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과 영성

 

교회력은 한국교회에서 무시된다. 교회력에 따라서 설교하는 설교자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영성을 협의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수 믿어 구원받고, 현재 축복을 받아 살며, 죽어서 천국가면 된다는 구도를 가리킨다. 이런 구도에만 머물면 설교자는 청중들의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는 방향으로만 나갈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돈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조금 더 나가서 남을 돕는 것을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소수자, 제삼세계, 빈부격차, 신정론, 철학, 예술, 인문학 등의 문제들이 별 의미가 없다. 신자들도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사람처럼 당장 재미있고, 자극적인 설교만 요구한다.

교회력의 얼개는 다음과 같다.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창조절. 교회력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부터 시작해서 세계 전체의 구원에까지 나간다. 교회력을 따른다는 것은 대학생들이 커리큘럼에 따라서 강의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대학생들은 재미있는 과목만 들으면 안 된다. 전공자는 교칙에 따라서 이수해야 할 과목을 다 들어야 한다. 교회력은 전공 선택과목이 아니라 전공 필수과목이라 할 수 있다.

2월은 셋째 주일인 19일까지 주현절이 이어진다. 예수가 주(Lord)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을 기리는 절기이다. 다음과 같은 유대인 학자의 질문이 주현절과 연관된다. 예수 등장 이후의 세상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면 예수가 메시아, 즉 주라는 증거는 없는 것 아닌가? 오늘도 우리는 이런 도전적 질문에 직면해 있다.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다.

 

2월5일/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 막 1:29-39/ 예수의 축귀 능력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한국교회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축귀나 치유와 (조금 더 나가 기복 같은 것들과) 일치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예수를 통해서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이 치료된다는 믿음은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바른 것도 아니다. 잘못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바른 것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성숙이 아니겠는가. 축귀 신앙으로 나가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게 인간의 본능적인 요구라는 것이다. 사람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신기한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 마술이 속임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흥미를 끄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기독교 신앙을 마술의 차원에 자리매김할 수는 없다. 다른 하나는 성서에 축귀 현상이 나온다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현상을 사실적인 것으로만 보면 성서의 깊이를 모르는 것이다.

위 본문은 예수의 축귀 및 치유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가 종합된 것이다. 1) 예수는 열병에 누워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쳤다.(29-31) 2) 안식일 저녁 때(안식일이 끝났음) 몰려온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께서 고쳤다.(32-34) 3)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은 축귀 및 치유 문제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위 사건은 모두 안식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안식일은 안식의 날이다. 안식은 쉼과 해방이다. 처음 시작은 그랬다.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질명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치병을 통해서 안식을 허락했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사역을 39절에서 요약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이런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이 가능하다. 예수는 실제로 병을 고쳤나? 특히 불치병이나 장애를 고쳤나? 이런 질문은 성경을 읽는데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의 중심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치병과 축귀는 복음서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구약에도 나오고, 다른 종교 문서에도 나온다. 요즘 병원에서는 이런 일이 반복된다. 더 근본적으로 사람은 생로병사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과 사 사이에서 늙고 병든다.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지만 아무도 여기서 거스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불치병에 걸려서 죽는다. 만약에 기독교 신앙을 그런 차원으로만 생각한다면 궁극적인 게 못된다.

물론 축귀나 치병을 위해서, 즉 신유를 위해서 기도하는 게 잘못은 아니다. 우리는 삶의 고난을 해결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으며, 당연히 간구해야 한다. 자식들이 부모 눈치를 보고 필요한 것을 요구하지 않을 수는 없다. 성경에도 이런 기도는 많다. 문제는 이런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매달린다는 데에 있다. 신유 신앙은 우리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에 근거한다. 더 나가서 축귀와 치병을 통해 얻는 건강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신유 신앙의 깊이에 들어가면 그 결과를 넘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지병을 고치기 위해서 두 번만 기도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어느 쪽이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 게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이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축귀와 치병에 대한 위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인가? 1) 시몬의 장모는 수종들었다. 2) 치유 사건에 혹하지 않도록 침묵을 명령하셨다. 3) 예수님의 일은 ‘전도’였다. 루터는 전도를 설교라고 번역했다. 예수에게 축귀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예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통치를 전한 것이다.

축귀능력은 오늘 어떤 의미인가?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또한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가? 악한 세력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는 존재론적 능력이 바로 귀신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것이 이미 굴복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그래서 귀신이 굴복된 현실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 전도이다.

 

2월12일/ 주현절후 여섯째 주일/ 고전 9:24-27/ 신앙은 구도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간혹 천국 상급론에 대한 논쟁이 불거질 때가 있다. 특히 차별적 상급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주장이 신자들에게 매혹적으로 다가간다. 경쟁구조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탓이다. 신자들은 신앙 이전에 심리적인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한국교회의 심리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작은 신앙행태부터 그렇다. 설교 시간에 아멘과 할렐루야를 습관적으로 외치기도 한다. 목회자에 대한 심리적인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 상급론 문제는 심리적인 요인만 있는 게 아니다. 성서구절이 그걸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런 성서구절 중의 하나가 위 본문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신앙인의 삶을 달리기 경주로 설명했다. 이 본문을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신앙생활도 한 사람만 받을 수 있는 상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다. 1등만 알아준다는 것이다. 이런 구절에 근거해서 신자들이 경쟁하듯이 교회생활을 하게 하는 것은 잘못이다.

바울의 비유는 경쟁 자체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구원에 대한 것이다. 27절을 보라.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이 누군가? 믿음이 부족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뼈대를 세웠다고 할 정도로 깊이 있는 신학자이며, 세계 선교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선교사이고,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영적인 깊이에 들어간 영성가이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가 신앙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두 가지만 보자.

1) 신앙(구원)은 과정이다. 어떤 이들은 구원을 자동차 운전 합격증이나 영어 자격증, 또는 극장 입장권처럼 여긴다. 사이비 이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자기들만 구원받는 집단인 것처럼 착각한다. 다른 이들을 자기 집단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애를 쓴다. 일종의 방주 구원론이다. 정통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심정적으로 이와 비슷하다. 구원은 아무도 태양을 소유할 수 없듯이 아무도 소유할 수 없다. 구원을 향해서 길을 갈 뿐이다. 이런 말이 관념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신자들이 그것을 소유로 확인하려고 애를 쓴다. 특히 목사를 비롯해서 교회구조에 깊이 들어온 이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강하다. 자신들을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목사는 구원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자기 구원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했다. 죽을 때까지 구원에 가까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2) 신앙은 방향이 분명해야 한다.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26절) 신앙의 방향이 정확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물거품이 된다는 뜻이다. 세월이 갈수록 가야할 목표로부터 멀어진다. 다미선교회나 통일교, 신천지 집단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의 이런 말은 독자들을 협박하려는 말이 아니다. 신앙이 엄중하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두려울 것이다. 평신도들은 신학적인 것을 잘 모르니 대충 성실하게 교회만 잘 나오면 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평신도도 최소한 이성적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신학자가 되어야 하며, 될 수 있다. 신학은 신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해서 바른 신앙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신학적인 성찰이 없는 신앙은 사이비로 빠질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세상살이에서 철학적인 반성 없이 무조건 사는 것과 비슷하다. 철학적 반성 없는 오늘의 삶은 무한 경쟁의 악순환이다. 교회마저도 무한 경쟁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

위의 설명으로 이제 신앙생활이 구도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구도자의 길을 바울은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하안거와 동안거를 하는 승려들도 있다. 수도승들도 자기 몸을 쳐서 절제한다. 세속생활을 하는 평신들에게도 그게 필요하다. 개인의 형편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구원을 향한 집중력이다. 기독교적인 구원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소리를 배우는 소리꾼처럼 말이다. 그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통해서 놀라운 기쁨을 맛볼 것이다.

 

2월19일/ 주현절후 일곱째 주일/ 막 9:2-9/ 메시아 비밀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일명 변화산 이야기는 오해되기 쉽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전근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이상한 현상에만 집착하면 본문의 중심을 잃는 것이다. 변화산 현상은 동화를 좋아하는 어린아이들의 호기심을 끌만 하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올라갔을 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예수의 옷에 광채가 났다. 엘리야와 모세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엘리야, 모세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산에서 어떤 능력을 경험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아합의 이방 선지자들과 싸우면서 신비로운 현상을 경험했고, 모세도 호렙산에서 소명을, 그리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신비로운 현상과 함께 받았다. 둘 다 초자연적 카리스마가 강력한 인물들이다. 또한 양자 모두 빛과 연관된다. 엘리아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으며, 모세는 불붙은 가시떨기에서 거룩한 경험을 했고, 율법을 받을 때 그의 후광이 넘쳐서 사람들이 바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엘리아나 모세 둘 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직접 나눈 인물이었다. 또한 이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앞서 올 이들로 알려져 있었다. 마가복음 기자는 이를 통해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것이다.

7절은 이를 구체적으로 말한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소리는 예수의 세례 장면에도 나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변화 산에서는 예수가 3인칭으로, 세례가 일어난 요단강에서는 2인칭으로 나오는 것만 다르지 내용은 똑같다. 세례와 변화산 사건이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인가? 예수 부활이 대답이다. 예수는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것이 세례 전승에도, 변화산 전승에도 토대로 자리하고 있다. 예수가 광채에 휩싸였다는 것은 그가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의미이다. 부활이 바로 그런 변화된 생명이라는 뜻이다.

부활은 아무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애벌레가 어떻게 나비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물고기는 자신과 물을 구분할 줄 모은다. 물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철학용어로 ‘소여’라고 한다. 사람은 지금의 생명 형식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는 부활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이는 곧 부활의 주님을 경험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니 부활 이전의 예수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 메시아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세 명의 제자들을 보라. 그들은 변모하신 예수님에게 초막 셋을 짓자고 제언한다. 황홀한 경험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일단 오해다. 메시아를 초월적인 능력의 소유자로만, 또는 신앙을 황홀한 경험으로만 보는 것이다. 마가복음 기자는 베드로가 지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정확하게 짚었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6절) 이게 제자들의 실존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으로 두려움에 빠졌다. 예수 부활도 그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UFO를 타고 온 외계인처럼 이질적인 생명 현상에 대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변화산에서의 신비한 현상은 곧 사라졌다. 황홀한 순간은 늘 빨리 사라진다. 일행은 산에서 내려왔다. 산 아래는 현실이다. 산 아래는 산 위와 다르다. 더 이상 엘리야와 모세는 없다. 예수의 광채도 없다.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글의 법칙에 따라서 작동되는 일상이다. 참된 쉼이 없는 일상이다. 이 일상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삶의 자리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아무도 여기를 떠날 수 없다. 물론 일상을 떠나서 홀로 머무는 순간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늘 예배만 드리는 게 아니라 세속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과 같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고난이다. 변화산 사건 뒤에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거기서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한다. 산 위는 메시아가 드러나지만 산 아래서는 메시아가 부정된다. 이런 현실을 우리는 떠날 수가 없다. 기독교 신앙을 직간접으로 부정하는 세상에 맞서야 한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변화산 경험을 떠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라는 단서가 달려 있다. 변화산 사건이 부활 사건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부활 이후를 살고 있다. 당연히 예수의 부활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비밀이다. 그의 재림에 의해서만 이 비밀이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 때를 기다리면서 지금 여기서는 예수가 주(主)라는 사실을 전해야 한다.

 

2월26일/ 사순절 첫 주일/ 창 9:8-17/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새 언약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위 본문은 노아홍수 전승에 속한다. 홍수 전승은 성경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이집트, 바빌로니아 전승에도 나온다. 홍수는 고대인들에게 위협적이었다. 생존의 위기였다. 고대인들은 대재난인 홍수가 왜 일어나는지를 몰랐다. 노아홍수 전승은 홍수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묘사한다.(창 6:1 이하) 하나님은 대홍수를 계획하고 실행하셨다.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류의 멸종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대홍수가 일어나면 실제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그런데 생각해보라. 인간이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어린아이까지 모두 죽인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창세기 기자도 이런 상식적인 생각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른 방식으로는 홍수 사건을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인류 몰살이라고 말한 것뿐이다.

본문 구성을 잘 보라. 노아홍수 이야기는 인류몰살을 간략하게 묘사한다.(창 7:21-24) 대부분의 이야기는 노아 방주를 짓는 일, 세상의 생명체를 방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 그리고 홍수가 물러가는 일에 대해서 다룬다. 노아홍수 전승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만약 노아홍수 이야기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다면 성서를 왜곡하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성서의 다른 진술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설교자는 지옥표상을 구체적인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신자들을 두렵게 한다. 그런 두려움은 영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심리적인 공포다. 노아홍수를 전하는 성서기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나 세세하게 신경을 쓰시는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 사실이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노아와 아들에게 ‘내 언약’을 세운다고 했다. ‘언약’이라는 단어가, 즉 ‘약속’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그것도 ‘내’ 언약이다. 노아와의 언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 또는 시내 산에서의 언약과 비교된다. 이스라엘은 기본적으로 언약의 민족이다. 하나님을 언약 개념으로 이해한 민족이다. 아브라함과의 약속이나 시내 산에서 체결한 이스라엘 민족과의 약속은 기본적으로 인격적이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이 인격적으로 여기에 반응한다. 그러나 노아와의 약속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것이다. 노아는 죽은 듯이 아무 말도 없다. 그 약속의 전제 조건도 없다. 무조건적이다. 노아와의 약속이 일방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불의하더라도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거꾸로 인간에게 의를 요구해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선택은 한 가지뿐이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P기자의 신학은 놀랍다. 인류몰살이라는 위협 앞에서, 실제로 종종 일어난 것인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을 노래한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생존 위기는 계속되었다. 3백만 년 전의 빙하기를 생각해보라. 지름 1킬로미터 되는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고 상상해보라. 태양계에는 그런 혜성들이 수없이 많다. 지구는 불바다가 될 것이다. 그것 말고도 인류 멸망의 개연성은 많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인류를 멸종시킬 수도 있다. P기자는 세상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을 제시했다. 그 약속은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 해당된다.

그 약속의 증거는 무지개였다. 무지개라는 히브리어는 전쟁의 활이라는 뜻도 있다. 하나님이 활을 옆에 세워놓으셨다. 더 이상 멸망의 위협이 없을 것이다. 노아홍수 이야기는 어둡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고 찜찜하지도 않다. 오히려 밝고 든든하다. 인류 멸망의 실제적인 위협을 뚫고 나가는 빛이다. 무지갯빛을 생각하라.

무지개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을 가리키나? 인간이 멸망당하지 않을 거니까 마음 가는 데로 그냥 살아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인간의 죄, 무책임, 폭력 등을 가볍게 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인간 멸망의 위협에 굴복당하지 않겠다는 고백이자 결단이다. 단순히 인간 멸망만이 아니라 생태계까지 포함된다. 군사주의자들이 벌이는 군사적 위협, 경제대국을 꿈꾸는 이들의 경제적 위협, 석유와 핵을 통한 위협에 굴복당하지 않겠다는 고백이다.

현대인들은 노아홍수의 배경에 되는 시대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멸망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불안한 마음으로 모두 노아방주를 짓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참된 방주요, 무지개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다. 예수의 재림으로 구원을 완성할 것이다. 노아와의 약속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2012년 1월, 인문학적 성서읽기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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