듯한(?) 표현도 할 수 있는게 인지상정 아닐까요?

어느 분은 욱한다고까지 표현하시던데

다비안으로서 그걸 왜 그렇게 고깝게 보이시는지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정목사님도 인간이다."

여기 이거 모르는 사람 있나요?ㅎㅎ

"찬양"이라는 표현이 좀 자극적으로 느껴져서 댓글을 달았네요.


교통사고로 많이 편찮으실 텐데 공연한 댓글 죄송하고

쾌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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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June 24, 2016
*.105.196.251

석진혁님, 물가의 나무님, 아름드리님, 제글이 좀 거시기한거 맞은거 같아요.

다시 아름드리님의 글을 읽어보니, 제가 오해한 부분이 있는듯 합니다.

그러나 거시기한 댓글은 제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어요.

제가 전에 공부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서 질문만 해대고 있었거든요.

답들이 오면 그것을 분석해서 왜 이렇게 말하느냐? 고 따지기도 하고 그랬더랬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날뛴거죠.. 그리고 교만했구요.

제가 그랬기 때문에 아름드리님도 그렇게 치부한거 같아요.

그런데, 저와는 좀 다른가? ..      그런가 봅니다.

제 무식+솔직한 댓글로 불편하신 모든 다비안님들께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것은 선동하는듯한 말투가 저도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목사님을 믿지 말라는.. 저는 목사님을 믿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습니다.

목사님 설교나 강의가 이해도 안되고 믿어지지 않는게 많지만, 그분의 표현을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각자의 신학의 자리가 있고, 각자의 기질과 성격, 삶의 자리로 표현할테니까요..

성서기자들이 같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지만, 다 다르게 하나님 경험을 표현한것 처럼요.

사실 지금까지 신앙생활해온 저로서는 정목사님의 말씀들은 눈뒤집어질 말씀들입니다.

때론 과격하다못해 컴퓨터를 꺼버리는 말씀일때도 있고,

이단인가? 삼단인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씀일때도 있었구요,

너무나 세밀하게 설명하셔서 이해가 쉬운 말씀일때도 있었어요.

말씀을 그냥 따라가다 보면 절벽위에 간당간당 서 있을때도 있구요,

푸른 초원에 편안히 누워있을때도 있어요..

늘 넘어지지 않기 위해 성령하나님을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성령하나님이 절 이곳으로 이끄셨기 때문에 무슨뜻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그분을 믿고 천천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정목사님을 믿는게 아니구요.. 쓸데없이 댓글이 길어졌네요.

모든 분들께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아! 글고 또 한가지, "신학:하나님 알아가는" 을 하면.. 진짜루 생수를 맛보는 기쁨이 샘솟아요. 제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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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1]유니스

June 24, 2016
*.25.237.82

어후.....한달치 공부 다 했어요.


아름드리님의 뉘앙스가 무엇인지 알아요.

목사님께서 어떤 특별한 상황에 대하여 보시는 시각을 말씀하실 때

저는 내심, 


'그기 아니고 그 멋진 광경을 저는 믿을거여요.. 

모든 것이 여전하게 돌아가는 것이 기적이라고 한다면 

좀 다른 스타일도 가능하다구요.'


하면서 다음 설교의 진행을 기다립니다. ㅎ

태평한 평신도라서요. 

오랜 옛날,

성서기자들이 당시의 일을 성글게 적은 것에는 많은 틈새, 유격이  있으니

그 사이로 개입할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 감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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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허재훈

June 24, 2016
*.45.64.74

샘터교회 교인으로서 부탁드립니다. 정목사님께 좀 더 예의를 갖추어 주실수는 없나요.


아름드리님께선 신학적 논쟁을 넘어 목사님의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 하시는 군요.

지금까지 질문처럼 하시고는 이제와서 비판이였다고  고백하시나요. 처음부터 본인의 답을 정해 놓고 같은 요지의 질문을 반복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답변해야 하나요.  싸울 작정이 아니면 피하는 길 밖에 없지 않나요. 정목사님께서 처음부터 피하셨나요. 어느 순간 목사님도 아름드리님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셨던 게 아닐까요. 


아름드리님이 만일 신학대학 교수님이라면 (아니길 바라지만)  비겁한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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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아름드리

June 24, 2016
*.97.90.75

1) 정용섭 목사님께,

제가 신학대학 교수라면, 정식으로 논쟁 또는 대화할 수 있다고 하셨네요.

교수이면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하고, 교수가 아니면 그만하시겠다는 건가요?

상대를 가리겠다는 말씀이시네요.

제가 쓴 글에 언짢아서 하신 말씀인 줄 알지만, 이 말씀은 실언하신 걸로 보고 싶습니다.

취소해 주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2) 은나라 님에게

올리신 글, 잘 보았습니다. 어려운 말씀을 하셨네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성령님의 이끄심이 은나라 님과 함께하여 풍성한 계시와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유니스 님에게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해한 바로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 멋진 광경을 믿을 것이라고 쓰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정 목사님의 해설에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건 목사님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편안하고 여유 있게 목사님 설교의 다음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씀이시지요?

귀한 말씀이십니다.

성경의 틈새와 우리의 개입 가능성이란 아이디어, 고맙습니다.

해 지는 저녁 드넓은 바닷가에서 크게 한숨 돌리는 기분입니다.

 

4) 허재훈 님에게

교회를 섬기는 분으로서 하신 말씀, 잘 보았습니다

여러 번 읽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목사님과 교회를 위하는 마음으로 쓰신 줄로 알겠습니다

마음이 상하셨다면,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여러 분이 말씀하신 대로, 목사님이 훌륭하신 점이 많은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공부도 많이 하셨고, 용기 있게 설교비평도 하셨고, 많은 자료를 누구나 볼 수 있게도 하셨지요

또 이런 식으로 댓글을 통해 대화하시는 점도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전체적으로 목사님이 전하시려는 바에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그동안 무조건 믿으라는 식의 막무가내 설교에 길들여져서

김교신 선생님이 하신 것처럼 온 몸에 냉수를 끼얹어가며 냉철한 눈으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 소 풀 뜯어먹듯이 덥석덥석 건성으로 성경을 읽은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문제지요.


그런데 저는 가끔 이곳을 보며

목사님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안 들린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우리나라 교인 중에는 목사님과 다르게 성경과 교회를 이해하는 분이 많거든요

이건 아마 많은 분이 동의할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 몇 차례 이곳에 글을 올리면서, 제가 생각했던 그런 분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감히 물을 수 없었던 거지요

궁금하지만, 그래서 더 자세히 묻고 싶지만

쟁쟁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으신 정용섭 목사님한테 어떻게 이런 걸 물어

그냥 대충 알아듣는 척하고 넘어가야 밑천을 감추지... 

이런 분들이 있었던 거지요.


저는 처음부터 저의 답을 정하고서 목사님이 뭐라고 답하나 보자

이런 식으로 목사님께 질문한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의 성서이해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성경을 목사님처럼 보면

성경의 의미가 더 확실해지는지

또 그렇게봐야 하는 이유가 무언지를 여쭌 겁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목사님이 보이신 태도에 실망을 느껴서 제 생각을 쓴 것이고요


제 말에 마음이 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묻고 싶습니다.

허재훈 님이 생각하는 예의는 다른 생각에 대해 다르다고 말할 수 없고

실망스런 태도에 실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인가요?


그리고 이곳에서 글 쓰는 사람의 신분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분에 따라 비겁하냐, 용감하냐, 를 평하는 것도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글은 그냥 글로써 평가해야겠지요.


교회와 목사님을 생각하신 허재훈 님의 심정을 다시 생각하며 이만 맺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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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산꾼

June 25, 2016
*.53.76.6

이곳이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는 공간이다보니

가끔 끝만 조금 다른 집단에 속한 분들이 들어오시곤하지요

진지한 토론의 장이되려면 최소한 쌍방이 열려있어야되는데

목사님의 신분에대한 언급의 행간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사료됩니다

이상 목사님을 찬양하는 1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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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쌀알

June 25, 2016
*.30.166.90

이거 참...
어떤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공동체의 가치관에 동의한다는 것을 전제하죠.
친구를 만날때도 그 친구가 나와 맞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만나고요. 너무 달라서 만나기만하면 기분이 상한다면 만나고싶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곳에 와서 메시지를 듣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다비아의 신학과 가치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맘에들지 않는다면 이곳을 자꾸 기웃거리며 말씀을 듣고싶지 않겠죠.
그런 사람들에게 왜 다 목사님 찬양만 하냐, 난 그게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게 좀 우습지 않나요?
인스타만 하더라도 유명인을 팔로우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행동양식들을 자신도 따라하고싶거나 그에게서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사이에 누군가 끼어들어가 너네 왜 이사람을 이렇게 좋아하는거냐. 난 그게 맘에 안든다 하면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또 사사로운 것으로 꼬투리 잡으며 공격을 해오는 사람에게 일일이 다 대꾸하기란 지치는 일입니다. 물론 사사로운 것이 아니었고 꼬투리 잡은적 없다고 하시겠죠.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교수라면 상대해주겠다 라는게 아니라, 심도있는 토론이 정말 가능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고싶다는 것이죠.
이 말의 전 배경엔 아름드리님의 질문이 정식적인 토론을 할만큼의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겠죠.
여기서 또 내 질문을 무시해? 라고 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일반 다른 학문에서나 정치 사회와 관련된 토론 프로그램만 보더라도 질문의 수준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겠죠.
내가 더 낫다. 우리가 더 낫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유일한 진리의 길이다. 라고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선 모두가 똑같이 갈급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갈급함을 조금이라도 해결해 보고자 여러 곳을 돌고돌다 여기에서 약간의 해답이라도 찾고 있는 한 사람이고요.
사람마다 다 취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다르니 각자 맞는 곳에 찾아가 배우면 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비아만이 정답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곳에 자리잡고 있을 뿐입니다.

또 오해하지 마실것은 다비아에 정착하고 있다고 해서 그 외의 다른 것들을 다 차단하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공부와 또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진리에 이르고자 분투하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들도 그럴 겁니다.

여기서 누가 더 잘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똑같이 진리앞에 목마른 연약한 사람일뿐입니다.
profile

[레벨:11]허재훈

June 25, 2016
*.255.203.196


아름드리님

진심으로 아름드리님에게 서운한 감정이나 나쁜 감정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목사님에게 하신 질문과 목사님의 대답은 저에게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난과 비평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목사님은 본인의 이름을 걸고 영향력 있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비평하셨습니다. 아름드리님도 정목사님의 글을 비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목사님의 비평에 몇 분의 목사님은 반론을 쓰셨고 대부분의 대형교회 목사님은 아무 대응이 없으셨지요.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그 분들의 자유입니다. 만약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목사님께서 무대응하시는 다른 목사님에게 왜 무시하느냐, 태도가 왜 그러시냐고 따지면 이때 부터는 비평이 아니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태도 운운 하는 것은 상대방의 인성과 됨됨이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름드리님께서 정식으로 이름을 밝히시고 정목사님의 설교를 비평 하신다면 제가 아는 정목사님은 환영하며 반가워 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신학교수라면 정식으로 논쟁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그런 취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신분의 차별을 둔다는 말은 정목사님을 몰라도 많이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목사님이나 신학교수님 같은 분들이 다른 목사님이 운영하는 게시판이나 교회 홈피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설교비평이나  비판하는 글을 쓴다면 이는 비겁한 행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교수님이라면 비겁한 행동이라고 말했던 겁니다.

앞으로도 아름드리님께서 다비아 게시판에 본인의 생각을 마음껏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똑같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생각을 답글로 달거나 내키지 않으면 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타인의 인성이나 수준을 함부로 판단하는 말들은 피해야 겠지요.

저의 글에 아름드리님의 감정이 서운하지 않기를 바라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한국 교회에 소금 같은 귀한 역할을 감당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스테이님.

저를 포함한 샘터교회성도, 대부분의 다비안은 정목사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찬양하지요. 단지 교회성장같은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말씀에만 집중하시는 정목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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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red

June 25, 2016
*.135.198.155

댓글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

1. 인품 훌륭한 분들이 참 많다.

2. 익명의 댓글로 이루어진 글 수준이 대단하다.

3. 익명이라서 쓸데없는 글에 에너지를 낭비하게된다.

     (어쩔수없는 해명성 글 ..소모적인..이 필요하다.)

4.그냥 본명. 소속까면 좋겠다.

     (red라는 대명을 가진 저는 서울 샘터교회 조무영/48/남/직업.건축사 입니다.)

5. 즐거운 주말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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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June 25, 2016
*.226.5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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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주일 전야 되셔요.~~!!^^

저는 서울샘터교회 창립교인이었어요. 다비아는 창립이전에 가입했었고요. 

그래서 제 닉네임이 익숙하신 분들도 꽤 되실 거여요. 댓글을 참 많이 달았었거든요.

거기에다 제가 시편강의 녹취를 하다보니 그리고 다비아에 크고 작은 말씨름이라도 생기면,

오지랍 넓게 묵은 다비안 노릇도 쪼매 하다보니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골수정빠" 불려지고 있는 거여요. 

기분 대게 나쁘데요.  뭐야, 우이씨.. 정빠라니.. 자존심 대게 상하네..그랬죠.

 

저는 위에서 여러분들의 댓글 내용들, 사실 저는 심도있게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끼여들 수준도 못 되어요.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에와서는 정빠로 불려질 때, 그때가  참 많이 그립다는 거여요.

왜냐면.. 그건 저한테 그 때만큼 열정이 식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요.

갑자기 이 시가 생각나네요.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넌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누군가(무엇)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무엇)의 '우주'를 사랑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사랑의 열정이 불꽃처럼 솟아 날때  몰입하는 게 아닐까요?

그 몰입이 어떤 사람들한테는 지나치다로 보일 수 있겠지만요.

그러니 그 열정은 당연히 비난받을 일은 결코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저는 정목사님을 존경합니다. 그 존경심이 정빠라면 다시 정빠가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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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July 02, 2016
*.164.89.102

안도현의 시가 오늘 아침에는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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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맑은그늘

September 01, 2016
*.212.139.114

설교링크입니다.

https://youtu.be/IYhHv7CXj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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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November 17, 2018
*.102.1.130

서로가 서로에게 바보다, 미쳤다고 말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보다, 미쳤다.”를 판단하는 기준이 애초부터 서로 달라서 결론이 나질 않습니다.

기준을 강조하는 자의 힘에 결론이 쏠리는 세상입니다. 이런 시기에 구주 예수 님을 사모하고 살아가기에 행복하고 다행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과 다비아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더 편안하고 기쁩니다.

전 기계설계를 하였었기에 무엇보다도 중심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분야별로 조립품들을 설계하고 나서 전체 조립을 할 때 뭔가 안 맞아서 틀어지면 그땐 정말 낭패를 보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제작단계까지 내려가서 난리를 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한 번씩 최초 전체 중심선을 잘 살펴봐야 하는데 무시하고 급하게 하다 보면 사고를 치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의 중심선이 나중에 하나님과 반듯하게 맞는지 안 맞는지 목사님의 말씀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수 님과 광인의 만남이 우연이듯이 저도 목사님과 한 권의 책으로 인하여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은혜로운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늘 수고하시는 목사님께도 물론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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