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사회적 약자
이 글의 제목 “기독교와 사회적 약자”는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기독교가 소위 고등종교로 자처한다면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기복신앙에 치우쳐 있는 샤머니즘 류나 극단적 밀의종교 집단이 아니라면 모든 종교는 당연히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 각각 종교 사이에도 입장의 차이가 있다. 예컨대 ‘용산참사’만 해도 그렇다. 불교, 개신교, 가톨릭이 각각 여기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거칠게 구분하면 가톨릭이 가장 강하게, 다음으로는 개신교가, 그리고 불교가 가장 나이브하게 대처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지난날 군사독재 시절에 정치 민주화와 경제정의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왜 가톨릭과 개신교로 대표되는 기독교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에서 불교보다 더 적극적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다음의 사실을 밝혀두어야겠다. 이 글은 여러 종교를 비교하거나 가치 평가를 내리는데 그 무게가 있는 게 아니다.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는 필자가 그런 문제를 언급할 수도 없다. 주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와 그것의 해석인 신학에 근거해서 필자의 입장을 펼칠 수 있을 뿐이다. 기독교가 사회적 약자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는 말에도 한계가 있다. 한국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한기총’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구제의 차원에서 접근할 뿐이다. 가난은 단순히 개인의 동정심에 근거한 구제의 차원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도 접근되어야 하는데, 한기총은 후자의 차원을 무시한다. 기독교가 사회적 약자를 적극적으로 편드는 이유에 대한 필자의 설명은 한국교회 전반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현상이라기보다는 신학적 당위에 대한 해명일 뿐이다.
위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기독교의 고유한 세계이해, 역사이해에 자리하고 있다. 유대교의 구약성서와 기독교의 신약성서는 이 세계를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세상’이라는 똑같은 단어이지만 공간적인 관점이 강한 헬라어 ‘코스모스’와 시간적인 관점이 강한 히브리어 ‘에온’에서 이 차이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을 시간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접근한다는 말이다. 그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자리이다. 그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그런 세상을 구약성서는 ‘에온’이라고 표현했다. 지난 에온은 물러가고 새로운 에온이 다가온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은 유대교에서 묵시사상으로 정형화되었다.
유대의 묵시사상은 초기 기독교의 역사철학이라 할 수 있는 종말론의 단초가 되었다. 종말론도 당연히 묵시사상처럼 세상을 시간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이는 곧 인과율적 역사 개념을 넘어서는 관점이다. 이 세상이 종말을 향해 열려 있다는 뜻이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이 세상을 영원회귀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실현되는 시간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특징은 변화와 과정이다. 종말론적으로 열린 이 세상과 역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고 변화된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그 변화를 위해서 투쟁하면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내용이 있다. 이런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곧 그런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이런 신앙적 태도에 근거해서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이 세상과 역사 앞에서 도전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을 놓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서양의 역사에 혁명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런 기독교의 종말론적 역사관에 놓여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창하는 마르크시즘은 기독교 종말론의 세속화이다. 이에 반해 윤회적인 불교와 무위적 노장이나 위계질서에 충실한 유교 사상이 중추로 작동되는 동양에서는 혁명이 불가능했다. 박노자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동학혁명도 사실 농민들의 양반을 향한 항거였지 위계의 정상에 자리한 왕을 끌어내리려는 혁명은 아니었다. 동양은 태생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성서적 근거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성서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짚어보자. 구약성서를 크게 분류하면 세 장르다. 첫째는 율법서, 둘째는 예언서, 셋째는 성문서이다. 각각의 문서들이 말하는 핵심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에 사회적 약자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율법서의 역사적 배경은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억압을 받던 사람들의 절규를 들으신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구해낸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성서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다음이다. 종살이와 사회적 불의는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사회악이다. 따라서 출애굽 공동체인 이스라엘은 사회적 소수자를 보살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원주민들을 군사력으로 제압하는 행위는 자신들의 성서가 말하는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몇 구절만 인용하겠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인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 22:21-23)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두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 15:12-14)
율법서만이 아니라 예언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니 더 노골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편파성(Parteilichkeit)을 주장한다. 사회적 약자들을 멸시하는 부자와 귀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애 5:28,19)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암 5:7) 이런 구절을 인용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오늘 그 어떤 정치 이념적 해방 선언보다 더 신랄하게 불의를 행하는 부자와 권력자들을 비판한다.
구약성서가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 등, 사회 소수자를 거의 편파적이라고 보일 정도로 싸고도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일은 주로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이 수단으로 다뤄지는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일어난다. 성서 전통은 그런 일을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으로 보았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그들을 제도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대표적으로 안식일, 안식년, 희년제도가 것이다. 그것은 왜곡된 사회질서의 회복을 말한다. 모든 빚은 탕감되어야 한다. 모든 노예는 해방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의 참된 쉼이 보장되어야 한다. 심지어 생태계도 쉼을 얻어야했다.
신약성서는 기본적으로 구약정신을 이어받는다. 복음서 중에서는 누가복음이 가난한 자에 대한 입장이 가장 확고하다.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는 노래를 부른다.(눅 1:52,53) 예수님이 회당에서 처음으로 읽은 구약성서는 이사야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마태복음도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마 5:1-12) 이런 전통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들, 노예들이 많이 들어왔다. 바울은 그 당시 교회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지난 2천년 역사에서 기독교는 두 가지 차원에서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 문제를 대처했다. 하나는 구제활동이다. 주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을 지켜온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활동이다. 이런 전통은 개인윤리의 차원에서 가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 제도를 개혁하려는 정치투쟁이다. 정치신학과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주로 이런 입장을 취한다. 이런 전통은 사회윤리에 강조점을 둔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이런 두 전통이 분리되어 있다. 소위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사이에서 벌어지는 노선 갈등이다. 이건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구제와 제도 개혁은, 그리고 개인과 사회는 불가분리이다. 기독교인은 가난한 이들과의 정서적 연대에 근거해서 구제에 힘쓰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가난을 대물림하는 사회 구조의 변혁을 위해서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며,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똑같다는 말이다.
한국교회의 실상
‘현대종교문화연구소’ 측에서 “기독교와 사회적 약자”라는 주제로 강연을 의뢰한 이유는 위와 같은 뻔한 말보다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과연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실제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듣고 싶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 부분에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말할 내용이 없다는 게 아니라 드러내놓고 말하기 부끄럽다는 뜻이다. 그래도 전반적인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만 짚겠다.
첫째는 동성애자 문제이다.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정서는 동성애를 죄로 규정한다. 하나님이 동성애자들을 ‘에이즈’로 치신다는 말이 설교 시간에 노골적으로 선포되는 실정이다. 둘째는 군복무를 거부하는 평화주의자들 문제이다. 한국에서 군복무를 신앙양심에 따라서 거부하는 이들은 대개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이다. 한국교회는 이들에게 대체 복무의 기회를 주자는 주장을 거부한다. 필자는 한국의 주류 기독교가 보이는 이런 행태를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이 그런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성서의 기본 정신과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전혀 모른다는 데에 있다. 그 이외에 크고 작은 이유를 대충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 기독교를 전한 초기 선교사들이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지금도 한국교회는 미국의 값싼 복음주의 교회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다. 오랜 일제식민 지배 아래서 피해의식이 깊어졌다. 남북분단 체제로 인해서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신앙의 차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려면 앞으로도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한편 한국교회는 구제 문제에서는 매우 성실한 태도를 취했다. 결식노인과 아동들을 위한, 또는 노숙자들의 쉼터 마련을 위한 구제활동에서는 에큐메니컬 진영이나 복음주의 진영을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북한 돕기 운동에서도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나 불교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나섰다. 심지어 기복적인 신앙을 뿌리내리게 했다고 비판을 받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평양에 심장병 어린이 전문 병원을 건축하기도 했다.
하나님 나라와 복지 문제
글머리에서 필자는 제목 자체가 이미 답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제목에서 암시하지 않은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 글을 정리하겠다. 그것은 기독교의 영적 지평이 가난한 자, 또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며 그들을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당위에 함몰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복지를 완벽하게 구비하는 것으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복지 문제는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적 착상이다. 기독교 신앙은 휴머니즘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구원은 피조물인 인간의 인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창조주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지의 모델을 북유럽 국가로 본다. 사람과 생태가 조화를 이루어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그런 복지 국가가 전 세계의 국가들이 꿈꾸는 미래일지 모른다. 복지가 최고로 구비된 공동체에서도 여전히 삶의 충만한 의미는 충족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태가 연루되어 있다. 첫째, 절대적 빈곤층이 없는 사회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없을 수 없다. 둘째, 복지를 통한 모든 행복한 조건들도 영원한 게 아니다. 사람은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사라질 것을 알고 있다. 좋은 조건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상실감이 훨씬 심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복지가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마가복음 14:3-9절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어떤 여자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사람들이 화를 냈다. 이 향유 한 옥합은 300 데나리온(대략 2천만 원)이나 값이 나가는 귀중품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그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게 옳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인간 구원은 가난을 복지의 차원에서 해결해 주는 데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차원에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는 뒤로 미루고 순수하게 종교 생활에만 천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잠정적인 문제 해결인 복지 해결이 인류 구원에서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필자의 생각에 복지 문제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국가가 그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도록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필요 없는 곳에 국가지출을 대폭 줄이고 복지 예산을 확장하도록 교회가 투쟁하는 것이다. 교회는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도울만한 물적 역량도 미미하지 않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이와 반대로 개인의 동정심만 자극하는 구제에만 기울어짐으로 결국 가난한 자들의 문제에서 무책임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현대종교문화 연구소 29회 종교 문제 세미나 “종교와 사회적 약자” 모임에서 행한 강연, 2009년 11월14일(토) 오후 2시, 대구교육대학교)
제가 십수년 전 어떤 기회에 신학과 연관된 서양 사상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러한 주장을 한 그 사람이 서양 종교사상계에서 상당히 유명한 사람인데 이름을 기억 못하겠습니다만) 그의 사상에 의하면, 지금의 자본주의가(혹은 그 발전이) 기독교 사상적인 산물(결과)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그게 맞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요즈음의 제 생각은 그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이래서, 기독교인 각자는 정말로 두눈 부릅뜨고 정신차려서 성경을 숙독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래야 헛된 사상에 속아넘어가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생깁니다.)
우선, 우리가 사회적인 어떤 사안이 기독교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 기준은 제일먼저 그게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느냐 아니냐를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현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바인 "多産"이나 '부의 축적'을 강조한 내용이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인데, 제 생각에는 예수님이나 혹은 구약에서도 그러한 가치를 말한 적이 없다(없을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언뜻 인간적인 가치기준으로는 다산이 매우 훌륭한 가치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 시대의 환경 파괴는 모두 인간의 다산을 겨냥한 탐욕의 결과물입니다. 가축들은 마치 공장의 공산품들처럼 최소한의 움직일 공간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라 그저 고깃덩이인 물건처럼 길러지고(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아 가축들 스스로 몸을 자학합니다. 그러한 가축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결국 그걸 먹는 인간에게 전이된다고 합니다.
농약과 비료를 무섭게 살포합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일화를 소개하자면, 일본의 000씨가 지난 약 10여년을 '정신나간 사람이다'라는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 떼로 몰려들어 나무를 뒤덮어버리는 온갖 벌레들, 그리고 갖가지 사과 병과 시름하며, 스스로도 도저히 안 될 것만 같다는 절망감을 참고 이겨내면서 그래도 오직 인간과 나무에게 그리고 대지 전체에 해롭지 않은 그런 사과를 만들어내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마치 그옛날 방주를 짖던 노아처럼) 우직하게 집착한 끝에 이제는 무농약 사과 생산에 성공했다는 세계적인 일화는 눈물겹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것이지요. 그건 거의 어떤 신앙수준 이상입니다. 그는 분명히 인류사의 흐름에서 어떤 선구자에 해당합니다. 바램 같아서는 그러한 인물, 그러한 일들이 기독교계에서 성서적 가르침으로 인해서 나와야 할텐데, 그분이 일본인이니 아마도 그런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원은 한없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는 "인류사의 산업혁명은 원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라는 생각이 제 사고의 지배적인 견해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한양 - 부산 간도 식은 죽 먹기처럼 걸어다니며 살았는데, 여즈음은 까스 풀풀 풍기는 자동차로 다닙니다. 그게 과연 인류가 추구해온 바 지선의 모습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한 자동차를 만들어내기 위해 철광산은 파헤쳐져 흉물스런 산하가 되어가고 있고, 대지는 중금속과 기름으로 오염 범벅 되어갑니다. 이제는 높고 사각진 아파트가 온천하를 뒤덮고 송전탑과 전신주가 산하를 온통 점령하고 있어서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하는 좋은 찬송곡은 이제는 별 의미가 없는,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의 곡이 되어버렸지요.
이런 게 모두 다산을 추구하는 인간의 지나친 탐욕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차라리 인류사를 되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본론으로, 이렇게 인간이 광기서린 탐욕으로 무장하여 물질(즉 돈)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래서 사회적 부가 축적되면 될수록, 오히려 목사님 언급하신 바의 "약한 자(약한 곳)에 대한 배려"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라는 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갈수록(즉 발전하면 할수록) 권력과 금력은 한통속이 되어 굴러갑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종국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정치인의 할 일이 마치 경제성장율 "0. 몇" 퍼센트 더 끌어 올리는 것인 것처럼 하고 있어요. 그들이 갖다 들이대는 통계치 기준에 의하면 그에 따라서 실업자 수를 수십만을 줄일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정계나 사회에서 돈줄을 거머쥐고 있는 이른바 경제인들을 더욱 더 배려하게 됩니다. 모두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논리입니다.
정치권력 쥔 사람들은 어떻게든 기업을 도와주고 기업과 공생관계를 결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꾀를 내고 수단을 강구합니다(이정권의 4대강 살리기 작전 같은 거 말입니다). 어지간한 불법(그게 어떤 류의 것이든, 때로는 사람들 죽이고 살리는 유사한 행동까지도)은 그저 한눈 지그시 감아줍니다. 그래서 결국 "유전무죄"는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요. 이러한 악순환의 결과 하나님이 선한 뜻으로 창조하신 인간들의 삶이 "그들만의 화려한 리그"로 전락되어 갑니다. 이런 풍조는 정도의 차이일뿐 선진국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구조는 마치 눈사람 뭉치기와 똑 같습니다. 어느 정도의 크기만 되면 그때부터는 마당의 눈을 혼자 다
뭉쳐가버리는 것이지요. 큰 걸로 한바퀴만 굴리면 하얗게 덮인 마당의 눈이 순식간에 다 끌려 들어가 검은색 마당만 남게 되는 그런 이치이지요. 새로 시작하는 사람은 도저히 크게 뭉칠 수가 없게 됩니다. 정글의 법칙처럼 강자 독식이 되고 말게 됩니다. 그러니 부는 세습되고 더욱 더 고착됩니다. 결국 자본주의하에서 성경적 가르침인 "희년"과 "회복"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지요.
심지어, 뉴욕에서 기르는 애완동물 사육비를 투입하면 아프리카에서 기아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옛날에는 왕과 고관대작들 극소수만 잘먹고 잘살았으나 지금은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극히 호화생활, 향략을 즐기고 있어요. 그 정도로 그사람들이 만족을 하던 않던간에 절대기준에서 보면 어마어마한 호화생활인 것입니다. 마치 큰 빨대를 박고 있는 것처럼 상당수의 사람들이 사회에 도는 돈을 긁어가고 있어요. 경제학적인 기준에서만 보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사람들을 위해서 들러리 삶을 억지로 살아주고 있는 꼴인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계가 정신차리고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그 핵심은 바로 少産과 나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경적 가르침인 희년정신과 "회복"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기독교계가 경제인들을(그리고 다산추구 성향을) 두둔하고 비호하는데 앞장서는 입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티비에서 문명을 등지고서 황량한 광야에서 낙타를 타고 양을 먹이며 사는 사하라 사막의 어떤 지순한 베두인,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라고는 황막한 산과 대지에 겨우 고사한 풀 몇포기 보이는 남미 어느 고산지대에서 역시 일용할 만큼의 짐승을 먹이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차라리 그게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비를 모릅니다. 배고플 때만 먹고 목마를 때만 목을 축입니다. 그래도 천사처럼 깊게 파인 얼굴에 그들의 눈은 숨겨지지 않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더군요. 아마도 핵전쟁이 크게 터져서 인류가 거의 전멸하게 될 그런 때 살아남아서 인류사를 연결시켜줄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저는 요한 사도가 계시록에 기록한 내용, 즉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짐승의 표인 "육백 육십 육"을 받아야만 모든 거래를
하며 살 수가 있게 된다라는 그 내용이, 바로 모든 현대 문명의 조류를 언급한 것이 아닐까하는 혼자만의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이제는 카드가 없으면 버스도 기차도 거의 탈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개인 식별정보로써 인간 스스로가 자신들 하나하나를 구속 / 통제하고 있습니다. 큰틀에서 보고 조망하면, 인간의 삶은 너무나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추락하는 마차 위에 모두 함께 올라타고 있는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귀신이 쫒겨 들어간 멀쩡하던 돼지떼가 순식간에 바다를 향해 내리 닫는' 그런 꼴이 인류사, 인간들에게 일어나지는 않을런지요.
지금의 모든 이러한 꼴(즉 무한대의 다산을 추구하는 탐욕적 자본주의의 모습)은 절대로 기독교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스로 거대한 인류사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를 섣불리 짐작할 수는 없을 일이지만 말입니다.
--------------------------- 무농약 무비료 사과 재배 인터넷 게시 글 소개입니다 --------------------
내 눈과 손이 농약이고 비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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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만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우리 (소수의 양식있는)기독교인들이 뜻을 함께하여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야만 할 때입니다.
성서적 가르침인 희년과 회복, 그리고 그 결과 가능해질 "나눔"을 실천하는 방안들을 강구해야만 할 때입니다.
성서적 가르침에 반한 다산적인 탐욕으로는 절대로 "보살핌과 나눔"을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 쌓인 부와 아프리카에서 진행되고 있는 죽음의 기아, 이 두가지 상반된 모습이 이를 크게
방증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은 새로운 사조라기보다는, 주님의 가르침 안으로의 복귀인 셈입니다.
목사님 글 전체적으로 흐름은 이해가 가지만 구체적으로는 잘 와닿지가 않네요.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말씀 같은데 오늘날 사회적 약자는 누구인지 또한 기독교인으로써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이들을 두울 방법이 무엇인지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 너무 두루뭉실 하게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하는데 "성서적"으로 오늘날의 가난한 자와 -- 요새 과부는 부자도 많지요 -- 사회적 약자는 누구인가요? 동성애 자가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사회적 약자인지 잘 이해가 안갑니다 -- 물론 동성애자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초보적 질문이라 좀 염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