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하라!

 

9월부터 창조절이 시작된다. 창조절이 세계교회로부터 아직 공인받지 못한 절기지만 나름으로 합리적인 절기라 생각해서 필자는 그것을 따르기로 했다. 이에 관해서는 6월호에 쓴 “성령을 받으라”를 참조하라. 9월 설교의 전체 주제는 “투쟁하라!”다. 첫 주일인 4일의 본문은 출 12:1-14절로 유월절 의식을 다루고 있다. 유월절은 애굽을 향한 이스라엘의 싸움을,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둘째 주일인 11일의 본문은 마 18:21-35절로 용서할 줄 모르는 완고한 태도에 대한 경고다. 용서를 모르는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다. 18일의 본문은 빌 1:21-30절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을 ‘싸움’으로 본 바울의 충고다. 25일의 본문은 출 20:1-11절로 십계명의 앞 대목인 4가지 계명이다. 이 계명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는 명령으로 집약된다. 즉 생명의 근원에 집중하라는 명령이다. 이런 명령을 받은 이들의 삶이 어찌 투쟁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투쟁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화해와 평화를 전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건 당연한 말이다. 문제는 어떤 화해, 어떤 평화냐 하는 데에 있다. 습관적으로 구타당하는 아내에게 남편과의 평화를 강요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경제적인 불평등의 고착화가 평화는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실존 자체가 투쟁적이기도 하다. 구약성경은 전체가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족장시대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거쳐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포로귀환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는 크고 작은 싸움으로 얼룩져 있다. 이런 문제는 개인과 사회의 복잡한 구조에서 작동되기 때문에 일반론이 아니라 좀더 진지한 신학적 통찰과 사회과학적 분석을 통해서 다루어져야 한다.

교회론적인 차원에서 한 마디만 보충하자. 교회는 이미 승리한 불가시적 교회와 아직 전투 중에 있는 가시적 교회의 변증법적 관계 안에 자리한다. 이미 승리한 불가시적 교회에 근거해서 오늘의 교회는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진리를 향해 투쟁하는 가시적 교회에 의해서 승리한 불가시적 교회가 인식될 수 있다. 9월 한 달간 우리 설교자들도 투쟁하듯이 설교의 짐을 져야겠다.

 

2011년 9월4일/ 창조절 첫째 주일

출애굽기 12:1-14/ 심판의 하나님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 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위 구절은 유월절 의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내용은 간단하다. 식구들이 함께 모여 특별한 의식을 행하면서 어린 양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다. 그 행위가 그만큼 진지했다는 의미다. 요즘의 유목민들도 자신들이 키운 짐승을 잡을 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종교의식에 가까운 의식을 병행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들은 양떼를 몰고 늘 이동해야만 했다. 철이 바뀌는 기간에는 이동 거리도 길었다. 이런 과정에서 새로 태어난 새끼 양들은 죽을 위험성이 높았다. 유목민은 자신들의 미래가 담보된 양의 안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특별한 의식을 행하면서 양을 도살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런 심정으로 양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에 발랐고, 구운 양 고기는 무교병과 나물을 곁들여 먹었으리라.

출애굽기가 전하는 유월절 의식의 특징은 애굽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 의식의 역사적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 양을 잡아먹으며 축제를 벌이는 그 밤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신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만은 이 재앙을 면하게 된다. 동양에도 이와 비슷한 민간신앙이 있다. 붉은 팥으로 죽을 끓여먹으면 악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구약성경 이야기가 동양의 민간신앙과 다를 게 없다는 뜻이 아니다.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고 해서 구약성경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경험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다. 생존을 위해서 투쟁해야 하고, 늙고 죽는다는 경험이 다 동일하다. 재앙이 느닷없이 닥치기도 한다. 이런 재앙을 넘어서서 생명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문제는 모든 민족의 보편적인 관심이었다.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뿌리는 의식으로, 동양에서는 붉은 팥죽을 뿌리는 의식으로 자리를 잡은 게 아니겠는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유월절 의식은 이 모든 의식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서 구분된다. 민간신앙은 단순히 악귀를 물리친다는 사실에만 초점이 있을 뿐이다.

이 본문으로 어떤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설교자의 영적인 깊이에 따라서 여러 관점의 설교가 가능하다. 필자는 12b절에 나오는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는 문장을 중심으로 생각했다. 위에서 암시했지만 유월절 전승은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의 결합이다. 하나는 유목민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 사건이다. 두 전승이 결합되면서 결국 앞의 의미는 축소되고 뒤의 의미가 확대되어 유월절은 순전히 출애굽을 위한 의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런 전승사(傳承史)를 불편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인류의 모든 문서는 전승사를 거친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등의 이름으로 자리한 예언서들도 마찬가지이다. 신약도 다를 게 없다. 자연과학도 전승사를 통해서 발전한다. 구약의 유월절 의식은 유목민의 전통을 넘어서서 민족 해방의 역사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을 행하시는 분은 애굽의 모든 신을 심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당시에 애굽의 바로가 바로 신(神)이었다. 제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인물이 신이다. 그는 신처럼 행세한다. 그 신을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은 쉽지 않다. 대개는 제국의 권력을 추종할 뿐이다. 애굽과 이스라엘은 비교가 되지 않는 나라였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고센이라는 곳에 자리 잡고 살던 소수민족에 불과하다. 그들은 바로의 말 한 마디에 피라미드 건설현장에 값싼 노동자로 끌려오거나 추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애굽의 모든 신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기는 어렵다. 애굽에 살던 수많은 소수민족들은 애굽의 삶을 자신들의 운명으로 알고 살았지만 이스라엘은 달랐다. 여호와께서 신을 자처하는 제국을 심판하신다고 생각했다.

오늘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모든 신’은 무엇인가? 오늘의 우상인 제국은 누구인가? 설교자들은 대략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만이 아니라 어쩌면 교회 자체가 심판의 대상일 수 있다. 이런 문제는 각자 설교자들이 알아서 챙기기를 바란다. 어린 양의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시켜서 설명할 수는 있으나 오늘의 설교에는 적합하지 않다. 한편의 설교에서 여러 갈래를 다 따라갈 수 없기도 하고, 그런 해석은 자칫 알레고리로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에 유월절 의식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계속 밀고나가는 게 좋다. 굳이 기독론적인 결론을 맺고 싶다면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면 되지 않겠는가.

 

2011년 9월11일/ 창조절 둘째 주일

마태복음 18:21-35/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21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위 본문의 구성은 세 단락이다. 1) 21, 22절은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이다. 베드로는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대답을 기대했거나 자신이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의 영성이 깊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답변은 의외였다.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제한의 용서를 가리킨다. 2) 23-34절은 용서의 은혜를 모르는 자에 대한 비유다. 1만 달란트 빚을 진 사람이 탕감을 받았다. 1만 달란트는 5천만 데나리온이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친구를 기어코 옥에 가뒀다. 3) 35절은 비유에 대한 해석이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는 구절과 상응한다.

본문은 용서의 미덕을 말하는가? 일단 그렇게 볼 수 있다. 마태공동체가 당면한 문제의 하나는 믿음의 지체들이 용서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상처가 깊었을 것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늘 이런 문제가 따라다닌다. 초기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동체의 치유를 위해서 용서의 영성은 필요하다. 그러나 적당한 예화를 곁들여 감동적으로 그 사실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설교하고 있네!’라는 말을 듣기 안성맞춤이다. 설교자는 이 말씀의 세계 안으로 청중들과 함께 들어가야 한다. 말씀의 놀라운 세계 안으로!

이를 위해서 다음의 질문이 필요하다. 제한 없는 용서가 가능한가? 그런 용서가 늘 옳은가? 제한 없는 용서는 사실 불가능하다. 베드로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일곱 번까지 용서하기도 어렵다. 또한 용서가 능사도 아니다. 반인륜적인 잘못을 행한 사람에게 선고를 내려야 할 판사를 향해서 ‘일흔 번씩’이라는 투로 말할 수는 없다. 무제약적인 용서의 윤리는 개인들을 불안하게 만들며, 사회 질서를 허물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교 역시 용서 만능주의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 단죄할 때는 단죄하고, 갈라설 때는 갈라섰다. 예수는 왜 현실에서 크게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하신 걸까?

설교자들이 떨어지기 쉬운 오류의 하나는 명제나 교리의 일반화다. 특히 그리스도교 윤리를 말할 때 더 심각하다. 설교자가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하자. 이게 좋은 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 삶에서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다른 회사와 직접 경쟁 관계에 있는 신자는 이런 말씀 앞에서 곤혹스러워한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야비한 수단으로 상대 회사를 음해하는 사회구조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 용서와 같은 윤리적 가르침이 복음의 능력으로 선포되려면 인간과 사회구조의 깊이와 더불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한국의 지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건전한 교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도덕주의적인, 즉 율법적인 설교에 떨어진다. 그런 설교는 결국 청중들에게 짐이 되거나, 삶의 요령을 피우게 만들 것이다. 더구나 그런 윤리적인 설교를 듣고 변하는 사람도 없다. 제자훈련과 성화를 아무리 외쳐도 사람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성만 생긴다.

오늘 설교의 주제인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용서의 능력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짚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단순한 윤리 도덕이 아니다. 윤리와 도덕은 사람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이루어낼 수 있다. 도로교통법을 지킨다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일도 가능하다. 복지문제도 이런 윤리 문제이다. 일종의 휴머니즘의 강화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지기도 하고, 사회적 전통과 습관에 따라서 학습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 뿌리를 둔다. 오늘 본문의 비유가 그 사실을 정확하게 말한다. 동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은 이 사람은 먼저 임금에서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그의 근본 문제는 임금과의 관계가 왜곡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데서 시작된다. 현대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류다. 사람은 보편적으로 죄의 지배를 받는다는 성서의 가르침은 옳다. 한나 아렌트(Hanna Arendt)는 나치 친위돌격대장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악의 평범성’을 말했다. 가정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이 직장에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아이히만의 가능성이 있다. 그런 처지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 아닌가.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의 윤리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윤리는 깨우침에 머물지 않고 실제의 행동까지 말해야 한다. 다시 신앙과 윤리의 변증법적 관계가 요청된다. 무제약적 용서가 불가능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을 건 물어야 한다. 이런 책임 추궁은 자기만 의롭다는 자만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즉 하나님의 정의에 순종해야 한다는 믿음을 토대로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또는 사회나 정부와의 관계에서 어디까지 용서하고 어디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의 객관적인 기준은 아무도 제시할 수 없다. 종말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각자가 판단해야 할 것이다.

 

2011년 9월18일/ 창조절 셋째 주일

빌립보서 1:21-30/ 복음은 싸움이다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위 본문의 첫 문장인 21절은 진지하다 못해 비장(悲壯)하다. 바울은 자기에게 생명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한다. 이런 고백을 아무나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나의 생명!”이라는 명제와 영적으로 일치될 때만 가능하다. 바울이 말하는 생명은 도대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여전히 배가 고프고 허무하고 늙고 죽는다. 생명을 얻었다는 증거가 별로 없어 보이는데도 그리스도가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여기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 그리스도가 생명이라는 사실이 어떤 영적 무게를 담지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설교자는 없으리라.

바울은 이어서 22절에서 육신으로 사는 것이 자기 일의 열매라고 말한다. 죽는 것은 유익한 일이고, 사는 것은 열매다. 죽어서 얻는 유익은 자기의 것이고, 살아서 맺는 열매는 빌립보 교우의 것이다. 23절에서 그런 영적 갈등을 더 분명하게 말한다.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자기에게는 더 좋은 일이지만 빌립보 교우들의 유익을 위해서 육신으로 살아간다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바울의 말이 빌립보 교우들에게 부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우리는 너희들 때문에 사는 거야!” 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리지 않는가. 바울의 경우는 그게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치열하다는 사실을 거론하는 중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생명에 직결된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 진력해야 한다. 여기에 집중하는 사람은 구도적일 수밖에 없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거나 범사에 감사하는 말은 모두 이런 삶을 가리킨다. 이것이 곧 영성이며, 수행(修行)이다. 설교자는 교회에서 이 수행의 차원이 어떻게 왜곡되거나 간과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삶을 빌 1:27-30절의 개념으로 바꾸면 ‘싸움’이다.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에 어울리는 개념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군사들의 싸움처럼 묘사한다. 빌립보 교회 교우들은 실제로 ‘대적하는 자들’(안티케이메노이)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었다.(28절) 그들의 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간다. 로마 정치와 헬라 사상으로 고도의 문명을 구가하던 빌립보 지역의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미련한 사람들로 치부당하기 마련이다. 따돌림을 당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신체적인 박해를 받았다.(고후 11:23 이하 참조) 이건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십자가 사건 자체가 세상의 걸림돌이 아닌가. 세상은 복음을 불편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주변에서 이런 따가운 시선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투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삶의 신학적인 근거는 29절이 제공한다. 거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두 가지로 규정한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은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 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현재를 초월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이런 믿음의 차원은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실존을 떠받치는 토대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고난을 피하거나 고난과 상관없다면 그 믿음은 어딘가 고장 난 것이다. 이 고난이 곧 싸움이다.

여기서 무엇을 위한 고난이며,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오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교회당 건축의 불법이나 미션 스쿨의 불법을 매스컴이 고발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것을 고난이라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지난 노무현 정권 때 교회가 박해를 받는다고 투정을 부리던 목사들이 있었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정작 필요한 싸움은 피하고 쓸데없는 싸움에만 열을 올린다. 필요한 싸움이 무엇인지를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예수를 십자가에 몰아넣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을 대항하는 것이 이 싸움의 핵심이다. 이런 권력은 매우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몇몇 교회가 매머드 교회당을 건축하거나 계획 중에 있다. 자신들의 헌금으로 필요에 따라서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 것이니 외부에서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논리는 종교권력의 속성이다. 또 신자들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반(反)기독교적인 주장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필자의 생각에 1만 명 모이는 교회 한 개보다는 1천명 보이는 교회 열 개가 교회의 본질에서는 물론이고 선교전략에서도 훨씬 효율적이다. 초대형 교회는 종교 마켓에 가깝다. 왜 그런지는 설명하지 않겠다. 로마가톨릭과 비교해보라. 초대형 교회는 늘어나지만 전체 개신교 신자 숫자는 줄어들고, 크게 이름을 떨치는 가톨릭 성당은 없지만 전체 가톨릭 신자 숫자는 늘어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초대형 교회가 해체되어야 한국 교회는 산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작은 교회도 모두 그런 초대형 교회를 목표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케리그마가 선포되어야 할 설교 시간에 가능하면 교회 비판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위 이야기는 설교자들이 그냥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것뿐이다. 핵심은 복음의 투쟁적 성격이다. 스스로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권력을 행사하는 이 시대정신과 우리는 어떻게 싸울 것인가?

 

2011년 9월25일/ 창조적 넷째 주일

출애굽기 20:1-11/ 명령하는 하나님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십계명(Dekalog)은 신명기 5:1-21절과 위 본문인 출애굽기 20:1-17절에 나온다. 각각 차이가 있지만 큰 틀에서는 동일하다. 두 대목으로 구성된다. 한 대목은 하나님과 관계되는 4개 항목이고, 다른 한 대목은 사람과 관계되는 6개 항목이다. 오늘 설교의 본문은 전자에 해당된다. 설교자는 우선 각 항목을 간략하게 설명하라. 자신의 영적 깊이에 따라서 그 항목의 고유한 세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가능하면 1988년에 나온 키에슬로프스키의 10부작 영화 <데칼록>을 보라.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3절) 이 명제가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다른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신은 없다. 다른 신을 둔다는 말은 유일하고 참된 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제1계명은 하나님을 외면하지 말고 섬기라는 뜻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를 아는 사람은 알리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4절) 로마가톨릭교회의 십계명에는 빠진 내용이다. 그들은 1계명과 2계명을 합해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로 정리하고, 제10계명을 둘로 나누었다. 유대교의 십계명을 따르는 개신교회와 달리 그들은 어거스틴의 십계명을 따른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1계명이 말하는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화다. 하나님의 형상화라는 말은 신을 자신들의 경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산 아래서 민중들은 출애굽의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7절) 하나님이 형상은 금지되었지만 이름은 허용되었다. 단 이름을 오용하면 안 된다. 이름을 오용한다는 것은 본질을 훼손한다는 뜻이다. 사실은 하나님께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8절) 안식일 전승의 동기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출애굽기는 창조사건과 연결되며 신명기는 출애굽사건과 연결된다. 창조의 하나님이 출애굽의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또한 창조의 능력이 출애굽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이 두 전승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위의 내용만 잘 정리해도 한편의 설교로 손색은 없을 것이다. 필자는 설교가 두 트랙으로 흘러갈 위험성을 감수하고 다른 관점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것은 십계명이 정언명령(定言命令)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언명령은 칸트의 윤리학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목적론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당위’로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정언명령은 하나님의 권위가 배타적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유는 그분만이 생명을 선물로 주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명령을 내릴 수 없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제자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생명 사건이며, 거꾸로 생명 사건만이 하나님이 명령이다.

오늘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요구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예컨대 제주도와 경제자유구역에 영리병원을 세우기 위해서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리와 병원이 결합되었다. 인간애의 발로인 의료행위를 영리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아무리 신자유주의 시대라 하지만 후안무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리교회라는 명칭이 나올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이 시대가 이렇게 막장에 이를 정도로 경제적인 영리만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십계명의 부정이다.

마지막으로 정언명령은 ‘예’만 요구한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사람은 토를 달 수 없다. 태중의 아이가 세상으로 무조건 나와야 하는 것처럼 무조건적인 순종만 있을 뿐이다. 아니오, 생각해 볼 시간을 주시오, 하는 것은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른다는 증거다. 기도 마지막에 회중 모두가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도 그 기도에 ‘예’ 하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예’ 공동체다. 하나님의 통치에 무조건 예로 대답한다. 이것을 공자 왈(曰)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영혼의 순종이다. 오늘 이 시대는 예를 망각했다. 하나님 경험이 없다는 뜻이다. 교회 안이나 밖에나 모두가 눈치를 보고, 머리를 굴리고, 개인적인 이익만 도모할 뿐이지 영혼을 던질 수 있는 ‘예’가 없다. 그 결과는 생명 상실이요, 생명 훼손이다. 그런 삶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불행하다. 설교자는 그 내막을 정확하게 뚫고 있어야 한다.(설교공부 2011년8월, 기독교사상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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