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사회적 약자


이 글의 제목 “기독교와 사회적 약자”는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기독교가 소위 고등종교로 자처한다면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기복신앙에 치우쳐 있는 샤머니즘 류나 극단적 밀의종교 집단이 아니라면 모든 종교는 당연히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 각각 종교 사이에도 입장의 차이가 있다. 예컨대 ‘용산참사’만 해도 그렇다. 불교, 개신교, 가톨릭이 각각 여기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거칠게 구분하면 가톨릭이 가장 강하게, 다음으로는 개신교가, 그리고 불교가 가장 나이브하게 대처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지난날 군사독재 시절에 정치 민주화와 경제정의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왜 가톨릭과 개신교로 대표되는 기독교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에서 불교보다 더 적극적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다음의 사실을 밝혀두어야겠다. 이 글은 여러 종교를 비교하거나 가치 평가를 내리는데 그 무게가 있는 게 아니다.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는 필자가 그런 문제를 언급할 수도 없다. 주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와 그것의 해석인 신학에 근거해서 필자의 입장을 펼칠 수 있을 뿐이다. 기독교가 사회적 약자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는 말에도 한계가 있다. 한국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한기총’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구제의 차원에서 접근할 뿐이다. 가난은 단순히 개인의 동정심에 근거한 구제의 차원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도 접근되어야 하는데, 한기총은 후자의 차원을 무시한다. 기독교가 사회적 약자를 적극적으로 편드는 이유에 대한 필자의 설명은 한국교회 전반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현상이라기보다는 신학적 당위에 대한 해명일 뿐이다.

위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기독교의 고유한 세계이해, 역사이해에 자리하고 있다. 유대교의 구약성서와 기독교의 신약성서는 이 세계를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세상’이라는 똑같은 단어이지만 공간적인 관점이 강한 헬라어 ‘코스모스’와 시간적인 관점이 강한 히브리어 ‘에온’에서 이 차이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을 시간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접근한다는 말이다. 그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자리이다. 그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그런 세상을 구약성서는 ‘에온’이라고 표현했다. 지난 에온은 물러가고 새로운 에온이 다가온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은 유대교에서 묵시사상으로 정형화되었다.

유대의 묵시사상은 초기 기독교의 역사철학이라 할 수 있는 종말론의 단초가 되었다. 종말론도 당연히 묵시사상처럼 세상을 시간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이는 곧 인과율적 역사 개념을 넘어서는 관점이다. 이 세상이 종말을 향해 열려 있다는 뜻이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이 세상을 영원회귀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실현되는 시간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특징은 변화와 과정이다. 종말론적으로 열린 이 세상과 역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고 변화된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그 변화를 위해서 투쟁하면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내용이 있다. 이런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곧 그런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이런 신앙적 태도에 근거해서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이 세상과 역사 앞에서 도전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을 놓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서양의 역사에 혁명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런 기독교의 종말론적 역사관에 놓여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창하는 마르크시즘은 기독교 종말론의 세속화이다. 이에 반해 윤회적인 불교와 무위적 노장이나 위계질서에 충실한 유교 사상이 중추로 작동되는 동양에서는 혁명이 불가능했다. 박노자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동학혁명도 사실 농민들의 양반을 향한 항거였지 위계의 정상에 자리한 왕을 끌어내리려는 혁명은 아니었다. 동양은 태생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성서적 근거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성서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짚어보자. 구약성서를 크게 분류하면 세 장르다. 첫째는 율법서, 둘째는 예언서, 셋째는 성문서이다. 각각의 문서들이 말하는 핵심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에 사회적 약자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율법서의 역사적 배경은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억압을 받던 사람들의 절규를 들으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구해낸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성서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다음이다. 종살이와 사회적 불의는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사회악이다. 따라서 출애굽 공동체인 이스라엘은 사회적 소수자를 보살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원주민들을 군사력으로 제압하는 행위는 자신들의 성서가 말하는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몇 구절만 인용하겠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인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 22:21-23)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두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 15:12-14)


율법서만이 아니라 예언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니 더 노골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편파성(Parteilichkeit)을 주장한다. 사회적 약자들을 멸시하는 부자와 귀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애 5:28,19)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암 5:7) 이런 구절을 인용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오늘 그 어떤 정치 이념적 해방 선언보다 더 신랄하게 불의를 행하는 부자와 권력자들을 비판한다.

구약성서가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 등, 사회 소수자를 거의 편파적이라고 보일 정도로 싸고도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일은 주로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이 수단으로 다뤄지는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일어난다. 성서 전통은 그런 일을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으로 보았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그들을 제도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대표적으로 안식일, 안식년, 희년제도가 것이다. 그것은 왜곡된 사회질서의 회복을 말한다. 모든 빚은 탕감되어야 한다. 모든 노예는 해방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의 참된 쉼이 보장되어야 한다. 심지어 생태계도 쉼을 얻어야했다. 

신약성서는 기본적으로 구약정신을 이어받는다. 복음서 중에서는 누가복음이 가난한 자에 대한 입장이 가장 확고하다.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는 노래를 부른다.(눅 1:52,53) 예수님이 회당에서 처음으로 읽은 구약성서는 이사야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마태복음도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마 5:1-12) 이런 전통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들, 노예들이 많이 들어왔다. 바울은 그 당시 교회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지난 2천년 역사에서 기독교는 두 가지 차원에서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 문제를 대처했다. 하나는 구제활동이다. 주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을 지켜온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활동이다. 이런 전통은 개인윤리의 차원에서 가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 제도를 개혁하려는 정치투쟁이다. 정치신학과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주로 이런 입장을 취한다. 이런 전통은 사회윤리에 강조점을 둔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이런 두 전통이 분리되어 있다. 소위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사이에서 벌어지는 노선 갈등이다. 이건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구제와 제도 개혁은, 그리고 개인과 사회는 불가분리이다. 기독교인은 가난한 이들과의 정서적 연대에 근거해서 구제에 힘쓰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가난을 대물림하는 사회 구조의 변혁을 위해서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며,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똑같다는 말이다.


한국교회의 실상 

‘현대종교문화연구소’ 측에서 “기독교와 사회적 약자”라는 주제로 강연을 의뢰한 이유는 위와 같은 뻔한 말보다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과연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실제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듣고 싶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 부분에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말할 내용이 없다는 게 아니라 드러내놓고 말하기 부끄럽다는 뜻이다. 그래도 전반적인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만 짚겠다.

첫째는 동성애자 문제이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정서는 동성애를 죄로 규정한다. 하나님이 동성애자들을 ‘에이즈’로 치신다는 말이 설교 시간에 노골적으로 선포되는 실정이다. 둘째는 군복무를 거부하는 평화주의자들 문제이다. 한국에서 군복무를 신앙양심에 따라서 거부하는 이들은 대개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이다. 한국교회는 이들에게 대체 복무의 기회를 주자는 주장을 거부한다. 필자는 한국의 주류 기독교가 보이는 이런 행태를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이 그런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성서의 기본 정신과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전혀 모른다는 데에 있다. 그 이외에 크고 작은 이유를 대충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 기독교를 전한 초기 선교사들이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지금도 한국교회는 미국의 값싼 복음주의 교회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다. 오랜 일제식민 지배 아래서 피해의식이 깊어졌다. 남북분단 체제로 인해서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신앙의 차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려면 앞으로도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한편 한국교회는 구제 문제에서는 매우 성실한 태도를 취했다. 결식노인과 아동들을 위한, 또는 노숙자들의 쉼터 마련을 위한 구제활동에서는 에큐메니컬 진영이나 복음주의 진영을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북한 돕기 운동에서도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나 불교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나섰다. 심지어 기복적인 신앙을 뿌리내리게 했다고 비판을 받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평양에 심장병 어린이 전문 병원을 건축하기도 했다.


하나님 나라와 복지 문제

글머리에서 필자는 제목 자체가 이미 답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제목에서 암시하지 않은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 글을 정리하겠다. 그것은 기독교의 영적 지평이 가난한 자, 또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며 그들을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당위에 함몰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복지를 완벽하게 구비하는 것으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복지 문제는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적 착상이다. 기독교 신앙은 휴머니즘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구원은 피조물인 인간의 인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창조주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지의 모델을 북유럽 국가로 본다. 사람과 생태가 조화를 이루어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그런 복지 국가가 전 세계의 국가들이 꿈꾸는 미래일지 모른다. 복지가 최고로 구비된 공동체에서도 여전히 삶의 충만한 의미는 충족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태가 연루되어 있다. 첫째, 절대적 빈곤층이 없는 사회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없을 수 없다. 둘째, 복지를 통한 모든 행복한 조건들도 영원한 게 아니다. 사람은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사라질 것을 알고 있다. 좋은 조건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상실감이 훨씬 심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복지가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마가복음 14:3-9절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어떤 여자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사람들이 화를 냈다. 이 향유 한 옥합은 300 데나리온(대략 2천만 원)이나 값이 나가는 귀중품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그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게 옳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인간 구원은 가난을 복지의 차원에서 해결해 주는 데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차원에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는 뒤로 미루고 순수하게 종교 생활에만 천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잠정적인 문제 해결인 복지 해결이 인류 구원에서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필자의 생각에 복지 문제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국가가 그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도록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필요 없는 곳에 국가지출을 대폭 줄이고 복지 예산을 확장하도록 교회가 투쟁하는 것이다. 교회는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도울만한 물적 역량도 미미하지 않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이와 반대로 개인의 동정심만 자극하는 구제에만 기울어짐으로 결국 가난한 자들의 문제에서 무책임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현대종교문화 연구소 29회 종교 문제 세미나 “종교와 사회적 약자” 모임에서 행한 강연, 2009년 11월14일(토) 오후 2시, 대구교육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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