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읽기

 

-  길 잃어버린 양 ‘들’의 고백 / 눅 15: 3 – 7

 

들어가는 말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서 양 백 마리를 치는 목자는 그중에서 한마리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그 양을 찾으러 나섭니다. 그 한마리를 찾아온 뒤, 그것을 기뻐하면서 친구와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비유 끝에 예수님은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7) 라는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잃은 양의 비유를 꺼낸 이유인즉, 결론 부분에 나온 것처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사실 하나가 사람들 마음을 껄끄럽게 만들어 놓게 됩니다. 즉 사건이 일어난 장소 – ‘들’이라고 언급된 - 가 어딘지는 몰라도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으러 가면서 나머지 99마리를 그냥 방치하고 가는 것은 아니냐 하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리 양 귀한 줄은 알면서 나머지 99마리 양은 귀한 줄 모르는 것 아니냐? 아무리 한마리가 귀하다 할지라도 나머지 99마리 양은 더 귀한 것 아니냐? 간단히 생각해서, 숫자적으로 보아서 99배가 더 많은데, 그렇지 않느냐? 한마리가 없어졌으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처럼 이제 더 이상 길 잃는 양이 생기지 않도록 단속을잘 해 놓을 것이지, 한 마리 양을 찾는다고 나머지 양을 방치해 놓고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그 한 마리를 찾으러 간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는 항변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항변을 듣기 전에도, 이 본문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항변과 같은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런 비유를 들었을까?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간다고? 그럼 목자가 버리고 가다시피 해버리면 나머지 99마리 양은 어찌 하라고? 99마리 양이 더 귀하지 않은가? 숫자적으로 보아도 99마리 양이 더 귀하지! 만약에 한마리 양을 찾으러 간 그 사이에 다른 짐승들이 나머지 양들을 습격해서 더 많은 양을 잃어버리게 되면 뭐라 변명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한마리 양쯤은 그냥 모른 채 하고 나머지 99마리나 잘 건사하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 항변 아닌 항변을 듣는 순간에 예수님의 말씀에 의문을 가지게 되거나, 아니면 말씀에 대한 주목도가 떨어져서 예수님의 말씀 의도가 희석 또는 반감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항변에 대처하는 방법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주안점은 잃어버린 양 한마리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하려고 하는 바는 잃어버린 한 마리가 귀중하다는 것이지만 결코 나머지 99마리가 귀중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런 식으로 변명이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넘어간다면 예수님이 불완전한 비유를 했다, 즉 헛점이 보이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주안점은 아니지만, 목자의 그런 행동이 나머지 99마리에게는 어떠한 영양을 미치는지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양 - 길 잃어버린 후의 –의 고백

 

우리가 이 비유를 들을 때에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런 제 3자의 위치에 설 게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런 양 한마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입장바꿔 생각하기,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시각을 바꿔봅시다. 우리가 이제는 양 100마리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100마리 양 중에 하나라면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지금 백마리 양의 하나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나는 그 목자가 기르고 있는 백 마리 양 중의 한마리입니다.

목자의 인도아래 잘 먹고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목자가 안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절, 반나절을 그 자리에 발이 묶여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풀도 이제 다 떨어져 가고 물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자 원망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아니 우리 목자는 뭐하길래, 우리를 이렇게 방치해 두고 있는거냐’ 하고 여기저기서 원망이 자자해지는 판에 우리 친구중 누군가 말했습니다. ‘우리 목자가 안보이는 것은 우리 백명중의 하나인 양돌이가 집을 나갔기에 그 놈을 찾으러 나갔대’

 

그런 말이 돌자, 이번에는 그 양돌이에게 원망의 화살이 돌아갔습니다. ‘아니 왜 그 얘는 길을 잃어버려서 우리가 피해를 입게 만드는거야?’ 그렇게 양돌이와 목자 모두에게 원망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반나절이 지난 다음에 양돌이와 목자가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부랴부랴 우리를 인도해서 푸른 풀밭으로, 신선한 물이 있는 시냇물로 인도해 주었고, 그제서야 주린 배, 목마른 목을 축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목자와 양돌이에게 원망의 눈초라를 쉽게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우리 목자는 친구와 이웃을 볼러모아 잔치를 벌였지요, 집나간 한 마리 양을 찾은 것이 그 정도로 기쁘다는 것이겠지만, 그래서 돌아온 양 양돌이도 기쁨에 겨워했지만, 그러나 나머지 99마리인 우리들은 그저 심드렁했을 뿐입니다. 원래 있었던 양이 나갔다 들어왔으니 재산적으로도, 별 이익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 목자가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지요.

 

그렇게 며칠이 흘렀습니다.

목자의 인도아래, 목자의 뒤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그가 인도하는 대로 풀도 뜯고 물도 마시면서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열심히 목자뒤를 따라간다고 했는데, 아니, 그 뒤를 따라간다고 생각했는데 풀을 열심히 뜯고 있다가 문득 눈을 들어보니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친구들도 목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맛있는 풀을 따라 오다 보니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친구들도 목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 나혼자 맛있는 풀을 따라서 다니다가 그만 일행에서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이제 어떡하나요? 아시다시피, 우리 양들은 혼자서는 제대로 길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넓은 광야에서 어떻게 저 혼자 우리 친구들과 목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설사 제가 찾아나선다 할지라도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곰들과 늑대들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내가 없어진 것을 누군가 알고, 특히 목자가 알고 나를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에 바로 엊그제 일어났던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엊그제 양돌이가 집을 나갔다고 우리 친구 99마리를 들에 두고 찾으러 나간 목자를 제가 그렇게 원망했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제가 만일 그때 우리 목자를 우리를 그냥 두고 양돌이를 찾으러 가면 안된다, 99마리가 더 중요하지 않느냐, 하면서 그를 막았더라면 양돌이는 결국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 우리 목자의 그 때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우리 99마리가 더 귀하다고 한마리 양을 찾으러 나가지 않았더라면 양돌이는 짐슴의 밥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고, 지금의 나도? 그런 운명, 마찬가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제 저 혼자 떨어져 나와 길잃은 양이 되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됩니다. 왜냐구요? 우리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마리인 나를 찾아 99마리를 들에 둔 채 찾아나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든 생각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마리 – 그것이 누구이든지, 나 말고 – 를 찾으러 가지 않는다면, 내가 길을 잃어버린 경우에도 나를 찾아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서야 우리 목자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한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목자, 그는 양 백마리를 모두다 같은 정도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만일에 누군가 우리중 한마리가 길을 잃어 그렇게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면, 이제 우리가 나서서 목자의 등을 떠밀어야 할 것입니다. 어서 나가서 그 한마리를 찾아오시라고! 그냥 두시면 그 양은 분명 굶어죽거나, 잡혀 먹히기 때문에 우리 곁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에 우리가 나서서 등을 떠밀러 어서 찾아오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양 한마리는 제 3자 그 누군가가 아니라 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결국은 나인 것입니다. 우리 속담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 없다' 는 말이 여기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99마리의 양이 굳이 그 한마리 양을 뭐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해당되지 않는다고 그 한 마리를 시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한 마리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일이라 생각해 보면 답이 간단하게 나옵니다.

 

역지사지, 쉬운 말로 표현하지면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하자는 것인데,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으러 나가 한나절을 99마리를 방치했던 것 같으나 실상은  백마리 모두를 찾으러 나섰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잃은 양 비유는 언뜻 들으면 빈틈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어느 양 한 마리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 것 같고, 99마리 양은 버려두는 것처럼 보여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런 행동이야말로 양 백마리를 모두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더 사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비유는 조그만 헛점도 없는 완벽한 비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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