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

 

벌써 10월이다. 마지막 주일은 창조절 10번째 주일이면서 종교개혁 494주년 기념주일이다. 종교개혁 모토 중의 하나는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늘 개혁되는 교회)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장로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개신교회는 기본적으로 개혁교회다. 개혁을 본질로 한다.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달려 있다. 지켜야 할 것과 바꿔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오히려 변질이 될 수 있다. 지켜야 할 것은 본질이며, 바꿔야 할 것은 형식이다. 교회의 본질과 형식을 구분하는 게 개혁의 단초다.

예컨대 교회의 단일성은 본질이고, 장로 제도는 형식이다. 교회의 단일성은 상수이고, 장로제도는 변수다. 오늘 한국교회가 단일성을 확보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적극적으로든지 소극적으로든지 장로 정치를 펼치는 일에는 신명을 내고 있다.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장로들은 대주주 노릇을 한다. 그런 의식을 가진 장로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한 교회의 단일성은 요원한 일이다. 왜 그런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장로제도만이 아니라 교회의 단일성을 훼손하는 교회의 제도는 더 늦기 전에 손질을 해야 한다.

교회의 단일성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평신도는 부지기수이고, 목회자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적지 않다. 단일성과 완전히 대립되는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는 교회의 본질을 외면하는 사람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성공한 벤처 기업가를 추앙하는 세속의 가치관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서 오히려 약한 지체가 더 소중하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실질적으로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걸 염두에 두고 종교개혁주일이 있는 10월 한 달간 설교의 짐을 져야겠다.

10월2일/ 창조절 다섯째 주일

마태복음 21:33-46/ 하나님 나라의 열매

포도원 주인은 포도 수확 철이 되자 하인을 시켜 소작농들에게 세를 받아오게 했다. 소작농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주인의 하인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주인은 소작농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 보고 아들을 보냈지만, 아들도 당했다. 세 공관복음서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시편 118:22절을 이 사건의 전거로 삼는다. 유대교 고위층이 부정했던 예수가 구원 역사의 한 중심이 되었다는 뜻이다. 유대교가 주장하는 구원의 구도가 달라진 것이다. 구원의 패러다임 쉬프트다.

마태복음이 다른 두 복음서인 마가나 누가와 다른 점은 43절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유대교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한 반면에 초기 그리스도교는 맺었다. 둘째, 그리스도교의 독립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증하려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유대교가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교에도 불안한 요소가 없지 않았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라는 차원에서 유대교와 여전히 경쟁적이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와 일치된 예수를 믿는 백성에게 주어진다. 거꾸로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주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동의하지도 못한 유대교 지도층은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다. 마태는 이 사실을 44절에서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예수로 인해서 유대교, 특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박살이 난다는 것이다. 유대교를 향한 절교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설교자는 청중들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들인지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그걸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유대교 신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신앙생활을 열정적으로 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마음을 열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끊임없이 자기에 대한 관심, 자기 교회에 대한 관심, 그런 업적에만 마음이 고정되어 있는 한 하나님 나라와 그 통치에 마음을 둘 수 없다. 오늘 우리는 성전을 절대화한 대제사장들과 율법을 절대화한 바리새인들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기억하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도 없다.

 

10월9일/ 창조절 여섯째 주일

빌립보서 4:1-9/ 공동체의 위기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위 본문은 다양한 주제를 산만하게 나열한다. 처음부터 그랬을 수 있고, 또는 전승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빌립보서를 쓸 때 바울의 심정은 불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옥에 갇혀 있었다.(빌 1:13) 그런데다가 빌립보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렸다. 대적하는 자들이 기승을 부렸다.(빌 1:28) 바울은 이들을 ‘개’라고 칭했다.(빌 3:2) 또한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빌립보서는 바울이 쓴 두 편의 편지가 하나로 편집된 것이다. 그 편집 과정에서 약간의 착오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오늘 본문은 세 항목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4:1절과 8, 9절로, 굳건하게 ‘서라’는 권면이다. 4:1b는 이렇다. “주 안에 서라.” 주 안에 서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게 쉽다면 바울이 이렇게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것들을 생각하라.”(8b)거나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a)는 권면도 똑같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올곧게 지켜나가는 일은 싸움과 같다.

둘째는 4:2, 3절로 동역자들을 향한 권면이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에서 활동하던 여자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의 갈등이 공동체를 흔들 정도로 심했던 것 같다. 역사적 교회는 늘 분열의 상처와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분열 없는 교회는 없다. 교회를 너무 이상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하며, 그렇다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도 말아야한다. 교회는 한편으로 종말의 빛으로 조명 받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어두움에 갇혀있다. 갈등과 분열로 상처를 받은 지체들을 도우면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셋째는 4-7절로 교회를 향한 권면이다. 여기서는 빌립보 전체 주제인 기쁨이 다루어진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기쁨은 삶의 조건과 상관없이 주와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삶의 존재론적 능력이다. 이 구절에는 기쁨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영성을 가리키는 중요한 단어가 여럿 열거된다. 관용, 주의 가까우심, 염려, 기도, 간구, 감사, 아룀, 지각, 하나님의 평강, 마음과 생각, 지킴 등이 그것이다. 이런 신앙적 용어가 가리키는 영적 세계를 뚫고 들어가야만 설교가 가능하다. 설교자는 이런 단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신학과 인문학의 차원에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위의 세 항목을 차례대로 강해하는 방식의 설교도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거기에 머물지 말라고 조언하겠다. 그럴 바에야 아예 한 항목만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것이 낫다. 본문을 옆으로 나열하는 방식보다는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게 바람직한 설교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서일과를 따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 본문을 다 다루고 있다. 이왕 그렇다면 세 항목을 간단히 설명한 뒤에 그것의 공통점을 찾아서 해명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위 세 항목을 다시 보라. 첫 항목은 신앙의 중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피력하며, 둘째 항목은 교회 분열을 극복하라고 권면하고, 셋째 항목은 기쁨의 영성을 놓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공통점은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에 위기가 닥친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항목인 기쁨의 영성은 위기와 관계가 없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기를 전제로 하는 이야기이다.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것 자체가 위기이다. 위기는 밖으로부터 주어지기도 하고, 안으로부터 주어지기도 한다. 빌립보 교회의 위기는 주로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였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은 싸워야 할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하지만, 안에서 주어지는 것은 그게 가능하지 않아서 더 어렵다.

빌립보 교회의 내적인 위기는 신앙의 정체성 논란이었다. 이런 논란은 빌립보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초기 이방인 교회에 모두 해당된다. 대표적으로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향해서 저주를 퍼부었다.(갈 1:6-10) 다른 복음은 할례파들의 주장을 가리킨다. 빌립보서에서도 바울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이들을 가리켜 ‘개’라고 했다. 그들은 행악하는 자들이고, 할례를 행하는 자들이다.(빌 3:2) 할례파는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을 전해들은 바울은 불같이 화를 냈다. 할례파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반적인 사태는 설교자들이 청중들의 형편에 맞도록 설명하면 된다.

오늘 설교의 중심은 할례파 문제 자체가 아니다. 이런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말 것을 전하는 바울의 권면이 중요하다. 억지로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다. 중심이 바로 서야 한다. 중심이 바로 서기 위해서도 바르게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한 번의 뜨거운 경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꾸준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했다.

 

10월16일/ 창조절 일곱째 주일

출애굽기 32:25-35/ 하나님과 송아지 상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6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위 본문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세가 레위 자손을 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집단적으로 죽이는 이야기이다. 한 나절에 3천명을 죽였다. 요즘에도 내전에 휩싸인 나라에서 집단 살해가 일어나는 마당이니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이해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주도한 장본인이 모세라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구약의 인물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바로 모세다. 그의 언행은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3천명을 죽인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인가? 두 구절이 여기에 관계된다. 27절에서 모세는 집단살해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뉘앙스로 말했다. 35절 보도에 따르면 송아지 건으로 하나님이 백성을 치셨다고 한다.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집단 살해 사건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출애굽기 기자는 왜 이렇게 잔인한 사건을 전하는 것일까?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가, 아니면 어떤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 꾸며낸 이야기인가?

이 전승의 배경에는 남북 왕조의 분열 역사가 자리한다.(왕상 12:25-33 참조) 북이스라엘의 태조인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상 두 개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웠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정치적 조치였다. 여로보암은 남북 왕조의 열왕들 중에서 가장 사악한 왕의 대명사였다. 금송아지 제작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송아지 상은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상에 대한 경고다. 하루에 3천명이 떼죽음을 당했듯이 다윗 왕조에 반역한 여로보암 왕조도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뜻이다.

송아지 상 사건을 단순히 정치적인 관점으로만 읽으면 안 된다. 더 근본적으로는 종교적인 문제다. 십계명 두 번째 항목은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출 20:4) 우상과 형상이 곧 송아지 상이다. 이 상은 다른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만들어 세운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왕상 12:28) 아론도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서 송아지 형상을 만든 뒤에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똑같은 표현이다. 이스라엘이 송아지 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태로, 즉 자신들의 경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뜻이다. 그게 성서가 말하는 죄다.

하나님을 경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생각은 매우 강렬하고 매력적이기도 하다. 금송아지는 풍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은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요구했다. 하나님의 약속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서의 보도에 따르면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물, 만나, 메추라기 등의 증거들을 보여주었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의 요구가 신앙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증거로 신앙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수없이 경험했지만 결국 바알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자신들의 경험 안으로 끌어들여서 확인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채근하다시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가장 확실한, 그리고 유일한 증거인데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물질의 복, 건강의 복, 후손의 복, 명예의 복을 원한다. 예수를 믿으면 성공한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외치는 목사들도 있다. 이것이 바로 송아지 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성서의 경고를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기는 쉽지 않다. 금송아지가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받는 오늘의 시대정신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도 연봉으로 사람이 평가되는 세상의 질서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교회도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세가 일벌백계의 심정으로 하루에 3천명을 죽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서기자는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신 것이라고 전한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능력 안에, 업적 안에, 설계 안에 끌어내리는 삶은 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경고다.

설교를 파멸로 끝낼 수는 없다. 풍요의 상징인 금송아지가 아니라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었다는 사실로 결론을 내리면 되지 않겠는가. 너무 뻔한 결론이라고 생각되는가? 앞의 설명이 충실했다면 청중들은 이런 답변을 새롭게 받아들일 것이다.

 

10월23일/ 창조절 여덟째 주일

데살로니가전서 2:1-8/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사도 바울의 편지는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고, 인간적으로 열정이 있으며, 문학적으로 수준이 높고, 영적으로 신비롭고, 철학적으로 매우 논리적이다. 이런 대목들을 놓치면 텍스트를 피상적으로 읽거나 또는 변죽을 울리게 된다. 그런 설교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다시 강조한다. 바울의 편지를 본문으로 설교하려면 우선 바울 신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성서 문장을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하고, 거기에 사용된 단어의 개념을 폭 넓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울의 처한 삶의 자리를 면밀히 살피는 것이다. 서신은 그 어느 것도 역사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위 본문은 바울의 다른 서신이나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과의 갈등을 전제로 한다. 큰 틀에서 볼 때 서신과 복음서가 놓인 삶 자리는 비슷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사역을 방해했다.(살전 2:15) 이런 박해는 전방위적인 것이었다. 바울도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했다고 한다.(살전 2:2) 당시에는 아직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리를 잡지 못했다. 유대교와의 경계도 분명하지 않았다. 많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가 천천히 유대교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또는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 사이에 신학적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교의 태두였다. 그가 세운 공동체는 토라와 할례로부터 해방된 복음 공동체였다. 바울이 공동체를 세우고 떠난 뒤에 할례파로 통칭되는 유대인들이 들어와서 바울의 가르침을 허물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도 조금씩 흔들렸다. 이들을 향해서 바울은 간절한 심정으로 자신의 복음사역을 변증하고 있다. 설교자들은 바울의 실존적 상황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사역이 하나님께로부터 위탁 받은 것이라고 한다.(4절) 이는 거꾸로 자신의 사명이 유대교 성전의 제사장들이나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본문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 주장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4b)도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유대교 당국에서 보면 불순한 사상이다. 기존의 권위 있는 체제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사실 늘 위험하다. 사이비 이단들도 대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기존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사역을 위탁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바울은 복음사역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점을 제시한다. 간사함, 부정, 속임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3절) 또한 아첨이나 탐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5절) 이어서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고 한다.(6절)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그런 대접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자비량 선교를 원칙으로 했다.(살후 3:8) 사도적 권위가 있었지만 그는 유모의 입장을 취하기로 했다.(7b) 절절한 마음이 전달되지 않는가.

목사들의 사역도 바울의 경우처럼 자비량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걸 목표로 평신도 교회를 세우는 이들도 있다. 목사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그렇게 본질적인 게 아니니까 그런 문제로 논란을 벌일 필요는 없다. 오늘의 목사가 바울과 똑같이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바울의 목회적인 마인드는 본질적인 것이다. 신자들에게 아첨하지 않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않는 것이다. 복음 사역을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으로 여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거들이다.

바울의 목회적 마인드는 단지 교회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우리의 삶은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 대개는 사람과의 관계에만 몰두해서 살아간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람이 듣기 좋은 말을 하려고 애를 쓴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삶은 단순히 교회 일에 매달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하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바울이 3절과 5절에서 말하는 대로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인간적인 술수를 부리지 않는다.

 

10월30일/ 창조절 아홉째 주일

마태복음 23:1-12/ 위선의 정체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태복음 23장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의 비판을 다루고 있다. 이 비판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시작되는 21장과 22장에도 나온다. 예수와 대립하는 이들은 주로 대제사장, 헤롯당, 사두개인, 서기관, 바리새인이다. 그중의 대표는 역시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 당시가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적극적인 활동을 한 사람들이다. 10월2일 본문 설명에서 언급했듯이 바리새인들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새롭게 일어난 유대교 복고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위 본문은 예수의 직접적인 발언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생각이 종합적으로 편집된 것이다. 본문에서 그것을 완전히 구별하기는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는 감안해야 한다.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복음서는 녹취가 아니라 해석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오히려 성서 형성이 역동적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활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제는 오늘 설교자가 그 해석 사건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위 본문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이다. 위선은 종교인들에게 나타나기 쉽다. 종교 자체가 경건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경건하지 못한 사람이 경건한 모습을 보이려면 어쩔 수 없이 위선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 해당된다. 8절 이하에는 당시에 존경받는 사람들이 열거된다. 랍비, 아버지, 지도자가 그들이다. 사람은 그런 칭호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질서와 권위를 냉소적으로 보는 말이 아니라 위선이 개인과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파괴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 위선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그렇다는 말인가? 핵심은 두 가지다.

1) 위선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다.(3절)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가리킨다. 4절은 이런 행태를 더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위선은 상대방에게 무거운 짐을 억지로 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예수와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의 율법이 바로 그와 같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예수의 말은 억압적인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킨다. 법과 윤리는 질서다. 사람은 거기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그것 자체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것이 절대적인 자리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다 담아낼 수 없는 율법이 절대화하면 위선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금 더 보충하겠다. 율법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은 율법 편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예컨대 십일조 헌금을 기준으로 신앙을 판단하고 가르치려고만 한다. 행동은 없이 말이 앞설 수밖에 없다. 자기의 말이 공허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거기에 더 매달린다. 오늘 법을 다루는 사람들도 이럴 위험성이 크다. 자신은 부도덕하면서 다른 이의 작은 흠결을 극대화한다. 한국에서는 특히 검찰 집단에게서 이런 일들이 흔하다. 피의자의 피의사실을 일일이 매스컴에 알린다. 소위 빨대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법원에 가기 전에 이미 피의자를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매도해버린다. 법을 다루는 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위선에서 나오는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다.(5절) 이것이 위선을 분간하기 힘든 이유다. 일단 겉으로 나타난 것은 선과 경건이다. 규칙적으로 구제하고, 시설을 찾아가서 봉사하는 것은 좋아 보인다.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도 좋아 보인다. 문제는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주로 종교적인 경건에 대해서 언급한다.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한다.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는다. 자연스럽게 몸에 밴 행동이다. 자신의 경건을 남에게 보이려는 행동이다. 이런 경건주의는 오늘도 흔하게 나타난다. 위선이 악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주장도 가능하다. 위선과 악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악은 이미 악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덜 위험하고, 거꾸로 위선은 선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마태복음의 결론은 섬기는 자, 낮추는 자다.(11,12절) 지금은 섬기지만 나중에 섬김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섬김을 받는 자리, 그리고 높은 자리는 그것 자체가 사람을 영적으로 불행하게 만든다. 섬김 받는 삶이 완전히 몸에 밴 사람은 섬김을 받지 못하는 순간이 되면 못 견딘다. 이게 불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먹고, 배설하고, 자는 일은 남의 도움 없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죽음은 혼자 감당해야만 한다. 섬김을 받는데 길들여지면 결국 삶의 근본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주일 494주년 기념주일이다. 종교개혁은 종교적 권위주의, 즉 위선을 허무는 작업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보다 훨씬 더 위선적이라는 말을 부정하기 어렵다. 억지로 자기를 낮추는 교회가 되기도 힘들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설교자 각자가 더 깊이 생각해보기를 바란다.(설교공부 2011년9월, 기독교사상 201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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