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主顯節)의 신비

 

주현절은 1월6일이다. 성탄절 이후 12일째 되는 날로 예수의 세례를 통해서 주(主) 되심이 드러난(Epiphany of the Lord) 때를 가리킨다. 고대 교회는 이런 절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표현했다. 그들이 무엇을 근거로 예수를 ‘주’라고 생각했을까, 하는 문제가 핵심이다. ‘주’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수를 주로 고백했다는 것은 그를 하나님으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예수에게 신성이 언제 정확하게 나타났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예수가 자신의 메시아 성을 언제 인식했는지도 확인할 수는 없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토로했다는 마태복음 기자의 진술(마 27:46)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까지 메시아 성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런 문제는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는 창조 사건의 스케줄을 사람이 계산해낼 수 없는 것과 같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으로 경험하고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단순히 교리적으로만 말할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보편적인 진리의 토대에서 변증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의 호칭인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 등등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할 뿐만 아니라 구원에 대한 오늘의 세계 경험이 무엇인지를 따라가야 한다.

 

1월1일/ 성탄절 후 첫째 주일

갈라디아서 4:4-7/ 종의 영, 아들의 영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교회에 속하지 않았거나 교회에 속했다고 해도 성경에 대해서 깊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갈라디아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본문이 낯설거나, 또는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본문의 중심과 거리가 멀다. 너무 익숙하게 대하는 분들이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로 나타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틀에서만 모든 본문을 해석한다. 이현령비현령의 해석에 머물거나 극단적인 알레고리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런 전(前)이해를 내려놓고 성서텍스트를 일단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위 본문을 보라. 중요한 단어가 여러 개 나온다. 때, 하나님의 아들, 여자에게 나게 하심, 율법, 속량, 아들, 아들의 영, 아빠 아버지, 종, 유업 ... 등이다. 각각의 단어를 일일이 설명하려면 무한정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단어 안에 어떤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어떤 이들에게 우습게 보일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자녀들을 두는 분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성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아들이라는 말이 오해를 부른다. 아들은 생물학적인 차원이 아니다.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바울은 왜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표현했을까? 그냥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했으면 충분했을 텐데 말이다. 더구나 여기서 동정녀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지. 여기서 여자는 남성과 대립되는 성(性) 정체성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는 공중에서 떨어진 인물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람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셨다는 뜻이다. 이런 말을 발설한 이유는 두 가지 차원으로 봐야 한다. 첫째는 소극적인 차원으로 가현설적 그리스도론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정통 기독교는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vere Homo)을 포기하거나 유보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예수의 인간성은 메시아를 신성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불편한 진실이다. 둘째는 적극적인 차원으로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속량하려는 것이다.

속량한다는 말은 풀어준다는 뜻이다. 예수는 율법에 묶인 사람들을 해방시키셨다.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즉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처한 어떤 구체적인 상황을 전제로 기록되었다. 갈라디아 지역에 할례파들이 들어와서 바울의 가르침을 훼방하고 있었다. 그들을 가리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자들이라고 했다.(갈 1:7)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사람들로서 유대 기독교의 대표자들이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나름으로 호소력이 있었다. 토라와 할례를 지키지 않는 복음은 교회를 흔들고 만다는 것이다. 오늘의 말로 바꾸면 칭의만으로는 부족하고 성화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칭의에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구원파로 떨어지고, 칭의를 상대화하면 성화론자로 떨어진다.

바울에 따르면 할례파들의 주장은 종의 영을 받은 것이다. 종의 영은 율법 개념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종은 주인의 뜻을 살펴서 행할 것은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말아야 한다. 그의 업적에 따라서 주인으로부터 평가받는다. 오늘 세상의 작동 원리가 거의 그렇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제 아들의 영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절) ‘아빠 호 파테르’는 아버지라는 아람어의 아빠와 그 아람어를 헬라어 식으로 부른 단어다. ‘너희가 아들’이라고 할 때의 아들과 ‘아들의 영’이라고 할 때의 아들을 루터는 다른 독일어로 표현한다. 앞의 아들은 자녀라는 뜻의 ‘킨트’(Kind)로, 뒤의 아들은 말 그대로 아들이라는 뜻의 ‘조온'(Sohn)으로 번역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일 뿐이고 아들은 예수뿐이라는 뜻이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암시한다.

자녀의 특징은 하나님을 통해서 유업을 받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가? 종의 특징과 반대되는 것을 찾아보면 된다. 자유의 삶이다. 영적인 자유다.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속량이다.

 

1월8일/ 주현절 후 첫째 주일

마가복음 1:4-11/ 물 세례, 성령 세례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의 공생애는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네 복음서가 모두 이 사실을 거론한다. 세례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메시아의 권위가 손상당할지도 모를 이 사건을 거론할 까닭이 없다. 특히 세례가 요한에 의해서 집행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기본적으로 도덕적인 죄 문제와 연관된다. 예수가 죄로 인해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인 예수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예수의 세례와 그의 정체성은 모순이다. 복음서 기자도 이 모순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인 세례를 외면할 수는 없다. 이미 그 이야기는 멀리 퍼져서 숨길 수도 없었다. 복음서 기자가 찾은 해결책은 세례를 통해서 오히려 예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다.

예수와 연관해서 세례에 대한 요한의 해석은 8절에 요약되어 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물 세례는 도덕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의식이다. 세례 요한은 요단 광야에서 금욕적으로 살았다. 그의 도덕적인 권위는 모든 사람들의 양심을 흔들었다. 요즘 식으로 개혁적인, 청교도적인 인물이었다. 물 세례는 실제적인 삶의 변화였다. 이것만으로 참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한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령 세례는 영혼의 변화를 가리킨다. 삶의 변화와 영혼의 변화가 어떻게 다른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단순히 삶의 변화는 형식적인 것이며, 영혼의 변화는 근본적인 것이라는 말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물 세례를 통한 삶의 변화는 본인의 결단을 통한 변화라고 한다면, 성령 세례를 통한 영혼의 변화는 하나님을 통한 변화이다.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에게 있느냐에 따라서 구별된다. 또 다른 관점으로, 전자는 행위에 초점이 있다면 후자는 존재에 초점이 있다. 행위와 존재는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것도 아니다. 행위는 존재의 인식론적 토대이고, 존재는 행위의 존재론적 토대이다. 예수님의 “나무와 열매”의 비유가 여기에 해당된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만(존재의 변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좋은 열매를(행위의 변화) 보고 나무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변화 사이에 변증법적 긴장이 있지만, 존재의 변화가 주도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신자들이 존재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주로 행위의 변화에 치중한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간증은 모두 행위의 변화에 머문다. 보수적인 교회는 개인의 변화에, 진보적인 교회는 사회의 변화에 치중한다. 이런 요구는 세례 요한의 물 세례다. 신자들에게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왜 그런지를 두 가지로 설명하겠다.

하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만 요구한다. ‘메타노이아’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는 것이다. 사람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가 도덕적인 사람인지 부도덕한 사람인지를 구분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장 간단한 이유는 인간 행위는 늘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거짓말 앞에서 사람의 행위는 상대적이다. 조금 더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 있고, 덜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 상대적인 사건으로 인간의 구원을 결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인간행위는 다른 사람이 판단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서 행위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현대윤리학에서 이런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폭력 문제만 해도 그렇다. 비폭력이 기독교적인 태도지만 그게 능사는 아니다.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한 반(反)폭력이 용납되는 상황이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생명 사건은 인간 행위보다 훨씬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생존에만 모든 관심이 있다. 그에게 도덕적인 행위를 요구할 수는 없다. 빙하기가 곧 도래하거나 혜성이 지구와 부닥치는 순간이 왔을 때 인간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 경구는 옳다. 부도덕하게 살아도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 행위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를 직면한 사람은 당연히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울의 칭의론이다. 로마서에서 칭의론으로 다루었다. 갈라디아서에도 비슷한 관점이 나온다. 칭의론은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가르침이다. 칭의의 기준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다. 사람은 실제적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게 칭의론의 토대다. 이런 문제는 까다롭지만 정확하고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의 중심 세계를 놓친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어떤 사람을 단죄하려는 규범이 아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죄가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원죄와 자범죄의 구분도 죄의 실체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교리이다. 기독교의 죄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하게 창조했는데 실제로는 악하다는 모순을 해명하려는 도그마다.

예수를 통한 성령 세례의 정당성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있다.(11절) 결국 위 본문도 예수의 정체성, 예수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또한 그것의 근거가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과 직결된다. 예수의 신성은 주현절 첫 주일에 맞춤한 언급이다. 그 신성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더 생각해보자.

 

1월15일/ 주현절 후 둘째 주일

사무엘상 3:1-9/ 궁극적인 소명 경험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위 본문은 어린 사무엘에 소명을 받는 장면에 대한 설명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개 성인이 되었을 때 소명을 받지만,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인데, 사무엘의 소명은 유별나다. 그의 출생 자체가 유별나다. 그 이야기는 잘 알져진 것이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브닌나라는 또 한 아내를 둔 엘가나의 아내다. 늙기까지 자식이 없었다. 자식을 낳은 브닌나에게 구박을 받던 한나는 서원 기도 끝에 아들을 낳는다. 사무엘은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는 실로의 성소에서 생활한다. 일종의 동자승과 같다. 어느 날 밤에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나타나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세 번을 부른 뒤에나 그 부르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 줄 알게 되었고, 네 번째 부르심 뒤에 구체적인 소명의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을 포기하고 사무엘을 대신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사무엘의 경험은 무엇인가? 사무엘은 세 번이나 하나님의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으나 그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스승 엘리가 부르는 것으로 생각해서 잠을 자고 있던 엘리에게 달려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국 이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했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을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비슷한 방식으로 말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대를 통해서 구체적인 인간 언어로 말씀하지 않는다. 인간 언어로 생각할만한 성서의 표현은 문학적 수사다.

구약성경은 소명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찾아와 책임을 물으셨다. 동생을 죽인 가인을 찾으셨다. 노아에게 찾아와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 아브라함에게도 여러 번 찾아오셨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물론이고, 모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신탁을 경험했다.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게 밖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따뜻하게 대접한 나그네가 바로 천사였다. 신약에도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을 만났다고 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도 부활의 주를 천둥소리와 빛 현상으로 경험했다.

오늘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또는 명령을 직접 듣거나 보았거나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불이 가슴으로 들어왔다는 말들은 아주 흔하다. 사이비 교주들은 거의 이런 경험에 의존해서 교리를 내세운다. 이런 주장들이 어필하는 이유는 그것을 제 삼자가 검증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 청중들도 그런 경험을 원한다는 사실에도 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의 경험이라도 믿고 싶어 한다. 청중들이 유치한 삼류 통속 티브이 드라마에 빠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진정성이 있겠지만 그것으로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이 담보되는 건 아니다. 그것은 검증되어야 한다.

어떻게 검증하는가? 시를 예로 들어보자. 모든 시가 참된 시는 아니다. 시인이 나름의 진정성으로 시를 썼겠지만 사이비 시가 될 수도 있다. 당시에 인기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사이비 시일 수도 있다. 역사적 비평에서 살아남아야만 그 시는 참된 시다. 성서에 있는 모든 소명에 대한 진술은 이런 비평의 과정을 거쳤다. 그 비평의 칼은 신학이다. 물론 신학도 가지각색이기 때문에 하나의 신학만을 내세울 수는 없다. 진리론적 해석학이 그 대답이다. 소명은 검증받아야 한다. 즉 해석되어야 한다.

진리론적 해석의 토대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해석학이 작동된다. 예수 이후로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들을 직접 찾을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과 같은 소명 경험이 필요 없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역사에 등장했기 때문에 그가 바로 소명의 근거이다.

이 말을 교리적으로만 듣지 말라. 핵심은 다음의 질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를 생명의 소명으로 경험할 수 있는가? 그런 경험이 있는가? 그걸 설명할 자신이 있는가?

 

1월22일/ 주현절 후 셋째 주일

마가복음 1:14-20/ 전적 의존성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지난 주현절 후 둘째 주일의 마지막 대목은 어떻게 예수를 생명의 소명으로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오늘 설교는 바로 예수가 제자를 부르신 사건을 본문으로 한다. 본문은 두 단락이다. 첫 단락은 14,15절로, 예수 사역의 총괄이다. 예수의 사역과 연관된 단어를 보라. 요한, 갈릴리, 하나님의 복음, 때, 하나님 나라, 회개, 복음, 믿음이 그것이다. 한 단어만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예수의 사역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연관되면서 넘어선다.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변방에 속한다. 이스라엘의 정치, 문화, 종교의 중앙은 예루살렘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 나라는 실제로 왔는가, 아니면 오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법적인 상태인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하나님 나라인가? 이 하나님 나라 앞에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회개와 믿음이다. 예수를 사람들에게 바로 그것 한 가지 사실을 요구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궁극적인 관심을 돌리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 나라가 생명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회개와 믿음은 같은 차원의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는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회개와 그것에 대한 믿음은 쉽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의 세계관은 일단 자리가 잡히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성격이 강하다. 물리의 세계만이 아니라 세계관의 세계에서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천동설로 세계를 보던 사람은 지동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쉬프트’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역시 생각의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 세상의 작동원리에 고정된 시각을 하나님 나라로 돌리기 힘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특히 종교적인 열정이 뜨겁고 종교적인 업적이 큰 사람들에게는 그게 더 힘들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크게 대립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걸 바꾸려면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즉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바울이 대표적이다.

둘째 단락은 16-20절로,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신 사건이다. 예수 사역의 총체가 실제 제자들에게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보도이다. 시몬과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은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 이 전승의 기본 구조는 두 문장으로 집약된다. ‘나를 따르라’와 제자들이 ‘따랐다’는 문장이다. 여기에 복음의 본질이 있다. 복음은 자기 내면의 종교적 가치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구원은 자기 내부가 아니라 자기 밖에서(extra nos) 주어진다는 것이다. 생명이 선물인 것처럼 구원 역시 선물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시각은 따른다는 말은 삶 전체와 연관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히 어떤 깨달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삶을 총체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교회 일에 매달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교회 일은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받아들이면 된다. 죽음과 이후까지의 모든 운명을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에 맡기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 이게 가능한가? 어떻게 가능한가? 대답은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알고 그 사건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다. 전적인 의존성이 대답이다. 이것을 마가복음 기자는 제자들이 ‘...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표현했다.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들을 버려둘 수밖에 없다. 의존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게 영성이다. 세상의 것들은 아무리 미련이 있다 해도 결국은 버려야만 할 것들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예수의 부르심을 경험했는가?

 

1월29일/ 주현절 후 넷째 주일

신명기 18:15-20/ 하나님 경험은 위기다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라고 생각했다. 선택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경인 구약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중개자가 필요했다. 그들이 선지자다.

가장 대표적인 선지자는 모세다. 물론 모세는 공식적으로 선지자 시대에 접어든 남북 분열왕국 시대 이전의 사람이지만 그의 기능은 분명히 선지자의 일이었다. 그 어떤 선지자보다 훨씬 많은 분량의 구약성서가 그의 이름으로 전승되었다. 특히 시내 산에서의 소명 전승과 호렙 산에서의 율법전수 전승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세의 영적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까이 갔던 인물이 모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세의 전체 신학사상의 요지는 신명기에 담겨 있다.

위 본문은 선지자 전승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다. 모세는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없다.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세 대신 말씀을 전할 선지자가 필요했다.(15절)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을 두려워했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16절) 시내 산에서 그들이 본 놀라운 어떤 현상을 가리킨다. 화산폭발이 고대인에게는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려움이 그런 난폭한 자연현상(화산폭발)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준엄성이 있다고 설명한다.(19절) 본문은 선지자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그 선지자의 선포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지자 자체가 중요했다기보다는 하나님 말씀은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근거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즉 하나님 경험은 존재의 위기라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 말씀 경험은, 즉 하나님 경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부정을 직면하게 한다는 것이 대답이다. 하나님을 통해서 영원성을 경험한다면 자기가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게 된다. 자기무화 경험이다. 하나님을 통해서 절대 의를 경험한다면 자기가 얼마나 불의한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통해서 사랑을 경험한다면 자기가 얼마나 비열한지를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능력과 구원능력을 경험한다면 자기가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절감한다. 이런 예는 성서에서 허다하다.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등이 모두 그렇다. 예수에게 나타나는 메시아적 능력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막 4:41)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수록 사람은 자기를 축소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자기축소, 자기무화, 자기부정은 파멸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이다. 왜 그런지를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리라.

오늘날 하나님 말씀은, 즉 하나님 경험은 위기에 빠졌다. 하나님 말씀을 자신감의 도구로 사용한다. ‘긍정의 힘’이라는 사이비 심리학이 교회를 지배한다. 그것은 본문 20절이 경고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행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선포했다. 본문의 경고에 따르면 그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한다.(20절)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 해체되는 경험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아는 게 아니다.(인문학적 성서읽기 2011년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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