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1113:00, 대구성서아카데미 <욥 이야기> 북토크, 서울 디어 라이프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욥과 예수의 운명에서 본 하나님 질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무신론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신론이 정당하다면 이 질문은 아예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신론 문제가 하루 이틀 된 주제도 아니고, 그 주장도 가지각색이라서 너무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신학계에서도 신죽음의 신학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유럽 사상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니체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신 죽음을 선언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소리쳤다. 나는 당신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살해했다. 당신들과 내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살해한 자들이다.”(즐거운 학문). 니체는 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기독교의 신 개념이 허무주의적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 외의 여러 사상가와 학자들의 무신론 역시 기독교 현상을 전제하는 것뿐이다. 더 근본적으로 신 자체를 부정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긴 하나, 그들의 주장도 결국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 개념이라는 한계에서 다루어질 뿐이다. 신 질문에 대한 논란은 현대 철학이나 뇌 과학으로부터 기인된 게 아니다. 이미 성경에도 그런 논란은 많았다. 오늘 우리는 대표적으로 구약에서 욥의 운명을, 신약에서 예수의 운명을 통해서 이런 하나님 질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 무죄한 이의 재난

욥 이야기는 기존의 유대교적 전통 신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화를 내리신다고 가르쳤다. 신명기 역사관이 그것이다. 그들은 십계명을 비롯하여 율법을 지키는 게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공부 잘하고 성실하게 살면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만 작동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들에게도 재난이 일어난다. 그것의 민족사적 사건이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포로 역사다. 문학적인 결과물은 욥기다. 욥기는 바벨론 포로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 제기다.

욥은 친구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라는 이름의 세 친구들은 욥의 재난이 죄에 의한 결과라고 주장했고, 후배 엘리후는 재난의 이유를 단련이라고 주장했다.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동의하는 입장이다. 욥은 그걸 부정했다. 자신은 그런 재난을 당할 정도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유대교의 전통적인 지혜 개념에 저항하는 것이다. 인간과 역사에서 벌어지는 대참사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그가 아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게 아니다.’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부정 신학인 셈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이것이 최선이다.

욥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 질문이다. 특히 신정론(theodicy) 문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분으로서 전능하고 사랑이 가득하며, 자비와 긍휼이 무한한 분이라면 이 세상에는 왜 무죄한 이들이 고난당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하나님은 누구이고, 어디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자기 말을 잘 듣는 이들에게 복을 주고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징벌을 내리시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운명에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죄가 없는 사람이 당하는 재난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설명할 수 있는가? 신학에서도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아직도 주어지지 않았다.

욥기 마지막 장인 42장에는 욥이 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인간 역사에 재난과 재앙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대답을 욥이 얻은 것은 아니다. 자연의 깊이를 다 모르듯이 재난의 깊이도 우리는 모른다. 창조의 신비를 대면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성경이 창조주 하나님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독교의 신앙 요약이라 할 사도신경도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대한 확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결국은 창조의 신비와 완성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 감당하기 힘든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는 창조 신앙이 한가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창조 신앙을 확보했다고 해서 발밑을 파고드는 재앙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말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실용적인 게 아니다. 거기서 당장 쓸모 있는 것들을 찾으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영혼의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인 공부가 답이다. 이를 통해서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어느 사이에 해결되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신앙적인 내공이 어느 정도냐에 달려 있다. 어느 누구도 욥이 당한 재난보다 더 큰 재난은 당하지 않는다. 사소한 문제로도 힘겨워하는 사람이 있고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심한 재난을 넉넉히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욥 이야기를 전해준 고대 유대인들은 창조 신앙으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운명을 버텨낼 수 있었다.

 

예수- 무죄한 이의 십자가

구약에서 무죄한 이의 재난에 해당되는 인물이 욥이라고 한다면 신약에서는 예수다. 십자가 처형은 대재앙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구원의 길이라는 말로 미화하는 사람은 욥을 향해서 죄를 회개하라고 주장하거나 단련의 기간이니 참고 견디라고 주장한 이들과 비슷하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토로했다. 예수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죽었다. 그 현장에서 몇몇 사람들의 주장을 누가복음 기자가 전한다. 관리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라고 예수를 비웃었다(23:35). 군인들은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조롱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자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난했다. 예수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고 외치면서 숨이 끊겼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운명에서 아무도 구원을 경험할 수 없었다.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십자가 처형을 실질적으로 묘사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가 거리끼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현존을 표적에서 찾기 때문이고, 이방인들에게 미련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지혜에서 찾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다. 표적 신앙은 오늘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며, 지혜 신앙 역시 현대인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표적과 지혜는 종교적인 사람들이나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삶의 절대적인 목표다. 그들에게 표적과 지혜는 하나님이다. 기독교인들이 표면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를 말하나 속셈으로는 표적과 지혜에 매달려 있다. 이런 이중성에서도 갈등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예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들에게 예수 십자가는 종교적인 장식품이 아니겠는가.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죄명은 신성모독이다. 당시 유대교 고위층이 볼 때 예수는 신성을 모독한 자다. 하나님을 종교적 권위에 기대서 말하지 않고 구체적인 삶, 즉 일상에 근거해서 말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먹고 마셨다. 모세의 법을 재해석했다.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환전과 장사를 하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것들이 파격적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현존을 몸과 삶으로 생생하게 느꼈다. 그런 느낌에 충실하게 살았다. 그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었다. 오늘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경험에 공명하지 못하고 율법 전통에 기울어졌다. 한 마디로, 하나님 경험이 없다. 그러니 사이비 하나님 경험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의 신앙이 고착화되면 역사가 실종되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와 일상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예수의 말은 하나님 나라가 일상에서 현실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 현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은 상투적인 것이다. 돈을 벌고, 싸우고, 사랑하고, 집을 장만하고, 자식을 낳고 키우며, 나름으로 삶을 즐기면서 산다. 일상은 양면성이 있다. 하나는 일상 자체가 우리의 삶에서 절대적이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일상이 우리를 영적으로 빈곤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종교와 일상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의 비유는 모두 일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동시에 제자들을 일상에서 벗어나게 했다. ‘나를 따르라.’는 부름은 일상에서의 일탈을 전제한다.

하나님 나라가 일상에 임했다는 말을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나는 일상의 심연을 붙드는 것이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에는 표면이 있고, 심연이 있다. 표면을 보는 사람은 신문기자라고 한다면, 심연을 보는 사람은 시인이다. 신학자와 영성가는 가장 깊은 심연을 본다. 그 가장 깊은 심연이 하나님이다. 우선 문학적으로 설명하자. ‘나는 걷는다.’는 것은 일상이다. 걷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시원을 찾아보면 아득하다. 호모 에렉투스의 경이가 나에게서 다시 경험될 수 있다. 나는 하루 24시간 중에서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길다. 이 책상 위에 놓인 사물이나 소품이 많다. , 연필, , 필통, 작은 화분, 책 받침대, 성경과 찬송, 주보, 장갑, 카메라 등등이다. 그 모든 것들의 시원은 아득하다. 내가 그것들을 손으로 잡는 것도 우주론적인 사건이다. 우주정거장에서 사는 우주인들을 보라. 그들은 식사와 배설, 칫솔질과 세면 등, 가장 간단한 행위가 생존과 관련된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은 빅뱅 순간과 연결되고, 우주 전체와 연결된다. 그게 일상의 심연이다. 이런 일상의 심연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일상은 결코 상투적인 것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매 순간이 생명 충만이다. 우리에게 하루는 일 년 중에서 365분의 1에 불과하지만 하루살이 같은 곤충에게는 일생이다. 그 하루가 어떤 사람에게는 밋밋하겠지만 그의 심연을 붙드는 사람에게는 가장 소중한 보석이다. 숨쉬고, 보고, 향기에 취하고, 나무를 붙들고, 옛날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고, 잠에 빠져든다. 우주 정거장에서 오래 머물다 지구로 귀환한 우주인들은 산들바람을 느끼고 풀냄새 맡는 것에서 황홀감을 경험한다. 그 일상의 심연에서 예수를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거꾸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선포에 밀착해서 살았던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현존하는 자리인 일상의 심연을 아는 것이 또한 기독교 신앙의 요체다.

일상 자체가 불행한 사람에게 일상의 심연을 통한 기쁨이 말장난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주장은 오해다. 아주 특별한 경우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 실업, 실연, 작은 연봉, 수술, 사별 등등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특별한 경우는 욥이나 예수의 운명이다. 그런 경우는 우리가 연대하여 투쟁하는 게 최선이다. 욥 이야기는 그런 불행을 우리가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런 특별한 경우를 당한다면 완벽하게 하나님의 현존을 실감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서 나락으로 떨어진 내 운명을 버텨내도록 일단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나는 지금 아주 특별한 운명에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아니 상대적으로 괜찮은 조건에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현존을 놓치는 이들에게 말하는 중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 일상에서 시작되었다고 선포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세례 요한이 이미 선포한 바 있다. 세례 요한의 하나님 나라와 개념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비슷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달랐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준비하라고 압박했으며,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향유하라고 호소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 앞에서 두려워했으나 예수는 기뻐했다. 요한은 금욕적으로 살았으나 예수는 먹고 마시면서 즐겼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존재의 기쁨이고 자유와 해방의 능력이다. 그에게서 하나님 나라는 혼인 잔치와 같다. 우리는 거기에 초청받은 사람들이다. 소를 사야하기에, 아들 장가를 보내기에, 땅을 사야하기에 바빠서 혼인 잔치 초청을 거부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여기 연봉 25백만 원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돈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이 무수히 많다. 만약 5천만 원을 받는 사람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5천만 원을 받는 사람은 1억 원을 받는 사람 앞에서 불행하다고 여길 것이다. 혹은 거꾸로 그걸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연봉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향유하는 데는 그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한 사람은 벤츠를 타고 넓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지하철을 타고 평소 좁은 아파트에 살 것이다. 큰돈을 들여서 외국 여행을 해야만 행복한 게 아니라 가까운 공원을 걸으면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작은 연봉으로도 존재의 기쁨을 누리고 자유와 해방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목사이기에 하나님 나라를 목회 현장에서 경험해야 한다. 작은 교회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느끼는 목사가 있고, 대형 교회에서도 그걸 느끼지 못하는 목사가 있다. 하나님 나라는 없는 곳이 없으며, 없는 때가 없다. 다만 우리가 그 나라를 향해서 회심하지 않고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게 고집이고 자기 연민이다.

세상은 완전히 다르게 작동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에 기대서 살아갈 수 있을까? 돈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을까? 특히 자본주의가 막장에까지 이른 대한민국에서 하나님 나라 운운이 타당한가? 목구멍이 포도청인 우리의 실존을 어떻게 무시한단 말인가?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충실하게 살다가 결국 십자가 처형을 당한 거 아닌가? 그런 운명을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이미 가까이 임한 하나님 나라를 현실에서 경험하는 사람은 자본주의라는 도도한 흐름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선택할 수 있고, 그 경험이 밋밋한 사람은 흐름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 나라 경험이 또렷한 사람이라고 해서 지금의 현실을 완전히 초월할 수는 없다. 어쩌면 하나님 나라는 오아시스와 같아서 경우에 따라서 헛것을 보고 착각하는 수도 있다.

나름 진정성이 있는 기독교인들도 현실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이미’(already)아직 아님’(not yet)의 변증법적 긴장 가운데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는 비유이고 암시이고 선취이고 손가락질이다. 우리는 여기서 완전한 생명을 획득하지 못한다. 종말에 완전한 생명이 주어질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결혼만 봐도 그렇다. 이 제도가 남녀를 하나로 묶어주는 제도로 최선이긴 하나 이것으로 남녀 관계가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혼의 미래는 열려 있다. 무조건 열려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보를 통해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완성되는 때가 바로 종말이다. 그 종말의 생명을 지금 여기서 선취해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일상의 심연에 대한 경험이다.

 

예수 부활과 궁극적 생명

일상의 심연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삶에서 기독교 신앙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를 믿지 않아도 다른 종교를 따르거나 예술과 시의 세계에 들어가서 생명의 신비를 만끽하면서 살아가면 충분하지 않은가? 이런 질문은 의미가 있긴 하나 우리의 논의에서는 불필요하다. 기독교 밖에서 진리와 생명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된다. 그들을 억지로 교회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한 사람이기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이 길을 갈 뿐이다.

절대 생명이 바로 부활이다. 절대 생명이라는 표현이 관념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그것보다는 부활이 더 실질적인 용어로 들린다. 부활은 어떤 구체적인 사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 유비를 찾아볼 수 없는 궁극적인 생명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했다. 바울은 “...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고 말했다. 우리가 잘 아는 기독교의 초보 교리다. 30대 초반의 한 유대인 남자가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과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기 삶을 자기가 완성시켜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에서 벗어난다. 세상의 강요와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죄 용서다. 이를 바울은 고전 2:15절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생명 완성을 경험한 자의 외침이다. 그 경험은 이 세상의 것들로는 주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기에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바울의 예수 경험은 고후 4:6절에 나온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신 분이다. 창조의 하나님만이 부활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현존이다. 그 영광이 곧 부활이다. 부활을 환생으로 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죽음 이후에 새롭게 시작되는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부활은 환생도 아니고 죽음 이후의 생명 연장도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종말의 완성자이시니 하나님과의 일치가 절대적인 생명을 얻는 길이고 부활에 이르는 길이다. 부활의 예수가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진술하는 사도신경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킨다. 예수가 부활의 첫 열매이기에 우리도 그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강의 요약은 이렇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일상(자연과 역사)의 심연이 그 답이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일상의 심연에 현존하시는가? 생명과 존재의 신비가 그 방식이다. 기독교인은 생명과 존재의 신비가 담지 된 일상의 신비를 어디서 경험하는가? 십자가와 부활의 운명을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가 그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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