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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 https://youtu.be/G6T2nKc3Ak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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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한복음 20:1-18 |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부활절, 2018년 4월1일
1.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10.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예수 부활도 반드시 전파되었습니다. 예수 부활 없이는 복음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부활은 21세기 기독교인들에게 곤혹스럽습니다. 신약성경과 사도신경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으니까 믿지 않을 수는 없지만 오늘의 과학적인 세계관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무조건 받아들이기도 힘듭니다. 지금 여러분은 예수 부활을 실제로 믿습니까? 믿지 않으십니까? 예수 부활을 믿지 않고도 신앙생활이 가능합니까? 진지하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입장만 곤란해지니까 아예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닙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2천 년 전 기독교인들의 예수 부활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빈 무덤 이야기
오늘 설교 본문에는 예수 부활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가지는 요 20:1-10절입니다. 1절이 보도하는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이른 아침, 그러니까 어둠이 아직 가시기도 전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묻힌 무덤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삼일 전에, 정확하게는 이틀 전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로마 총독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예수 시신을 자신의 가족 묘지에 매장했습니다. 간략한 장례 절차는 니고데모가 담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 제자들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매장이 끝나면서 안식일이 시작되었기에 예수 시신에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은 이유는 니고데모에 의해서 수습된 예수 시신이 온전하게 수습되었는지를 확인하거나, 또는 시신으로나마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본문은 이에 관해서 아무 말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동굴로 된 무덤의 출입구를 막아놓은 돌이 치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적으로 예수 시신을 어느 누군가가 옮겼다고 생각했습니다.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그녀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베드로와 다른 제자, 즉 요한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어요.’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젊은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했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뒤따라온 베드로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 시신은 없고 수의만 보였습니다. 그제야 요한도 무덤 안으로 들어와서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게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당시 무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모든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 전승은 예수 시신이 묻혔던 무덤에서 예수 시신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빈 무덤이 부활 이야기의 출발입니다. 막 16:1절 이하는 다음과 같습니다. 몇몇 여자 제자들이 예수 시신에 바를 향품을 들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시간에 무덤에 갔습니다. 무덤 안에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시체 놓였던 자리의 우편에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 청년 모습을 한 이는 천사로 추정됩니다. 청년이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났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고 이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마 28:1 이하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고, 눅 24:1절 이하의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눅 24:12절에 따르면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여자들에게서 소식을 들은 베드로가 무덤에 달려가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고 합니다. 예수 시신은 안 보이고 시신을 쌌던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그 광경을 놀랍게 여긴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왜 ‘빈 무덤’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일까요? 빈 무덤이 예수 부활을 확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오히려 오해를 받기 좋습니다. 당시 파다했던 소문은 시체 도난설입니다. 마 27:64절이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십자가 처형이 끝난 즉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 제자들이 예수 시신을 빼돌리고 부활한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르니 무덤 경비를 철저하게 시키라는 말을 빌라도에게 합니다. 마태복음은 시체 도난설이 예수 부활을 부정하려는 헛소문이었다고 봅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도 빈 무덤은 민망하고 불편한 이야기입니다. 마술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술에서는 사람을 반으로 자르거나 완벽하게 결박한 채로 물속에 넣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마술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난 이야기(눅 7장)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요 11장),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난 이야기(막 5장)가 그런 것들입니다. 외경인 베드로복음에도 예수 부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부활 이야기는 이런 것들과 다릅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다시 살아나는 장면에 대해서 아무런 묘사도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예수 시체에 임재 했다거나 천사들이 예수의 시체에 피가 돌도록 노래를 불렀다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만 전합니다.
시신은 부관참시하려고 끌어내지 않는 한 무덤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자연법칙입니다. 빈 무덤을 이런 자연법칙이 깨진 것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성경은 2,3일 만에 무덤이 빈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신문보도로 가능한 수학적인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상징적인 시간입니다. 호 6: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너무 끔찍한 운명이라서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일종이 ‘멘붕’에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제자들은 예수를 생명의 궁극적인 현실성(ultimate reality of life)으로 경험했습니다. 그 생명의 현실성은 생전의 예수님에게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그들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한 게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생하게 기억한 것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기억은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제주 ‘4.3 사건’ 70주년이 다가옵니다. 1948년부터 시작해서 수년 동안 제주도 주민 열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참혹했던 학살사건이었습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70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가족을 그리워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잊히거나 감각이 약화되지 않을 겁니다. 제자들의 예수 부활 경험은 이런 그리움과는 전혀 다릅니다. 단순히 생전의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한다는 각오를 다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종말에 이루실 생명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희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경험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에 이어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간 뒤에 막달라 마리아 혼자 남았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막달라 마리아만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과 함께 갔다고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혼자 간 것으로 나옵니다. 요한공동체가 막달라 마리아를 강조해야 할 어떤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혼자서 무덤을 찾아간 거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눅 8:1-3절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 제자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그중에 한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혼자 남은 막달라 마리아는 울면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에 두 천사가 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되었습니다.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요 20:12).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묻습니다. 마리아는 앞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합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여전히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어딘가로 옮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덤이 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하고 다시 주변을 살피자 어떤 사람이 근처에 서 있는 게 보였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이었지만 마리아는 동산 관리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앞서 천사가 한 말과 비슷한 말을 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여전히 예수님의 시체를 찾을 생각만 하면서 대답합니다. 당신이 무덤 안의 시체를 옮겼으면 장소를 알려달라고, 그러면 내가 시체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겠다고 말입니다.
마리아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합니다. ‘4.16 세월호 참사’ 4주기가 다가옵니다. 당시 상황을 우리는 모두 기억합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구조되기를 바라던 데드라인이 지나자 이제는 시신을 찾는 것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자식의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죽은 자들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 바로 시신을 일정한 절차에 따라서 장례를 지내고 매장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그런 애끓는 심정으로 천사를 만났을 때나 그가 동산 관리인으로 착각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을 때나 예수 시신에 대한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은 ‘마리아야!’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자 마리아는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녀는 ‘랍오니!’ 하고 외쳤습니다. 그 단어는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부활의 예수님을 바로 생전의 예수님으로 알아본 것입니다. 김춘수는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습니다. ‘마리아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예수님의 시신에 매달려 있던 마리아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 사건에 눈을 뜨게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심층적인 관계를 경험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고전 15:5절 이하에는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그리고 바울입니다. 이 목록에 여자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여자들의 의견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어쨌든지 부활의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광장에 나타나신 게 아닙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처형한 빌라도를 찾아가지도 않았고, 산헤드린 법정에 나타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올림 받은 예수 그리스도
막달라 마리아는 반가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몸을 붙들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20:17절입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부활의 정체성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험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승천과 같습니다. 승천은 하나님과의 합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생명을 완성하실 분이기에 하나님과의 합일은 예수님이 생명의 능력자가, 즉 생명 수여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경험한 예수 부활의 요체입니다.
요 11장에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예수님은 인간과 똑같이 세상에서 살다가 생명을 잃었지만 이제 하나님이 그를 높이셔서 생명을 나눠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런 확신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설명이 이론적이어서 손에 잡히지 않는 분도 있을 겁니다. 부활 신앙은 결국 생명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속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는 늙거나 병들거나 사고를 당해서 죽습니다. 사람들은 가능하면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사고 당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을 기술적으로 감당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생명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경험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도 하나님에게로 올라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 경험에 근거해서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에게 올라가는 경험은, 즉 죽으나 사나 참된 생명 가운데로 받아들여진다는 경험은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에센스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그 대답입니다. 일상적인 말로 바꾸면 자기 염려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자기의 삶을 자기가 책임지고 완성시켜야 한다는 강요와 유혹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런 강요와 유혹이 우리의 생명을 약화시키고 파괴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죽음에 대한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에 의해서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흔들림 없이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죽음마저도 생명의 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 15: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전대미문의 생명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건과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생명을 파괴하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으니,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쁨과 희망 가운데서 살아가십시오.
예전에 새가족들을 양육하고 매주 구역예배를 열심히 드리던 때가 있었습니다.하루는 아침에 집정리와 함께 예배준비를 하며 찬송아닌 장사익씨가부르는 '꽃' 이라는 노래를 듣는데 그 가사가 감동으로 다가와 순간 무릅 꿇고 '주님 나도 주님께 꽃이 되고싶어요'하고 눈물로 기도하는데 '너는 꽃보다 더 귀하단다'라는 내적음성을 들은 경험이 있었답니다.그 순간이 '마리아야'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마리아의 경험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예배때 기억나서 그 감동이 다시 밀려와 가슴 벅찬 부활절예배를 드렸네요...
살면서 나의 생명이 그분과 연결 되어 있다는
경험을 순간순간 할수 있다면 지루한 삶이 생명 충만한 삶으로 채워져 생명이 선물임을 알고 감사로 나머지를 살수 있을것 같은데 ...
육체의 죽음 너머가 궁금합니다.
바람에 의지하여 흩날리는 아름다운 꽃잎을 보며 지금과 전혀 다른 그 너머를 기대해 봅니다.
흡사 '유레카! 유레카!'를 외치며 탕속에서 나신으로 뛰쳐나온 아르키메데쓰만큼 감격스런 소식이 되지 못함은 무엇때문일까요?
부활생명, 절대생명을 약속받았음을 분명 믿고있는 우리라면,
삶의 어떤 처지에서도 존재의 기쁨, 내면의 충만, 영혼의 자유를 누려야 마땅하거늘, 영혼의 핍절함 가운데 (본인은 이에 대해 무감각한채) 갈수록 율법적 신앙으로 치닫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 손에 쥔 모든 것들로부터 한순간 흔적도 없이 끊어지고 말 죽음에 갇혀사는 인생의 궁극적 숙명의 문제 앞에서 깊은 허무와 절망감, 죽음에 관한한 세상 누구도 날 도와줄 이가 없다는 절대고독의 깊은 어둠가운데서, 죽음에 삼키움바 되고마는 내 운명의 종국으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타는 목마름으로 고대하며 살고 있지 않는 탓이겠지요?
"수루에 혼자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풍전등화같은 절체절명과 절대고독의 자리에서 구국의 염려로 당신의 창자와 간장이 타들어간다는 이순신 장군의 백척간두의 심정만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향한 절실성이 그 임계량에 차기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부활생명의 약속은
성경에 나오는 덤덤한 교리로, 정보로만 남고 말겠지요
목사님께선 백척간두라는 표현을 곧잘 쓰시지요?
언제 죽을지 모를 내 운명이 매일 백척간두에 떨어져 지낸다는 것을 새삼 실감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