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 정의와 평화(미가 4:1~5)
Remembrance Sunday / 2009. 11. 8 / 런던 트리니티 교회
예언자 미가는 유다 왕 요담(B.C. 747-742), 아하스(B.C. 742-725) 그리고 히스기야(B.C. 725-697) 때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남서쪽 유다 구릉지대의 한 작은 촌락인 모레셋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성장 배경이나 어떤 과정을 거쳐 예언자자 되었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성서를 통해서 그의 신상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상당히 적습니다. 그는 유명한 예언자 이사야와 동일한 시대를 살았고 두 사람이 행한 예언에 비슷한 내용이 제법 됩니다. 오늘 본문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 이사야 2장 1절부터 4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가는 예언활동을 하기까지 매우 가난한 소농(小農)에 속하여 가진 자들로부터 착취와 억압을 당하며 지냈습니다. 나아가 B.C.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을 친히 겪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사회적 불의와 부정 그리고 전쟁의 잔혹함과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였습니다. 그런 삶 가운데서 예언자로 부름 받은 그는 권력자, 부자, 고위 관료들, 종교 지도자들의 눈치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을 용감하게 전했습니다. 몇 가지만 살펴보실까요?
2장 1절부터 5절은 <부자들의 탐욕>을 질타하는 내용입니다.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주인도 부려 먹는구나.” (공동번역. 1,2절) 이는 물질적 탐욕에 눈이 먼 당시 부자들을 향한 거침없는 공격입니다.
이것을 가난한 미가가 피해의식에 젖어서 부자들을 혐오한 나머지 이런 설교를 행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는 지금 개인감정이나 열등의식에 빠져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물질적 풍요나 부(富) 혹은 부자(富者) 그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권력과 손잡은 부자들의 불의하고 부당한 횡포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정의(正義)에 위배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웃과 동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과 편중은 언제나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부의 독식은 심각한 소외와 차별과 갈등을 낳습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미가는 이런 점에 근거하여 부자들에게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한 것입니다.
3장 1절부터 4절은 <부패한 지도자들>에 대한 엄중 경고입니다. “이것은 내 말이다. 야곱 가문의 어른들은 들어라.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들은 들어라. 무엇이 바른 일인지 알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선을 미워하고 악을 따르는구나! 내 겨레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며, 내 겨레의 살을 뜯는구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미어 남비에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구나.” (공동번역. 1~3절).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하느님의 법은 쇠귀에 경 읽기 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공평한 법(法)에 근거하여 함께 더불어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훼 하느님 백성다운 공동사회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지도자들은 이런 하느님의 뜻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쳤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피와 눈물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이기심을 극대화 시키고 있었습니다. 힘없는 이들은 엄격한 법 적용으로 온갖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 반면 지도자들은 법을 비웃으며 살았습니다.
3장 5~8절은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미가가 살고 있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 활동이 진행되고 있었고 제사장들과 다른 여러 예언자들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옳게 전달하고 가르쳐서 백성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 종교 지도자의 임무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내 겨레를 그릇된 길로 이끄는 예언자들을 두고 야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라는 것들, 입에 먹을 것만 물려주면 만사 잘 되어 간다고 떠들다가도 입에 아무것도 넣어 주지 않으면 트집을 잡는구나!”> (공동번역. 5절)
한마디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눈이 먼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이다, 아무 염려 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라고 설교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죄를 짓든 말든, 말씀을 준행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습니다. 돈을 받으며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듣는 이들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설교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는 것 같습니다.
3장 9절부터 12절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불의>에 대한 고발입니다. ‘예루살렘의 어른이라는 것들은 돈에 팔려 재판을 하고 사제라는 것들은 삯을 받고 판결을 내리며 예언자라는 것들은 돈을 보고야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야훼께 의지하여,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재앙은 무슨 재앙이냐?" 하는구나!’ (공동번역. 11절). 재판관들은 뇌물에, 사제들은 삯에 예언자들은 돈에 눈에 멀어 부패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미가가 지도자들을 향해 이처럼 신랄한 공격을 퍼 부운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도자의 책임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의 부정과 타락은 결국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며 공동생활을 파괴하는 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가의 이런 선포는 단순한 사회 개혁이나 정의 구현 차원에서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정치 혁명가나 사회 개혁가 혹은 종교 개혁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의 예언은 종말론적 하느님의 나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전혀 새로운 질서입니다. 미가가 행한 선포의 뿌리는 바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미가 뿐 아니라 이사야나 아모스 같은 예언자들이 유난히 정의를 강하게 부르짖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에 기초하지 않은 불의, 부정의, 부패, 향락, 방종, 타락은 그 분의 심판을 자초한 것인데, 하느님은 때때로 이방민족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징계하신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미가와 같은 예언자들의 인식에 따르면 주전 721년에 있었던 앗수르에 의한 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느님의 심판과 징계의 결과입니다. 또한 그로부터 약 20년 후에 일어난 앗수르의 산헤립에 의한 유다 지역 침공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이 같은 예언자들의 현실인식에 따르면 정의와 평화는 언제나 궤를 함께 하는 요소입니다.
미가가 경험한 전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전쟁의 원인을 현상적으로 보면 그것은 그저 정치외교적인 것입니다. 당시 중동의 패권은 앗수르가 쥐고 있었고 유다 왕 아하스와 히스기야는 한 동안 앗수르와의 동맹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산헤립 때에 이르러 히스기야는 애굽을 등에 업고 산헤립에 반기를 들었습니다만 애굽이 산헤립에 패배하는 바람에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는 봉신의 위치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런 격동의 시기 때문에 선량한 백성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미가는 전쟁을 겼었지만 전쟁 자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대신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핵심 내용 중의 하나인 <평화>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구약학자들에 따르면 오늘 본문은 미가가 직접 말한 내용이기 보다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생겨난 종말론적 표상이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합니다.
1절은 온갖 사회적 불의와 처절한 전쟁 저 너머에 있는 세계, 즉 모든 싸움이 끝나고 생명이 완성되며 성취되어 가는 하느님의 평화의 나라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2절은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 권력이 지배하는 지상의 어떤 제국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작용하는 곳이라 말합니다. 온 민족이 자발적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통치에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하느님 나라 통치의 주된 내용은 다름 아닌 정의와 평화라고 선포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전쟁과 분쟁 대신 평화가 편만한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임하면 문명과 문화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고 파멸에 빠뜨리는 무기들이 건설의 도구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면 민족들 간에 전쟁과 전쟁 욕구가 종식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민족 사이의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 강대국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시리라. 그리 되면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칼을 빼어 드는 일이 없어 다시는 군사를 훈련하지 아니하리라.” (공동번역)
성서 기자들은 주변 강대국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을 언약백성들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 때문에 하느님께서 강대국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내리 치셨다는 것입니다. 그 죄란 이미 2장과 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불의와 부정의를 말합니다. 미가도 자신이 겪은 전쟁을 그렇게 이해한 듯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학적 해석이자 신앙 고백입니다.
하지만 전쟁은 일으킨 쪽이나 당하는 쪽 모두에게 비참한 결과를 낳게 합니다. 당하는 이들은 죽음에의 공포와 아픔 그리고 이별과 상실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전쟁을 일으킨 쪽도 예외는 아닙니다. 전쟁은 인간성을 말살합니다. 하느님의 형상은 온 데 간데없고 야만성과 광기만이 서로를 잔인하게 죽일 뿐입니다. 국가 간에 입은 상처도 쉽게 아물지 않을 뿐 아니라 적군을 살상한 이들도 죄책감 때문에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물론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습니다. 전쟁 참전자 들 중에 알코올, 마약, 폭력 등에 빠져들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대량살상용 전쟁무기의 끝없는 발달과 군수업자들의 영향력 확대일 것입니다. 전쟁은 하느님의 소중한 형상들을 무차별 파괴합니다. 개개인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과 역사가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전쟁은 하느님 나라에 가장 역행하는 죄악 그 자체입니다. 추악한 인간적 욕망의 최고 극치가 바로 전쟁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주의자이십니다. 기독교 복음은 평화를 지향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전쟁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은 전쟁을 품을 수 없습니다. 산상설교를 통해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공동번역. 마 5: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을 장식하던 때 예루살렘 성을 들어가시면서 ‘작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평화의 왕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칼로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께서는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공동번역. 마 26:5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폭력과 전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를 대망하며 그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된 속성은 바로 정의와 평화입니다. 그렇지만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소극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 각 구석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적극적 개념입니다. 그런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평화의 세계,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아멘!
현 영국 노동당 정부는 아프간 전쟁 때문에
갈수록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잃고 있어요.
이젠 철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구요.
아래 사진은 지난 10월 30일 자 Daily Mail 지에 난 것인데
아프카니스탄에서 부상당하여 돌아온 장교와 병사들 모습입니다.













신완식
paul


어느 시대 어느 곳을 가나 <부자들의 탐욕> <부패한 지도자들> <거짓 종교 지도자들> <지도자들의 불의>는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큰 세상의 혼돈 속에서 미가와 같은 작은 외침이 더욱 빛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지금은 <거짓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미가와 같은 진실된 외침이 가려지나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언젠가는 암흑과도 같은 세상에서 생명으로 향하는 더욱 밝은 등대가 되겠지요.
부디 목사님께서도 어둠에 안주 하지 않고 항상 주님 안에서 밝은 등대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