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00
노자, 리더십에 반(反, 또는 叛)하다.
<’반하다’는 말을 혹시 오해할지 몰라 한자를 덧붙입니다. 이 때의 ‘반’은 反, 또는 叛 입니다.>
5. 노자가 기가 막혀!
지난해 10월,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눈에 띄어 갈무리를 해 놓은 적이 있다.
<삼성 사장단이 연말 인사철을 앞두고 리더십 공부를 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31일 열린 삼성수요사장단 회의에는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노자에게 배우는 리더십’을 주제로
무위(無爲·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음)의 개념을 적용한 리더십에 대해 설명했다. 최 교수는 올 6월에도 삼성수요사장단 회의에서 ‘노자에게 배우는 경영의 지혜’를 강연한 적이 있다.> (조선일보, 2012. 10. 31)
31일 열린 삼성수요사장단 회의에는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노자에게 배우는 리더십’을 주제로
무위(無爲·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음)의 개념을 적용한 리더십에 대해 설명했다. 최 교수는 올 6월에도 삼성수요사장단 회의에서 ‘노자에게 배우는 경영의 지혜’를 강연한 적이 있다.> (조선일보, 2012. 10. 31)
드디어 노자를 리더십 주창자의 반열에 올린 학자의 주장이 나왔구나, 하는 놀라움에 이 기사를 스크랩해 놓았는데, 조선일보의 기사에서는 최교수가 노자를 주제로 하여 6월과 10월 두번 강의를 했다고만 했을 뿐, 그 내용에 대하여는 아무 말이 없어서, 그저 강의의 제목으로만 내용을 유추할 뿐,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못하고 리더십과 경영의 지혜라는 별개의 강의인줄 알았다.
물론 그런 강의의 제목만으로도 충분하게 의아했었다. 왜냐면 최교수의 책-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인간이 그리는 무늬> – 에서는 그런 조짐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두 책에서 최교수는 노자를 리더십과 연결시키는 발언을 한 적이 없고, 더군다나 경영의 지혜를 언급한 적이 없었으니, 이를 어떻게 이해 해야 할지?
그로부터 몇 달 후, 다른 신문에서 이 강의에 대하여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사장단회의의 강사와 강의 주제는 삼성이 현재 어떤 것을 고민하는지 엿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2012년 한 해 동안 이뤄진 44차례의 회의를 주제별로 구분하면 경영 관련이 11차례로 가장 많았고, 국제사회 이해에 대한 강의가 9 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특히 중국은 4차례나 주제로 다뤄지면서 삼성이 가장 많이 연구하는 지역으로 꼽혔다. 소통(4차례), 리더십(4차례) 등도 삼성이 깊이 고민하는 주제였다. 노자, 한비자, 역사, 한시 등 인문학 강의도 종종 눈에 띈다. 통섭, 융합, 창조적 파괴가 경영의 최고 화두가 된 덕분이다. 서강대 최진석 교수는 5월과 10월 ‘노자에게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 ‘노자에게 배우는 리더십’이라는 사실상 똑같은 주제로 앙코르 강연을 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한겨례, 2013.04.11)
내가 궁금했던 것 - '노자에게서 배우는 리더십'과 '노자에게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가 어떻게 다를까 – 에 대한 답이 거기 있었다. 최교수는 제목만 달리 했을 뿐, 같은 내용을 강의했다는 것, 그러니 ‘노자에게 배우는 리더십’이라는 강의와 ‘노자에게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라는 강의가 사실상 똑 같은 것이라는 사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결국 최교수는 ‘리더십’이 바로 ‘경영의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경영의 지혜라는 무엇일까?
다름 아니라, 인력관리 및 조직관리이다. 조직은 어떻게 관리하는가? 인력은 어떻게 관리하는가? 인력관리와 조직관리의 요체가 무엇인가? 바로 효율이다. 다시 말하면 투입 대 산출의 관계에서 그 생산성을 극대화 시킨다는 것, 그게 바로 경영의 지혜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어떻게 이끌어가는가, 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요즈음 각광받고
있는 소위 리더십이다.
그런데 언제 노자가 그런 언급을 했던가? 아니 노자의 어떤 발언이 ‘경영의 지혜’로 분류할 만한 것이 있었던가? 대체 최교수는 노자의 어떤 발언을 리더십으로, 경영의 지혜로 분류하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노자가 이를 알면 기가 막혀 할 것이다. 노자가 그저 기가 막혀!!!!
2013.11.04 18:57:03
죽음을 앞두고는 누구나 철학자가 되는 모양입니다. 이병철의 글, 읽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우선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신 존재에 대한 질문이니
무슨 말로 그 질문에 대답했을지 궁금합니다.
그러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인간은 어찌할 수 없음에
그게 바로 무위의 경지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위.......참 엄청난 단어입니다
무위라 쓰고 ...어렵다, 고 읽어야 하는 단어
모르겠다, 라고 읽어야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요.
무위에 관해 논한 글들을 읽을 때에는 손에 잡히는 듯 하다가
책을 덮고 나면 손안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산산히 사라져 버리는
그러한 말, 무위
스스로 그러함도 그런 무위 속에 하나이겠지요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므로, 한다는 것이 고작 부처 손바닥 안의 손오공같은 것
정말 신 존재 앞에 우리는 그래서 겸허히 무릎 꿇어야 하는데
나...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서.....그러네요.
무위....더 열심히 파 보려고 하는데
잡히는 것, 있으면 같이 하시게요.....
2013.11.05 17:45:30
예, 목사님,
고 이병철회장의 질문에 가톨릭 차동엽신부가 책을 내었네요
당시에 질문을 받은 신부(정의채)가 답을 드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차동엽신부가 <잊혀진 질문>이라는
제목으로 25년만에 공개한다고 되어 있네요.
그외에 스님, 목사님, 철학자들이 개인적으로 답한 게 있더라구요.
(제 개인적으로는 아퀴나스<신학대전>번역하신 정의채신부님 답변이 젤루 궁금하네요)
우리 모두 그럴 겁니다. 그런 질문들 앞에서
나름대로 '답'을 써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도그마적, 도식적인 답변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영성의 깊이에서
끌어올려진 답을 낼 수 있느냐가 중요한 관건이겠지요.
그런 생각하면 저는 참 착잡해집니다.
올려주신 글들 찬찬히 보면서 또 답글 드리겠습니다.
고 이병철회장의 질문에 가톨릭 차동엽신부가 책을 내었네요
당시에 질문을 받은 신부(정의채)가 답을 드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차동엽신부가 <잊혀진 질문>이라는
제목으로 25년만에 공개한다고 되어 있네요.
그외에 스님, 목사님, 철학자들이 개인적으로 답한 게 있더라구요.
(제 개인적으로는 아퀴나스<신학대전>번역하신 정의채신부님 답변이 젤루 궁금하네요)
우리 모두 그럴 겁니다. 그런 질문들 앞에서
나름대로 '답'을 써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도그마적, 도식적인 답변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영성의 깊이에서
끌어올려진 답을 낼 수 있느냐가 중요한 관건이겠지요.
그런 생각하면 저는 참 착잡해집니다.
올려주신 글들 찬찬히 보면서 또 답글 드리겠습니다.
2013.11.05 22:27:18
얼마 전에 신천지에서 만든 신문인가, 유인물에서 그 질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차동엽 신부님이 쓰신 글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한번 찾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힌 질문 앞에 두고, 과연 어떻게 대답을 했을지, 궁금해 집니다.
라라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교과적인 답변이야 누구든지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삶 그리고 영성을 바탕으로 하는 답변, 그런 것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본인도 속이 시원하고 물어 본 사람도 그럴 것인데..
우선 차 신부님의 글, 읽어봐야겠습니다.
귀한 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런데 차동엽 신부님이 쓰신 글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한번 찾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힌 질문 앞에 두고, 과연 어떻게 대답을 했을지, 궁금해 집니다.
라라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교과적인 답변이야 누구든지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삶 그리고 영성을 바탕으로 하는 답변, 그런 것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본인도 속이 시원하고 물어 본 사람도 그럴 것인데..
우선 차 신부님의 글, 읽어봐야겠습니다.
귀한 글, 정보 감사합니다.
삼성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폐암으로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가톨릭 신부에게 종교, 신에 대한 질문 24개를 적어 보냈다지요?
저도 인터넷에서 읽어 봤는데,
하나님의(신,창조주로서)존재증명에 대한 질문이 첫번째, 두번째더군요.
나머지도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이구요.
그러다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인가?" 이 질문이 눈에 띄였어요.
이 분이 부자라서 그럴까요?^^
이 '부자'들에게 노자강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더 부자만들기 프로젝트 일까요? ^^
목사님께서 누누히 강조하시는 것처럼,
노자의 道, 無爲는
죽음을 앞둔 이병철회장의 질문처럼
절박함, 그 자체가 아닐런지요?
그 어떤 절체절명의 순간에 맞닥뜨릴 수 있는,
'본질'에 대한 깨달음 말이어요.
그렇게 봐서인지 저는 이 '무위'라는 단어만 들어도
'스스로 그러함' 의 경지에 대해 아득한, 경외감이 생깁니다.
마치, 신의 존전에 와 있는 것 처럼요.
우리의 힘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무위를 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가히 '신의 존재증명, 창조주로서의 존재증명'의 영역일지도 모르는데요.
평안한 주일 저녁입니다.
집안 볼일이 있어 나들이를 하고 왔는데
온 산이 오색단풍이더군요.
저수지 아래 물구나무 서 있는 산이
피식 웃게 만들었어요.
엄청 자랑질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