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강 인간에 대한 물음(1)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643 추천 수 0 2012.06.16 12:31:07

제 34강

인간에 대한 물음(1)

 

반갑습니다. 좋은 계절이죠. 오늘이 2008년 5월 22일입니다. 이 날 우리가 만났군요.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시공간의 구애 없이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합니다. 100년 전 쯤의 사람들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소통의 공간이 시작된 거니까요. 앞으로 5백 년 후의 우리 후손들은 어떤 방식으로 소통할까요? 아마도 지금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겠죠. 참으로 신기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게 인간학(anthropology)인데요. 우리가 사람의 특징을 갖고 산다는 건 자연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문명을 일군다는 뜻입니다. 자연 안에서만 산다는 것은 자신과 종족 보존에 모든 근거를 두는 삶의 형태예요. 거기에는 죄도 없고 사랑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동물들의 삶이죠. 그들은 그저 자연 안에 들어가 있을 뿐이죠. 그들에게는 윤리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큰 의미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선악이 큰 의미가 없어요. 그냥 자연 안에서 삽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자연 안에서 적응을 못해요. 그래서 우리가 불안한 겁니다. 동물들에게는 죄가 문제되지 않아요. 죄의식이 없으니까요. 그냥 자연의 메커니즘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사람만이 이런 문제로 힘들어해요. 그로 인해 문명이 발생한 겁니다. 그 문명이 실질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는가 아니면 파괴하는가 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어쨌든 인간은 동물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문명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일단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살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모두 자기 안일에만 머물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의 연대감을 꾸준히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를 이루기 위한 거창한 의미의 연대감은 둘째로 치더라도, 마르틴 부버 같은 사람이 말했듯이, 사람은 나와 너와의 관계를 통해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부버는 『나와 너』에서, 이 세계가 점점 나와 그것이라는 사물의 관계로 되어가고 있는데,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해 가야하며 거기에서만 인간 존재의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지진으로 수만 명이 죽었고, 행불자도 많다고 합니다. 이미 미얀마에서도 해일로 십 수만 명이 죽었지요. 여러분은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나요?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축복해서, 대지진, 사이클론, 해일 같은 자연 재해들이 많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나요? 우리는 하나님께 축복받은 땅에서 살고 있으니까 안도하며 넘어가야 할까요? 우리에게 큰 재앙이 없다고 하는 건 다행이겠죠. 그러나 재앙의 문제는 좀 전에 말한 대로 인간적 연대라는 점에서 볼 때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지구 안에 같이 사는 모든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인류보편적인 휴머니즘에 근거해서도 그렇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실제적으로 느껴야 해요.

이게 참 어렵습니다.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고요. 한국 뿐 아니라 외국의 다른 기독교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요. 이게 특히 미국 쪽의 가벼운 복음주의가 들어와서 기독교가 상품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상품은 포장만 잘하면 되는 거예요. 그건 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책이 다른 곳에 있어서 제가 정확한 인용을 할 수 없는데요.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인가 하는 미국 신학자가 미국교회가 일종의 마켓이 되었고, 복음은 상품이 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큰 교회에 다니면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것들을 고르는 겁니다. 대형 마트에 들어가 다양한 물건들을 구매하듯이 말이죠.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소비자인 신자들에게 입맛에 맞는 것들을 진열하기에 바쁘고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그걸 먹으면 몸에 좋은지 설사가 나오는 건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미국 교회라고 다 그런 건 아니겠죠. 그래도 각 나라 교회의 지향점은 있거든요. 거칠게 표현해서, 미국교회의 방향이 바로 값싼 실용적 복음주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직수입 되었고요. 유럽에서 들어온 교회는 우리나라에서 다 죽을 쑤고 있어요. 루터교나 성공회가 그렇잖아요? 우리나라 성공회는 영국에서 직접 들어왔는지, 미국을 통해서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영국 성공회에서 온 것으로 본다면 그렇습니다. 사실은 유럽에서 온 교회들이 기독교적인 뿌리가 있는 건데, 우리나라에서는 맥을 못 춥니다. 다시 우리 공부로 돌아와야겠네요.

기독교 신앙은 실질적으로 기독교 신자의 의식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신자의 생각과 삶 속에서 성육신(incarnation)이 되는 거란 말이죠. 이런 말은 여러분이 하도 많이 들어서 제 설명이 더 필요 없을 텐데요. 그래도 참 이상해요. 설명을 많이 듣는다고 깨닫는 게 아니거든요. 공부든 예술이든 신앙이든, 이것은 낱말 뜻만 알아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공부’라는 것은 뭐를 안다는 것인데, 정보 차원에서 아는 것과 실질적으로 자기 삶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요. 기독교 신앙을 시작할 때부터 차근차근 신앙과 삶의 일치를 배워하는데, 그런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거죠. 여러분도 그런 것을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들도 그걸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 놓치고 있어요. 기독교 신자들이 붕붕 떠서 다닙니다. 영적으로 안정적이지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보면 늘 들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뭘 사야하고, 말을 쏟아내야 하고, 안정이 안 된 것처럼 말입니다. 뭔가를 채우기 위해서 두리번거리는 방식으로 사는 거지요. 기독교 영성과는 거리가 먼 삶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에 밀착되느냐? 그것이 신앙의 성육신인데, 이게 안 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근본에 대한 질문

요즘 수요일 저녁마다 샘터교회에서 시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은 둘째 치고 시편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제 공부가 많이 됩니다. 어제 제가 느낀 건데요. 물론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기도 하고요. 시편에는 여러 유형의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시편 기자는 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 저주, 악독 등을 많이 쏟아냅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께 질문을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가 뭐냐, 당신은 지금 왜 침묵하느냐, 왜 당신이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이 돌아가는가, 하고 묻는 거예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 따지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삶의 궁극적인 질문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께 질문할 압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래 전부터 그걸 말하고 있어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그래요. 여러분이 그걸 빨리 눈치 채야 합니다. 우리 앞에 일어나는 현상적인 삶과 그 삶의 내면에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아주 궁극적인 것에 대한 질문과 대답, 그리고 그에 대한 진술, 그것이 바로 성서입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제가 어떤 여자 분에게서 전화를 받았어요. 저는 잘 모르는 분인데, 아마도 다비아를 통해서 저를 알게 된 것 같아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 등을 물어보시더군요. 왜 하나님이 아벨을 지켜주지 않고 죽을 때까지 내버려 뒀으며, 그 반면 살인자인 가인은 왜 살려주었냐고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건 초등학교 수준의 이야기인데 한국교회 성도들이 그 정도로밖에 성서를 읽지 못합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을 어떤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보도로 읽기 때문이에요. 그런 분들에게 성서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론적인 이야기를 다시 할 수도 없구요.

성서 안에는 어떤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질문하는 거죠. 성서에는 이미 뻔한 답을 주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답이 아니라니까요. 답의 방식을 통해서 어떤 것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는 답이라기보다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옳습니다. 질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은 못 들어가죠. 성서 기자들의 영성을 따라가야 그 질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괴테의 나 휠더린의 시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고전들이나 도덕경 같은 중국 고전들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그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성서에서 가장 궁극적인 것을 질문할 수 있으려면 그 쪽으로 한발 한발 자꾸 내딛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걸 잘 못합니다. 지금 제가 강의 진도를 나가야 자꾸 다른 쪽으로 빠지는군요. 정리해야겠습니다. 성서 텍스트가 과연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라도 눈치를 채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기독교를 상품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성서는 그냥 내가 막 요리해서 먹으면 되는 건가요? 성서를 인스턴트식품쯤으로 생각한다니까요. 물에 넣고 끓여 먹으면 다 되는 줄 알고 성서를 마구잡이로 먹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보세요. 우리의 영성이 조금이라도 풍요로워지는지.

미얀마나 중국의 쓰촨성 참사 앞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적 질문을 할 수 있을까요? 이걸 가지고 사실은 밤잠을 자지 않아야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밤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이 숙제를 갖고 씨름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기본적으로 신정론의 문제입니다. 무죄한 자들의 고난을 보세요. 어린아이들의 죽음을 우리가 무엇으로 해결하겠습니까? 학교들이 많이 붕괴돼서 열대여섯 살 학생들이 떼죽음을 당했잖아요?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있나요?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요? 제가 돌아오는 주일에 이 주제로 설교를 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력에 따르는 설교를 3년 동안 했는데요. 이번에는 이 사건이 너무 커서 잠시 교회력과 별도로 이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아마 돌아오는 주일이 성령강림 두 번째 주일일 겁니다. 예정대로라면 성령에 대해 설교를 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이 신정론의 문제, 하나님이 능력 있고 사랑 있고 전능한 분인데 왜 이 땅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불행들이 끊이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설교하려고 해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질문을 한 거예요. 이런 참사들이 여러분 가슴 속에 아픔으로 와 닿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늘 세상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냥 편하게 사십시오.

자신의 존재를 가볍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긴장이 있어야겠군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 가볍게 여기는 거예요.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자신을 끝없이 가볍게 만들고 축소시키세요. 거의 무화시킬 정도로 말이죠.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성은 자기 축소, 자기 무화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나라가 확대됩니다. 인생살이가 힘든 것은 자기 무게 때문이에요. 자기가 가벼워지면 주변의 것이 아무리 무거워도 무겁게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지난 십 년 동안 한국 개신교회는 양적으로 보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영성의 문제가 가장 큰 것 같아요. 우리는 기껏해야 ‘Again 1907’ 같은 것들이나 합니다. 일종의 향수병이라고 할까요? 복고주의입니다. 우리는 결코 1907년으로 돌아가서도 안 돼요. 미래로 가야죠. 게다가 1907년에 있었던 신앙현상들이 건강한 것도 아니거든요. 값싼 죄의식이라고나 할까요? 열강들의 틈에서 무력감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나온 건강하지 못한 영적 운동이었어요. 그 때로 다시 돌아가야 할 어떤 원형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인간학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왜 이렇게 뜻하지 않은 사고를 만나서 죽게 되는가? 이 문제 갖고 우리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의 삶이 도대체 무엇인가?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는가? 조금 더 만화 같은 질문을 한다면, 제 아버님이 칠십 세 쯤 돌아가셨는데요. 제가 그분보다 장수해서 아흔 살 정도에 죽어 나중에 천국에 간다면, 아버님과 저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요? 제 아버님이 저보다 더 젊을 것 같아요. 그냥 재미로 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삶, 생명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우리에게서 진지하게 나와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해요. 정말 진지해야 할 부분에서는 진지하지 않고 가볍게 넘어가야 할 부분에서는 너무 무거운 경우가 많습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반북, 반핵, 반김정일 같은 집회에는 엄청나게 열을 올리지만 신정론 같은 중요한 문제들, 여기에는 동성애 문제도 들어가는데, 우주보다 더 중요한 생명의 문제들은 너무 쉽게 처리해버립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교인들을 중심으로 군 대체복무제가 추진 중에 있습니다. 그들은 평화근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어요. 무조건 군대에 안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만 본다면 평화주의자로서 감옥에 갈지언정 집총을 거부하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기독교인들이 하지 못하는 걸 여호와의 증인들이 한다면, 옆에서 박수라도 치고 입법 과정을 도와야 하는데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거꾸로 하고 있어요. 한기총에서는 공개적으로 그걸 반대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세계를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을까요? 많은 게 중층적으로 얽혀 있는 삶의 문제들을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방식도 문제지만, 때에 따라서는 단호하게 어떤 걸 끊어낼 필요도 있어요. 그건 제가 인정합니다. 2천 년 기독교의 역사가 이단 논쟁의 과정이었으니까요. 이단논쟁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현재 남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방 기독교 대표인 바울과 유대 기독교 대표인 예수님의 동생들과 제자들이 한바탕 싸움을 벌입니다. 이단 논쟁인데 살벌했었어요. 그 뒤로도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논쟁들이 이어졌지요. 물론 이단 논쟁이 때에 따라서는 정치와 결탁하기도 했습니다. 다비아 사이트에 어떤 분이 쓴 칼뱅의 이야기처럼, 정치와 연관해서 하나님 나라와는 걸맞지 않은 방식으로 결정되는 수도 없잖아 있었어요. 그러나 진리를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이런 논쟁들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전제하면서, 집총거부라든지 평화를 위한 군 대체복무 등을 타종교가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지원해주지는 못할망정, 트집을 잡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볼 때, 과연 최소한의 인간적 태도나 영성, 혹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현설적 사고방식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이 가현설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현설에 대한 교리사적 배경은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을게요.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 아니라 그냥 가짜로 나타난 그림자였을 뿐이라고 주장한 게 가현설이에요. 신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한 초기 기독교의 이단 중 하나가 이 가현설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이런 이단 논쟁이 많았는데요. 이단은 정통과 대부분 비슷합니다. 한자로 보면 끝만 다른 게 이단(異端)이에요. 그래서 이단적인 성향이 소위 정통이란 교회에 계속해서 붙어 있는 겁니다. 종이 한 장 차이에요. 제가 어딘가에 썼을 텐데요. 성령과 악령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이라고요. 이단인지 아닌지도 마찬가지예요. 전체가 다르면 확 드러나지만 대부분이 비슷하고 어떤 부분만 살짝 다르면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도 해요. 다만 그걸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예수님의 인성을 약화시키게 된 거죠.

어떻게 보면 오늘 한국교회 신자들은 다 가현설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하게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이미 예수님은 신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예수를 말할 때 핵심적인 게 베레 호모 베레 데우스(vere homo, vere Deus)거든요. 참된 인간 참된 하나님이라는 거죠. 제가 지난 강의에서 이야기했나요? 했더라도 양해하고 조금 들어주세요. 이것은 반인반신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온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모습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예수님에게서 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교부 때부터 그런 것은 배척했습니다. 온전한 인간이라는 것은 총체적인 의미에요. 예수님은 먹기만 할 뿐만 아니라 배설도 해야 하고, 사춘기도 겪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온전한 인간인 동시에 온전한 신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이 예수님의 존재 신비를 이해하는 게 삼위일체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성을 온전하게 확보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는 가현설적인 요소가 심각합니다. 그래서 신앙 자체나 인간에 대한 이해도 가현설적이에요.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공중에 떠 있다는 거죠. 기독교인들의 머릿속에는 굉장히 건전하고 모범적이며 지금 당장 천당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된 인간이 자리 잡고 있고, 또 자기가 그렇게 되리라 기대해요.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모범적인 바리새인 타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건전하게 산다면 그것도 좋아요. 몰몬교도들이 세계 선교를 한다고 우리나라에도 옵니다. 더울 때도 정장을 하죠. 그와 비슷하게 부동산 투기도 안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반듯하게 모범적으로 살 수 있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지도 못하면서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거죠.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독특한 게 있는데요. 교회에서 집사님,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하죠? 언어에서도 어떤 형(型)이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무엇이 문제일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삶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 모양만 절대화시켜서 그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해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틀을 정하는 겁니다. 담배 피우지 마라, 술 마시지 마라는 등의 어떤 규범이나 범주를 정한다니까요. 그런 인간 이해가 우리에게 아주 강합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동성애자들은 견디질 못하죠. 숨이 막히니까요. 평화주의자, 노동 운동가 등 여러 유형의 삶이 있잖아요? 창녀들도 있어야 하고 술집 작부도 있어야 하고요. 그런 삶이 나쁜 게 아니냐고요? 일단 그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제가 무율법주의, 율법 무용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윤리 문제는 다음에 나오니까, 거기까지는 나가지 말죠.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좀 내버려두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내버려두면 이 세상이 카오스로 빠지고 폭력이 난무하지 않겠느냐고요? 물론 세계 질서가 잡힐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질서는 필요하겠죠. 그것마저 우리가 다 방기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각각의 인간이 그 질서 안에서 평화롭고 다양하게 살아가도록 하자는 거예요. 예수님도 그랬잖아요?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서 어떻게 했나요? 그냥 먹고 마셨어요.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술주정뱅이 아니야? 왜 그러고 사냐? 인간이 참 이상하다.’라고 속으로 많이 조롱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쁘고 반사회적이니까 이제 손 씻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삭개오에게도 매국노 같은 짓 그만 두고 깨끗하게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현실 그대로 그 사람들을 인정했어요. 저도 제발 기독교가 다른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라고 역설하는 중입니다.

졸저 설교비평집 3권이 나왔습니다. 『설교의 절망과 희망』(대한기독교서회)입니다. 이번에는 재미있게도 띠지까지 만들었네요. 예쁘게 잘 나왔습니다. 3권에는 표지 날개 속에 저자 소개와 함께 사진도 한 장 넣었습니다. 1, 2권에는 사진이 없었습니다. 이번 거는 마지막이어서 넣었습니다. 설교비평에서도 제가 말하려고 했던 게 바로 그거였습니다. 좀 세련된 교회들, 강남 지역에 있으면서 교양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저런 방식이거든요. 사람들을 바꾸려고 해요. 코미디죠. 코미디. 오정현 목사님이 강남을 클린 강남으로 만들겠다고 하죠? 옥한흠 목사님도 그런 식으로 제자 훈련을 하셨을 거예요. 강남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클린 강남이 되었나요? 여전히 거기에는 소수의 엘리트들, 한국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꾸 모여들고 있어요. 교회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옥한흠 목사님에 대해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이해해 주세요. 교회가 잘난 척을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구원도 받았고 괜찮게 사니까, 저 사람들을 정말 불쌍하게 여기고 변화시켜야겠다는 식으로요. 요즘 말로 꿈 깨는 게 낫습니다.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은 방식대로 살라고 했을 거예요.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면서 사는 게 좋다면 그렇게 살면 돼요. 그런데 자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계몽을 한다는 거죠. 그걸 그만두자고 설교비평에서 말한 거예요. 계몽 좀 그만하자고요. 성숙한 시대에는 그렇게 잔소리하는 방식으로 말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그런 말을 듣고 혹 교회에 나온다고 해도 그 사람은 유아적인 겁니다. 이미 성숙한 시대인데도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여전히 우리에게 먹히고 있죠. 먹히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만이 길인 것처럼 나가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인간론은 너무 천박합니다. 우리는 꼭 바리새인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계몽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여러분도 앞으로 주변 사람들을 계몽하려고 하지 마세요. 전도한답시고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한 가지만 했어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안에서 살았습니다. ‘바실레이아 투 데우’,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한 걸 선포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회에서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한 사람들, 즉 창녀나 세리 같은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정말 괜찮은 사람들로 만들고자 닦달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 사람들을 수용하고 초청했을 뿐이에요.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그 쪽으로 삶의 방향을 돌리라고 안내한 거죠. 그런데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로 방향을 바꾸는 일이 세리와 죄인들에게는 가능했는데, 바리새인들에게는 불가능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우리 기독교인들의 전형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역설적이죠? 이상하죠? 종교적인 열심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애도 많이 쓰고 기도나 헌금은 물론 전도도 많이 하는데, 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로 전향하기 힘든 걸까요?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죠?

우리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요. 밀란 쿤데라의 책제목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말입니다. 그 책 읽으셨나요? 아주 특이한 구성과 내용으로 된 소설이더군요. 그런 소설을 쓰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어떤 인간 이해를 갖고 설교를 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민하지 않거든요. 아주 가벼운 감수성을 자극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고, 상대방의 불안한 마음을 공격합니다. 죄책감에 빠지게 해서 불안한 마음이 들게 하고 그로 인해 교회에 나오도록 만드는 이런 방식은, 프로이트나 니체 등이 이미 충분하게 분석해 놓은 잘못을 우리가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다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 일종의 가현설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래서 성서가 그 당시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삶의 형식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오늘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주입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게 뭔지 잘 눈치 채지 못하더라고요. 대학교 교수든 변호사든 의사든, 그런 면에서는 왜 그렇게도 순진한 걸까요? 그게 믿음이라고 자꾸만 세뇌를 받아서 그런 것 같아요. 뭘 그렇게 따지냐,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믿고 순종하라는 거죠. 그런 순종이 목사에 대한 순종으로까지 이어지게 되고요.

역사 앞에서 책임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지성적 기독교인들은 한국교회 안에서 설 땅이 없습니다. 다 교회에서 빠져나가요. 한국교회가 지난 10년 동안 성장하지 못하고,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점점 추락하는 겁니다. 그 뿐 아니라 교회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대형 마트가 들어서면 소형 슈퍼나 재래시장이 다 죽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라고 하는 기독교 본질에 근거해서 볼 때, 이런 모습은 건강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대형교회는 더 커지고 소형 교회들은 더 문을 닫을 뿐 아니라, 자립하지 못한 목사들이 최소한의 체면 유지도 힘든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들 그런 상태를 그대로 방기하고 있을 뿐이고요.

기독교 신학은 철저하게 인간론적이어야 합니다. 사실 교육, 역사, 철학, 예술은 물론 정치, 경제가 모두 다 인간론이거든요. 의학, 물리학, 화학을 자연과학이라고 하지만 인간론에 더 근본에 있습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쓰고 김용준 선생이 번역한 『부분과 전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학이라는 영역이 문화를 논하고 더욱이 철학과 종교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과학이라는 하나의 방법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책임과 의무는 과학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학이 제시하는 지식의 축적이 오용되어 잘못을 초래하는 비극은 막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과학은 분명히 인간론이며, 과학적이라는 말은 바로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과학도 인간적인데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구원, 자연까지 포함한 우주론적 구원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해야 할 신앙과 신학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방향을 잘못 잡고 쓸데없는 싸움에 우리의 영적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경우가 많아요.

 

창조론과 진화론

기독교 인간학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여러 주제 중의 하나가 창조론과 진화론입니다. 오늘 시간이 많이 갔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자세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진화론의 옳은 부분은 다 받아들이면 돼요. 진화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걸로 보면 되지 않겠어요? 아무 문제도 아닌데 왜 그걸 가지고 과학자들과 싸우는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진화론과 투쟁하는 대표적 단체는 창조과학회입니다. 거기에는 주로 기독교 자연과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어요. 그들은 성서에 있는 모든 창조의 방식이 과학적으로 옳다고 말하는데요. 그런 창조과학회의 주장들은 과학계에서도 별로 받아들이지 않고 신학계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굉장한 과학자들의 모임인 것처럼 부각되어 있어요. 웬만한 교회들이 창조과학회에서 만든 영화나 자료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요. 신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닙니다. 쓸데없는 싸움이니까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2백만 년 전에 침팬지와 인간의 공동 조상인 어떤 유인원이 있었다고 해요. 그 친구가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었는데 지진과 같은 대재앙이 일어난 거예요. 그로 인해 아프리카가 동서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삼림지대로 이루어진 서쪽 지역의 인간 조상들은 침팬지처럼 여전히 나무를 기어오르며 먹고 살았지만, 초원지대로 바뀌어 버린 동쪽 지역의 인간 조상들은 먹을거리가 부족해 이곳저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동쪽 지역의 인간 조상들이 직립 형태로 걸어 다녔는데, 이러한 직립인을 가리켜 호모 에렉투스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최초로 인간적인 특징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럴 듯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인간 이해에 대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자는 거예요. 엄격하게 말해서 과학자들은 신학자입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정직한 과학자라고 한다면, 기술자가 아니라 진정한 과학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신학자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원리들을 연구하고 밝혀내는 사람들이잖아요. 하나님의 계시를 해명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창조 행위 자체가 하나님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과학자들과 쓸데없이 싸우지 말자는 겁니다. 그들이 진화론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에 겁먹지 마세요.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넉넉하게 생각하세요. 만약에 그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생명의 근원과 미래가 완전히 해명될 수 있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정말 그런 하나님이라면, 그 실체가 빨리 드러날수록 좋지요. 우리가 속고 있는 거니까요.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어떤 과학자에 의해서도 창조의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행위들이 인간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을 테니까요. 과학자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면 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게 옳으면 받아들이면서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생물학이나 물리학이 말하는 걸 무조건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가 있어요. 그걸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신학적인 인간 이해는 과학자들의 인간 이해와는 다르지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어떤 근거는 있어요. 그게 뭔지를 찾아나가는 게 공부죠. 그 공부는 다음 주에 할 겁니다. 인간이 흙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거든요. 창조과학회처럼 진화론자들과 소모적인 싸움에 빠져들지 마세요. 그럴 시간 있으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쪽으로 파고 들어가세요. 기독교의 핵심에 대해서는 아주 얄팍하게 알고 있으면서, 누군가가 교회를 비판하는 것 같으면 실체도 없는데 돈키호테처럼 너무 흥분해서 달려드는 것 같아요.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있고 슬프고 허무한 삶을 살아가는 실질적인 인간을 바탕에 놓고서 하나님이 이런 우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아야 합니다.

요즘 날씨가 좋아서 저는 행복한데, 자연재해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어수선합니다. 용기를 냅시다. 어떻게든 버텨내야 하니까요. 심각한 문제라도 잘 받아들이고 즐겁게 지내길 바랍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돌아오는 주일 저녁에는 강의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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