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강 하나님 나라 윤리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443 추천 수 0 2012.06.18 22:16:27

제 38강

하나님 나라 윤리

 

여러분, 안녕하세요? 강의가 3주 남았군요. 세월이 빨리 갑니다. 강의 전에 <한겨레신문>에서 읽은 작은 글을 소개할까 합니다. 안도현 시인이 ‘시와 연애하는 법’이란 제목으로 이 신문에 연재를 하고 있어요. 이 꼭지에 공지영, 안도현,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교대로 쓰더군요. 이번에 안도현 시인이 쓴 글이 너무 재미있기도 하고 제가 평소에 생각했던 설교나 기독교 영성과도 상당히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잠시 소개할까 합니다. 제가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할 때 시를 예로 많이 들었는데요. 시 자체를 말한다기보다는 시 경험과 성서 경험이 비슷하다는 말이에요. 둘 다 언어 경험이니까요.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어떤 세계가 있으니까요. 시와 성서, 설교의 공통점은 굳어져 있는 게 아니라 열려져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여러분이 제게서 여러 번 들었겠지만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성서도 언어고 시도 언어잖아요. 언어가 사건이라는 거죠. 언어는 우리가 보기엔 늘 그대로 있는 것 같잖아요. 근데 그게 살아 있습니다. 사건이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겁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열림이고요. 언어는 이 세계를 향해서 열려져 있어요. 시 한편이 있다고 하면, 그 시는 하나의 상품처럼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고정시킬 수 없는 어떤 사건, 세계인 겁니다.

그걸 앞 시간에 ‘지평’이라는 용어의 개념으로 설명했어요. 제가 약간 전문적인 용어를 쓰더라도 이해해주세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최선의 길이에요. 지평이 굳어져 있는 게 아니라 열려 있고, 그 지평이 곧 세계라 했습니다. 시라고 하는 언어가 사건으로 세계를 향해 열려 있어요. 기독교로 말하면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고정된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지평으로 이해하는 거죠. 움직이는 세계입니다. 이 감각 속으로 우리가 빨려 들어가야 해요. 우리는 늘 실증적으로 생각합니다. 실증이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이 세계를 다 실증적으로 담아낼 수는 없잖아요. 수학 공식처럼 다 풀어 낼 수 없다는 거예요. 자연과학적인 논리 실증주의로는 다 해명해 낼 수가 없죠.

 

안도현의 시론

안도현 시인이 신문에 쓴 글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과의 결별’ 이 제목을 듣고 이게 바로 신학과 딱 맞아 떨어진다고, 영성과 딱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네 번째 글인데요. 인터넷으로 <한겨레신문>에 들어가면 볼 수 있을 겁니다. 첫 단락만 읽어볼게요.

 

만약에 당신이 ‘가을’을 소재로 한 편의 시를 쓴다고 치자. 당신의 머릿속에 당장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가을의 목록은 십중팔구 ‘낙엽·코스모스·귀뚜라미·단풍잎·하늘·황금들녘·허수아비·추석’과 같은 말들일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당신의 상상력을 만나기 위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낙엽은 ‘떨어진다’는 말로 연결되고, 코스모스는 ‘한들한들’이라는 의태어를 만나고, 귀뚜라미는 ‘귀뚤귀뚤’이라는 의성어와 결합하며, 단풍잎은 ‘빨갛게’ 물이 들 것이며, 하늘은 ‘푸른 물감을 뿌리다’는 문장과 조우하며, 황금들녘은 풍요의 이미지를 데리고 올 것이며, 허수아비는 반드시 ‘참새’를 불러들이고, 추석은 ‘보름달’로 귀결될 것이다.

이렇게 한심한 조합으로 시의 틀을 짜려고 한다면 그 순간, 그때부터 당신의 시는 망했다고 보면 된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을 이 시인은 한심하다고 지적해요. 가을의 푸른 하늘은 높다,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다, 이러면 이때부터 시는 망하는 길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중간에 다른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요. 이 사람이 ‘연탄시인’으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연탄재와 가을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설명했고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동시를 가르치는 책에 이런 게 나온다고 합니다. 문장을 써놓고 괄호 안에 알맞은 말을 찾으라고 하는 건데요. ‘토끼는 ( ) 뛰어간다.’ 여기에 답을 쓰라고 하면 학생들은 뭐라고 쓰겠어요? ‘깡충깡충’을 정답으로 알고 쓰겠죠. 그래서 아이들은 동시를 쓸 때마다 토끼는 깡충깡충 뛴다고 쓸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게 아이들의 창의성을 죽이는 겁니다. 요즘 아이들은 토끼가 산에서 깡충깡충 뛰는 걸 보지도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관념으로만 아는 동시 공부를 하는 거예요. 시냇물은 졸졸, 새싹은 파릇파릇, 이렇게 진부하고 상투적인 언어들이 시를 망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뭐를 말하려고 하는지 알겠죠? 설교가 그 따위로 진행되고 있어요. 시냇물은 졸졸, 이런 식으로요. 성서와 성서를 근거로 한 영적인 세계는 의성어나 의태어를 암기하는 방식으로는, 혹은 우리가 진부하게 알고 있는 기존의 이야기 방식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성서를 새롭게 읽어보세요. 사건이 되도록, 지평과 세계가 열리도록 말이죠.

오늘 제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윤리 문제를 계속해서 강의하게 될 텐데, 이것도 연관이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늘 결정된 틀이 있거든요. 이혼하지 말라, 뭐 하지 말라, 이런 이야기뿐이죠. 어떤 목사님은 집회에 모인 청소년들에게 책상 서랍에 있는 포르노를 다 치우라는 식으로 설교하시더군요. 이건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아이들이 그걸 보지 않을까요? 더구나 그런 것들을 아이들에게 세뇌시키면 기독교 윤리는 죽고 하나의 규범만 남게 됩니다. 이런 생각으로 세상에 나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윤리도 결국은 하나의 사건이 되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하고, 종말론적으로 나가는 흐름을 타야하는 거예요.

우리는 어떻게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과 결별하고 낯선 진실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낯선 진실을 경험하나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낯설게 다가오나요? 이 세계가 그렇게 다가오나요? 그래야 우리의 영성이 깊어집니다. 우리의 영적인 작용이 예민하게 작동하기만 하면 그런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제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그런 맥락 속으로 들어가는 게 쉽지는 않아요. 일단 그런 세계가 있다고 하는 그 자체도 경험하기가 힘들고요. 그리고 그걸 경험하게 되면 좀 불편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았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부정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거죠.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이 낯선 진실로 다가오는 방식이 아니면 우리의 신앙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악순환에 빠질 수 있어요. 안도현 시인의 글이 좋아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종말론적 생명

여러분, 개구리 소리가 들립니까? 제가 연구실로 사용하는 아파트 밑에서 지금 개구리들이 울고 있는데요. 오늘 여기에 비가 경상도 말로 억수로 왔습니다.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비가 와서 개구리가 엄청 울어대네요. 소리가 참 좋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전에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어떤 분이 질문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즉 죽음 이후에 우리가 오늘 이 땅의 삶을 기억할까요, 기억하지 못할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아마 아무도 모를 거예요. 성서는 뭐라고 말할까요? 비슷한 이야기는 나올 법하기도 한데 지금 제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지금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그때를 기억할까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의 숨소리와 피가 배꼽을 통해 내 몸속으로 들어왔던 기억들은 지금 우리에게는 없어요. 그러나 분명히 그 사건들은 있었습니다. 분명히 있었는데 우리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죠. 그런 것들이 나름대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 어머니의 영양 상태에 따라서 나의 발육 상태도 달라졌을 거고, 어머니의 심리적인 상태에 따라서 나의 정서 상태도 영향을 받았을 텐데, 기억은 나지 않아요. 죽음 이후의 다른 생명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가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다면 기존에 우리가 생각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혹은 너무 낯설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생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익숙한 것만 따라가니까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금 면류관을 쓰고 이 땅에서 충성한 것에 대한 보답을 받아야 하는 거죠. 거기에 가서도 안수집사나 장로 같은 좋은 자리를 얻어야합니다. 이 땅에서 시원찮게 봉사한 사람은 상급도 시원찮게 받아야 하고요.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생명이기 때문에 오늘 이 땅에서의 모든 체험들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흡사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경험이 우리에게 기억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복음서에 나오는지 서신에 나오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 나라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보고 이 땅에서 살던 사람들을 만날 것이라는 구절들이 있잖아요. 이 땅에서 살던 사람들을 우리가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의 삶도 다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그 기억이라는 것이 어려운 문제예요. 대개 사람들이 기억할 때 가치 판단이 들어가고, 호불호(好不好) 같은 것들이 들어가거든요. 최후의 심판 때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 알곡과 가라지가 완전히 갈라진다고 보는데요. 알곡,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나쁜 기억을 할 수가 없잖아요? 나쁜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한다면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니까요. 그런 것들을 두루 두루 생각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우리가 다 모릅니다. 우리가 약속으로 그것을 믿고 있을 뿐이죠. 그리고 조금씩 알아가고 있을 뿐이고요.

또 생태적 생명 사상, 즉 자연과 우주의 생태적인 생명과 제가 가끔 말하는 기독교의 유기적 생명이 어떤 연관이 있냐 하는 질문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에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도 힘들고요. 제가 잘 알지도 못합니다. 말을 해도 아주 부분적인 거예요. 그러나 간략하게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생태적 생명사상과 기독교의 유기적 생명사상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말해달라고 했는데요. 같은 점이라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 자연을 말한다는 점이고요. 그러나 일반 생태학자들은 자연을 정말 자연스러운 것으로 알고 거기에서 작동하는 생명의 원리들을 추구해 가지만, 우리는 이 세계가 자연스런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하나 저절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쪽으로 책을 쓴 사람도 많아요. 기독교의 유기적 생명사상은 단순히 자연의 생명 메커니즘에 머무르지 않고 기독론적으로 접근합니다. 기독론에 초점이 있어요.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핵심적으로 그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조금 더 나아가 마지막 재림과 심판까지요. 이런 것들이 다 예수 사건인데요. 결국 자연에 있는 생태적 생명이 어떻게 예수의 사건과 연관이 있는가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일반 생명사상과 차이가 있는 거죠. 하여튼 이런 것들을 전제하면서 클라라님이 질문한 것과 연관해 본다면,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명에 있어서도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 결별하는 것이 필요해요.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가족 관계를 누리잖아요. 남편과 아내가 있어야 하고 자식들이 있어야 하는 스위트 홈의 방식도 일종의 생명 방식인데요. 귀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것과도 우리가 결별을 해야 하는 거죠. 알겠어요? 기독교 신앙은 가족의 소중함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교회가 늘 일반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따뜻한 가정을 중심으로 한 메시지를 전한다고 한다면 아직 미숙한 겁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게 아니죠. 그래서 제가 5월이면 많은 목사님들이 하는 가정 설교, 부부 간에 어떻게 하라,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식의 설교가 의미 없다고 말한 거예요. 그런 것들은 해라 혹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하는 겁니다. 그것으로부터 결별해야죠. 그래서 예수님이 이미 가족이 원수라고 말한 것 같아요. 우리가 생명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가족이잖아요. 거기에 묶여 있는 한, 그런 것만이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하게 받아들여지는 한, 우리는 낯선 생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족 이기주의에서 빨리 벗어나야 해요. 가족에게 무관심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에 대한 애착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에요. 그래서 그게 편한 거에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편한 거로부터 결별하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결국 저는 이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종말론적 생명이요. 제가 자꾸 어려운 말만 쓰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화두로 생각하세요. 기독교 신앙은 다른 게 아닙니다. 자꾸 정답만 요구하지 마세요. 저는 생태적 생명과 기독교적인 유기적 생명의 관계에 대해 정답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쪽으로 나가는 길을 가고 있을 뿐이에요. 여러분, 교회에서 자꾸 정답을 찾으려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목사님들이 대답을 해봐야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고 오히려 왜곡될 때가 많습니다. 이건 접어두고요. 종말론적인 생명, 이것을 꼭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생명의 방식은, 가족이 있고 이것저것을 먹고 배설하는 것들은 모두 다 잠정적인 겁니다. 잠정적이라는 말을 몇 번 썼죠. 오늘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기독교 윤리는 기본적으로 잠정적이에요. 잠정성, 이런 것은 외워두세요. 기독교 공부는 외우는 게 아니지만 필요한 단어는 외워둬야 합니다. 왜 잠정적인가 하면, 종말론적인 생명이 우리에게 오고 있기 때문이죠. 이런 것들은 신학적인 표현이어서 잘못하면 뜬 구름 잡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그리고 자꾸 어렵다고만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것을 추상적으로 느껴집니다. 이것은 대학공부를 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박사학위를 갖고 있어도 이해가 안 되는 말들이 있어요. 종말론적 생명이 우리에게 온다고 하는 것은 인문학적 사유예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것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마 한국교회 기독교인들이 다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을 거예요. 믿습니까?, 기도하면 됩니다, 낙심 말고 하십시오, 이런 말만 하죠. 삼일교회의 한 젊은 목사는 ‘계속 모드’로 나가라고, 성서를 보면 성공한 사람들은 다 ‘컨티뉴 모드’(continue mode)였다는 말장난으로 기독교 신앙을 끌어갑니다. 한번 시작했으면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라, 그러면 성공한다고요. 아주 실증적이죠. 그래서 성공했다는 게 확 다가오니까요.

 

세계의 잠정성

성공이라는 것도 다 잠정적이에요. 우리에게는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면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러나 이 방식이 아니면 안 됩니다. 제가 표현능력이 없어서 좀 더 일상적인 신앙의 용어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마 나우웬이나 루이스 같은 사람들은 이런 신학적 개념들을 훨씬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거예요. 이게 다 통하는 이야기거든요.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은 아무리 최선으로 삶을 완성시킨다고 해도, 그것이 잠정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정말 확실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불교용어로 공안(公案)이라고 하나요? 이것을 화두로 붙들고 싸워야 해요. 우리는 이 땅에서 삶이 성취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윤리의 차원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인격적이고 세련되게 도덕적으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경지까지 나가야 한다는 당위가 있기는 있어요. 그건 당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 요청이 있는 건 분명한데요. 그런 것들은 율법이 계속해서 추구했던 것들입니다. 고상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고 필요한 것들이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그런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걸 바탕에 깔고 시작합니다. 윤리도 우리가 완성할 수 없고요.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 인정하죠? 우리가 윤리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잖아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나 그럴듯하게 넥타이를 매고 설교하는 저나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욕을 한 자나 살인한 자나 똑같다고 했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과 같다고 했어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친절한 말을 하고 내 재산을 남에게 나눠준다고 해서 윤리적으로 완전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하든 안하든 별 차이가 없어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도, 알려져 봤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성실하고 윤리적인 삶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노력하기는 해야 하는데, 그러나 그냥 노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 되는데도 ‘노력해야지’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필요할 수도 있어요. 좀 더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위선이라도 선을 행하는 게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위선은 아예 선을 행하지 않는 것만 못할 수가 있어요. 이게 미묘한데요. 여기에서 우리가 성실하게 윤리적 행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할 사람은 할 거고, 아무리 하라고 해도 못하는 사람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강요해서 선을 행하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에 머물게 할 수 있어요. 세리와 죄인들처럼 터놓고 죄인처럼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어떤 분이 우리 교회에 잠깐 다니러 왔어요. 다른 교회에 다니는 분이고요. 그분 이야기가 자기 교회도 그렇고 대구 지역도 다 그렇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의사들이 단기 선교를 가는데, 자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일주일 정도 가서 쉽게 약 나눠주고 치료하고 온다는 거죠. 그런데 비행기 값이랑 기타 비용을 계산해 보니까, 그렇게 가지 말고 그 돈을 모아서 현지에 병원을 세워주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더라는 거예요. 단기 선교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지혜롭지 못한 것 같다는 거였어요. 사실 단기 선교 같은 것들이 유행처럼 되고 있잖아요. 대학생들도 많이 떠나고요. 저도 그런 방식의 단기 선교에 대해서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요즘과 같은 한국교회의 해외 선교 자체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길어질 것 같으니까 그만 두겠습니다. 하여튼 그분의 이야기는 대구지역에 있는 의사들이 일 년 동안 다녀오는 단기 선교 비용을 모으면 수억 원이 된다고 해요. 그렇게 큰돈으로 차라리 낙후된 지역에 병원을 세워주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다는 얘기였어요. 그런데도 그런 방식으로 단기 선교를 가는 것은 자신을 나타내고 싶기 때문인 거죠. 선은 선인데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면 위선이 되거든요. 좀 엄격하게 말해서요. 좋은 뜻으로 갔다 오는 건데, 그렇게 까칠하게 시비를 거냐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는 신학적으로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왜곡된 길로 떨어지기 때문에 자기 검증이 필요합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윤리

우리가 윤리적으로 살기는 해야 하는데,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윤리적으로 살 수가 없어요. 하기는 해야 하는데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인데, 칼 바르트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설교자의 실존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Sollen)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는 불가능성(Unmöglichkeit)의 긴장 속에 있다고요. 이 말을 오늘 주제인 윤리와 연관시켜 본다면,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의 긴장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저는 판넨베르크가 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방향을 말하려고 합니다.

『신학과 하나님 나라』(대한기독교서회)는 판넨베르크가 젊었을 때 미국 유니온신학대학에 가서 행한 특강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신학과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와 교회, 하나님 나라와 윤리학의 근거, 미래의 도래로서 현실성 등의 아티클이 실려 있는데, 제가 오늘 잠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윤리학의 근거입니다. 이 사람이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기독교 윤리학의 근거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이죠. 종말론이 기독교에서는 정말 중요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나요? 종말이라고 하면 어떤 신학적 표상이 떠오르나요? 종말이라는 주제만 다룬 책도 많이 있고요. 주석서 등에도 많은 부분이 종말론을 깔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인 하나님의 나라도 종말론적이고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윤리, 이렇게 이야기하면 판넨베르크가 설명하려고 하는 기독교 윤리의 근거가 됩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하는데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아티클의 두 단락만 읽어볼게요. 하나는 아티클의 시작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는 부분입니다. 동영상 강의에서 이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는 전달되기 힘들겠지만, 지난 5개월 동안 여러분이 어느 정도 신학적 훈련이 되었다고 보고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신학적 생각을 깊이 하도록 자극시키고 설레게 하는 글이에요. 신학생들이 이런 글들을 정말 재미있게 읽어야 하는데요. 평신도들도 이런 책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들어보세요.

 

예수의 가르침은 윤리적 급진주의를 포함해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의 메시지에 의존되어 있었다. 그는 삶의 모든 국면을 세계의 임박한 종말의 빛 안에서 보았다.

 

놀랍죠? 전혀 하나님의 나라가 올 기색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러나 지금도 가까이 와 있다고 리얼하게 경험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입니다. 제가 지난 두 시간에 걸쳐 하나님 경험을 어떻게 하는지 말했잖아요. 하나님 경험이 하나님 나라의 경험입니다. 우리가 신앙에 깊이 들어가려면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그 단어가 연결된 문장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제가 잔소리가 많죠? 읽다가 보면 정말 중요한 부분인데 여러분이 놓칠까봐 그래요. 사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공부예요. 이렇게 좋은 신학 책을, 명성가의 글을 한 단락씩만 놓고 주석하는 방법 말입니다. 설교도 성서 텍스트의 한 단락을 놓고 주석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거잖아요. 그것처럼 인문학이라는 공부 자체가 이런 방식입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가 중요한 거죠. 처음부터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윤리적 급진주의를 포함해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의 메시지에 의존되어 있었다. 그는 삶의 모든 국면을 세계의 임박한 종말의 빛 안에서 보았다. 예수 이전의 모든 견해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행동과 일치하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유효한 것이 되든지 아니면 거부되든지 하였다.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 예수의 실존 안에 고동치는 유일한 현실이었다. 리얼리티였다. 이것만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라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할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이외에 다른 것들은 상실되어도 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들도 구원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여기에 집중해 살았고 여기에 자기의 온 실존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간 자로서 선포하고 행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서 모든 다른 것들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만 실현되어야 할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른 것은 손을 놓아도 된다는 겁니다. 상실해도 돼요. 가족도 때에 따라서는 상실할 수 있고, 부도 건강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족, 건강, 나의 삶 등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거죠. 하나님 나라의 경지에서 다른 모든 것들은 상대화 되지만 그 상대화 된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 궁극적 현실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겁니다. 신학적 표현이긴 해도 와 닿죠? 이러한 신학공부를 아주 철저하게 한 사람만이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선포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종교를 파는 약장사가 됩니다. 틀림없어요. 그리고 사이비일수록 장사를 더 잘 하죠. 미안합니다. 제가 다 싸잡아서 말하는 건 아니라, 상당히 많은 경우에 그렇다는 겁니다. 판넨베르크의 이런 신학적 진술을 목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사람들이 잘 파악해서 자기의 영성을 심화시킨 다음에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전해야 하는데요. 이게 잘 되지를 않죠.

안도현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낯선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거든요. 하나님의 나라는 정말 낯설고 늘 새롭습니다. 충격이고 놀라움이거든요. 바르트의 표현대로 이 놀라움은 하나님 앞에서의 놀라움이고, 루돌프 오토(Rudolf Otto)가 말하는 누미노제의 경험이자, 모세가 호렙산의 불붙는 가시떨기 앞에서 신발을 벗을 수밖에 없었던 근원적인 새로움에 대한 충격입니다. 그게 기독교 영성이고 신앙이에요. 그게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새로운 영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이 세계가 변화되도록 이끌어가야죠. 그런 차원에서 오늘 우리가 윤리를 말할 때도 윤리적 상상력이 필요한 거예요. 임박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오늘 우리가 우리의 잠정적인 윤리 혹은 잠정적인 삶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개혁하고 어떻게 상응하도록 만드는가 하는 거죠. 이게 정말 우리의 숙제 아닌가요? 다음 목요일에 윤리의 몇 가지 항목들을 설명할 때 첫 번째로 성(性)을 이야기할 텐데요.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도 이미 우리에게는 고착된 성윤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우리가 가진 것을 조망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성애가 이미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고 하는 익숙한 사고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동성애가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여기에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빛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게 종말론적 윤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하나 규정해 나가는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거냐고요?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해체와 다원주의 상태로 되고 마는 거냐고요? 규범은 아무것도 아니냐고요? 그 다음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 윤리의 종말론적 다이내믹은 그 이후에도 진행을 계속하는 세계의 윤리 문제들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의 타당성을 심히 제한하는 두드러진 약점으로 흔히 다루어졌다. 예를 들면 산상수훈은 장차 올 시대에 대한 일련의 행동규칙으로 간단히 처리되거나 아니면 최후 승리 직전의 짧은 기간 동안의 행동을 위한 지침 정도로 처리된다. 어떤 경우로나 예수의 윤리적 교훈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결국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시기를 잘못 짚었다고 하는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의 유효성이 더욱 문제시 되는 것이다. 예수의 윤리적 교훈의 강한 종말론적 성격은 그 보편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종말론적이라는 예수님의 윤리의 다이내믹이 현실적인 삶에 들어와서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들이 있었다는 거죠. 산상수훈에 있는 것들은 종말에나 가능한 것이고, 예수님이 종말에 대한 시간 계산을 잘못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윤리적 지침도 뒤로 물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윤리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오해라고 말하는 겁니다. 마지막 단락만 더 읽겠습니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궁극적 성취가 인간적 노력의 한계를 초월해 있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무 활동을 하지 말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준비하도록 고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준비는 사랑에 의해서 수행되는 신앙의 활동, 역사(work)이다. 종말론적인 희망을 가진 사람은 그가 달성한 일이 잠정적 성격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각하고 그의 에너지를 요구하는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 좀 더 희망이 있는 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의 미래로 개방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로 자신을 어떻게 해요? 개방, 아까 제가 열림이라고 이야기했죠? 개방, 이게 결론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어떤 선한 행위나 업적들도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서 볼 때 잠정적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는 사람은 잠정적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것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 손 놓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겠지 하는 식의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좀 더 나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갖고 나아가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처한 삶의 문제들을 끌고 그 희망을 바라보며 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혁명을 넘어서 오히려 전복입니다. 혁명을 우리가 가장 진보적이라고 하는데 기독교는 아예 전복이에요. 한 발 더 나가죠.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말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기독교적인 역사 이해, 윤리 이해가 참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이라는 걸 느끼겠죠? 오늘 우리는 여러 가지 중요한 신학적 용어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 이것이 우리에게 오고 있어요. 도대체 이게 우리 귀에 들어올까요? 잘 안 들어오겠죠.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아주 리얼하게 느껴야 하고 윤리의 잠정성을 명백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저는 6월 10일에 ‘목협’의 촛불 시위에 참석합니다. 그것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그것도 잠정적이에요. 그걸 해도 계속 같은 문제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어요. 우리의 행위가 잠정적이라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오늘의 문제들을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그 쪽을 향한 희망 안에서 끌고 갈 것인가 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종말론적인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기독교 윤리의 근거라는 뜻입니다. 이게 오늘 강의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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