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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주현절 조회 수 2603 추천 수 0 2018.01.21 19:51:23
성경본문 : 요나 3:1-5, 10 

하나님의 회심

3:1-5,10, 주현절 후 셋째 주일, 201812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10.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의 소명

요나 이야기를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없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요나 이야기를 들으면 한눈팔지 않고 귀를 기울입니다. 그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그의 이름을 딴 성경이 요나입니다. 1:1절에 따르면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입니다. 그에게 어느 날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니느웨라는 큰 성에 가서 그 성의 악독이 여호와 앞에 상달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왔다는 뜻이겠지요. 요나는 마땅히 아멘이라 대답을 하고 그 말씀에 순종했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1:3절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니느웨에 가고 싶지 않아서 일단 어디론가 숨어버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스는 유대 땅에서 가장 거리가 먼 곳입니다.


요나가 탄 다시스로 가는 배는 지중해를 도는 무역선입니다. 풍랑이 크게 일었습니다. 사람들은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배 안의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침몰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승무원들과 승객 모두를 사로잡았습니다. 결국 제비뽑기 식으로 사람을 택해서 바다에 던지기로 결정했습니다. 요나가 당첨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졌고, 풍랑은 그쳤으며, 큰 물고기가 요나를 통째로 집어삼켰습니다. 3일 후에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는 바람에 요나는 살아났습니다.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버티면서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욘 2장에 나옵니다. 아주 깊은 탄식에서 터져 나온 기도입니다. 2:5절은 이렇습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7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요나가 영혼의 어둠에 갇혔다가 여호와를 통해서 새롭게 힘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요나 이야기는 예수님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11:29-32, 12:38-42). 사람들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아무 표적도 보일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동안 갇혔다가 살아난 것을 가리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요나는 3: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다시 받습니다. 내용은 첫 번째 말씀과 똑같이 니느웨로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요나가 살고 있던 유대 땅에서 비교적 가까운 티그리스 강 연안에 자리하고 있던 고대 도시입니다. B.C. 12세기경부터 앗수르의 주요 도시가 되었고, B.C. 8세기경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곳을 수도로 삼아 당시 중근동에서 가장 영화롭고 번성한 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요나는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선포한 메시지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내용입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 니느웨 사람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면 여호와가 구원해주실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나가 두 번째 말씀을 받아서 니느웨로 오긴 했으나 말씀을 선포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처음부터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욥도 하나님을 향해서 투정부리고 불평하는 듯이 발언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두 사람 모두 죽고 싶다고 몸부림쳤습니다. 3:11절은 이렇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이런 표현들이 반복됩니다. 7:15절입니다. ‘이르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으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서 비슷한 탄식을 합니다. 2:3절입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는 4:8절에서 다시 그 말을 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욥과 요나가 다른 상황에서 한 말이지만 그 의미는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죽을 지경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회심

욥의 심정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닌데도 엄청난 재앙을 만나고 친구들에게 동정을 받고 비난받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요나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4:1절에 따르면 요나는 뭔가를 매우 싫어하고 성을 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언지는 바로 앞 구절인 욘 3:10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기에 하나님이 니느웨에 내리려고 했던 재앙을 내리지 않게 되었다면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이 말씀을 전한 선지자로서 요나는 말씀 선포의 결실이 일어난 것이기에 당연히 기뻐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화를 내지 말라고 요나를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요나는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나중에라도 요나가 자기주장을 거둬들였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왜 이렇게 철없이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요?


저는 21세기 대한민국 교회에서도 요나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을 흔히 봅니다. 독선적인 구원관을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강변합니다. 더 나아가서 로마가톨릭교회에도 구원이 없고, 개신교 중에서도 다른 교단에는 구원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툭하면 저 사람은 자유주의자라고 매도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자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이비 이단에 가까울수록 구원의 폐쇄성에 더 강력하게 사로잡힙니다. 소위 신천지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천명이 바로 자기들 종파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폐쇄적이고 독단적이며 배타적인 구원론에 빠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태는 살아가는 방식과 신앙방식이 자신들과 조금만 달라도 화를 내고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요나 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만 은총과 구원을 내려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모두 심판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으니 요나는 차라리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바에는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성애자들과 군 대체 복무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거품 물고 비판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자칫하면 광신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도 종이 한 장입니다. 요나가 거짓 선지자라는 게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망가지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실행된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참 선지자입니다.


요나는 이 사실을 유대인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신학 개념을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3:10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영원불변입니다. 바울도 하나님이 영원 전에 자기를 선택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칼뱅은 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택받을 자와 버림받을 자를 이미 이중으로 예정해놓았다고 말입니다. 출애굽 전승에서도 하나님이 애굽 최고 권력자인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이 중간에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요나 시대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주장을 요나는 지금 과감하게 선포했습니다. 혁명적인 것입니다. 이런 선포가 당시에 당연히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의 연민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기분 나쁘게 여겨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이 욘 4:11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본문은 니느웨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이방인들의 숫자를 거론합니다. 더군다나 가축까지 거론합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포함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배타적이고 선택적 구원관이 하나님의 연민과 자비에 근거해서 포용적이고 보편적 구원관으로 확장되는 계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게 중요했다면 요나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환호했을 겁니다.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이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바꾼다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그 회심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연민입니다. 그 연민은 요나를 기록한 사람의 연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이방인들까지 구원받을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로 돌려서 말한다면 지금 굳이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이런 반론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더 근본적으로 구원을 오해하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 소관이며, 따라서 그분의 의지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뿐이지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가 구원받도록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파렴치한 범인들이나 반인륜적인 행동을 한 사람들처럼 구원에서 배척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들에게도 여전히 구원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붙들고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나서야 합니다. 그런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저는 두 가지로 설명하겠습니다.

 

보편 구원의 깊이

한 가지는 사회적인 차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당신은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방식으로 작동됩니다. 사회학적으로 타자화현상입니다. 학교 교육을 생각해보십시오. 공부 못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학교 교육이 진행됩니다. 그들은 이방인 취급을 받습니다. 서울대학교 합격한 학생들 숫자로 고등학교의 평가가 이루어집니다. 교육만이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이 이런 방식으로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런 학교교육과 사회경험을 한 요즘 젊은이들은 평창 올림픽에 참여하기로 한 북한을 이런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을 타자화하는 겁니다. 요즘은 덜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툭하면 저 사람들은 종북 좌파니까 상대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방인은 구원받을 수 없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 그걸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죽은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겉으로야 죽는다고까지 말하지 않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와 달리 본문은 하나님도 뜻을 돌이키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포입니까? 교회는 이 놀라운 선포를 세상에 확장시키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른 한 가지는 개인적인 차원입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이방인의 삶을 부정하는 방식에 길들여졌습니다. 율법적인 삶이 고착되어 버린 겁니다. 가난하면 불행하다는 생각이 자신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아주 좁은 틈으로 밀쳐 넣습니다. 요나처럼 현대인들은 자기 삶에서 싫어하는 것도 많고 화를 내는 것도 많습니다. 자기 삶에서 이방인의 것들이 발견되면 못 견디는 겁니다. 요즘 저는 나이가 들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깊어집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고유한 삶의 깊이와 향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이와 비슷하게 되어야만 인생이 의미 있어지는 게 아닙니다. 목사의 경우를 말한다면 큰 교회 목회를 해야만 목사로서 의미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그리고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준비만 되어 있다면 모든 것이 최선이고 절정입니다. 여러분의 삶도 그렇습니다. 건강이 좀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돈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학력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각각 고유한 삶의 깊이가 있습니다. 그런 삶의 깊이를 놓치고 이방인처럼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삶은 파괴됩니다. 여러분의 삶을 사람들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이 다 받아주실 터이니 마음을 놓으십시오.


이게 막연하거나 낭만적인 게 아니라 실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구원의 빛이 우리를 비춥니다. 아무리 어둡게 보이는 순간이라도 구원의 빛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말기 암 진단을 받아 요양원에서 사는 몇 달 동안 생명 충만하게 지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인생살이에서 구원의 빛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 떨어지기 전에도 우리는 구원의 빛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연민과 자비를 절실하게 깨닫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요나를 기록한 사람이 전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 사실입니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과 가축들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뜻을 바꾸는 하나님의 자비를 붙드십시오. 여러분들이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소리꾼들이 득음에서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과 자기 인생이 전혀 새로운 빛으로 채워지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빛을 우리는 가장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바꾸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연민과 자비를 통해서 생명의 빛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설교듣기: https://youtu.be/C0KoDaIS2r4 

설교보기는 예배실황 아프리카티브이를 참조하세요.  http://afreecatv.com/nfermata 이 영상은 한 달 뒤에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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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6]홍새로

January 22, 2018
*.151.83.22

어린시절에 요나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으며 빠져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동화로 듣던 그때는 알지못했던 지금 여기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생명현상,

차가운 겨울바람, 메말라 보이는 나뭇잎, 멀리 보이는 산들, 숨쉬며 먹고 자고  살아가는 사람들,

고대로 부터 흘러온 시간, 인간이 다 알지 못하는 이 세계...

이 보이는 세계와 나타나지 않은 세계까지 창조하신분,

종말까지 이끌어 가시는 분, 그분 하나님께서 인간이 구분한 이방인이란 신분의 사람과

그의 가축까지도 구원하셨다는 요나의 고백을 풀어 말씀해 주시니,

우리가 생명안에서 연민과 자비에 안겨있음을 이제 느끼게 됩니다.

존재하는 모든것은 아름답다 하는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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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anuary 22, 2018
*.182.156.204

압축적으로 정리한 에스더 님의 대글이

길게 풀어서 설명한 내 설교보다 더 실감이 납니다.

저 아득한 시간과 세상과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 더 깊이 깨닫는 것보다

우리의 삶에서 더 즐거운 것도 없겠지요.

하나님의 연민과 자비 안에 안겨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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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당진구세군

January 23, 2018
*.81.137.191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을 '하나님의 회심'으로 표현하신 목사님의 말씀에 큰 공감이 갑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구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우리의 삶 속에 구원의 예(북한문제, 동성애문제, 한국교회문제 등)를 적용해 보고 토론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주위 소중한 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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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anuary 23, 2018
*.182.15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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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런 방식으로 저의 부족한 설교가

다른 분들에게도 전달되는군요.

낙평리 사관님이나 저나 인식과 실천에서 부족한 게 많겠지만,

그리고 목회에서 시행착오도 거듭되겠지만

성서기자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하나님'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기쁨만은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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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happyheejin

January 30, 2018
*.99.177.243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되십니다. 그들도 약속 아래 있고, 약속의 능력 아래 있습니다. 이 약속과 약속의 능력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칼바르트의 신학묵상 1월 28일 중에서"


목사님 설교와 통하는 내용을 발견해 한 켠에 더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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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anuary 30, 2018
*.182.156.163

와, 해피 님이 바트의 신학묵상을 읽는다는 것도 놀랍고

거기서 저 구절을 찾아내셨다는 것도 놀랍군요.

바르트와 같은 신학 대가들의 글을 읽으면

마음에 평화와 용기가 전달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저런 구절은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외워둬야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독일어 문장을 읽어봐야겠습니다.

마음이 두근거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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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2102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2171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2279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1761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1934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1737
776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2419
775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1719
774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1644
7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1738
772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1877
771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1426
770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2615
769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2876
768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2506
767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2495
766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2282
765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2] 2018-10-15 1670
764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2622
763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3074
762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1961
761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1607
760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2031
759 창조절 말씀과 삶의 일치로 인한 복 (약 1:17-27) [4] 2018-09-02 2585
758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2428
757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2766
756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2067
755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2092
754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2176
753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2171
752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2607
751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2605
750 성령강림절 연보도 은혜다! (고후 8:7-15) [6] 2018-07-01 1998
749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2732
748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비유 (막 4:26-34) [5] 2018-06-17 2868
747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10] 2018-06-11 2302
746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3133
745 성령강림절 거듭남과 성령 (요 3:1-13) [2] 2018-05-27 2690
744 성령강림절 성령이 도우시리라! (롬 8:22-27) [4] 2018-05-20 2546
743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2567
742 부활절 성령 임재의 증거 (행 10:44-48) 2018-05-06 2459
741 부활절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4] 2018-04-29 2982
740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2224
739 부활절 예수의 살과 뼈 (눅 24:36-48) [4] 2018-04-15 2303
738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2774
737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2843
736 사순절 예수의 죽음과 매장 (막 15:33-47) [4] 2018-03-25 2466
735 사순절 예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요 12:20-33) update [4] 2018-03-18 2358
734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2996
733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3462
732 사순절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7] 2018-02-25 3034
731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3260
730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2299
729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2741
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2375
»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2603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2565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3711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3071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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