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없이 성경읽기

 

일어나서 먹어라 / 요 21: 1-14, 왕상 19: 1-8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나타나신 장면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눈에 뜨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40-43)

 

자기 몸을 보여주시면서까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시던(눅24:36) 예수님이 뜬금없이 먹을 것이 있느냐 물으시더니, 있다 하니까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바로 잡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세월호 참사를 겪고 있는 가족들이 모여있던 진도체육관에서 컵라면을 먹던 어떤 장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라면이 넘어갈까요? 애통해 하는 실종자 가족들은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채 비통해 하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 컵라면 먹을 생각이 났을까요? 물론 산 사람은 먹어야겠지요. 먹어야 사니까. 그러나 그것도 상황 나름이 아니겠습니까? 정, 그렇게 못견디게 배가 고프면, 장관 정도 되면 어디 먹을 자리가 없었겠습니까? 다른 조용한 곳, 사람들 눈이 없는 곳에서 먹으면 더 잘 먹었을 것이고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예수님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에 구운 생선 한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42-43)

 

‘그 앞에서’ 라는 말이 참으로 절묘합니다. 많은 사람이 있는 앞에서, 사진기자가 그런 장면을 분명 찍을 것이 분명할 텐데 라면을 맛있게 먹은 그 장관의 상황과 어찌 그리 똑 같은지요. ‘그 앞에서’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다 쳐다보는 가운데에서, 라는 말입니다.

 

왜 그리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죽을둥 살둥 하는 절체절명의 시간에 벌벌 떨고 있다가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게 되어서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판인데,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 앞에서 생선 토막 하나를 잡수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여기서 그친다면 그 장관과 다를 바 없겠지만  그  다음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물어보신 다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 21:12-14)

 

그렇게 음식을 혼자 드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조반을 손수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무얼 드시고, 또는 제자들에게 무얼 먹도록 해 주신 사건들, 어찌 보면 불필요한 사건들처럼 보이는데,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디 그뿐인가요? 열왕기상 19장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왕상 19: 4-8)

 

이사벨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가던 엘리야는 절망의 자리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그를 먹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처럼, 성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먹이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왜 성경은 그런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 먹이고 계시는 것일까?

 

그래서 그 두 경우를 살펴보아,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을 먹일 때의 상황은 어떤 것일까요?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의 모습은 어떤가요? 예수님과 같이 하면서 열과 성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러 뛰어다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혀 방문을 잠그고 꽁꽁 숨어 있었고 그 후로도 아예 자기들의 고향으로 낙향하여 어부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의 경우는?

엘리야는 자기 인생의 최대 위기에서 어찌 할 바 모르고 심지어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절망 속에 빠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극도로 공포에 사로잡힌 엘리야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어떤 것도 시도해 볼 생각을 하지 않고 누워 잠을 청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 - 특히 누군가 옆에 있지 않고 혼자 있을 때 - 에는 마치 이 세상이 망한 것 같이 느껴지고, '내가 더 살아 무엇하리요' 하는 절망감에 사로 잡혀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상 두 경우를 살펴보았는데, 그렇게 사람이 어떠한 충격을 받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심지어 죽음을 생각할 때에 성경은 그들에게 '일어나 먹으라', 그래서 먹이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저 같으면 각각 당사자를 불러 놓고,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그러므로 네가 이러면 되겠느냐' 라며 따끔하게 혼내주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설득을 해보려고 할 것인데 성경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저 먹을 것을 만들어 그들을 먹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집단적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요즈음 세월호 참사로 인해서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사건에 해당되는 관련 가족들은 차치하고, 우리 온 국민들 사이에 '일이 손에 안 잡힌다', '무엇을 하려 해도 그 사람들 생각이 나서 할 수가 없다', 는 증상으로 대표되는 집단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자식들이 그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이 자기에게도 닥칠뻔한 일이니까,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끔찍한 생각이 드는 것이고, 또 그런 끔찍한 광경들을 티브이를 통해 실시간으로 아주 생생하게 중계를 하고 있으니까 발달된 영상매체의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그런 증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이 치료를 위해서 많은 조언을 해 주고 있는데 그 중 몇가지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들이 취할 행동은 티브이 시청을 끊고, 그런 뉴스에 관심은 기울이되 티브이로 보지를 말고 신문으로만 보라는 것입니다. 왜냐? 티브이는 신문 활자 매체와는 달라서 마치 저기가 경험하는 듯한 생생한 감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 뇌에 더 생생하게 기억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티브이 방송에서는 계속해서 같은 장면을 여과없이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모든 국민들이 그렇게 트라우마에 잠기라고 아주 대놓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니 그런 영상 매체 대신에 활자 매체인 신문으로만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둘째, 실종자와 희생자 유가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혼자 두면 안 좋다는 것입니다.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분이나, 우울증 내력이 있는 분들은 절대로 혼자 두어서는 안 되며, 매일매일,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게 필요합니다.  더하여 그들을 원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조치가 필요한데, (쌍용차 해고자들을 치유하고 있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아주 핵심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일상의 복원’이다. …쌍용차 해고자들 대다수가 부부관계, 이웃관계, 이런 일상이 다 무너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와락’이 자신들을 위한 공간이며 ‘와락’에 가면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도록 할 것이다. ‘나도 옛날에 이렇게 살았지, 이렇게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지’라는 자극을 일상에서 많이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일상의 복원을 위해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식당'인데,  정박사는 “치유의 시작이자 핵심은 일상의 기본인 밥을 먹는 것”이라며 “‘와락’에서는 따뜻하고 정갈한 밥을 늘 공급할 것이다. 엄마가 따뜻한 밥을 해주듯이 기본적인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상처받은 사람들을 일상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 핵심적인 것이 바로 밥을 먹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보니까, 제가 왜 그럴까? 왜 그럴까? 하면서 의아해 했던 것들이 이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친히 먹이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것을 알 수 있거니와, 두 번씩이나 같은 말씀으로 권면하면서 엘리야를 먹이고 힘을 내도록 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 바로 상처를 입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인 제자들과 엘리야에게 다가가셔서,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이전에 먹이시고, 힘을 주시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심신이 아주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는 방법인 것입니다.

 

엘리야를 먹이신 하나님

 

보십시다.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엘리야를 일으켜 세우시느냐?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여기서 재미있는 묘사가 있습니다.

열왕기를 기록한 기자는 그 음식물을 먹고 난 엘리야가 무려 사십 일간을 걸어갔는데 그렇게 만든 것이 무엇이냐? 바로 엘리야가 ‘먹고 마신 그 음식물의 힘’이라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이라고 하지 않고 ‘음식물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을 해 먹여 배를 든든하게 한 다음에, 그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심어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밥만 잘 먹더라.”

 

그제서야, 아 성경에 예수님이 생선을 잡수신 것, 제자들에게 생선과 떡을 먹게 하시는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이러한 것 때문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사소한 곳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주신 것을 먹으면서, 또한 엘리야가 일어나 먹으면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당신의 백성을 보듬어 주면서 ‘밥먹자, 힘들지?’ 하면서, ‘그래 밥먹고 어서 기운 차려야지, 이제 기운내야지, 그래서 새 일을 해야지!’ 하는 다독거리며, 힘을 내어 새로운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언젠가 들었던 유행가 한 곡이 떠올랐습니다. 노래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밥만 잘 먹더라.”

 

<사랑이 떠나가도 가슴에 멍이 들어도 한 순간뿐이더라

밥만 잘 먹더라 죽는 것도 아니더라

눈물은 묻어둬라 당분간은 일만 하자

죽을 만큼 사랑한 그녀를 알았단 그 사실에 감사하자>

 

물론 유행가 가사 속의 이야기와 세월호의 상황은 다릅니다만,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근본적인 상처는 모두 같습니다. 상실의 고통, 연인과 자식들, 내 사랑하는 이가 떠나간다, 그렇게 아픔이 있을 때 눈물은 묻어둬라, 당분간은 일만 하자. 이제는 그러한 상처에 목매지 말고 일어나 밥먹고 일하자, 는 말이지요.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갔지만, 그 슬픔에 잠겨 인생이 끝났네, 하늘이 무너졌네 연연해 하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밥도 잘 먹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아주 쿨한 모습. 저는 오히려 이런 모습이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밥 잘 먹고 힘을 내십시다.

 

그렇게 해서 음식을 먹고 사십 일간을 걸어간 엘리야에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 다시 한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에 빠진 엘리야를 먼저 먹이셨다. 예수님은 절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먹을 것이 있느냐 물으시고, 그로부터 시작해서 제자들을 먹이고,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누구처럼 남이야 먹든 말든 자기 혼자 라면을 허겁지겁 먹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라면, 그래서 '남이 아프던 말던 상관없이 나만 괜찮으면 좋아'라는 심보가 요즈음 세태의 모습이라면, 몸소 식사를 만들어서 제자들에게 먹게 해주시는 예수님, 그리고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 먹게 하여 힘을 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지금 이 시점의 그 힘든 마음에서 어서 벗어나, 새롭게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밥을 잘 먹고 힘을 내십시다. 우리만 잘 먹고 힘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과연 밥을 잘 먹고 있는지 살펴서 그로 하여금 먹고 힘을 낼 수 있도록 애쓰고 수고하는 우리 되기를 바랍니다.  절망과 우울 속에 빠져 있지 말고, 힘을 내어 한번 이런 슬픔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하십시다. 이렇게 음식을 먹이고 일으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슬픔에 잠겨 있는 가족들에게도, 그리고 슬퍼하며 갈 길 몰라 헤매고 있는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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