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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 https://youtu.be/pJom8ithhe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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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afreecatv.com/nfermata |
성경본문 : | 사도행전 9:1-6 |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부활절 셋째 주일, 2019년 5월5일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바울, 이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짠한 분들이 계실 겁니다. 지금 우리는 바울을 예수의 사도로서 위대한 신학자, 영성가, 선교사, 신약성경 중에서 최소한 10권을 쓴 저술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대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당시 주류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비주류였습니다. 그는 먼저 유대교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원래 유대교에서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 쪽에서 볼 때 바울은 배신자였습니다. 예루살렘에 근거지를 둔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도 바울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더 이상 선교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설립한 교회에서도 리더십을 인정받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전 9:1,2절에 따르면 고린도교회 신자들 중에서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바꿔 말하면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로 불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입니다. 우리가 보통 사도라 부르는 열두 제자는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은 인물들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세상을 뜬 다음에 교회 공동체에 들어왔기에 당연히 이 열두 제자에 포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바울은 열두 제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갈 1:11절 이하에서 그는 자신의 복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열두 제자들만이 아니라 자신도 예수님을 만났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사도행전 기자가 오늘 설교 본문에서 드라마틱하게 설명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본문은 아직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나오지만, 다메섹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으로부터 회당에 보내는 명령 공문을 받아 일행과 함께 길을 가는 중이었습니다. 종교 개혁 당시에 루터를 파문하기 위해서 교황으로부터 종교재판 공문을 받은 주교나 추기경과 비슷한 역할을 한 겁니다. 길을 가는 바울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경험했던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이 다 기록하지는 않지만 바울은 예수가 누군지에 관해서 많은 공부를 했을 겁니다. 그는 원래 박학다식한 학자이자 열정적인 종교인이고 로마와 헬라 문명을 어릴 때부터 경험한 사람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바울을 둘러 비쳤다고 합니다. 밤중은 아니었을 테니 그 빛은 일반적인 빛과 달랐을 겁니다. 혹시 먹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온 빛이었을까요? 아니면 무지개와 비슷한 현상이었을까요? 어쨌든지 전혀 이상한 현상 앞에서 바울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자신이 정상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이런 기이한 행동은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적한 산길을 가는데 호랑이나 UFO를 만났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뒤로 자빠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을 겁쟁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너무나 익숙하게만 경험합니다. 땅에 엎드릴 정도의 신비로운 경험이 없습니다. 일상에서도 신비로운 경험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민들레를 보고 허리를 굽혀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좀더 예민한 사람들은 이런 봄날에 새싹이 땅을 뚫고 나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그 모습을 더 정확히 보려고 땅에 엎드릴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땅에 엎드릴 정도의 비상한 현상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땅에 엎드린 바울에게 어떤 소리가 들렸습니다. 행 9:4절이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
바울은 ‘당신은 누구시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에게 다메섹으로 들어가면 바울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가이드해 줄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행 22장과 26장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바울의 예수 경험이 명백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의 예수 경험이 무엇인지가 정말 궁금합니다.
바울의 이 경험을 설명하는 본문에는 아주 중요한 종교적 메타포가 두 가지 나옵니다. 하나는 빛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소리입니다. 바울은 세 마디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소리는 공기의 떨림이 우리의 청각기관인 고막을 울릴 때 나타나는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현상입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그런 것과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를 불렀을 때 나타난 현상이 그런 것입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시인들은 그런 경험을 자주합니다. 그들은 바람과 나무와 꽃으로부터 소리를 듣습니다. 시인들의 이런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경험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마술이 아니라 세상과 인간과 그 역사의 심층과 신비에 대한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예수 경험이 열두 사도들의 예수 경험에 못지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부활 증인 목록에 자신도 포함시켰습니다. 고전 15:5절 이하에 그 목록이 나옵니다.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그리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 같은 바울 자신에게도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그 대목에서 자신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라서 사도라고 인정받는 게 부끄럽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기독교 역사를 바꿀 정도입니다.
바울의 회심
바울은 유대교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가 예수를 빛과 소리로 경험한 뒤로 예수의 복음에 운명을 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인생의 방향이 180도 달라진 겁니다. 이렇게 달라진 단초는 부활의 예수 경험입니다. 만약 그가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율법종교에 매달린 수많은 바리새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생을 마쳤을 겁니다. 우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삶도 이와 비슷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대개 좋은 선생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그런 일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났다면 디모데는 바울을 만났습니다. 예술가들도 좋은 선생을 통해서 예술의 깊이로 들어가곤 합니다.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이 인생에서 중요하다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를 통해서 삶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에게 바울의 예수 경험과 같은 경험이 있으신가요? 실제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개인에 따라서 대답이 다를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바울에 대해서 좀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경험한 이후로 그동안 자신이 추구하던 모든 종교적인 목표와 이미 이룬 업적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빌 3:8). 잘 알려진 문장입니다. 이런 문장을 근거로 세상에서 하는 일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바울은 세상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세상 일이 배설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경험이 자기 삶에서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겁니다. 바울의 이런 경험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한 여자를 실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 다른 여자들은 모두 너무나 평범해서 시시해보였습니다. 손자를 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마음도 이와 비슷할 겁니다. 그 아이만 눈에 들어옵니다. 부활의 예수를 경험한 바울은 이제 생명을 빛처럼 환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이전에 추구하던 자랑거리가 시시해진 겁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사실, 베냐민 지파, 바리새인, 율법의 완벽성 등이 다 시시해 진 겁니다.
바울의 이런 고백을 예수 잘 믿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라는 말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종교적 교양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아주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 실제로 경험하지 못했으면서도 아는 것처럼 착각하거나, 자신은 그런 신앙의 경지와 거리가 멀다고 아예 포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경험을 했기에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을 시시한 배설물처럼 여긴다는 말은 교양적으로 세련된 사람이 되었다는 게 아니라 삶 자체를 다르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조금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겁니다. 그걸 성경은 회심, 즉 메타노이아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수학능력 고사 점수에 민감하던 학생이 갑자기 점수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에 매진하고 그것에 따라서 일희일비하던 목사가 그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배설물로, 즉 시시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은사를 넘어 ...
요즘 수요공부 모임에서 고린도전서를 공부하는 중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그 유명한 고전 13장을 공부했습니다.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랑하던 은사를 몇 가지로 나열하고 분류했습니다. 방언, 예언, 지식, 믿음, 구제, 희생 등등입니다. 그런 것들은 교회에 없어서 안 될 소중한 은사이지만 상대적인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면 절대적인 것이 훼손됩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런 일로 인해서 시끄러워졌습니다. 고전 13:3절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도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바울은 구제와 희생을 사랑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구제와 희생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사랑에서 나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제와 희생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늘 상대적인 자리에 놓인다는 뜻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 하나님 나라, 그 통치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은사를 절대화하는 우를 종종 저지릅니다. 서로를 경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배척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위축시킵니다. 지난 수요일에 우리는 고전 13장을 본문으로 한 판넨베르크의 설교에서 한 대목을 함께 읽었습니다. 그중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사랑의 현실성이 무한하게 풍요롭다는 말은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화를 보고 경험한 그런 사랑과는 완전히 다르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풍요롭고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집착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에게 내맡기기보다는 사랑을 통해서 그저 쾌적하게 살아보려고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의 뜻을 따르도록 사랑의 이름으로 요구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손에서 갈망으로, 즉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하려는 갈망으로 변질됩니다. 갈망으로 변질된 이런 사랑은 항상 이기적입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실제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에 내재한 갈망의 환영과 연결시킵니다. 더 나아가서 이 갈망의 환영 뒤에 숨어서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대방을 실제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갈망은 자기 자신을 추구해나갑니다. 상대방에게서 자기를 성취해내려고 합니다.
우리는 다시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예수를 통해서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바울처럼 영적으로 내공이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이 질문에 딱 맞은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르고, 여러분도 모릅니다. 많은 경우에 기독교인들은 그럴 필요성을 전혀, 또는 별로 느끼지 못하면서 삽니다. 지금 자신의 삶에 전반적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만족스러우면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습니다. 만족스럽지 못해도 인생이 별 거 있냐, 열심히 자기를 성취하면서 살다가 늙으면 죽는 거지, 하는 생각이 가장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만나기 전의 바울이 취한 삶의 태도와 비슷합니다. 예수를 만나는 경험이 없으면 이런 삶의 태도가 최선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이 거기에 머물지 말라고 설교하지만 그게 말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 저 스스로 답답하긴 합니다. 극단적인 비유를 말씀드리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지금 마약이나 도박에 몰입해 있는 사람에게 백무산이나 이시영 시인의 시를 읽어줘야 아무 소용이 없는 거와 같습니다. 여기서 마약과 도박은 자신을 성취하려는 갈망입니다. 목사에게는 교회 성장이 이에 해당됩니다.
바울에게는 왜 그런 놀라운 일이 벌어졌을까요? 바울 자신도 딱 부러지는 대답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는 일반적인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대답입니다(고전 15:10).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보다 더 높은 경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바울의 영혼이 얼마나 충만할지 상상이 갑니다. 자신의 운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니 세상의 방식으로 어떤 성과가 날는지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씨앗을 받아든 사람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씨앗을 심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서 저절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때로는 과일을 맺을 겁니다. 생명 충만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세상은 늘 우리를 향해서 성과를 내라고 압박하고 유혹합니다. 거기서 우리의 영혼은 위축되고 지칩니다. 바울은 부활의 예수를 만난 뒤에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살아있는 자로, 즉 부활하신 분으로, 생명의 원초적 근원으로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바울의 예수 경험은 상투적인 게 아닙니다. 절대적인 자유와 해방 경험입니다. 율법의 삶으로부터 복음의 삶으로 전환하는 경험입니다. 여러분의 예수 경험이 실제로 이런 내용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은 사람들이 자랑거리로 여기던 것들을 더 이상 자랑하지 않게 되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그런 자랑거리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다른 부분에서는 좀 부족해도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경험에서는 탁월한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크게 한번 죽어야...를 성경적으로 표현하자면
세례, 회개, 옛사람의 십자가에 못박힘...등이 아닐런지요
그런데 바울의 다메섹 경험처럼
J를 믿고 나서 십수년이 되어가도 우리에게 아직까지
이런 대사(大死)의 경험이 없다면,
그래서 회개에 합당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삶의 변화가 없이 산다면, 우리에게 남은 신앙여정에서 대사의 희망은 있는걸까요?
어쩜 大死의 야무진 꿈은 내려놓고
매일 그날이 그날같은 일상속에서
'날마다 죽노라'의 심정으로 小死(작은 죽음)와 작은 부활을 거듭하며 사는게 최선이 아닐런지요
은퇴한 어느 노목사님의 저서에 보면
다메섹에서 바울에게 들린 주님의 음성은
바울의 내면에서의 울림이었을거라고 해석하고 있더군요
바울을 '너'라고 부르는 주님이 이미 자신의 내면에 들어와
계심을 각성하게 된 그 순간, 경천동지의 전율과 함께
J를 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복기에서 목사님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것 같습니다
이번주는 설교보다 복기에서 더 많은 도전을 받은것 같습니다 ㅎㅎ
설교시간 분량만큼의 복기까지 매번 올려주시니... 친절이란 표현이 부족할만큼 '친절한 금자씨' '친절한 목사님'이 아닐수 없습니다
구원의 급진성과 점진성 사이의 논쟁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걸 보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불교의 돈오돈수, 돈오점수 논쟁과 비슷한 면이 있는 거지요.
그런데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이런 문제의식조차 없을 겁니다.
그런 문제에 마음을 쏟을만한 상황이 아닌 거지요.
세상의 작동원리에 실제 삶과 영혼이 전적으로 지배당하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신의 분량만큼 살아내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친절한 목사님' 운운은 고맙게 생각하면서,
바울 식으로 말해 받은 바 은혜가 커서 최대한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있고,
이게 나의 영적인 즐거움이라서 이런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자,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빛과 소리로 인해서 땅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경험이
우리 모두의 인생 길에서 자주 일어나기를 ....
바울이 사울이었을때,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모습으로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세계를 적으로 삼던 존재였는데,
부활의 예수를 만난후에는 율법종교에서 벗어나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것이네요.
생명차원에서는 동등하므로
타인을 억압하지 않으며 스스로 억압 받지 않아도 되며
교만하지도, 주눅들지 않아도 되는 자유와 해방은
행복과 가치의 기준을 자본주의 원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라고 믿게된 사람이며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에게 있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