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에서 보편으로!

 

8월에도 교회력으로는 성령강림절후 절기가 계속된다. 밋밋한 절기이다. 계절적으로도 무더위가 여전하고, 가정마다 여름휴가 등이 겹쳐서 신자들의 교회 생활이 둔해질 수도 있다. 여름수련회를 통해서 신앙의 각성을 촉구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매년 반복되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역설적으로 목사는 신자들이 게으름을 좀 피우도록 내버려둘 필요가 있다. 세상살이에서도 늘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이면 신경질환이 오듯이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점이 없지 않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종교적 열성은 만천하가 다 안다. 주일이 오히려 피곤한 날로 경험되기도 한다. 교회 직분은 왜 그리 많은지. 웬만한 이들은 수능을 코앞에 둔 학생들처럼 거의 쫓기듯이 신앙생활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영성이 깊어지겠는가.

영성은 생명의 본질에 집중하는 삶의 능력이다.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영성의 심화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교 영성에도 앎이 관건이라는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으면서 신앙적인 열정에만 사로잡혀 있다. 아는 것처럼 포즈를 취하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아는 게 거의 없다. 입만 열면 십자가와 부활과 하나님 나라를 외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몰라도 교회 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이 용감하게 큰 소리 칠 수 있는 집단이 교회다. 비극적이지만 그게 우리의 현주소다.

설교자도 여기서 예외가 아닐 것이다. 영성의 고수들인 성서기자들의 영적 경지를 모르거나 외면한 채 무언가를 설교한다. 성서의 정보를 아는 건 아는 게 아니다.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참된 앎이다. 거기서만 해석 사건은 일어난다. 역사, 시간, 존재, 절대, 상대, 질료, 형상, 묵시, 때, 구원, 종말, 의, 법, 인식, 논리, 생명, 노동, 죽음, 우주, 생명, 도, 선취, 에온, 로고스 등등, 성서텍스트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이런 개념들을 파악하고 있어야만 성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독자들께서는 위에 두서없이 열거한 단어를 주제로 각각 A4 용지 10매 분량의 신학 에세이를 앉은 자리에서 쓸 수 있는지 질문해보시라. 설교는 신학 강의가 아니라 말씀선포라는 말로 이 과제를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영성에 대한 논리적 인식이며 해명인 신학이 없다면 신탁도 없고 선포도 없다. 아는 게 없는데 아는 것처럼 떠드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아무리 진정성이 있어도 돌팔이 약장사다. 약만 잘 팔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사이비 아니겠는가. 설교자의 자리가 얼마나 준엄한지를 염두에 두고 8월 한 달 설교 사역을 감당해보자.

 

2011년 8월7일/ 성령강림절후 여덟째 주일

로마서 10:5-15/ 차별에서 보편으로!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는 20세기 현대신학에서 바르트와 브룬너의 ‘자연신학논쟁’에 얽힌 아티클처럼 초기 그리스도교의 첨예한 신학주제를 다루고 있다. 핵심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해명이다. 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 바울은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극복한다. 복음은 율법의 지양(止揚, Aufhebung)이다. 이런 결론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론에 이르게 된 사유의 과정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공부든지 개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듯이 신앙공부도 똑같다.

위 로마서 본문도 두 가지 입장을 변증법적 차원에서 대립적으로 다룬다. 하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은 분명히 구별된다. 율법은 행위에 초점이 있다면, 믿음은 존재에 초점이 있다. 행위와 존재는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개념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행위는 사람의 관점이라면, 존재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따라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업적의(義)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칭의(稱義)이다. 업적의와 칭의에 대해서 모르는 설교자는 없다. 문제는 단순히 낱말 뜻으로만 아는 것과 그것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 목회 현장에서 칭의는 공허한 구호로 남고 업적의가 기승을 부린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너무 명백한 것이라 필자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그게 보이지 않는다면 성서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이다.

바울은 위 본문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생뚱맞은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이 제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짚는다. 구약의 인용이 반복된다. 레 18:5, 신 30:12, 신 30:14, 사 28:16, 욜2:32, 사 52:7이 그것이다. 6절에 나오는 하늘 운운과 7절의 무저갱 운운은 신 30:12절을 패러디한 것이다. 핵심은 9절이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바울이 신명기를 인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인식과 깨달음의 토대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또 입과 마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설교자들이 더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참고적으로 한 마디만 한다면, 경건한 유대인들은 토라를 외우거나 문자를 옷에 달고 다녔으며, 그리스도교 전통도 역시 세례문답과 사도신경 암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논리는 근본적으로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을 해체시킨다. 이것이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풀어야 할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바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관계설정이었다. 거칠게 구분하면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그것을 거부했다. 바울은 후자의 입장이다. 처음 그리스도교의 주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즉 일종의 종교적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양 진영은 결별했다.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복음의 진수를 전하는 중이다.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나 지키지 않는 헬라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이다.(롬 10:12a)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다는 것이다. 욜 2:32절을 인용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고 전했다.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킨다. 바울의 이 주장이 얼마나 혁명적인 것인지는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모든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경쟁력이 있는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차별을 전제로 한다. 한국교회는 이런 사회 체제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채질을 하고 있다. 철저한 불신앙이요, 우상숭배이다.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마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긴 말이 필요 없다.

 

2011년 8월14일/ 성령강림절후 아홉째 주일

마태복음 15:21-28/ 이스라엘과 예수의 복음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는 간혹 어떤 인물의 믿음에 대해서 코멘트 했다. 12년 간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고 하셨으며,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에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면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 8:8, 13)고 말씀하셨다. 시각장애인들을 향해서도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고 하셨다. 오늘 설교본문에서도 그런 표현이 나온다. 예수는 가나안 여자를 향해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라고 말씀하셨다. 믿음도 크고 작은 것이 있나? 믿음만 있으면 모든 병이 치유되나? 그 믿음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 ‘긍정의 힘’ 유의 심리적 자기만족과 무슨 차이가 있나? 예수는 경우에 따라서 믿음과 상관없이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도 하셨다는 걸 보면 믿음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 한국교회는 믿음 만능주의에 기울어져 있다.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한다. 여기에는 성서와 신학과 세계교회사에 연관된 많은 요인이 작용한다. 성서는 믿음 실증주의로 간주될만한 가르침들이 적지 않다. 위에서 인용한 대목만이 아니라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등, 거의 모든 신약성서가 믿음을 강조한다. 이런 성서구절에 근거해서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성서의 오해다. 엄격이 말해서 믿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이 중요하다. 루터의 ‘솔라 피데’ 개념은 개신교 신자들의 영성을 믿음 일원론으로 몰고 갔다. 그것은 루터 신학의 오해이다. 루터는 중세기 로마가톨릭교회의 업적의(義)를 거부하기 위해서 믿음을 강조한 것이지 지금 우리에게서 보듯이 광신이라 불러도 될 만한 신앙행태를 정당화한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영향을 받은 미국 부흥운동도 중요한 요인이다. 예수를 영접하고 (주로 도덕적인) 죄를 회개하는 것이 최선인 신앙에서는 예수에 대한 원초적 믿음만 강조된다. 신학과 예전도 폐기된다. 극단적으로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축소되고 믿고 있는 자기만 극대화된다. 일종의 영적 나르시시즘이다. 이건 병든 신앙이다. 사이비 이단에 가까운 집단일수록 이 믿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위 성경본문을 통해서 청중들에게 믿음을 강조하는 설교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설교자들의 관점으로 필자가 설교제목을 정했다. 부스러기 믿음,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소원대로의 믿음, 끈질긴 간구의 믿음 등등이다. 가나안 여자를 중심으로 감동받을만한 믿음을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다. 이런 설교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본문의 근본에서 벗어난 설교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본문의 병행구절은 막 7:24-30절이다. 마가복음에는 여자와 예수의 대화만 나오는데 반해서 마태복음에는 중간에 제자들이 끼어든다. 상황이 더 복잡하게 진행된다. 제자들은 도와 달라고 고함을 친 여자를 쫓아 보낼 것을 예수에게 요구한다.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과 달리 이 여자의 믿음에 대한 예수의 코멘트가 없다. 전체적으로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의 보도를 극단화했다. 이방인 지역을 대표하는 두로와 시돈 지방의 가나안 여자를 무시하고 대신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일단 그렇게 보인다. 예컨대 마가복음은 자녀로 먼저 배부르게 할 수밖에 없다고 표현하지만 마태복음은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언급한다.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마태공동체의 상황이 더 절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이 표면적으로는 마가복음에 비해서 더 노골적으로 이방 여자를 거부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옹호한다는 사실을 행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여자의 발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15:22) 이방 여자가 예수를 메시아로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뜻이다. 마태가 개작을 하면서까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예수가 이스라엘로부터 이방인들을 향해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책임이 이스라엘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공동체가 처한 삶의 자리이기도 하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선교 정책의 방향을 이방 쪽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던 근본책임도 역시 유대교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종교적인 기득권에 안주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거부하는 집단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구원 통치는 교회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교회가 그의 통치에 지배당해야지 거꾸로 가려고 하면 안 된다. 이런 말이 실감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늘 한국 교회는 예수의 복음을 거부한 이스라엘인지, 아니면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외친 가나안 여자인지를 보면 실감이 날 것이다. 안타깝지만 많은 설교자들이 이 부스러기 신앙까지도 욕망의 실현으로 오도한다.

 

2011년 8월21일/ 성령강림절후 열 번째 주일

출애굽기 2:1-10/ 건지시는 하나님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2:1-10절은 그 유명한 모세의 출생에 얽힌 전승이다. 오래 전에 나온 <십계>나 1998년도에 나온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는 모세를 주인공으로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고대사를 장식하는 인물 중에서 전설적인 요소가 가장 많은 위인이었다. 모세 오경이 그의 이름을 따르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한 민족으로 그 정체성을 갖추게 된 출애굽 사건의 장본인도 모세다. 심지어 그는 예수 공생애의 중요한 장면인 변화산 전승에도 엘리야와 함께 등장한다. 그가 이스라엘 역사에 어느 정도로 중요한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각각의 설교자가 알아서 설명하면 된다.

모든 영웅들에게는 출생 신화가 따르기 마련이다. 모세도 예외가 아니다. 전체 줄거리는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거친 대목도 보인다. 바로의 딸이 태어난 지 석 달 된 모세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라는 걸 알고도 그대로 살렸다고 한다. 당시 히브리 가정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들 중에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아이는 모세 누이의 기지로 다시 모세의 생모 밑에서 자라다가 일정한 나이가 되자 바로의 딸에게 와서 양자가 된다. 바로의 딸은 이 양자에게 모세라는 이름을 붙였다. 뜻은 물에서 ‘건져냄’이다.

모세라는 이름에서 이미 그가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가 암시된다. 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모세는 결국 자기 민족을 물에서 건져낸다. 그 일은 그가 80세 때 일어났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리고 바로와의 힘겨루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설교자가 적당한 분량으로 전달하면 된다. 핵심은 홍해 사건이다. 이스라엘은 우여곡절 끝에 출애굽에는 성공했으나 곧 위험에 봉착한다. 앞은 홍해요, 뒤는 바로의 기병대다.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서 지팡이를 든 손을 들자 홍해는 갈라진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마른 땅 처럼 건넜고, 뒤따라오던 바로의 기병대는 수장되었다. 이 장면은 모세의 노래(출 15:1-18)와 미리암의 노래(출 15:19-21)를 통해서 전승되었다.

노래의 중심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여호와께서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을 홍해에 수장시켰다. 2) 이스라엘 자손은 마른 땅으로 지나가게 하셨다. 3) 높고 영화로우신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 주제는 단순히 홍해 사건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와 연관된다. 그들은 늘 배수진의 형국에서 살았다. 바로의 병거로 대표되는 제국의 폭력에 노출된 그들의 운명은 마치 물속을 지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특별한 능력으로 그들은 물속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구약성서의 신앙고백이다.

사실 우리의 삶도 모세가 건짐을 받은 나일강이나 이스라엘 민족이 건짐을 받은 홍해의 물속과 다를 게 없다.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모두 안간힘을 쏟는다. 어떤 이들은 이미 빠져나온 것처럼 도사 연한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물에서 밖으로 나온 사람은 없다. 그것이 이 세상에 던짐을 당한 존재(das geworfenes Sein)인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단 하루만 굶어도 허기가 져서 못 견뎌하고, 시시때때로 외로움에 몸부림친다. 온갖 일상에 치이다가 결국 죽는다. 누가 여기서 벗어났는가? 아무도 없다. 누가 우리를 건져낼 수 있는가? 창조주이신 하나님 외에 없다. 이 사실을 공자 왈(曰)이 아니라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전하려면 설교자가 단순히 말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직면하고 있는 실존의 엄중성과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원의 현실성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모세의 출생 전승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의 결론은 무엇인가? 모세를 나일강에서 건지셨고,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 전체를 죄와 사망의 물에서 건지셨다. 그것을 가리키는 의식은 세례다. 물에 잠겼다가 다시 밖으로 나오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하게 되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생명에 대해서는 살게 되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설교자와 청중들은 없지만, 문제는 이것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필자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본인이 그 세계에 들어간 것만큼만 경험될 것이다. 결국 설교와 영성은 배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깨우침이 아닐는지.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CEO가 아니라 수행자(修行者)다.

 

2011년 8월28일/ 성령강림절후 열한 번째 주일

마태복음 16:21-28/ 종말과 생명 완성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늘 본문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다루고 있는 바로 앞 대목(마 16:13-20)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내용은 설교자가 각각 적당한 분량으로 설명하면 된다. 핵심은 베드로의 고백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 고백으로 베드로는 극도의 칭찬을 받고, 최대의 권위를 보장받는다.

이어지는 오늘 설교 본문은 앞 대목과 상반된다. 예수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한 뒤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난설화의 축약이다. 베드로는 이를 말린다. 이게 우리에게는 미스터리다. 인류 구원의 길을 가신다는 예수의 말을 베드로는 왜 이해하지 못했나? 고난과 죽음을 말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부활까지 말렸다는 건 뭔가 다른 속사정이 있지 않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예수는 베드로를 책망하신다. 바로 앞에서 극한의 칭찬을 받은 베드로가 극한의 책망을 듣는다는 건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베드로의 인식이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런 혼란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예수 자신에게도 일어났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확신했을까? 그리고 자신이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이 두 질문이 오늘의 설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설교자는 나름으로 생각을 정리해두어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며, 설교자는 가능하다면 이런 주제에 대한 글을 읽어둬야 한다. 이 문제는 역사적 예수와 들림 받은 그리스도를 구분해서 봐야만 해결된다. 역사적 예수는 인식론적으로 제한적이었다. 그것을 부정하면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예수는 마지막 때를 자신도 모른다고 소신을 밝힌 적도 있다. 반면에 들림 받은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룬 존재로서 역사를 초월한다.

역사적 예수에게 인식론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에는 잘못이 없었다. 생명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인식과 믿음이 그것이다. 생명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믿음으로 그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십자가의 길은 만용이다. 이런 인식과 믿음에 근거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무조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는 것이다. 그 ‘나’는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이며, 동시에 하늘로 들림 받은 그리스도다.

24절과 25절은 예수가 선포한 목숨, 즉 생명의 고유한 특성을 가리킨다.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얻는다고 한다. 이게 말이 되나? 26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런 말들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즉 영적인 시각에서만 타당하다. 이런 시각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연장하고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올인’한다. 살벌한 방식으로 거기에 매진한다. 목회도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교단마다 인간적인 파벌싸움이 얼마나 노골적인지를 보라. 예수는 그 생명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종말론적 생명이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마 16:27)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인식한 예수 정체성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베드로는 예수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은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대립되는 개념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일치된다. 인자, 하나님의 영광, 천사 등은 종말 표상이다. 종말에 생명이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는 종말의 생명이 참된 생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한다. 여기서 ‘행한 대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종말론적 생명을 막막하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은 지금 경험하는 생명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생각은 생명을 피상적으로 본 결과다. 생각해보라.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며, 얼마나 무상한지를 말이다. 죽음으로 우리의 삶은 완전히 붕괴된다. 그게 하나님의 정의 아니겠는가. 부자로 살았든지 가난뱅이로 살았든지 죽고 나면 공평해진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나 이름이 그 사람의 실체는 아니다. 언젠가는 그 이름도 잊힌다. 그래서 예수는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목숨’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종말에 완성될 생명의 세계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희망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종말론적 생명이 우리의 참된 생명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생명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허무할 뿐인가? 아니다. 지금 여기서의 생명은 선취의 방식으로 종말론적 생명에 연결되어 있다. 28절이 이에 관해서 중요한 사실을 암시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인자 운운하면서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죽기 전에 종말이 온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확신했다면 예수는 묵시적 열광주의자에 불과하다. 이 진술은 종말의 참된 생명이 신비한 방식으로 오늘 현실에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것을 초기 그리스도교는 종말 생명의 선취(先取) 사건인 예수의 부활에서 경험했다. 그래서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오늘 설교는 호흡이 빠르다. 예수의 정체성에 근거해서 종말에 일어날 생명 완성과 그것의 선취에 대한 해명이었다. 이것이 오늘 청중들의 신앙생활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교자들이 처한 목회 자리에서 각자 생각하면 좋겠다. 모두의 분발을 바란다.(설교공부 2011년7월, 기독교사상 2011년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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