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대구샘터교회 수련회에서 행한 특강 원고다. 2017819() 18:30-20:00, 가산 산성마을 전원휴양센터)

 

 

하나님 경험과 시원성

 

      

하나님 경험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자주 나온다. 선악과 사건 이후에 아담은 네가 어디 있느냐?’(3:9)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인 뒤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을 받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왔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모세야, 모세야!’(3:4)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1:5). 이런 구절은 구약성경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신약은 구약처럼 노골적으로 하나님과 만나거나 대화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대신 천사들이 자주 등장한다. 예수의 출생이나 바울의 회심 사건 등에 천사가 나온다.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존재니까 천사와의 대화는 하나님과의 대화나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한가? 그런 일이 오늘 우리에게는 왜 일어나지 않는가? 지금도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이들은 제외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이비 이단 교주들의 주장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을 직접 보거나 만나거나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절대 생명(초월)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으로 작동되는 이 세상에서(내재) 살아가는 사람이 그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직접 보고 싶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33:20).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인물로 알려진 모세도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었는데, 다른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처럼 들리는 보도는 문학적 수사다. 6:1-5절을 보라. 이사야는 성전에서 특별한 환상을 보았다. 주께서, 즉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천사들이 상투스찬송을 불렀다.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런 문장 역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으로 보면 곤란하다. 그는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소명을 받았다. 그 소명을 주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문학적인 글쓰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경험은 아예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 경험에 대한 이야기다.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라고 간접적인 경험이다. 전체적인 경험이 아니고 부분적인 경험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또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분만을 경험한 것이다. 1백만 개의 퍼즐 중에서 한 개 조각을 경험한 것과 같다. 한 조각이라도 분명히 전체 퍼즐에 속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퍼줄 전체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 경험은 모순, 충돌되는 경우가 많아.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경험하고 어떤 경우에는 진노하는 분으로 경험한다. 사랑이기도 하고 미움이기도 하다. 전능한 존재이기도 하고 무능한 존재이기도 하다.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사히 탈출하게 만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를 하나님이 뜻한 바대로 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 하나님은 그렇게 전능한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욥기는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벌어진 신론 논쟁이다.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욥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았지만 욥은 그걸 부정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은 더 풍성해졌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고후 4:6절은 다음과 같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나님은 영광(: 독사)으로 나타나시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곧 하나님이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14:8절 이하에 따르면 빌립은 예수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경험했다. 이런 경험에 근거해서 사도신경에도 나와 있듯이 초기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했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다. 예수만이 하나님 경험의 유일한 통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에 근거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이번 특강의 목적이 아니기에 간단한 방향만 제시하는 것으로 정리하겠다. 제자들은 예수 사건에서 생명 구원의 깊이와 신비를 보았다.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죄와 죽음이다. 죄와 죽음이 예수를 통해서 극복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핵심은 생명 경험이다. 생명 경험이 곧 하나님 경험이다. 지금 우리는 살아있다. 생명체라는 말이다. 죽으면 생명이 없다고 한다. 기독교는 죽는다고 해서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으로 변화된다고 믿는다. 부활이 그것이다. 부활은 끝이 없는 생명(endless life)이 아니다. 끝이 없는 것은 끝이 있는 것과의 상대적 개념이라서 여전히 절대적인 게 못된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다. 양적으로 늘어난 생명이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된 생명이다. 생명의 양과 질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지루하지만 통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은 즐겁고 속도도 빠르게 느껴진다. 앞의 시간은 양적인 차원의 경험이라면 뒤의 시간은 질적인 차원의 경험이다. 앞의 것은 상대적인 생명 경험이라면 뒤의 것은 절대적인 생명 경험이다. 부활은 절대적인 생명 사건이다. 그것을 여기서 오늘(here and now) 어떻게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시원성(始原性)에 대한 경험이 그 대답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선포하고 완전히 의존했던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현실(reality)이 바로 이 시원과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통치다. 하나님은 통치로서 존재하니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이다. 후기 유대교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는 묵시문학적 형태를 띤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때가 되면 강력한 힘으로 시작되고, 이로 인해서 정의가 완전하게 실현된다고 보았다. 예수도 이런 신앙적 풍토에서 생활했다. 이스라엘과 예수에게서 하나님 나라는 동일하게 중요하다. 차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머물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여기에 와 있다. 이 차이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미 여기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붙들고 있어야만 현실을 의미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다. 그런 영적 시각으로 예수는 기존 유대교 권력자들과 용감하게 투쟁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여기 와 있다는 사실을 뚫어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시원적(始原的, anfänglich) 사유다.

시원은 시작, 근본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이를 태초라고 말한다. 1:1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이며, 1:1태초에 말씀이 존재했다.’이다. 성경 기자들은 세상을 지금 이렇게 현상하는 것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시원의 차원에서 보았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직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시원적 깊이에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시원적 깊이를 보려면 시원적 사유가 필요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원적 사유는 존재의 호의의 메아리이다. 그 호의 속에서 유일자가 자기를 밝혀주고 스스로 발생하게 한다. 즉 존재자가 있도록 한다.”(Was ist Metaphysik?).

 

성찬, 빵과 포도주

대구샘터교회는 매월 첫 주일에 성찬식을 거행한다. 성찬식에서 필요한 물품은 빵과 포도주다.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몸과 피로 받아들여진다. 빵이 실제로 예수의 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는다. 로마가톨릭교회는 화체설을 주장한다. 사제가 빵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는 축성을 하면 실제로 예수의 몸으로 변한다는 말이다. 포도주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개념인 질료와 형상의 관점에서 이런 교리를 내세운다. 빵이라는 질료가 예수라는 형상으로 인해서 실제로 예수의 몸이 된다는 논리다. 이 세상의 사물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차원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논리를 부정할 수는 없다. 예수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소립자가 지금 성찬대 위에 놓인 빵 안에 들어있다고 주장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럴 정도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루터교회는 임재설을, 개혁주의교회는 기념설이나 상징설을 주장한다. 어떤 입장이든지 빵과 포도주의 시원적 깊이를 예배에서 경험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빵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오묘하고 신통방통하다. 우선 밀이 자라야 한다. 밀이 자라려면 최소한 물과 탄소와 태양빛이 필요하다. 흙은 모든 것의 토대다. 이런 요소들은 다 시원적인 것이다. 여기서 태양빛만 보자. 태양은 지구에서 15천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초속 30만 킬로미터의 속도인 광속으로 달려도 지구까지 9분이 걸린다. 빛의 물리적 성질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 모든 물리적 성질은 이 둘 중의 하나이어야 하는데, 빛만은 다르다. 물은 입자다. 그래서 앞에 유리로 된 담이 있으면 물은 통과하지 못한다. 빛은 앞에 유리가 있어도 통과하다. 그러나 유리가 아닌 장애물이 있을 경우에 빛은 통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입자이면서 파동이라고 한다. 태양은 8개의 행성을 지닌 항성이다. 지구는 세 번째 행성으로 금성과 화성 사이에 자리한다. 지구에서 가장 크게 보이는 행성은 지구와 크기가 비슷한 금성이다. 태양은 은하계 안에 자리한 평범한 별이다. 은하계에는 1천억 개의 별이 모여 있다. 이런 은하계가 우주는 1천억 개가 있다. 우주가 더 큰지는 확인할 수 없다. 밀은 태양빛과 탄소와 물을 흡수해서 영양분을 만들어서 3-4개월 자란다. 태양빛만 받는 게 아니라 밤하늘의 달빛도 받는다. 나비와 벌과 새들이 그들의 친구다. 간혹 요정과도 대화할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이삭이 트며 결실을 맺는다. 이런 과정 전체가 신비다. 오늘의 첨단 과학이라 하더라도 밀 이삭 없이 순전히 실험 도구만으로 실험실에서 밀을 생산해낼 수 없다. 생명 현상은 주어진 것이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때가 되면 누군가 밀을 추수하고 제분하고 반죽하고 발효시켜서 구워낼 것이다. 성찬식에서 빵을 손으로 받는다는 것은 우주적인 사건이다. 시원적인 것이다. 사물에 들어 있는 시원적 깊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빵 한 조각만으로도 황홀한 기쁨을 맛볼 것이다. 이런 시원적 깊이야말로 성찬의 빵이 예수의 몸이라는 사실의 실질적인 의미다.

포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 역시 오묘하고 신통방통하다. 밀과 마찬가지로 포도 역시 태양빛과 물과 탄소가 필요하다. 여기서 물만 보자. 물은 액체다. 지구에 있는 사물은 세 가지 형태를 띤다. 그것 자체가 신비한 현상이다. 행성이나 위성의 어떤 것들은 기체로만 되어 있다. 물이 있는 행성은 없다. 간혹 금성이나 목성 등에서 물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리기는 하지만 그게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지구처럼 물이 오랫동안 보존된 행성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 메커니즘은 물을 필수로 한다. 외계인은 물 없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지구에는 물이 풍성하다. 지구 표현의 대부분이 물이다. 우리 몸도 70% 이상이 물이다. 지구의 물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주장들이 분분하다. 지구 밖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안에서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45억 년 전 처음 지구가 만들어졌을 때는 태양처럼 불덩어리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지금의 지구는 상전벽해라는 말도 모자랄 정도로 급격하게 변화된 행성이다. 생명의 가득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물이다. 우리가 지구에서 물을 경험한다는 것은 시원적인 것이다. 온천욕, 설거지, 커피와 포도주와 맥주 마시기, 밥을 하고 국을 끊이는 모든 일상 행위에 시원적인 깊이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깊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물 한 잔만으로도 황홀한 기쁨을 맛볼 것이다. 이런 시원적 깊이야말로 성찬의 포도주가 예수의 피라는 사실의 실질적인 의미이다. 왜냐하면 성찬의 포도주를 통해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과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참여하게 될 부활 생명을 여기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빵과 포도주는 지구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사물이다. 사물의 시원적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시원적 사유다. 이 시원적 깊이는 창조 신앙이 말하는 핵심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하셨다는 게 창조론의 기초다. 창조는 지금 과학자들이 하는 발견, 발명, 개량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창조가 무엇인지를, 즉 세상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아직 모른다. 아마 모른 채 인류 역사는 끝날 것이다. 지금도 창조는 보존되고 있으며, 종말에 완성될 것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과학철학 교수 장하석은 바로 그 대목을 도형으로 정확하게 설명했다. 전체 검은 부분에서 환하게 빛나는 동전 크기의 원이 과학의 역할이다. 과학적으로 아는 게 늘어날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다 아는 이야기다. 그는 물이 100도에 끓는다는 원칙도 당연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노년에 들어서 신비주의적인 관점을 보였다. (, Ding)은 사중자(Gevierte- 넷을 가리키는 독일어)의 회집이라고 표현했다. 잔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부은 것의 선물 속에는 땅과 하늘, 신성들과 사멸할 자들이 체재한다. 이 네 가지는 자체로부터 볼 때 하나이지만 함께 속한다. 그들은 모든 임재자들보다 먼저 와서 하나의 유일한 사중자 속으로 겹쳐져 있다.”(사유와 존재, 234쪽에서 재인용). 여기 내 책상 위에 연필이 있다. 연필의 질료인 나무와 흑연은 땅에서 왔지만 동시에 하늘에서 온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신이 활동했으며, 결국 연필은 해체된다. 이런 네 요소들이 연필이라는 사물에 모여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설명이다. 동화처럼 들리겠지만 여기에 사물의 시원적 깊이가 드러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래서 코엘료도 연금술사에서 모래 한 알이 우주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물의 시원성을 독특한 시적 언어로 표현한 김혜순 시인의 시 음식에 대한 예의의 일부를 소개한다. 그 시는 오래된 영화 <단포포>를 보면 일본 국수 먹는 법이 나온다.’로 시작된다. 이 시인에게 국수 먹는 것은 시원에 대한 경험이다. “ ... 다음은 음식 자체에 대한 예의/ 젓가락으로 국수가 담긴 표면을 어루만진다./ 특히 고기를 건드려 주면서 어루만진다./ 그다음 고기를 국물에 담가준다./ (그러면서 고기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조금 후에 뵙겠습니다, 라고 존칭으로 기도한다./ 면부터 먹는다./ 후루룩 소리를 내어 예를 표한다./ 면을 먹으면서도 애정을 담아, 고기를 응시하는 걸 잊지 않는다.//... 나는 내게 와서 내게 먹는 것이 된 것들의 두려움을 함께 먹는다./ 그들의 두려움은 내 불안이 되었을 거다./ 내 몸 속에 들어와 내 시간이 된 것들의 비명과 공포와 불안을 생각한다./ ... ”

지구 안의 모든 사물은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 장자는 하루살이와 코끼리의 무게가 동일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물을 숫자로 계량하는 방식으로 대하기 때문에 결국 사물의 시원적 깊이를 놓치고 있다. 그런 깊이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급한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데만 떨어지는 삶은 결국 의미 충만성을 얻기 힘들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창조자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행위로 보아야 한다. 낙엽, 곤충, 거품 등등, 모든 사물이 전혀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 신앙의 중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호모 에렉투스

한국교회에서는 창조론이 오해되기도 하고 독단에 빠지기도 한다. 자연과학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긴다. 소위 말하는 창조 과학이 기독교 창조론을 대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거기에도 스펙트럼이 넓기는 한데, 가장 극단적인 입장은 젊은 지구론이다.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지구가 6천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는 마치 지구를 평평한 것으로 보는 것과 비슷한 시각이다. 비전문가들에게는 전문적인 것처럼 보이는 과학 용어와 개념을 나열하면서 진화론이 틀렸고, 성경이 과학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전파한다. 다른 부분에서는 개혁적인 교회 중에서도 창조 과학을 받아들이는 교회가 적지 않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신학적으로 미숙하다는 증거다. 창세기가 말하는 6일 창조도 그대로 믿을 것이다. 이런 전근대적 행태에 근거해서 교회 밖의 안티 기독교 세력은 기독교를 비판한다. 거기에 반대하기 위해서 기독교는 다시 격렬하게 자연과학을 비난한다. 젊은 지구론에 의하면 공룡시대도 부정되고, 구석기와 신석기도 부정된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유인원들도 부정된다. 호모 에렉투스(직립원인)에 대한 사전의 설명이다. “신생대 제4기 홍적세에 살던 멸종된 화석인류로 160만 년 전부터 25만 년 전까지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였으며, 아직도 상당한 논란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의 직계조상으로 간주된다.” 나는 진화의 역사야말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증거라고 믿는다. 진화에 시원적 깊이가 있다는 뜻이다. 이를 직립원인에 한정해서 살펴보겠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즉시 서서 걷지 못한다. 일정한 기간 누워 있다가, 힘이 생기면서 엎드리기도 하고 기다가, 다른 것에 의지해서 선 다음에 발걸음을 조금씩 옮긴다. 더 먼 시간으로 가면 어머니 자궁의 양수에 떠 있다가 세상에 나와서 두 발로 걷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이 인간 진화의 긴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벼랑 위의 포뇨라는 만화영화에서, 주로 앞부분에서 이를 재미있게 묘사했다. ‘포뇨는 푸른 바다에서 찾아왔어요.’라는 노래가 배경으로 나온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네 발을 사용하다가 두 발로 서게 되는 진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지질학적 우연이다.

원래 사람과 침팬지의 공동조상이 아프리카에서 다른 동물과 경쟁하면서 살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동부와 서부에 지질학적 격변이 일어났다. 서부는 여전히 밀림이 계속되었고, 동부는 평야로 바뀌었다. 서부와 동부 사이에 높은 지대가 형성되어서 왕래가 쉽지 않았다. 동부에 머물게 된 이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노출되었기 때문에 다른 포식자들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아야 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제는 네 발로 기어 다니지 않고 두발로 서게 되었다. 두 발로 서면 일단 시야가 확보되기 때문에 포식자들의 접근을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진화의 과정은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겠지만 직립원인이라는 정체성으로의 변화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불가역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직립원인이 된 다음에는 인간의 특징은 비약적으로 진화되었다. 뇌의 용량이 늘어나게 되었고, 성대가 자유로워져서 언어가 발달하게 되고,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도구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직립, 이것은 인간의 시원적 깊이를 가리킨다. 까마득한 진화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선다는 것을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사건이다. 로봇 연구자들이 해결해야 할 핵심이, 어쩌면 해결 불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로봇의 직립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로봇 개발자들이 만든 로봇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로봇의 움직임이 우리에게는 유치하게 보인다. 힘은 우리보다 강하지만 세밀하지 못하다. 평지에서 걷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계단을 올라가는 일은 더더욱 힘들다. 언젠가 로봇의 기능이 더 발전하면 피겨스케이팅을 할 줄 알거나 테니스 시합을 할 줄 알게 될까?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리라고 본다. 농사일을 보자. 지금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기계로 농사를 짓는다. 그러나 기계 혼자서 할 수 있는 없다. 인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실제로는 기계가 못하는 일도 많다. 과학이 더 발전하면 가능하다고 주장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의 임계점을 로봇이 넘을 것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알파고가 바둑 시합에서 인간 최고수를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자동차와 사람이 달리기 시합을 할 수 없는 거와 같다. 사람이 계산기를 당할 수 없는 거와 같다. 공정하게 시합을 하려면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주는 것이나 시동을 거는 일도 사람이 도와주지 말아야 한다. 알파고를 대신해서 사람이 바둑돌을 놓지 말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엄청난 분량의 데이터베이스를 다른 데 두지 말고 바둑을 두는 현장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공정한 시합이 된다.

사람이 선다, 또는 달린다는 말은 지구 중력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다. 중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직립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지럼증이 있는 사람은 쓰러지는 법이다.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를 보라. 뒤뚱거리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걷는다.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된다. 어른이 아이에게 중심 잡는 법을 이론적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 아이가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열 발자국을 걷다가 차츰 늘어나 옆에서 손을 잡아주지 않아도 혼자서 엄마를 졸졸 따라다닐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뛸 수 있게 된다. 기어 다니던 아이에게 걷고 뛰는 건 삶의 비약이다. 16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에게 일어났던 일이 지금 이 아이에게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걷는 데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걷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안다. 언젠가 우리도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이전까지 걷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게 좋다. 사실은 걷는 것만이 아니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촉감을 느끼는 것이 다 존재의 기쁨에 속한다. 인간에게 이런 것보다 더 큰 일은 없다. 더 시원적인 일은 없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시원적인 것은 존재론적인 능력이다. 빈부귀천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런 인식이 가능한 사람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누릴 줄 모른다. 천민자본주의 이념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돈으로 환산되는 것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건강을 위해서 걷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운동하는 사람들도 많다. 걷고 운동하는 것마저 그것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다른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일종의 투자 개념이다. 혼자서 일단 바르게 서는 연습을 해보라. 온 몸으로, 주로 발바닥에 중력을 느낄 것이다. 중력을 느끼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시원적인 것이다. 지구와 몸으로 교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의 교감! 섹스도 기본적으로 몸의 교감에 의한 희열이다. 지구와의 교감을 통해서 희열을 느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시원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이다. 현대인은 걷기의 시원적 차원을 놓치고 산다. 지구와의 교감보다는 기계와의 교감에 더 익숙하다. 걸으면서도 스마트 폰에 존재를 맡기고 있으니 어찌 걷기의 영성에 들어가겠는가.

나는 걷는다1,2,3권은 기자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프랑스 남자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터키 이스탄불에서부터 중국 시안까지 12,000킬로미터를 자기 발로 걸은 이야기다. 나중에 프랑스 리옹에서 베로나까지 900킬로를, 그리고 베로나에서 이스탄불까지 2,000킬로를 더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기회가 된다면 가보고 싶다. 거기에 가기 전에 국내만이라도 좀 걸어야하지 않을는지. 불교 수도승들이나 기독교 수도사들도 걷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걸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일단 걸을 수 있는 건강이 필요하다. 다음은 짐을 최소화해야 한다. 걷는 것 자체에 목표를 둬야지 다른 것에 목표를 두면 안 된다. 아니 여기에는 목표 자체가 없어야 한다. 가장 극단적인 순례에는 삼보일배, 오체투지가 있다. 이런 순례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게 된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나 순전하게 그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의 영혼에는 다른 그 어떤 것이 제공할 수 없는 평화가 깃들 것이다. 그 의식이야말로 시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하나님

시원적인 것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자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세상을 완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런 현상을 루돌프 오토는 누미노제라고 표현했다. 누미노제는 말 그대로 거룩한 두려움이라는 뜻이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고 한다(3:6). 중풍병자를 예수가 고치자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한다(9:7). 두려워했다는 표현들은 성경에 자주 나온다. 하나님 경험이 왜 두려움일까?

하나님 경험이 낯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혼자 한적한 곳에서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외계인을 만났다고 상상해보자. 사람처럼 생기면 안 된다. 얼굴도 없다. 달걀 모양이다. 주먹 정도로 작아졌다가 순식간에 코끼리 정도로 커지기도 한다. 어느 순간에는 불꽃이 되었다가 다시 바람이 된다. 이런 형체는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낯섦의 극치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에 떨어진다. ‘전적 타자라는 칼 바르트의 신학개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전적 타자(Totaliter Aliter)로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을 존재 유비로 해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놀라워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외계인과 같은 형체를 상상하기는 어렵기는 하지만 이미 성경 기자는 그런 걸 암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기자의 예수 경험이 계 1:13-16절에 이렇게 나온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이런 경험을 한 이는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되었다(17).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사실적인 것으로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삶의 경험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극단적인 상징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경험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도현은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하라.’고 충고한다(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40쪽 이하). 시인들도 그럴진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낯섦에 대한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거룩한 두려움이야말로 시원적 사유의 단초다.

성경 기자들은 이런 경험을 역사에서 찾았다. 하나님을 역사 경험으로 본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로 표현한다. 1:8절은 이렇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역사를 초월한다는 뜻이다. 이런 존재는 세상에 없다. 다른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던 고대 왕들도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한다. 화려한 유물과 건축도 일시적이다. 하나님만이 알파이며 오메가이기 때문에 전능한 자로 불린다. 이게 옳은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성서기자들만이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어서 그걸 본 것은 아니다. 그들도 다른 이들과 똑같이 역사를 보았다. 이집트 바로의 마병들이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보았고, 아시리아가 무너지고 바벨론이 함락되는 것을 보았다.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제국들은 절대적인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선지자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역사를 은폐의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역사가 하나님의 통치라고 한다면 역사의 깊이가 곧 시원성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종말 완성이 그것이다. 그 완성은 하나님의 자유에 속한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25:31-46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난다. 오른 편에 분류된 양은 자신들이 칭찬받을 것으로 기대하지 못했고, 왼편에 분류된 염소는 자신들이 심판받을 것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복음서 기자들이 역사를 시원적 깊이로 경험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사물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역사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대다수는 인과율에 머물러 있다. 공부 잘한 사람에게 그만한 대가가 가고, 못한 사람에게는 그에 해당되는 결과가 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까지도 이런 인과율의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에게 축복이 임하고 불순종한 사람에게 징벌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이라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불순종한 사람이다. 예수는 이런 인과율적 역사관을 거부했다. ‘포도원 비유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경제 원리에 어긋난다. 하루에 10시간 일한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에게 동일한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지급한 포도원 주인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같다고 했으니 말이다. 역사는 결정론적 인과율이 아니라 종말론적 차원에서 개방된 것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통치에 의해서 역사가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만 역사는 변혁과 개혁과 혁명의 길을 갈 수 있다. 종말 힘이 이미 현재에 은폐의 방식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느끼기 때문이다.

개별 인생도 역사다. 지금 당장 결정되는 게 아니라 흐름 속에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궁극적으로는 죽음에서 결정된다. 출생부터 죽음까지가 인생의 역사다. 이 인생의 역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구를 만나서 사랑하게 될지, 누구를 만나서 대립하게 될지, 누구를 만나서 도반의 길을 걸을지, 누구를 만나서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차원보다 더 깊은 차원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행복한 조건이 나중에도 행복을 보장하는 게 아니며, 지금의 불행한 조건이 나중의 불행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계산해낼 수 없는 수많은 요소들이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최선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야말로 시원적인 것 중에서 가장 시원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믿는다. 그 영원한 생명이 바로 시원적 생명이다. 개인의 운명과 인류의 운명은 바로 그 하나님의 생명과의 결합으로 완성될 것이다.


[참고자료]

 

하이덱거- 왜 존재자는 존재하고 더 이상 무는 없는가/ 화이트헤드- 리얼리티는 과정이다./ 장자의 호접몽/ 플라톤 동굴의 비유/ 색즉시공 공즉시색/ 도가도비상도/ 불립문자/ 줄탁동시/ 백척간두진일보시방세계/ 바둑 복기/ 대나무 바람 소리, 기왓장 떨어지는 소리/ 호모 에렉투스/ 원소/ 블랙홀 

카핑 베토벤귀 먹고 소음만 들리는 베토벤은 교향곡을 듣는다/ 베르디의 레퀴엠’- 클라우디오 아바도/ 미겔란젤리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로- 버린 돌에서 피에타 상을 만들어낸다/ 영화 블랙헬렌 켈러의 언어 경험  

오인태 시가 내게 왔다’/ 어린왕자셍떽쥐베리/ 소피의 세계노르웨이 작가 요수타인 가아더/ 월든소로우- 각자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들으며.../ 코엘료 연금술사/ 나는 걷는다베르나르 올리비에  

루아흐, 프뉴마/ 태초/ 모세 이야기- 스스로 있는 자, Ich werde sein, der sein werde./ 에릭 프롬, To have or To be/ 판넨베르크-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 바르트- tataliter alieter/ 누미노제- R. Otto/ 도미니크 수도원 영성- Ora et lab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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