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으라!”

 

6월은 부활절 절기가 끝나고 성령강림절 절기가 시작되는 달이다. 첫 주일인 5일은 부활절 마지막 주일이고, 12일은 성령강림절이다. 그 뒤로 대림절까지 성령강림절 절기가 거의 6개월간 계속된다. 성령강림이 교회 출현에 결정적인 계기라 하더라도 6개월은 너무 길어 보인다. 교회력의 긴장감이 떨어질 정도다. 실제로 성령강림절을 제외하고는 성령을 주제로 설교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탓인지 요즘 일각에서는 9월부터의 절기를 창조절로 제시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이런 구도로 보면 대림절부터 부활절까지의 6개월은 성자 하나님, 성령강림 이후 3개월은 성령 하나님, 그 이후 3개월은 성부 하나님을 기리는 절기가 된다. 삼위일체론적인 관점에서도 균형이 있어 보인다. 성자 하나님을 기리는 절기가 6개월이라 하더라도 편중된 것은 아니다.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로 세분되기 때문이다. 어쨌든지 6월부터 성령강림절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오늘 한국교회 강단은 성령론적으로 건강한가? 이에 대해서 필자는 회의적이다. 표면적으로는 시도 때도 없이 성령이 거론된다. 그게 지나쳐서 남발로 느껴질 정도다. 교회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교회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하면 성령을 받지 못했거나 성령에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윽박지른다. 성경에 대한 역사 비평을 봉쇄하기 위한 방편으로 성령의 조명을 주장하기도 한다. 심한 경우에는 성령 경험이나 성령 임재가 비술(祕術) 전수쯤 되듯이 “성령을 받아라!” 하고 외치는 설교자들도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한국교회에서는 성령이 왜곡되거나 좁은 의미로만 인식되고 있다. 오순절적 은사주의나 개인의 심령주의이다. 철부지 사춘기 소녀의 짝사랑을 사랑의 본질로 오해하는 형국과 비슷하다.

이 자리에서 성령에 대한 설명을 길게 설명할 수 없다. 한 마디만 하겠다. 구약이 ‘루아흐’라고 말한, 그리고 신약이 ‘프뉴마’라고 말한 영의 속성은 생명이다. 즉 성령은 생명의 영이며, 생명의 능력이다. 풀어 말하면 ‘살리는 능력’이다. 성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대답하려면 결국 생명, 살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한다. 생명 현상을 우리는 도처에서 발견한다. 교부들은 성령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만 온 영인지, 아니면 아들로부터도 온 영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서방교회는 ‘그리고 아들로부터’(필리오 케) 온 영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였다. 이런 논쟁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그는 성령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2011년 6월5일/ 부활절 일곱째 주일

베드로전서 5:6-11/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신약의 편지들은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를 그 배경으로 한다. 개인 이름으로 된 것이든지 교회 이름으로 된 것이든지 모두 동일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신자들의 구체적인 삶을 그 토대로 한다는 뜻이다. 그런 삶의 자리로 들어가려면 텍스트 자체에 대한 공부가 필수다. 이 말이 당연한 것 같지만 실제 설교 현장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서에서 필요한 주제만 끌어낸 뒤에 자신이 전하고 싶은 말만 한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큐티 유의 설교가 그렇다. 강해설교도 넓게 보면 이런 유의 설교다. 이런 설교 현상은 진보적인 설교자들에게도 자주 나타난다. 성서가 역사 개혁을 설파하기 위한 요구로 사용된다. 개인의 윤리 도덕적 변화를 강조하는 보수적 설교자들이나 사회 변혁을 강조하는 진보적 설교자들이나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성서텍스트에 대한 접근이 세심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보자.

베드로의 편지는 고난에 처한 공동체의 삶을 배경으로 한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거나(3:14)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라고(4:16) 권면한다. 오늘 설교 본문은 그걸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며(8절),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한다고 말한다.(9절) 베드로의 편지를 읽어야 할 교회 공동체가 당한 고난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의 깊이를 따라가는 것이 성서읽기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해야 할 고난은 일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세상살이에서 당하는 고난은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이런 일상의 해결을 신앙의 본령인 것처럼 말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일상의 해결책 제시쯤으로 주장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일상 문제까지 해결된다는 논리의 삼박자 축복은 한국교회 강단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살아가는데서 일어나는 문제의 해결은 세상이 다 제시하고 있다. 모든 정치 이데올로기는 세상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약속을 한다. 모든 나라의 꿈인 복지사회 건설도 바로 그것을 말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근원적인 문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다. 그들은 로마의 황제에게만 붙여진 퀴리오스(주)라는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렸다. 황제 숭배 거절이 박해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정부 아래서 공무원이 될 수 없었으며, 때로는 순교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박해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는데,(9절) 그런 이야기는 로마의 역사 문헌에도 나올 정도이다. 오늘 그리스도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상당 부분에서 상실했다. ‘팍스 로마나’ 이데올로기는 오늘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화뇌동의 조짐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에 가는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이 정통 그리스도인들보다 초기 그리스도교 정신을 훨씬 더 진지하게 따르고 있는 셈이다.

베드로 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하는지를 가르친다. 믿으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라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유한 차원이 있다. 아무리 대중적인 인기 몰이에 능한 설교라 하더라도 그 차원에 못 미치면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주먹질에 불과하다. 베드로 편지는 오늘 본문에서 다섯 동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다. 겸손 하라,(6) 주께 맡기라,(7) 근신하라,(8) 깨어라,(8) 대적하라.(9)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단어다. 이게 삶의 능력이다. 설교 시간이 넉넉하면 이 다섯 단어를 좀더 설명해도 좋다. 이 단어들이 멋지긴 하지만 우리가 그대로 살기는 힘들 것이다.

베드로 편지도 이를 무조건 당위로 강요하는 게 아니라 이런 삶의 능력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을 제시한다. 새로운 차원의 영적 실존을 제시한 것이다. 10절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은 전혀 새로운 신분으로의 변화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암행어사와 비슷하다. 거지행색을 했어도 그는 품위를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분이 왕의 특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가? 많은 설교자들이 단어로만 이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갑니다. 믿습니까?” 하고 외치기만 한다. 영광(독사)은 하나님의 존재 신비이다. 영광 개념을 연구하려면 책 한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설교 시간에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설교자는 일단 개념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베드로의 편지에 따르면 그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종말론적 생명의 선취인 예수의 부활이며, 동시에 승천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대한 설명을 여기서 더 밀고 나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청중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로 조금씩 더 들어올 것이며, 거기에서만 겸손으로부터 시작해서 대적에 이르기까지의 다섯 단어로 권면하고 있는 신앙의 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

 

2011년 6월12일/ 성령강림절

요한복음 20:19-23/ 성령을 받으라!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의 제3독서인 요 20:19-23절은 큰 틀에서 부활 전승에 속한다. 나중에 추가된 21장을 제외하면 20장에 나온 이야기가 부활 전승에 관한 모든 것이다. 20장의 부활 전승은 네 대목이다. 빈 무덤 이야기,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 도마 이야기가 그것이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이야기에 해당된다. 이 이야기는 다른 전승들과 한 가지 점에서 구별된다.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부활 전승은 대부분 주님의 부활 현현 자체에 초점이 있다. 또는 갈릴리로 가신다거나 거기서 만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올 뿐이다. 부활과 성령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신약성서는 원래 부활과 성령을 구분해서 전한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다. 성령 임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행 2:1-13에 나온다. 이런 보도를 연대기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 예수님 이전의 시대를 하나님의 시대로, 예수님의 시대를 그리스도의 시대로, 그 이후를 성령의 시대로 분리해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사도행전이 보도하는 성령강림 사건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적 정체성에 대한 설명이지 성령 임재의 시간표를 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오순절 사건 이전에도 이미 세상에서 활동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도 성령은 활동했으며,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실 때도 성령이 활동했다. 세상의 모든 생명 사건은 성령의 일이다.

이런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성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성령을 귀신 비슷한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귀신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는 것처럼 성령도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그런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현상을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성령은 이 글을 시작하는 대목에서 말한 것처럼 근본적으로 ‘생명의 영’이다. 이런 표현이 막연하게 들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확실한 어떤 현상에 집착한다. 방언이나 신유 등의 현상이 그것이다. 성령의 은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상들은 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흔하다. 그런 이상한 현상에 매몰되면 성서가 말하는 성령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생명의 영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는 이유는 생명이 무엇인지 아직 확연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죽음의 비밀도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궁극적인 것은 종말에 그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이라도 바르게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서라도 설교자는 신학만이 아니라 인문학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생명의 능력을 받으라는 말과 똑같다. 사람이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생명을 줄 수 없듯이 성령을 줄 수 없다. 성령 부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가능하다. 그래서 교부들은 성령이 아버지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도 온 영이라고 말했다. 부활의 주님이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는 요한복음의 진술은 신학적으로 옳다. 신약성서는 부활을 참된 생명이라고 말한다. 주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생명의 영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통해서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능력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요한복음 기자는 본문에서 성령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죄까지 언급했다.(20절) 너무 멀리 나간 발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죄는 죽음을 불러온다. 부활이 죽음의 극복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죄의 극복이기도 하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죄의 선포는 세례와 연결된다고 한다. 예수님은 승천 순간에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세례는 하나님과의 근원적인 관계 회복을 가리키다. 사죄를 통해서만 그게 가능하다.

사죄를 가리키는 세례가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서 생명을 얻게 하는가? 교회 밖의 사람들도 여기에 동의할 수 있나? 교회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이 선교다. 이 작업은 방언의 통역 은사와 같다. 학문적인 용어로 해석학이다. 요한복음 기자의 표현을 따르면 다음과 같은 명령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명령이 주어졌다. 그걸 절실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외면하는 이들도 있다. 부활 생명의 영인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명령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설교자는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이 진술을 좀더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한다. 좁은 의미의 전도를 넘어서야 한다. 세상에 생명을 전하는 일이 무엇인지, 사죄가 가리키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전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2011년 6월19일/ 성령강림절후 첫째(삼위일체) 주일

마태복음 28:16-20/ 세례를 베풀라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첫째 주일이면서 동시에 삼위일체 주일이다. 삼위일체는 일반 신자들만이 아니라 설교자들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주제이다. 삼위일체 교리가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삼위일체 개념은 관념적이다. 아버지, 아들, 영이 셋으로 구별되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말, 위격으로는 구별되지만 본질로는 일치한다는 말은 실체가 아니라 관념이다. 우리는 이런 대상을 이 세상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개는 삼신론에 떨어지든지 단일신론에 떨어진다. 삼신론이나 단일신론은 교부시대에 이미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한국교회 현장에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둘째, 삼위일체 개념은 성경에 직접 나오지 않는다. 성서기자들은 아버지, 아들, 영의 관계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으로 진행되면서 천천히 그 개념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핵심 주제였으며, 영이 하나님의 존재론으로 인식되면서 삼위일체 개념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어거스틴의 영향이 크다.

설교는 신학강연이 아니기 때문에 삼위일체 주일이라고 해서 그 복잡한 교리문제를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설교자가 그 신학적 맥락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삼위일체 개념은 단지 삼위일체 주일만이 아니라 모든 설교의 중심이다. 설교가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교리이다.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그리스도 일원론적인 경향을 보인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단순논리에 머물러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또한 이 세상의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어떤 이들은 역사적 예수를 강조할 뿐이지 예수가 어떻게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신(神)인식인 삼위일체의 신비가 그리스도론의 관념화로 치부되고 말았다. 이런 태도는 교부들이 얼마나 치열한 신학적인 논쟁을 거쳐서 삼위일체 개념에 도달했는지를 몰라서 나오는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8:16-20절에는 삼위일체 개념의 단초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했다.(19절) 마태는 예수님이 부활 후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으로 전한다. 여기에는 마태의 고유한 신학과 신앙이 담겨 있다. 사실 이 말씀에서의 핵심은 삼위일체라기보다는 세례다. 세례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세례를 베풀지 않았으며, 바울도 아주 드물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걸 전제하면 좀 특이한 현상이다. 세례는 그리스도교에서 처음부터가 아니라 신앙이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강조된 것이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훗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합류한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로부터 받은 영향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예수의 이름으로만 세례가 베풀어졌다. 마태는 지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같이 거론한다. 그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 단서가 16, 17절에 나온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의 한 산에 이르러 예수를 보고 경배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열한 제자의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제자들이 그럴 정도라면 다른 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예수를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섬긴다는 것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니었다. 십자가에 달려죽은 이를 어찌 경배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자신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말이다. 이것이 마태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다. 하늘과 땅의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하늘로부터 내려온 이에게만, 하늘로 올라간 이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부활 경험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신학적 진술이다. 이제 예수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렇다면 세례도 당연히 아버지, 아들, 영의 이름으로 베풀어야만 한다.

위 설명이 약간 복잡했을 것이다. 설교라기보다는 신학적인 해명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설교자들은 신학적인 해명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해명이 정확하기만 하다면 신앙적인 공명을 일으킬 것이다. 신앙은 신학적인 차원의 참된 앎에서 시작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의 세계와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세계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설교의 결론은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이 무슨 뜻인지를 푸는 것이다. 세례가 순전히 종교적인 의식으로 머물면 곤란하다. 세례는 사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가리킨다. 거기서만 사람은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세례 사건을 더 밀고 나갈 자신이 있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아버지의 이름, 아들의 이름, 성령의 이름이라는 세 차원으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세례 사건은 사람을 이 세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생명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2011년 6월26일/ 성령강림절후 둘째 주일

창세기 22:1-14/ 아들을 바쳐라!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세기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의 하나가 위 본문의 내용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는다. 그가 아들의 목에 칼을 대려는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를 말렸다. 사자의 말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많은 예술가들이 이 아브라함의 아들 번제 전승에서 영감을 얻었듯이 설교자들도 여기서 많은 설교 주제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인 신앙에서 모범을 보인 아브라함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불가해한 시험을 주시거나 ‘여호와 이레’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당시 가나안에서 자행되던 어린이 희생 제사에 대한 거부라는 사회 문화적인 관점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문제는 설교자들이 이 텍스트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가장 전형적이면서 가장 천박한 설교는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믿음을 보이라고 닦달하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을 헌금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런 설교는 본문의 영적인 깊이를 훼손시킨다. 영적인 것을 세속화하는 것이다.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차이가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진정성이 있는 설교자들도 그런 잘못에 쉽게 빠져든다. 종교적인 형식으로 행해지는 일들도 얼마든지 세속적인 욕망의 발현으로 떨어질 수 있지 않는가. 설교자들이 청중들을 자신의 목회 성공을 위한 도구로 대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노골적으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경우는 흔하다. 설교도 역시 그런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들을 바치라’는 요구가 말이 되는가? 창세기 기자는 말도 되지 않는 이런 요구를 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했을까?

다른 한편으로 이런 명령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매우 절박하게 들렸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여유롭게 들렸을 것이다. 창세기 기자가 이 사건을 일종의 시험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약간 다른 상황이지만 욥의 이야기도 역시 시험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서 벌어지는 무죄한 이들의 고난은 단지 하나님의 시험뿐이라는 말인가? 그 시험에 들기 위해서 인간은 비참한 운명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말인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도 일종의 시험이다.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이 반복해서 시험을 당해야만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다 대답을 하려면 설교의 진도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 설교자 자신은 일단 이런 질문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독자들은 시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브라함의 심정으로 이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여기서 어린이 번제라는 잔인한 행위 자체를 너무 중요하게 다루지 말아야 한다. 설교는 너무 선정적인 묘사를 통해서 청중들의 심리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다. 성서기자도 심리 묘사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대화와 행동만을 건조하게 전할 뿐이다. 나머지는 독자에게 맡긴다. 모든 부모들은 자신보다 자식들을 더 귀하게 생각한다. 아브라함도 이것이 옵션의 차원이었다면 이삭이 아니라 자신을 번제로 바쳤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자신이 아니라 이삭이었다. 그가 아들을 번제로 바칠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실존이었다. 자신들의 미래를 자신들의 역량 아래에 두느냐, 아니면 자신들의 생각과 계획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통치에 두느냐 하는 양자택일을 요구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그들도 후자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런 선택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기대에서 어긋나거나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遺棄)를 토로하지 않았는가. 또한 그의 약속은 막연하거나 비현실적인 때가 많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맡긴다는 것이 가능한가? 인간의 역사는 거의 실패했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거듭해서 실패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운명에서만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한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요구했으며, 그 요구를 실행에 옮겼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게 했다. 하나님 자신이 거기에 달린 것이다. 놀랍게도 거기서 인류의 미래가 열리게 되었다. 이 사실을 청중들에게 실감이 가도록 전하는 것이 설교자에게 맡겨진 숙제이다.(설교공부 2011년5월, 기독교사상 2011년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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